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도의 크나큰 실수
“건곤합벽(乾坤合壁)을 알고 있나?”
동방학이 물었다.
“그…, 그걸 어떻게?”
자신들 이외에 그것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염도는 경악했다.
“뼈아픈 경험이 있으니깐!”
동방학과 공패의 얼굴에 과거에서 지금까지 견디어 온 고통의 그림자가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 무공을 맞받고도 살아남았단 말인가?’
염도와 빙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건곤합벽이라고 하면 사부님이 지닌 가장 강력한 위력의 봉인기 중 하나였다. 무쇠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해도 그것을 맞받 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데 그 봉인기를 맞받고도 살아남았다고 하니 어찌 그들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이 두 노인도 그 무시무시한 위력의 초식을 정면에서 맞받고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이 둘은 백 년 전 천겁혈세 때 천겁령 측에 붙어 정사양도를 휩 쓸며 공포를 휘몰고 다녔던 자들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태극신군에게 당한 뼈저린 경험이 있었다. 이 둘은 백 년 전에도 여전히 친구였는데 합공을 하고도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의 좌수도와 우수검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우수의 검한기와 좌수의 검염기에 당한 상처는 아직도 두 사람의 몸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솔직히 건곤합벽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동시에 삶의 희망도 함께 버렸다. 그들의 주인인 ‘그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날 그곳에서 뼈를 묻었어야 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깨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어언 백 년. 비록 그 본인은 아니라 해도 그 설욕의 때가 온 것이다.
“자, 건곤합벽을 보여 봐라.”
그러나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것을 남 앞에서 선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나? 두려운가? “
“그렇지 않소. 난 두려움이란 게 뭔지 모르오.”
“그럼 설마…, 아직도 그걸 익히지 못한 건가?”
동방학의 어이없어 하는 반문. 순간 빙검과 염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시뻘게졌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너무 깊게 캐묻지 마시오. 우리들이 귀하들을 상대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오.”
빙검의 말에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인의 직감력은 무척이나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신군(神)은 어찌 되었나?”
철저하게 감정의 떨림을 억제한 목소리였다. 자신의 동요를 노인은 상대방에게 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신(武神)이라 칭송되는 분이오. 당신 따위에게 ‘신군’이라고 함부로 불릴 이름이 아니시오.”
빙검이 차갑게 대꾸했다.
“아직도 살아 있나?”
살짝 빙검과 염도를 떠본다. 천겁령의 그림자 안에 있는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엄청나게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 세상에 그분을 상하게 할 칼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빙검은 동요하지 않고 빙 둘러 대답했다. 그는 결코 사부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 기라도 하는 것처럼 쌍마의 칼날 같은 시선이 빙검의 차가운 눈동자를 해부하려고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청은발의 검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쌍마는 침묵으로 대신 답했다. 무신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그 신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뼈아픈 교훈을 얻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적대관계라지만 함부로 말하기가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동방학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온 흑도계의 거물인 것이다. 평소 말을 아끼는 편이지만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결코 침묵하는 법 은 없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줄다리기의 허점이 어딘지를 간파했다. 노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염도를 향했다. 노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동방학이 통렬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아직도 숨이 붙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미안하지만 믿지 못하겠군. 들판에서 객사해 들짐승의 먹이가 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지. 무덤이 어 딘지나 나중에 가르쳐 주게나. 과거의 정리를 생각해 나중에 향이라도 한 대 태워줄 테니.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무덤을 파 시체에 매질을 가하거나 토막 내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은 면해 주도록 하겠네. 그런 걸 당해도 천번만번 마땅한 악적이지만 말이야. 자네들은 우리가 베푸는 온정과 아량 에 깊이 감사해야 마땅할 걸세! 되돌려 생각해 보니 말년에 무척이나 불쌍했군 그래. 제대로 된 후계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다니 말일세. 안 그런가? 반쪽
짜리 제자만 달랑 두 명이니 말이야. 혹시 둘이서 한 묶음인건가?”
하나하나가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극단적인 언어들뿐이었다. 노인의 빈정대는 듯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염도와 빙검의 가슴을 후벼 팠다. 특히 마지막 일격은 치명적일 정도였다. 마침내 참다못한 염도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닥쳐라! 이 망할 놈의 늙은이야! 돌아가신 사부님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테다!”
“염도! “
빙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순간 염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자신이 얼마만큼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런 바보, 멍청이!”
염도는 그런 말을 들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크큭…, 크큭…….”
형체가 남지 않도록 찢어 죽이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었지만 동방학의 잿빛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으하하하! 크하하하! 으하하하!”
노인의 삐쩍 마른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희열에 들뜬 커다란 웃음소리가 협곡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협곡이 우르르 진동했다. 몇 몇 관도들은 참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드디어, 드디어 그 무신 혁월린이 죽었단 말인가? 그자 때문에 여태껏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거늘……. 이제야 세상의 빛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걸을 수 있겠 구나. 그분께서 나서지 않는 이상 무신을 막을 자가 없어 걱정했었는데…, 알려줘서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빙검의 얼굴이 처절한 정도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필사의 각오를 결의한 자의 얼굴이었다. 염도는 스스로의 실수에 놀라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저 망할 입이 방정이라고 빙검은 생각했다. 절대로 흘러나가서는 안될 비밀이었다. 지금까지 천겁령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비밀스런 활동을 계속해 온 건 무신 혁월린과 무신마 갈중혁의 그림자가 강호에 크게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두 개의 무게추 중 하나인 무신이 죽었다면, 그 그림자의 색이 엷어 짐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겨우 돌아 온 염도가 좀 떨어져 있는 남궁상을 보며 외쳤다.
“상, 주작단과 함께 결계를 펼쳐라! 그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라. 그리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저 두 사람을 결코 내보내서는 안 된다.”
“예? 옛!”
남궁상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명령에 따랐다. 주작단이 일제히 산개하며 두 노인의 주위를 신속하게 빙 둘러쌌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 기가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관도들은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염도가 또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다른 놈들은 지금 손놓고 뭣들 하나? 어디 불구경 났냐? 죽고 싶지 않으면 냉큼 움직여! 꾸물거리는 놈은 특별훈련과정 50회 반복이다.”
염도의 불호령에 손놓고 있던 관도들이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희한하게도 그들은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모르는 듯 했다. 왜 저렇게 야단법석 호들 갑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오십 명 가까이 되는 대 인원에게 포위당했는데도 두 노인의 안색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했다.
“절대 저자들을 살려 보내서는 안돼!”
일그러진 빙검의 얼굴은 처절할 정도였다.
“알겠나, 이 바보야! 자네가 한 일은 자네가 매듭을 짓게. 우리가 협공이라는 빌어먹을 짓을 해서라도 저자들을 살려 보낼 수는 없어!”
죽기보다 하기 싫은 협공까지 꺼내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이 일을 중대하게 여기는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천겁령의 숨통을 트여 주는 일을 스스로 자진 해서 할 수는 없었다. 무신과 무신마는 지난 백 년 동안 천겁령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무게 추이자, 족쇄였던 것이다. 죽은 사부님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평정심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심장까지도 차갑게 얼려져 있을 거라는 빙검이 이처럼 다급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사안 은 다급한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을 죽인다고 일이 해결되겠나? 저 위에서 매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귀머거리가 아니라네. 노부의 목소리가 자랑할 만큼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저들 이 듣지 못했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이미 늦은 것 같지 않나?”
깔보는 투가 역력한 동방학의 비웃는 말에 염도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달리는 수레를 멈추기에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 있는 빙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결코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방금 전 당신의 도발에 넘어간 이 사고력 전무의 성급한 인간이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때, 불안한 낌새를 느끼고 우리 주위 방원 삼장 내에 나의 기(氣)로 방음막(防音膜)을 쳤으니 말이오. 이 성질 급한 인간의 입을 짓뭉개서라도 막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지만……. 그러니 저 절벽 위는 물론이고, 지 금 결계를 치고 있는 아이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이는 없을 거요.”
“뭐라고!”
“어…, 어느새!”
두 노인이 각기 다른 경악성을 터트렸다. 설마 빙검이 그 혼잡한 와중에 그런 술수를 부렸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잘했다, 철수야! “
염도는 자신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옛날 한때 친근했던 시절에 그를 부르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지난 20년간 한번도 부른 적이 없는 호칭으로 부르다니 정신이 나갈 정도로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이었다.
“내가 자네들을 무시한 것은 사과하겠네. 하지만 자네들만의 힘으로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나? 설마 이 애송이 무리들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
빙검의 반격은 동방학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요!”
빙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금 빙검과 염도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백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 둘의 눈동자에는 결사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비뢰쌍마라 해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맞대응이라도 하듯 두 노인의 전신에서도 검은 살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고수들의 싸움은 으레 그 러하듯 먼저 기세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살기와 살의가 밀고 당기는 가운데 그들 사이로 무형의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초고수들만이 뿜어낼 수 있다는 무형지기 (無形之氣)가 부딪치면 때때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내공의 싸움이라기보다 정신력의 싸움에 더 가까웠다.
이 무형의 기류에 휩쓸리면 보통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어기상인(御氣傷人)의 신묘한 경지도 모두 이 무형지기의 힘 으로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력한 무형지기가 격렬히 교차하는 이 중심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가장 확실한 자살방법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무형지기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아침 산책이라도 하듯 태연하게 걸어 들어온 이가 있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상식이 상식을 삼켜버렸는지 그 남자는 이 폭발할 듯한 기의 압력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만 멈추죠.”
가장 황당한 방법으로 이들의 대립을 중단시킨 이는 바로 비류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