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연과 비뢰쌍마와의 결전
– 이름을 가질 자격
“이보게, 자네 뭐 하는 건가? 그들은 감히 자네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어서 이리 돌아오게! 저 하늘에 걸린 해가 채 지기도 전에 관에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가?”
비류연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취영검 신유성이 다급하게 뜯어 말렸다. 그의 눈에 비류연의 행동은 무모 그 자체로 비춰졌던 것이다. 저 두 노인장과 잠깐 상의할 일이 있어 좀 가보겠다고 말하는데 그가 어찌 맨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비류연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류연은 막무가내였다. “이보게, 모용휘! 자네는 친구가 아닌가? 어서 말려보게! ”
취영검 신유성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모용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무모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한 번 움직 인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지금껏 저 친구가 일단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용휘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했다. 그의 눈동 자는 혼란스러운 그의 내심이 표출이라도 되는지 미미하게 떨렸다.
“무모함이라 불리는 용기라도 좋다! 과연 나도 저 친구처럼 저렇게 저들 앞에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이 수려한 용모의 청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흥, 주제도 모르는 것이! 네 까짓 게 나서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가까운 곳에서 다른 관도들과 함께 결계를 펼치고 있던 마하령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왜 자신이 지금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지 그녀 자신조차 혼란스러 웠다. 당랑거철(蝶嫏拒轍)! 철 수레를 가로막는 사마귀처럼 그냥 죽어버리면 편하지 않는가!
“야! 이 멍청아! 어서 돌아와! 네놈이 그렇게 대단해!”
마하령의 앙칼진 외침에도 비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손을 흔들며 검진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려는 짓은 명백했다.
“너무 무모하군! “
용천명은 그의 행동 양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마하령이 저렇게 열을 내는지도 그에게 의문이긴 마찬가지였다. 저 자는 도대체 무슨 신념으로 움직이 는 걸까? 보통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인 것이다. 저들은 백 년 전 천겁혈세 때 헤아릴 수 없는 공포를 뿌리고 다녔던 마두 들이었다.
용천명이 보기에 비류연은 기름으로 목욕을 한 다음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부나방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회의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비류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 돼! 저 사람들은 너무 위험한 사람들이야!’
나예린은 저 노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노인이 뿜어내고 있는 사방을 짓누르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 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류연은 겁도 없이 그 위험천만한 자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류연, 제발…….?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지금 불안의 씨가 그 싹을 틔웠다. 자신이 한 남자 때문에 불안해지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나예린이었다. 왜 심장이 옥죄어 오는 듯 이 답답해지는 건지 나예린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근심과 불안을 경험하고 있을 때 마침내 비류연은 네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중앙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검진의 중심에서 소용돌이치는 살기는 5장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아주 잘 전해져 오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느새 다가온 은설란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그녀도 다행히 이 혼란의 와중에서 다친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람이 숨을 죽이고 잠잠한 밤의 고요한 호수 같은 시선이 은설란을 향했다.
“제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듯이 보이나요?”
은설란은 생긋이 웃었다.
“네! 아주, 아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예린은 평소에 감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조그만 눈썰미만 있어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답니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비로소 자신이 지금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이 깨어졌음을 알았다.
“괜찮을 거예요. 큰 걱정 말아요. 내가 보기에 그는 결코 쉽게 죽을 사람 같이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오늘 이 자리가 그의 무덤이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저에 게는 그렇게 느껴져요. 함부로 먼저 죽어서 여자를 울리는 남자는 사상 최악! 최저거든요! ”
강한 신념이 담긴 단호한 목소리였다.
“전 별로 울거나 그럴 생각은.”
그러나 은설란의 눈과 마주친 나예린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흐르는 슬픔의 강과 그 물줄기가 모여 이룬 비탄의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봐 버렸 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더 이상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나예린과 은설란은 비류연이 무턱대고 폭풍우치는 무형지기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이야기였다.
넌 누구냐?”
자신이 느낀 경악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동방학이 말했다. 이 소년(그들 기준으로 보자면 비류연은 단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의 놀라운 등장에 모두들 어 느새 무형지기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싸우는 중에 방해를 해서 미안한데요…….”
비류연은 그렇게 서두를 시작했지만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저렇게 뻔뻔하면서도 당당해지지 않는다.
“어쨌든 저도 일단은 사문과 사부라는 걸 가지고 있는 처지라서요.”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냐?
커다란 도를 어깨에 걸친 채 공패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애송이에게 격전을 방해받다니 체면 문제였다.
“참 시끄러운 할아버지네요. 그냥 끝까지 들어요.”
염도와 빙검이 보기에 비류연은 공패의 화를 돋우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시, 시끄러운 하, 할아버지?”
공패는 분노를 뛰어넘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할아버지라니…, 백이십년이 넘도록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칭호였다.
“그 처지라는 것 때문에 사문의 계율(戒律)을 집행해야 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계율 말인가?”
동방학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
“명호가 섬뢰마검이시라구요?”
“그렇다!”
“둘이 한 쌍으로 비뢰쌍마라고 한다죠?”
비류연의 질문은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어투였다.
“그…, 그렇다.”
동방학의 제지 때문에 공패는 용케 폭발하지 않았다.
“천지간에 가장 빠르고 강한 힘인 뢰()의 이름을 그 앞에 붙이려면 그만큼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누구든 뇌의 이름을 쓰려면 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이름이 비뢰라면 좀 안 되겠네요. 저희는 두 자 모두 허락해 주는 경우는 없거든요.”
“참으로 광오하구나!”
“뭐 보통이죠.”
여전히 비류연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런데 너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단 말이냐?
일검에 목을 따는 대신 계속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 동방학도 이 느닷없는 불청객에게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 어린 꼬맹이가 얼마나 황당한 이유 때문에 자 신들의 대결 중간에 목숨을 걸고(물론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했지만) 뛰어들었는지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반대로 공패의 흥미는 저 나불거 리는 혀를 한시라도 빨리 저며 내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희 문파는 융통성이 아주 많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안 된다고는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금 나를 감히 시험하겠다는 거냐? 나 섬뢰마검 동방학을?”
“아니죠. 심사하겠다는 거죠.”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후자 쪽이 위에서 아래를 본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비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참, 그리고 과거에 쌓아 놓은 명성은 애석하게도 이번 시험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돼요. 가산점도 없구요. 물론 학연이나 지연 같은 연줄이나 뭐 그런 것도 당연 히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뇌물은 으음…, 좀 고민되는 문제네요. 그건 액수를 봐서 나중에 따지도록 하죠.”
곧 죽어도 안 받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허허…….”
저 터무니없는 광오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건지 이제는 황당함을 넘어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진짜 할 건가 본데?’
‘그런가 보군.’
염도의 소곤거림에 빙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어린 사부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진심이란 것이 많은 사람에게 보여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염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주작단을 제외한 천무학관의 모든 관도는 뒤로 돌아 결계 외부로부터 올 공격에 대비하라! 뒤로 돌아!
주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도들이 염도의 명령에 뒤돌아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섬뢰마검 동방학은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히 벌어지고 있는 한편의 광대놀음 같은 어이없는 상황에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묵묵히 쳐다봐야만 했다.
“이제 나의 이름도 세월의 강물에 휩쓸려 가버렸나?’
세월의 무상함이 이토록 허망하게 다가올 줄은 짐작도 못했다. 그러나 진짜 이 꼬마는 자신과 싸워 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전혀 긴장하는 기색도 없었다. 자신의 패배를 생각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정말 패기가 넘치는구나! 감탄했다. 너의 나이에 그 정도 패기와 그만큼의 기량을 지닌 이는 드물 것이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 “구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보통이죠.”
“하지만 너무 자만이 심하구나. 그리해서 어찌 험한 강호와 그 지독한 인생을 항해할 수 있겠느냐? 겸손은 모든 것의 보도(寶刀)라는 것을 모르느냐? 겸손은 훌륭 한 항해사고 강력한 우군이며 멋진 신병이기(神利器)이지. 너는 이 겸손의 덕목을 좀더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구나. 내가 이 좋은 평생의 친구를 너에게 소개시 켜 주고 싶구나.”
“사양하겠습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필요 없습니다.”
“허허, 겸손은 강력한 우군이지만 교만은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느냐?”
“모릅니다. 물론 알고 싶지도 않고요.”
“하하하, 좋은 패기다. 젊은이가 그래야지. 허허…, 그러나 이 일을 어쩐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냐, 아냐! 별 문제는 아니고 단지 조그마한 일인데 자네에게 그 겸손이란 걸 가르쳐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있다는 거지.” 남의노인이 정색하며 말한다. 그의 안광이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쯧쯧, 글쎄 말이다. 자기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벅찬 이 마당에 남의 일에까지 신경을 쓰다니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요? “
비류연이 묻는다. 별로 꼭 알고 싶을 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물어주는 게 노인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그 시간이 한량한 사람은 바로 노부 본인일세!
노인이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군요.”
“쯧쯧, 겸손은 평생의 친구라니깐 그러네!”
“그건 저를 이기고 나서 해도 늦지 않죠.”
“그럼 어디 시험 방식에 대해 들어볼까?”
“어이, 학! 진짜 할 셈인가?”
놀란 목소리로 공패가 물었다. 당연했다. 지금은 저런 미친 애송이 놈을 상대로 장난치고 놀 시간 따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동방학은 이 비상식적인 애송이 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는지 모르지만 좋은 취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 년 동안 은거했더니 별별 날파리가 다 꼬이는군.”
공패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걱정 말게. 그냥 단순한 유흥거리니깐 말일세.”
“할아버지께서는 뢰(雷)의 어느 얼굴을 추구하고 계시죠? ”
“나는 빛을 뒤쫓는 쾌(快)를 추구한다!”
노인의 대답에 비류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성취는 있으셨나요? “
동방학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번졌다.
“허허, 누군가에게 또다시 그런 질문을 듣게 될 줄이야. 오래 살다보니 별 신기한 경험도 다 하게 되는군. 이제까지 그 누구와의 겨룸에서도 느리다고 느낀 적이 없 었다.”
“그렇다면 노인장께서 장담하는 그 빠름이 과연 뢰에 견줄 수 있는지 보여 주실까요? 저의 쾌로 노인장의 쾌를 맞상대해 드리죠.”
“건방지구나!”
“보통이죠.”
보통이란 말이 너무 자주 소년의 입에 의해 왜곡되는 것 같다고 동방학은 생각했다. 잡스런 생각이었다.
“늙은이의 호기심 때문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충분할 만큼요!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무얼 믿고 저리도 오만불손(傲慢不遜) 광오하단 말인가? 상대의 장점으로 상대를 공격하겠다고 예고하다니! 도대체 얼마만한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대공자를 제외하고는 저런 나이에 저런 배짱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용인가? 아니면 지렁이(土龍)인가? 대답은 곧 나올 것이다.
“정히 죽음이 소원이라면 보여주마.”
“그건 두고 봐야죠.”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찰칵!
그의 오른팔과 오른다리에서 두 개의 묵룡환이 풀려져 나와 땅바닥에 떨어졌다.
쿵!
“이 동전이 떨어지는 걸로 신호를 삼죠!”
비류연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염도에게 건네주었다. 쾌를 겨루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방법이었다. 동방학은 어이가 없었다. 비류연의 행동은 그의 빠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던 것이다. 흥미와 재미만으로 용서해 주기에는 너무나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확실히 죽고 싶은 게냐?”
“죽는 쪽이 어느 쪽일지는 동전이 땅에 떨어져 봐야 아는 것이죠. 아직 동전은 던져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섣부른 단정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동방학은 기가 막혀 이미 대꾸할 힘도 나지 않았다. ‘벌써 나의 위상이 시간의 강물에 휩쓸려 가버린 모양이구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자결하는 게 시간도 절약하고 더 좋지 않겠느냐?’
비류연은 그저 싱긋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이제 던지죠!”
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동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하나의 동전을 향해 쏠렸다.
.탕!
마침내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 순간 빛과 생사가 한 순간 한 자리에서 교차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아무도 이들의 초식 교환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다들 서로의 시력을 확인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봤나?”
“못 봤네!”
염도의 질문에 빙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허허허! 허허허허! 크하하하!’
돌연 침묵하던 동방학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목청이 터져나갈 듯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노인의 광소가 한 순간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 시험 결과는 어땠나?”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상대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정도 빠르기면 쓸만하군요.”
투두둑!
비류연의 앞섶이 열십자 모양으로 잘려나갔다. 자신의 가슴을 묵묵히 바라보며 비류연이 말했다.
“두 번의 변화가 아니라 그냥 한 번이면 좋았을 것을, 아쉽군요.”
“그런가?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로군.”
동방학은 고소를 머금었다.
“합격인가?”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명호에 들어간 뇌의 이름을 인정하죠.”
“고맙군. 이제 염라대왕 앞에 가서 당당히 별호를 댈 수 있게 되었군, 그래.”
주룩!
그의 미간에서 핏줄기가 한줄기 붉은 선을 그리며 새어나오더니 서서히 콧날을 타고 마른 볼을 지나 턱에 이르러 그의 수염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방금 그 초식의 이름이 무엇인가?”
“섬뢰(閃雷)!”
“허허, 과연! 나의 이름으로 날 깨트렸다는 이야긴가?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패배로군. 최고의 속도에 죽게 되어…, 영광…, 이네.”
힘겹게 말을 마친 동방학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백 년 전 이름을 떨치던(그것이 비록 흉명이라 할지라도) 검의 고수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생을 마감 한 것이다. 빙검은 같은 검객으로서 마음이 착잡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류연의 말과 움직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동방학의 위치에 있었다면 비류 연의 일초를 막을 수 있었을까?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속으로 소리쳤다. 더욱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는 영원히 제자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만은 죽어도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학(鶴)! 하~악! 이, 이 노옴!”
유일무이한 친구의 죽음에 이미 눈알이 뒤집힌 공패가 톱니 같은 날을 지닌 잔뢰도를 무지막지한 기세로 휘두르며 비류연의 허리를 쓸고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동방학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가운 지면에 얼굴을 묻은 채 일어날 기미가 없는 동방학은 이미 죽은 자의 모습이었다. 공패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심장은 그 움직임을 멈추고, 흐르던 피 도 멎었음을. 그가 눈뜨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거라는 것을.
그러나 비류연은 잘 피했다. 일도가 허리를 훑고, 이도가 머리를 쪼개고 삼도가 목을 땄지만 비류연의 몸은 여전히 사지 말짱한 채 건강하기만 했다. 세 개의 잔상 이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봉황무(鳳凰舞) 삼첩인(三疊人)이었다.
“정정당당이 뭔지 잘 모르는 할아버지네요. 나이 잡수신 분이 그렇게 막 행동하시면 안 되죠. 주위의 젊은 것들이 어떻게 보겠어요?”
“필요 없다. 죽어라!”
공패가 다시 도를 휘둘렀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뢰의 어느 얼굴이죠? “
광폭하게 쓸어오는 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비류연이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패는 대답대신 폭발적인 힘으로 도를 휘두를 뿐이었다. 그 의 도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초식이라도 맞지 않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비류연은 여전히 종이 한 장 차이로 얄미울 만큼 약삭빠르게 공패의 도를 피해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죠.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뢰()의 어느 면이죠? “
공패의 폭풍 같은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내면서도 말을 할 만한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공패가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네놈을 일격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함이다. 극강이다.”
그러자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자격을 시험해보죠.”
그렇게 말하고서는 비류연은 한참이나 더 공패의 도를 이리저리 괴물 같은 움직임으로 피해 나갔다. 때로는 얼굴을, 때로는 어깨를, 때로는 좌우 허리를 노리며 종 횡무진 도기가 짓쳐들어왔다. 그러나 비류연은 반격하지 않는다. 그의 오른쪽 손은 계속해서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이건 좀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제발 얌전하게 기다려 주시면 안 돼요?”
자신의 목을 노리고 횡으로 날아드는 도를 피하며 비류연이 항의했다. 눈알 뒤집힌 공패의 귀에 비류연의 청원이 들릴 리가 없었다.
비류연은 그 후로도 일곱 초식을 더 피해야만 했다. 이제 공패의 밑천도 슬슬 그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너무 강맹함에 치중한 공패의 잔뢰삼십육패(殘雷
三十六覇)’로는 비류연의 재빠른 다리와 연체동물을 능가하는 유연한 회피 능력을 쫓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여파 때문에 둘러싼 포위망을 점점 넓어질 정도의 강맹한 무공이지만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마침내 공패는 자신의 절기 중 최후 초식인 잔뢰번천지(殘 雷飜天地)를 시전 할 준비 자세를 갖추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무공 중 가장 패도적이고,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그 순간 축 늘어져 있던 비류연의 오른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비뢰도(飛雷刀) 오의(義) 검기(劍氣)
굉천광뢰(轟天狂雷)의 장(章)
굉뢰
비류연의 소매가 펄럭이며 그 그림자로부터 조그마한 은빛 물방울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것은 새벽 풀잎 위의 이슬만큼이나 작아보였다. 그리고 지루할 만큼 느렸 다. 엄청나게 강해보이는 어마어마한 이름에 비해 그 결과물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조그마했지만, 그런 만큼 작고 아름다웠다.
공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마터면 전신의 맥이 탁 풀려 도를 놓칠 뻔했다. 곧 그의 동굴처럼 깊고 커다란 콧구멍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이런 중대한 순간에 장난을 치는 비류연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스으윽!
별빛의 눈물처럼 빛나는 작은 은빛 방울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공패를 향해 다가갔다. 강과 패를 겨루기에 그 가는 은빛 물방울은 너무 미약해 보였다. 이미 준 비 자세에 있던 공패가 도를 들어 이 은빛 방울과 비류연을 동시에 두 조각 낼 기세로 강하게 내리쳤다.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힘을 지닌 일격이었다. 마침내 잔뢰삼십육패의 최후초식인 잔뢰번천지가 시전된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은구슬 같은 물방울에 상어처럼 사나운 이빨을 지닌 거도가 부딪쳤는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그 누가 감히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염도와 빙검은 휘둥그렇게 떠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도와 부딪친 은빛 물방울 주위로 사방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안 간힘을 쓰며 그것을 막고 있는 핏발선 공패의 찡그려진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자신의 도를 때리는 엄청난 무게감에 공패도 믿겨지지 않는지 연신 자신의 손아귀와 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명을 넘게 베고도 상한 적이 없던 날에 쩌쩌쩍 거 미줄 같은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쾅쾅쾅쾅쾅!
수십 가닥의 백뢰가 은빛 방울을 중심으로 맹수처럼 튀어나와 공패의 전신을 채찍질하듯 유린했던 것이다. 쇠망치가 휘둘려진 듯한 거센 충격에 내장이 뒤집히고 뼈가 부러졌다. 거구의 공패가 대여섯 걸음이나 연신 뒤로 물러났다.
챙강!
은빛 소용돌이와 백뢰의 세례에 휘말려 금이 가있던 공패의 애도가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깨어졌다. 햇빛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이는 조각들이 산산조각 난 거울의 파편처럼 흩어졌다.
“크아아아악!”
공패가 손잡이만 남은 도를 내팽개치며 두 눈을 감싸 쥐고 뒤로 대여섯 발자국 물러났다. 두 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조각난 도편 중 일부가 기묘한 각도로 날아가 그의 눈을 찌른 것이다.
“더러운 것만을 본 눈이니 이젠 필요 없겠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눈은 겨울의 찬 서리처럼 냉정하기만 했다.
깨어진 수백 개의 도편들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간 공패의 몰골은 참혹할 정도였다. 머리는 올올이 풀어져 사형장의 죄수처럼 산발이 되었고, 얼굴 여기저기에도 도편이 남겨놓은 붉은 상처들이 여럿 새겨져 있었다. 옷은 이미 여기저기가 찢기고 베어져 너덜너덜했고, 드러난 살 여기저기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게다가 몇 개의 도편이 허벅지를 관통하고 지나간 듯 무릎을 꿇고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대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백 년 전 수많은 공포를 뿌리고 악행을 저지르던 비뢰쌍마가 한명은 소년의 손에 죽고, 다른 한 명은 이런 굴욕적인 몰골이 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니 아무 도 못 믿을 이야기였다. 저승의 판관 같은 눈으로 비류연이 공패를 바라보았다. 이제 공패의 생사판결은 오로지 비류연의 손에 달린 것이다.
“죽여야 하오!”
빙검이 외쳤다.
“무림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 자를 절대 살려 보내서는 안 되오. 그 비밀은 절대 엄수되어야만 하오!”
빙검의 목소리는 간절하기까지 했다. 비류연은 잠시 망설였다. 원래 이럴 예정은 없었던 것이다. 두 눈은 이미 잃었으니 오른팔 하나 정도로 용서해 줄까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공패가 나예린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알았더라면 비류연의 이런 고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자를 살려둘 만큼 비류연은 자비로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원래 이 의식은 죽음으로 연결되어서는 그 의미가 쇠퇴하게 되어 있었다.
당사자가 덜컥 죽어버린다면 누가 그들이 명호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겠는가? 강호에 그것이 알려지지 않는 이상, 그들의 이름은 지금처럼 그대로 계속될 것이 아 닌가.
“어쩌지…….”
고민되는 문제였다.
비류연이 잠시 한 사람의 생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비류연의 발 앞으로 검은 물체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은 검고 둥근 공처럼 생겼는데 비류연은 저것과 똑같은 물건을 예전에 환마동 안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치지지지직!
심지가 타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도 나는데 심지가 없는 것을 보니 특수 제작된 뇌탄(雷彈)이 분명했다. 게다가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뇌탄이다, 피해!”
순식간에 사람들이 뇌탄으로부터 멀어졌다. 만일 저것이 엄마뢰 정도의 위력이 있다면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매몰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콰콰쾅!
이윽고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만 요란했지 눈에 띄는 그 어떤 파괴력도 없었다. 대신 희뿌연 연막만이 뭉게뭉게 터져 나왔다. “이런 속았다! 이건 속임수야!’
빙검이 외쳤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뇌탄은 공패에게 너무 가까웠다. 아무리 천겁령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방대한 조직 이라 해도 공패 정도의 인물을 장기판의 졸처럼 버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뇌탄은 공패가 그 폭발력에 휩쓸려 충분히 가루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제길!”
염도도 욕을 퍼부으며 달려갔다. 그를 이대로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천겁령에게 무신의 죽음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뭉게뭉게 피 어오르는 연막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며 염도는 공패에 있었던 장소를 대충 가늠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공패였다.
염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확하게 그곳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그 다리로는 회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챙!
그러나 염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신을 시뻘건 적의로 감싼 혈의복면인이 공패의 앞을 가로막고 그의 도를 제지했던 것이다.
‘고수!’
염도는 한눈에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 달려들려던 염도를 혈의인이 왼손을 들어 제지했다.
“멈추는 게 좋을 거요!”
나지막하지만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미친! 내가 네놈 말 따위를 들을 것…….”
말하는 동시에 한 발을 내딛던 염도는 ‘쐐에에엑’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퍼뜩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퍽! 퍽!퍽! 퍽! 퍽! 퍽!
방금 염도가 서 있던 자리에 나란히 6개의 흑색창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속도는 어지간한 화살보다 빨랐고, 위력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내가 뭐랬소? 멈추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하지 않았소.”
정체불명의 혈의인이 다시 말했다.
“흥, 가소롭군! 이 따위 장난감으로 본인의 앞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렇다면 그게 얼마만한 오산인지 이 몸이 직접 교육을 시켜주마.”
염도의 도에서 붉은 검염기가 이글거렸다. 지금 그는 마치 불꽃의 사자(獅子)처럼 늠름하고 기백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혈의인이 말했다.
“다시 한번 경고하오. 더 이상 경거망동을 하지 마시오. 방금 전 것은 이 분을 구하기 위한 가짜였지만 내 부하들이 저 위에서 불붙여 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것은 진짜이니 말이오.”
염도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던 빙검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그렇게 된다면 가장 곤란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누가 그런 속임수 따위를 믿을 것 같나!”
염도가 버럭 고함질렀다.
“속임수? 천무학관 환마동에서 터진 건 그럼 장난감 폭죽이었던 모양이군.”
“그…, 그걸 어떻게…..”
“그런 간단한 건 굳이 묻지 않아도 답을 알리라 생각되오만. 자, 이제 생각이 바뀌셨소? 우리는 아직 7할의 전력이 남아 있소. 정면으로 상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상대해 주리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손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만 물러나겠소. 당신들에게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 천겁 나부랭이들이…….”
염도의 거친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으음.”
빙검은 침음성을 흘렸다. 양자택일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내몰리고만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때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요. 사람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죠! 그렇지 않나요?’
염도와 빙검, 그리고 혈의인의 경악한 시선이 한 남자를 향했다. 청년 같기도 하고, 개구쟁이 소년 같기도 한 남자가 씨익 웃었다.
“꼬마야, 너는 누구냐? 건방지게 여기는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적혈은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퇴각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더더군다나 안개와 흙먼지가 방해가 되어 동방학과 공패가 쓰러진 이유를 아직 정확히 모르 고 있었다. 만일 알았다면 절대 이런 경거망동을 했을 리가 없다.
비류연이 한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저기 그 덩치 큰 할아버지에게 빚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 두죠.”
적혈에게는 백 년이 지나도 이해가 가지 않을 법한 소개였다.
“나는 아직 그 노인네에게 빚이 남아 있어 이대로 보낼 수 없군요. 당신들 전원이 공격하고 싶으면 공격해요.”
“그, 그런 걸 마음대로 정하면…….?”
항의하려던 빙검의 말을 비류연은 도중에 잘랐다.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더라도 당신들 모두를 제물로 삼아서라도 남겨진 빚을 회수하지 못한다는 것은 체면 문제라서요.”
“…, 말도 안 되는 배짱이로군! “
혈의인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비류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오늘은 저대로 그대로 보냅시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있을 겁니다.]
빙검이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이번만큼은 염도도 빙검의 손을 거들었다. 견원지간인 이 두 사람에게는 가뭄에 홍수 날 만큼 드문 일이었다. 비류연의 너무나 어이 없는 막무가내 행동 때문에 절대로 공패를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는 그 사실마저도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사태가 막중하다는 이야기였다.
비류연은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이대로 공패를 보내는 게 찝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제자가 저리도 애걸하는데 사부로서 거절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이래서 달린 혹이 발목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잠시 공패를 바라보 던 비류연은 아무 말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빙검과 염도가 전면으로 나섰다. 비류연이 억지를 부리고 생떼를 쓰지 않아 무척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대표단 전체의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약간 과장한 면이 있어도 그의 말을 8할 이상이 사실임이 분명했다.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공패를 저대로 그냥 돌려보낸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었지만 지금은 관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였다.
“좋소. 더 이상 그대들에게 손을 대지 않겠소. 이만 가보시오.”
빙검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고맙군.”
“당신의 이름은?”
잠시 머뭇거리던 적혈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적혈! 우린 다시 만날 거요.”
“다시 안 만나는 게 좋을 거요. 그날이 당신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피어오르는 연막 속을 향해 빙검이 외쳤다. 공패를 들쳐 업은 적혈은 대표단의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빙검은 작게 중얼거렸다. “적혈…, 결코 비뢰쌍마에 비해 떨어지는 실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과연 저들의 실질적인 정체와 근거지는 어디인가? 그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오늘 저지른 중대한 실수가 얼마나 큰 반발이 되어 돌아올지 여기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