비뢰도 11권 9화 – 몰살!

비뢰도 11권 9화 – 몰살!

몰살!

임개와 이송학은 손까지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휴우…, 하마터면 쪽박 찰 뻔했구만..

임개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하오대검수(天下五大劍手)의 일좌인 빙검과 천하오대도객(天下五大刀客)의 일좌인 염도. 이 두 사람의 힘만으로도 이 흑랑채를 강호에서 먼지로 사라지게 만 들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이 둘만을 상대한다 해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둘 이외에도 50여 명의 화산지회 대표단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로 끔찍했다.

천무학관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흑랑채주 임개는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이마를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저승사자가 코앞에 행차한 줄도 모르고 기세 좋게 날뛰며 방종한 행동을 무참히 감행했던 것이다. 목이 온전히 붙어 있는 게 기적이었다.

만약 빙검과 염도가 이송학의 심금을 울리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될 뻔했던 것이다. 임개는 고개를 휘휘 휘둘러보고는 호탕하게 외쳤다.

“구사일생이란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기념으로 내일은 착한 일이나 좀 해야겠다.”

“착한 일이라굽쇼?”

착한 일이라니? 산적과 가장 안 어울리는 일 중 하나였다. 그 착한 일이란 말은 들어본 지 너무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 정말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녹림도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채주의 정신 이상을 의심했다.

“너무나 큰 정신적 충격 때문에 약간 훼까닥한 거 아닐까?”

임개의 부하 중 조장을 맡고 있는 장규가 옆의 동료인 노구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글쎄? 네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한데, 그렇지 않고서야 산적 놈이 무슨 염병할 착한 일? 이 닭살 돋는 거 안 보여?

노구는 자신의 팔뚝을 친구의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톡톡! 그의 팔뚝 피부에는 깃털 뽑힌 닭살같이 우둘우둘한 게 돋아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착한 일이라는 말 에 거부감을 일으켰는지 그의 팔뚝이 잘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친구 장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나도 좀 전에 아까 그 착한 일, 선행이라는 말을 듣고 소름이 오싹 끼치더라구. 하마터면 경기 들 뻔했지.”

이들의 대화가 만일 두목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경을 칠 우려가 다분했기에 그들은 아주 작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소곤거려야만 했다.

휙!

그때 갑자기 채주 임개의 날카롭고 험악한 시선이 그 둘을 향하자 그들의 연약한 심장은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이봐! 조장!”

임개가 그들을 불렀다.

“네! 두목! ”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내일 작업할 때는 딱 반만 털도록!”

그가 말한 선행은 그런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규와 노구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허걱! 그렇게 엄청나게 착한 일을.. .?”

둘은 마치 다른 사람 보듯 경이적인 시선으로 임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나직하고 음습한 목소리에 임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들이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의 기척을 느낄 만한 실력을 지닌 이가 여기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은 그림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웨…, 웬 놈들이냐? ”

오랜 녹림 생활로 다져진 그의 본능이 절박한 위험이 다가왔음을 삑삑거리며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예민한 후각은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감싼 이들의 전신에서 뿜 어져 나오는 피와 죽음과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우라질! 이거 재미없겠는데…….’

한눈에 척 보기에도 이놈들은 엄청나게 위험한 놈들이었다. 마른 침이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그는 지금 본능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공포와 맞서 맹렬히 싸우고 있 는 중이었다. 선두에 선 흑의 중년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가 바로 이들을 이끄는 총대장, 그 이름은 적혈이라 칭하는 사내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임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적혈은 무미건조하고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승·사·자! 너희들의 제삿날이 내년 바로 오늘이다.”

그것은 지옥에서나 어울릴 듯한 목소리였다. 사방을 가득 채운 살기에 배짱으로 먹고 산다는 흑랑채의 부하들도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입을 봉하고 있었다. 평 소라면 최소한 기본적인 욕설만이라도 먼저 쏟아부었을 것이다.

“걱정 마라! 한꺼번에 저승길로 보내줄 테니 외롭지는 않을 거다.”

“니기미, 쓰불! 누구 맘대로! 얘들아, 쳐라!”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임개가 외쳤다. 계속 시간 끌어봐야 흑랑채에 유리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오오오오!”

흑랑채의 산적들은 일제히 무기를 꼬나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인 십이혈마대도 기다렸다는 듯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애초에 싸움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완전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십이혈마대의 칼이 사신의 미소를 지으며 휘둘러질 때마다 산적들은 그 생명을 그 칼날 아래 고스란히 내놓아야 했다. 아무리 녹림오패의 이름이 대단하다 해도 이들 앞에서는 어른에게 대드는 어린애만큼이나 역부족이었다.

피!피!피!

가을의 만추를 강제로 앞당기기라도 한 듯 산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학살(虐殺)은 반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헉, 헉, 헉!”

씨근덕씨근덕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임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시체더미 속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사람은 자신 혼자뿐인 모양 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악귀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피의 태반은 산채 부하들의 피였다.

“야! 먹물! 먹물! 이소오옹! “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자신의 부하들 중 숨쉬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전신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피칠갑을 한 채 임개는 십이혈마대의 총대장 적혈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지만, 그의 도끼는 이미 고철덩어리처럼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무자비한 십이혈마대의 칼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느라 입은 상처들이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왼팔도 이미 너덜너덜해진 모양인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옆구리랑 뱃가죽 여기저기가 쑤시는 것을 보니 칼이 한두 번 지나간 게 아닌 듯싶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끝인가?’

이제 한 번밖에는 제대로 휘두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혼자 죽지는 않으리라! 임개는 자신의 단전 밑바닥에 있는 마지막 진기한 줌까지 짜내었다. 죽 을 때는 한 놈이라도 더 많이! 저승 가는 길동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크아아악! 죽어라!’

콰꽝!

피를 토하는 듯한 날카로운 괴성! 그리고 거대한 기폭음(氣爆音)!

그것은 임개가 이승에 남긴 마지막 존재의 흔적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그날 구궁산은 수십 통의 피를 끊임없이 들이켜야만 했다.

“피해는?”

자욱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참혹한 시체더미의 한가운데 서 있던 십이혈마대 총대주 적혈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망 두 명! 중상 세 명! 경상 일곱 명입니다.”

제1대 조장과 부장을 겸하고 있는 혈검이 인원을 점검한 후 보고했다. 적혈의 인상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금 제정신인가? 겨우 이런 조무래기들이랑 싸우는데 사망자가 둘씩이나 나오다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게다가 부상자가 열? 도대체 그동안 훈련을 어떻게 해왔기에 요 모양 요 꼴인가?”

적혈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조직 최정예를 자랑하는 암살전문가인 자신들이 이런 산적 나부랭이를 상대로 이 정도 피해를 입은 것은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다.

“사망자는 어느 대 소속인가?”

“제9대와 제11대 소속 대원들입니다. 예상 외로 흑랑채주 흑랑부 임개라는 자의 도끼가 매서웠던 모양입니다. 녹림오패란 말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더군요.”

“아무리 녹림오패의 일인이라 해도 어차피 산적 나부랭이일 뿐이다. 제9대 조장과 제11대 조장은 돌아가면 문책이 있을 거라 전해라. 그리고 중상을 입은 놈은 특 별 강화 수련 과정인 지옥연무 석 달! 경상은 한 달이다. 물론 이 작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지옥연무란 말에 부장 혈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쌍한 놈들!’

그러나 당연한 대가였다. 약한 자에게 던져줄 자비 따위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두 명씩이나 당해서야 앞으로 일을 어찌 해먹는단 말이냐? 쓸모없는 것들! ”

“임개 이외에도 놈들 중에 의외의 고수가 끼어 있었습니다. 검을 쓰는 자였습니다.”

“산적이 검이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무기였다.

“그자의 검법으로 미루어 볼 때 아무래도 군자소요검 이송학인 것 같습니다.”

십이혈마대는 힘만 앞세워 정보를 무시하는 엉터리 부대는 아니었다.

“쌓아놓은 학식이 강을 메울 정도라는 군자소요검 이송학이 도적질을?”

이번 보고만큼은 적혈도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사치스런 감정은 잠시 잠깐일 뿐이었다.

“그자는?”

순간 혈검은 대답할 말을 잊었다. 입이 열 개라도 그는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이 작전의 요체는 절대 생존자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살기어린 무시무시한 책망의 시선이 혈검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지금 그자는?”

삭풍이 몰아치는 듯한 말투였다.

“제8대에서 추적대를 보냈습니다.” “그래?”

그제야 잔뜩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제8대는 추종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조였다. 그들이 여태껏 사냥감을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지평선 너머까지라도 샅샅이 뒤져 반드시 제거하라. 실패하면 목숨으로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우리는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반드시 말살하도록. 지금부 터 부대 재정비에 들어간다. 실시! ”

“예! 알겠습니다.”

“정비가 끝나는 즉시 재추적이다. 그리고 미끼를 풀어라! 녹림왕이 그 미끼를 물도록. 미끼는 중상 입은 놈들을 써라! 마침 잘됐군. 일부러 상처낼 필요도 없으니 깐. 그리고 도주한 그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거하도록! 이상!”

얼음처럼 냉철한 명령이었다.

“복명(復命)!”

중상을 입은, 그러나 움직이기에는 그다지 불편이 없는 대원 한 명이 주섬주섬 죽은 녹림도의 옷으로 바꿔 입고, 얼굴을 매만져 역용(易容)을 했다. 어차피 상처는 가짜가 아니기에 아직도 붕대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에 그자는 어느새 한 명의 부상당한 산적 졸개로 변해 있었다. 그자의 찌를 듯한 살기도 어느새 몸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되고 없었다. 원래 이런 일에 종 사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강하지만, 때에 따라 그 살기를 숨기지 못하면 이 장사를 계속 해먹기가 힘들었다.

“가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면 그 공을 감안해 지옥연무를 반으로 줄여주겠다.”

적혈의 말에 그는 감지덕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큼 지옥연무는 아무리 독하게 수련해 온 그들로서도 힘겨운 과정이었다. 산적이라고 흑랑부 임개의 도끼를 얕잡 아 본 게 크나큰 실수였었다.

“가라!”

“복명!”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퍼져 나오는 피비린내에 그녀는 손수건으로 코를 막아야만 했다.

“참혹하군요.”

그녀의 아름다운 아미(蛾眉) 사이가 가볍게 찡그려졌다. 그녀의 호수 같은 두 눈에는 혐오감이 일렁거렸다.

“누구의 소행일까요?”

마부석에 앉아 있던 장노(張)가 대답했다.

“시신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표식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무래도 녹림오패 중 하나인 흑랑채의 산적들인 것 같습니다. 녹림오패는 다른 어중이떠중이 산적 패 들과는 달리 매우 훈련이 잘돼 있는 곳인데 하나같이 제대로 반항도 못 해보고 죽었군요. 모두들 상처가 지독히 깔끔합니다. 이들의 상처로 미루어 볼 때 전문가들 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무서운 솜씨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였다. 갑자기 장노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즉시 하얀 옥수를 들어 붉은 입술을 막았다. 장노의 예리한 시선과 쫑 긋한 귀가 주위를 살폈다.

팟!

순간 장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의 손이 바람보다 빨리 뻗어 나갔다. 그의 손끝에서 섬광 하나가 풀숲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사라라락!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놓쳤나요?”

“면목없습니다. 반응은 있었는데 놓친 것 같습니다. 상당히 빠른 쥐새끼로군요.”

“괜찮아요. 그보다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지요. 그들에게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 않았나 걱정이에요.”

“네, 소저! ”

사실 그녀가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 준다는 것은 그녀의 소속과 출신상 무척이나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는 이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럇!”

찰싹!

장노의 채찍이 허공의 바람을 가르자 마차의 바퀴는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적혈은 상당히 기분이 불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왜냐하면 뒤처리를 깔끔히 하라고 남겨두었던 부하 녀석 하나가 꼴사납게 어깨에 비도를 맞고 돌아온 것이다. 그 미덥지 못한 데다 칠칠치도 못한 부하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감싼 채 송구스러운 듯 부복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 빠진 녀석들의 대장이 되었지??

욕지거리를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서 어떻게 주군의 얼굴을 대한단 말인가? 얼굴이 화끈거려 면목이 서질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뼈를 깎는 단련을 시켜야겠어! ’

백 년을 걸쳐 내려온 강철의 율법대로 천겁의 그림자에 약한 자는 필요 없었다.

“상당히 고명한 솜씨로군요.”

부장 혈검이 칠칠치 못한 부하의 상처를 살펴본 후 말했다. 어깨를 꿰뚫은 암기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것이라 그것만으로는 출수자의 신분을 파악하기 는 힘들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평범한 마차꾼의 솜씨가 아니었습니다. 기척을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상입은 장본인 512호가 대답했다. 512호면 제5대 12번 대원이라는 뜻이었다. 대주와 조장 이외에는 그들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512호는 변명이라도 하 고 싶은 모양이었다.

“절정 고수의 솜씨가 확실합니다. 피하지 않았다면 분명 심장을 관통했을 겁니다.”

혈검의 판단은 아마 정확할 것이다. 이런 유의 판단에서 그는 여태껏 틀려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512호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도망쳐 온 주제에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나?”

쏘아붙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적혈이 물었다.

“면목없습니다. 하지만 그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였습니다.”

“뭐라고?”

적혈은 하마터면 그의 멱살을 움켜쥘 뻔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은빛여우가 확실합니다.”

“왜 그걸 먼저 말하지 않았나? 이 멍청아!”

잔뜩 화가 난 적혈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제는 약해진 데다 멍청해지기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에 512호는 절망감마저 느껴야 했다.

“급신을 통해 이 사실을 상부에 알리고 대응책을 받아 오게. 그리고 그 마부의 존재가 누군지 조사해 보도록!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다.” “알겠습니다.”

적혈의 명령에 십이혈마대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마리의 매가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