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는 기억상실증?
– 운해(雲海)에서의 낚시
아득한 숲, 높은 벼랑, 무한(無限)으로 펼쳐진 끝없는 은백의 평원, 수십 개의 산봉우리를 구비구비 휘감고 있는 망망한 구름의 물결. 실로 천하의 비경(秘境)이랑 칭할 만한 절경이었다.
뇌운봉(雷雲奉) 은백평(銀平) 운해암(雲海巖)
그곳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 한가운데 선반처럼 툭 불거져 나온 조그마한 둔덕이었다. 산 전체로 보면 그곳은 삐죽 옆으로 돌출되어 나온 작고 조그만 돌부리에 불 과할지 모르지만 그 아래 펼쳐진 은백의 구름바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텅 빈 심연의 나락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번 빠지면 시체 찾는 일은 아예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화공(畵工)의 신이 심혈을 기울여 일필휘지 붓을 날린 듯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망망한 풍경의 한가운데서 그림의 일부라도 된 듯 세월의 풍상에 깎인 바위 위에 자리한 채 한손에 자흑색 오죽(烏竹)으로 만든 낚시대를 구름바다 위에 드리운 노인이 있었다.
늠름하게 늘어뜨린 은빛 수염, 백마의 눈부신 갈기털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은백의 머리카락, 그리고 두툼한 흰 눈썹 아래에 깊숙이 감추어진 맑고 서늘한 두 눈은 마치 모루 위에서 담금질된 붉게 달구어진 검처럼 형형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위엄 섞인 눈동자 앞에서 담이 작은 사람은 감히 정면으로 쳐다볼 엄두조 차 내지 못하리라.
용모만으로는 곤륜(崑崙)의 천선(天仙)을 떠올리게 하는 선풍도골의 노인이었지만 이 노인이 바로 현 비뢰문의 문주이자 한 놈뿐인 제자에게 ‘악덕(惡德)’내지는 ‘악질(惡質)’, ‘괴물(怪物)’, ‘악마(惡魔)’, ‘도깨비’ 등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는 비류연의 사부였다.
분명 사부는 낚시중이였다. 낚싯대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척이나 한정되어 있다. 죽간을 가지고 낚시 이외에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 낚시하라고 만든 물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주변에 무슨 물 비슷한 것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뇌운봉 꼭대기.(비류연과 사부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봉우리를 뇌운봉이라 불렀다. 다른 이들이 이곳을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그들에게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무도 숨이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만장단애 꼭대기 근처에 무슨 고기를 낚을 만한 물줄기가 있겠는가. 봉우리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수원은 여기서부터 한참이나 밑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이곳은 그곳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그리고 높이 떨어져 있어 물 흐르는 소리조차 중도에 지쳐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사부는 그런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멋지게, 그리고 조용히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진지함에는 엄숙함마저 느껴진다.
사실 그 모습이 진지하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부의 태도가 어떻든 그가 낚시 바늘을 던진 곳은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쪽빛처럼 푸 른 바다가 아니라, 눈처럼 새하얗고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느낌이 드는 구름의 바다, 바람의 평원이었다.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지 않는 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 다.
그런 곳에다가 당당하게 낚싯대를 걸어두다니 그것은 상식을 도외시한 얼토당토 않은 짓이라고 절찬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위였다.
그는 지금 무엇을 낚으려 하는 것일까? 아니 뭔가 낚을 생각이라도 있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낚시하는 노인의 옆에는 이 상식을 처참히 도외시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사부와 마찬가지로 오죽으로 만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주렴처럼 길게 드리워진 검은 앞머리에 가려 용모 확인이 불가능했다.
바로 비류연이었다.
넓게 펼쳐진 새하얀 운해의 수평선 끝에는 구름을 뚫고 나온 십수개의 봉우리들이 검은 창처럼 뾰족하게 서 있었다. 그 광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서 두 사람 의 노소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시간 속에 잠겨 버린 듯, 흐르는 시간 속에 녹아버린 듯, 자연에 동화된 듯한 그들의 자연스러움은 이 광활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대자연의 한복판에서도 뻔뻔스 러울 정도로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당연히 있을 곳에 당연히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낚시를 하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두 사람의 노소 중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의 신경은 온통 낚싯대 끝에 집중되어 있 었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는 모양이다.
동쪽 구름바다에 머리꼭대기까지 잠겨있던 금빛 태양이 서서히 위로 떠올라 하늘 꼭대기에 걸렸다. 노소의 그림자가 하루 중 가장 짧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의 낚싯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자처럼 묵묵부답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노소의 눈은 아직도 포기를 몰랐다.
“…, 제자야!”
시선은 돌리지 않고 죽간 끝에 고정한 채 건조한 목소리로 노인은 소년을 불렀다. 원래부터 물 속에 드리우는 게 지극히 상식적이며, 정상적인, 애초부터 그런 목 적으로 만들어진 낚싯대를 바다라고는 하지만 구름바다 속에 드리우는 저의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의 노소는 이 일련의 행동들이 전혀 헛되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무엇인가의 획득과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
무감동하고 무감각하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소년의 목소리답지 않게 세월에 찌든 듯한 권태로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잡히냐?”
“별로요!”
“그러냐?”
“…..”
무감동한 대화의 끝은 기나긴 침묵과 정적으로 장식되었다. 오늘따라 입질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사부!
이번엔 소년이 노인을 불렀다.
“님! ‘이다!”
사부는 단 한자만 강조했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구름 위로 불어오는 동풍이 은백색 바다를 휘저으며 급류를 형성시키거나 때때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구름이 바람을 따라 무수한 만상을 그려내며 흘 러갔다.
“하아아암! 낚시명인이라는 사부의 주장은 오늘로서 헛된 것임이 밝혀진 것 같군요.”
따분한 목소리로 근사한 하품을 곁들이며 비류연이 말했다.
“이상하게도 오늘 따라 영 입질이 신통치 않구나. 단지 그것뿐이다.”
그러나 제자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부랴부랴 말을 이었다.
“강태공이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강태공이 된 것은 아니다. 그의 어획량도 낚시꾼으로서 비웃음을 살만큼 턱없이 적었지. 그러나 그 사람은 천하를 낚지 않았느 냐! 앞으로 이 사부를 강태공 사부라고 부르도록 해라.”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명을 한 번 해 본다.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 세상 강태공이 모두 죽었나 봅니다. 사부님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다니 말입니다! “
제자의 반응은 냉담 그 자체였다. 매몰찬 놈이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는 사부였다. 게다가 저 싸가지 없는 말투하고는….
“무얼 낚는 것만이 낚시의 도는 아니다. 낚시꾼의 도란 모름지기 죽간을 드리운 채 자연을 벗 삼아 인생과 세월을 낚는 행위, 바로 그 자체이지.”
사부의 열변은 여기서 그칠 줄을 몰랐다.
“그것이 바로 낭만이라는 것이다. 낭만! 젊은 애송이들은 쉬이 느낄 수 없는 감정이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그러면 낚이리라!’라는 금과옥조 같은 낚시꾼의 금 언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사부가 훈계조로 엄하게 말하지만 귀담아 들으려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탕에 대한 변명치고는 너무 거창하군요. 날조된 금언까지 나오다니 말입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비류연의 냉담한 반응에 사부의 두툼한 백미가 꿈틀거렸다.
“어허, 이런 끈기 없는 놈! 이것도 모두 다 수련의 일종이라 하지 않았느냐!”
“또 다시 그 수련 이론입니까?’
제자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당연하다, 이놈아! 이 운해 낚시(일명 구름 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누차 이야기하지만 많은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여기서 잡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당연히…, 물고기죠!”
딱!
천벌강림(天罰降臨)!
“새(鳥)다, 이놈아! 이 산꼭대기에 어떤 미친 물고기가 살고 있겠느냐?”
“윽! 세련된 농담이었다구요.”
이마를 감싸 쥐며 비류연이 투덜거렸다.
“농담 좋아하네, 요즘 슬슬 반역의 기운이 높아지는구나. 제자야! “
“에이, 그건 착각이에요. 착각!
내심 뜨끔한 비류연이 손사래를 치며 얼버무렸다. 역시 사부의 동물적 직감은 날카롭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하며…
“…, 또한 이런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것들은 보통 새들이 아니다. 구름 위까지 날 수 있는 튼튼한 날개를 지닌 것들은 새들 중에서도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들뿐
이지. 게다가 그 녀석들은 사납고 힘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빠르다.”
쉬지 않고 사부의 열변이 토해진다.
“때문에 낚시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구름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안력이 필요하다. 일단 목표가 어디쯤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하지. 지렁이 한 마 리 달랑 끼워놓고, 구름 속에 드리워 놓고 있으면 맹금들이 날아와 그걸 덥석 물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 는…….?
열렬한 웅변에 목이 타는지 사부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리춤에 있던 술 호로를 꺼내 시원스레 목을 축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류연이 입맛을 다셨지만 아무래도 그 자신의 차례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는 기(氣)로서 얼마만큼 능수능란하게 낚싯줄을 움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도가 높은 만큼 바람도 강하다. 게다가 잡아야 할 날개 달린 물고기는 바람을 가를 정도로 빠르다. 그것들에게 뒤지지 않는 속도로 낚싯줄을 움직여 순식간에 그들을 묶어야 하는 것이다. 비뢰도를 익히는데 있어 꼭 필요한 수련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도 너는 이 신성한 낚시를 지금 겨우 아무 것도 낚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만두자고 말하는 것이냐?”
마치 불꽃과도, 화산과도 같은 저력을 지닌 웅변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의 마음은 여전히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이게 정말 그렇게까지 도움이 될까? 아무리 봐도 개인적인 취미생활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불신의 씨앗에서 발아한 의혹과 의심은 점점 더 깊어져 갔지만, 진심은 마음속에 조용히 묻어 두기로 했다. 이럴 때는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벌써 멀뚱히 앉아 있는 것이 반나절이라구요. 이렇게 긴 시간을 헛되이 들여서 봉황(鳳凰)이라도 낚으려는 겁니까?”
“글쎄다, 그것도 그리 썩 나쁘지 않은 계획이구나.”
사부가 고개를 모로 꼬며 대답했다. 어째 마음이 동하는 모양새였다.
“그거 잡으면 비싸겠죠?”
“무~지 비싸지!”
더욱 강조하며 말한다.
“으음…….”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사부의 무서운 점이다. 요즘은 자신도 점점 더 사부의 저런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아 비류연은 착잡하기만 했다. “봉황이 뭘 좋아할까?”
갑자기 이야기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백마 취향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설핏 들은 것 같은데요?”
“백마는 용 아니었냐?”
사부가 제자의 미끼에 대한 잘못된 정보 인식에 대해 지적했다.
“그랬었나요? 그럼 그런가 보죠.”
“옛 고사에 용을 잡으려면 미끼로 백마를 써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봉황을 잡으려면 백호를 미끼로 써야 하는 걸까?
“글쎄요? 낚아 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죠. 그런 건 낚시교본에도 없다구요. 게다가 백호면 같은 사방신(四方神) 친구 아니에요? 아무리 봉황의 먹성이 좋기로서 니 설마 친구를 잡아먹을까요?”
“윽!”
사부는 잠시 뜨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금세 회복했다.
“그래서 결론은 모른다는 것이냐?”
“모르죠.”
“쯧쯧, 그런 것도 모르다니.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웠던 것이냐?”
이런 경우 보통 아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부는 엉뚱하게 제자를 질책한다. 언제 봐도 훌륭한 사부였다.
“당연히 사부가 보여 준 것만 보고, 사부가 가르쳐 준 것만 배웠죠. 사부도 모르는 것을 제자가 알면 그건 사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저 같은 우수하고 예의바른 제자를 둔 것을 천고의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구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비류연이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제자로서의 자세인가! 정말 감동적일 정도로 화기애애한(?) 사제지간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아아, 천고의 재앙을 내가 불러들였구나!’
사부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비류연은 그것에 대해 신경을 끊어버렸다.
잠시 후,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사제지간의 티격거림은 이미 그들의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묘한 일이지만 이 들 사제에겐 아무래도 그것이 일상적인 생활인 모양이었다. 사제이자 노소인 두 사람은 다시 낚싯대의 끝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계속했다.
누가 그랬던가? 낚시와 인생은 끝없는 인내의 연속이라고…….
“사아~부우!”
제자가 사부를 부른다.
“왜에? 제에자아야? 넌 항상 존경의 ‘님’자를 빼먹는구나. 그건 결코 좋은 습관이 아니란다. 이 착하고 상냥한 사부에게 제자의 주리를 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사부가 옆을 돌아보며 지적했다. 그러나 다음번에 그것을 고칠 것이라고는 기대치 않는 모양이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사부의 눈썹과 수염은 눈밭처럼 하아얀 백색이었으며, 그 복슬한 눈썹 밑의 형형하게 빛나는 맑은 눈은 세월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류연은 가끔 이 사부가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굉 장히 이질적인 존재라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옛날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과거에 있었던 무용담 같은 거요.”
비류연이 드물게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열두 살에 사부가 아무렇게나 던져준 손자병법을 읽고 그는 그동안 자신이 한참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던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비로소 위태로워지지 않고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승리 의 희망도 그만큼 더 높아진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만일 이 격언이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은 너무나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사부는 자신의 세세한 버릇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반면 그 자신은 사부에 대해 아는 게 쥐뿔만큼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그날 이후,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 비류연은 앞으로 차근차근 사부에 대해 알아나기로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알아서 뭐하려고? 남의 과거지사에 호기심을 나타내는 건 결코 좋은 습관이 아니다.”
점잖은 목소리로 타이르듯 사부는 말했다.
“그냥 존경하는 사부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듣고 싶은 제자의 간곡한 소망이라 생각해 주세요!
갑자기 자신의 양심이 바늘로 찌른 듯 아파왔다. 그러나 비류연은 이를 악물고 그 아픔을 견뎌냈다. “그으래에?’
사부의 대답이 기쁜 듯 높아진다.
“나도 속세의 때에 많이 절었구나! ’하고 비류연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와신상담(臥薪 嘗膽)은 그냥 생겨난 고사가 아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도 있지 않은가?
강하고 휘어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인생이라는 전장(戰場)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승리에 항상 고통이 뒤따르 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강호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좀 해주세요. 비밀주의는 햇빛 비치는 해맑은 사부와 제자 관계에 극약이나 다름없다구요. 결코 권장덕목이 아니죠. 그래서 말인데요, 사부님은 과거에 어떤 존재였나요? ”
“흐음, 과거라.
갑자기 사부가 고개를 돌려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구름들은 조용히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부의 시선이 현재를 넘 어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에 비류연은 몸을 흠칫 떨었다. 사부가 분명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건만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고 그 정신은 저 아득한 먼 곳을 항해하고 있는 듯한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사부는 지금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 것일까? 당사자가 아닌 비류 연으로서는 분하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계속 과거에 머물 생각은 없는지 이윽고 사부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잊어버렸다!”
사부가 어울리지 않게 현인 같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꼭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때때로 현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곧장 눈의 착시 현상으로 치부 해 버리고 신경 끊어버리는 비류연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게 바로 비류연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네?”
비류연이 어이없어 반문했다.
“잊어버렸다.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것은 기억에서 끄집어내기에도 막막할 정도로 너무나 오래전의 일…. 나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일순간 비류연은 멍해지는 자신을 체감했다. 저런 대답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용케 쓰러지지는 않았다. 장황한 무용담이 나오기를 기대했던 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설마 노인성 치매인가?’
자신의 사고(思考)를 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비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덜컥 상념이 읽혀 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돌주먹 말리듯 말린 백염(그 이름 백아(白兒)!)이 자신을 맹공격 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저 수염을 볼 때마다 냉큼 달려가 싹뚝 잘라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불끈 치솟아 오르는 비류연이었다. 멋들어지게 늘어진 은빛 수염은 풍성하긴 했지만 저게 때때로 관상용으로 멈추지 않고 불쌍하고 가련한 제자의 억압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비류연은 빼꼼히 실눈을 뜨고 사부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기척을 숨기고 낌새를 읽히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사부는 잊혀진 과거
를 뒤지고 있는지 사랑스런 제자 쪽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사부의 눈은 여전히 아득한 과거의 잔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무책임하게 ‘잊어버렸다, 까먹었다’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일축할 수 있는 겁니까? 억지로라도 한 가지쯤은 기억해보세요. 몽땅 다 잊어 버렸을 리는 없잖아요? 사부의 무용담을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는 제자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구요!”
비록 비류연의 입이 지금 피를 토하듯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두근거린다는 그의 심장이 보내는 맥동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냉정할 정도로 일정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자극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꾸만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듯 보여 더욱더 궁금했다.
“으음, 과거라…, 과거라……..”
사부는 오랜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낱말들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침음성을 흘렸다. 고민에 잠긴 듯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기억 의 창고 속에 깊숙이 묻혀있던 먼지 덮인 과거의 화첩을 끄집어내고 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비류연은 이미 사부가 지닌 기억 창고의 부실성과 기록 보 관의 현 상태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한참이란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류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이제 뭔가 기억이 나시나요?”
도리도리, 사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기억이 안 난다!”
창고 탐색의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뭔가를 자신에게 숨기고 있거나……. 사부의 과거는 일절 비밀의 장막에 칭칭 겹겹이 둘러쳐져 있어, 아직 한번도 그 안을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왠지 그런 생각에 기분이 나빴다.
비류연이 발끈해서 외쳤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사부가 무슨 기억상실증 환자입니까?”
“내가 기억상실증 환자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차라리 밥숟갈 뜨는 법을 잊었다고 하지 그러세요? 그럼 오히려 믿기 편할 겁니다.”
“어허! 이런 방자한 녀석! 네 녀석이 아주 사부를 노망난 노인네로 만들려고 작심을 했구나! 기억나지 않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 다는 거냐? 사부는 하늘, 그러므로 그 말 또한 하늘의 천명(天命)이다. 알간?
강압적인 사부의 태도에 비류연은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사부에게 대적해 봤자 본전도 뽑지 못하는 탓이다. 손해 막심, 피해 막심, 후유증 막심한 일 을 감정이 북받친다고, 뿔따구 난다고 실행할 만큼 비류연은 어리석지 않았다.
비류연은 강경정책에서 다시 유화정책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의 목소리가 겨울의 북풍에서 다시 봄의 미풍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사부도 예전에 강호에서 강호인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잖아요?”
“강호? 그런 게 옛날에 있긴 있었지. 아마 지금도 있을 걸?”
“요즘도 있습니다.”
비류연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류연아…….”
“네?”
사부의 눈이 세월의 깊은 저편을 바라보았다. 자상한 목소리로 사부가 말했다.
“이제 그런 일들은 나에게 무의미하단다. 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는지도 몰라. 이제 과거는 나에게 의미가 없고…,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도 없단다. 지금 나에 게는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오늘 저녁에 마실 술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 하는 것 말인가요?”
사부는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것이지. 많이 똑똑해졌구나. 사부의 마음도 읽을 줄 알고? 이제 철이 든 어른이라도 된 것이냐?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들 하거늘..
오래간만의 칭찬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구요. 그런 거야 기본이죠. 제가 보통 똑똑해야 모르는 게 생기죠. 애석하게도 전 머리가 너무 좋아서 좀체 모르는 게 생기지 않거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한 듯 비류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년의 그 뻔뻔함에는 매번 이 사부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방진 녀석! 넌 그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삼백 년은 이르다”
가소롭다는 듯이 사부가 말했다.
“난 강호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다. 그러니 내가 강호에 대해 해 줄 말은 없구나. 내가 무언가를 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잊어버렸다. 너무 오래전 일이거든. 그것들은 모두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니 지금 새삼스럽게 돌이킬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던 것 같다.”
“역시나 노인성 치매로군요! “
비류연이 마치 고귀하고 명망 있는 의원인 화타(華陀)라도 되는 것처럼 진단을 내리고 자신의 진맥에 확신을 가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이! “
단번에 얼굴이 시뻘게진 사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딱!
사부의 알밤이 그의 이마에서 징벌의 불꽃을 일으켰다. 비류연의 눈앞에서 별이 빛났다.
“어이쿠! 이런, 오호 통제라! 요즘은 정직과 진실이 외면 받는 세상이로구나!”
곧 죽어도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말 안 하는 게 비류연다운 점이었다.
“망할 녀석! 사부에 대한 공경심과 경외심을 가지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 사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신앙과 같아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일렀잖느냐!”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사부가 말했다.
“내 오늘 공경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네 녀석에게 사문의 명예와 긍지가 뭔지, 또 그것을 수호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마. 이 망할 것아! 그 얇은 귓구멍 후벼 파고 똑똑히 듣거라!
근엄하고 준엄하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사부가 말했다. 꽤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럴 때 반항하면 매번 결과가 좋지 않았다. 사부가 진심이 되면 무섭다는 것을 오랜 제자 생활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비류연이었다.
사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나라의 법률도 나의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떠한 규정과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속박 당하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억지로 틀을 만들어 놓고, 세치 혀로 꾸 미고 다듬어 놓은 허식 가득한 도덕과 예절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내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자신의 마음이 명하는 데로 말하고 행동한다.”
잠시 말을 멈춘 사부는 비류연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지 힐끔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남이 틀리다 말한다 해도 바른 것이 틀린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의 잣대로 자신의 가치를 재고, 그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그런 어리석은 대중들의 광대놀음에 동참하지 마라. 우리는 오직 자신의 마음이 제시하는 진리의 잣대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요?”
“그래! 너와 나! 그래서 우리! 비뢰문의 제자라면 의당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 이름에 대한 책임은 질 줄 알아야 하지.”
“이름이요?”
“그래 이름! 내가 아직껏 기억하고 너에게 전해줄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사부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위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갑자기 사부가 거인이라도 된 듯 했다.
“비뢰(飛雷)란 이름은 아무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이건 그가 그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 이름을 쓸 수 있는 것은 우리 비뢰문의 후예뿐이니라.”
“그럼 뢰()자는요?”
“뢰 자라고? 흐흠……..”
사부는 약간 고민하는 듯 했다.
“그 이름을 사용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무능한 자는 그 누구도 뢰의 이름을 쓰지 못하지. 세상엔 너무나 많은 어중이떠중이 허접들이 뢰(雷)의 이름을 마구 가져다가 자기 명호 앞에 붙인다. 가소로운 일이지. 실력도 없는 주제에 감히 겉멋에 휩싸여 뢰(雷)의 이름을 남발하니 말이야!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주제를 가르쳐 주어라. 그 이름은 너 따위가 쓸 이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럼 전(電)자는요? ”
집요한데가 있는 비류연이었다. 힐끗 사부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소년은 회피태세를 취하려 했지만 노인 쪽이 더 쾌속했다.
딱! 눈앞에서 불꽃이 한번 튀었다.
“마찬가지다, 마찬가지!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자에게 뇌전(雷電)의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 암, 그렇구 말구.”
사부는 여기에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명예(名譽)란 이름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바로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넌 우리 비뢰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긍 지를 지니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는 우리의 이름이 남에게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느냐?”
“그런 걸 어떻게 참아요?”
물론 그런 염병할 일은 참을 수도 없고, 참아서도 안 된다. 그런 걸 참는 건 정신 건강에 무척이나 해로운 일임은 그는 오래 전부터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을 행 복하게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너도 명심해라!”
“네, 사부!”
결의가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며 평소의 놀기 좋아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님!’
사부가 악을 썼다.
“네! 님!”
비류연이 즉각 대답했다. 이번에는 ‘사부’라는 말이 어디론가 도망가고 없었다. 또 다시 천벌을 준비하며 사부의 주먹이 서서히 위로 들려졌다. 비류연은 슬금슬 금 도망갈 자세를 취하며 서서히 앉은 바위에서 살짝 엉덩이를 뗐다.
그러나 사부의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낚싯대 끝이 움찔하며 휘청거렸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입질이었다.
항상 제멋대로이고, 제자도 마음껏 부려먹는 사부지만 이 명예라는 부분에 대해서만은 상당히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에 못이 박힌다고 하던가? 이런 상황이 되면 하기 싫어도 연상 작용 때문에 머리 속이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비류연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자신의 문파와 자신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잠자코 용서할 만큼 마음씨가 곱지가 못했다. 결코 호인은 아니었다.
갈라진 협곡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푸른 하늘 위에 높게 걸린 구름조각들이 강한 서풍을 타고 힘찬 말처럼 달리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