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마군의 말로
– 세 가지 질문
격렬했던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아직 그 뒷수습은 여러 가지가 남아있었다. 땅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한 노인에 대한 처리도 그 안에 속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경황이 없었는지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들은 쓰러져 있는 모사령을 데려가지 않았다. 하긴 사지는 흙 속에 묻혀있고 얼굴만 빼곰히 드러낸 채 기 절해 있으니 못 알아 볼만도 했다. 그 조그만 얼굴조차도 이상한 물질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무너진 나무들도 그를 숨기는 데 한 몫을 했다. 그렇게 해서 모사령은 적진의 한가운데에 남겨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그는 버림받은 것이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에 모사령이 겨우 눈을 떴다. 서서히 모사령의 얇은 눈꺼풀이 들려졌다. 따가운 햇살과 함께 한 사람의 인영이 그의 시야 안으로 들어 왔다. 길게 자란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 그것이 자신을 이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장본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벼락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한 그루의 큰 나무에 기대어 앉혀져 있었는데 수십 개의 시선이 그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염도, 빙검, 주작단과 나예린,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이 그 시선의 주인이었다. 자신이 지금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뱀눈의 모사령은 다급한 마음에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납덩이라도 얹어놓은 듯 손가락 하 나 까딱할 수 없었다.
“윽…, 윽윽, 익, 이익…….”
아무리 용을 써보려 해도 물 먹은 솜뭉치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이려 해도 소용없어요. 전신의 마혈(痲穴)을 모두 제압해 놓았거든요. 아마 입만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형식적으로 정중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날 어쩔 셈이냐? 죽일 셈이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모사령이 외쳤다.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은 죄는 죽음으로 속죄될 만큼 가벼운 거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당신은 제 소중한 것을 함부로 파괴하려고 했 “거든요.”
어조의 기복이 없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그러자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무서운 말만 하시는 분이로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렇게 죽음을 열렬히 바라지 않으셔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요. 그러니 내기를 하죠!”
“내기?”
사로잡혀 있는 모사령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요. 내기를 해서 당신이 이기면 당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풀어주죠.”
“정말이냐?”
“전 제가 한 번 내뱉은 말에는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죠. 걱정 말아요.”
[그, 그건.]
염도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하려고 했지만 비류연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하지만 이자를 심문해 배후를 캐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른 척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심문한다고 말할 사람 같지도 않은걸요. 저렇게 뱀처럼 야비하게 생겼어도 그 정도 기개는 있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런 걸 함부로 정하면 안 된다고 계속 애원했지만 비류연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기 방법은?’
“아주 간단한 내기죠!”
비류연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 그 안으로부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헉!”
주위의 모두가 경악성을 터트리며 놀라 자빠졌다. 몇몇 여자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비류연의 손에 들린 것은 두 마리의 청홍쌍각사였다. 양손에 두 마리의 뱀을 든 채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기 규칙은 간단해요. 제 손에 들린 이 두 마리의 뱀을 땅바닥에 놓았을 때 그 뱀이 누구에게로 가는가로 승부를 결정짓죠.”
“네…, 네놈. 제 정신이냐?
“물론이죠!”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비류연 자신뿐인 것 같았다. 염도와 주작단을 포함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래도 모사령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저 청홍쌍각사라는 뱀이 어떤 뱀인가? 비사마군 모사령과 함께 백 년을 넘게 살아온 뱀들인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애초에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이런 내기를 제의하는 비류연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 내기가 당신에게 명백히 유리한 조건인 만큼 이쪽에서도 조건이 있어요.”
저쪽이 유리한 줄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뭔가?
경계의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모사령이 물었다.
“만일 내가 이기면 우리 쪽이 하는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는 걸로요. 어때요? ”
잠시 심각한 얼굴로 침묵하던 모사령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위험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기에 자신이 질 리가 없었다.
“좋다. 나 비사신군 모사령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만일 이 내기에서 노부가 지면 너의 그 조건을 수락하마.”
“화끈해서 좋군요! 좋아요, 좋아! 그래야 재미있죠.”
비류연은 무척이나 기쁜 듯 박수를 쳤다.
[이제 불만 없겠죠?]
염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면 뭐하나? 이길 가능성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있어야지. 염도는 그냥 맘 편하게 포기해 버리기 로 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
“언제든지!”
자신의 승리를 12할 확신하며 모사령이 응대했다. 비류연이 두 손을 위로 들어올리자 그의 눈이 청홍쌍각사의 눈과 마주쳤다. 이 두 마리의 미물들은 경계어린 눈 초리로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냐?’라고 묻는 듯한 눈초리였다.
한번 화끈하게 당한 교훈이 있어서인지 함부로 반항할 생각은 애당초 포기한 듯 했다. 청홍쌍각사를 바라보는 비류연의 눈이 서서히 새벽의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 작했다. 그 신비롭기까지 한 광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두 마리의 미물들뿐이었다. 조용하지만 차분하고 힘 있는 말이 비류연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왔 다.
“자! 이제 너희들은 어느 쪽이든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해라.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해주마!’
순간 인간처럼 서로를 바라본 청홍쌍각사는 서슴지 않고 원주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비류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금 두 마리의 고개가 강제 되기라도 하듯 돌려졌다.
“아참! 주인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충견비(忠犬碑)처럼 충사비(忠蛇碑)라도 세워줄지 모르니깐. 하지만 잊지 마라. 저쪽에 가면 너희들의 앞날 은 오로지 뱀탕이 될 운명뿐이라는 것을! 뱀은 정력에 좋다고 하니 군침 흘리는 녀석들이 꽤 많이 있거든. 죽어서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자 어떻게 할 테냐?”
인간의 말을 알아들었음인가?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었다. 비류연의 손에서 풀려난 두 마리의 뱀은 두 사람의 정 가운데서 갈팡질팡 망설이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 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 이제 너희들의 판단으로 너희들의 운명을 결정해라!”
비류연이 외쳤다. 그가 내뱉은 지금의 말에는 언령의 힘이 깃들어 있는 듯 엄청난 권위가 느껴져 감히 누구도 거역할 마음을 품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선택 의 갈림길에 섰다. 두 마리는 곧 결단을 내려졌다.
스르륵!
비사마군을 향해 기어가는 척하던 두 마리의 청홍쌍각사가 갑자기 방향을 선회했다.
“이…, 이럴 수가!”
자신에게 꼬리치며 올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고 있던 모사령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가 버젓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두 마리의 청홍쌍각사는 살갑게 꼬리 까지 흔들며 비류연에게로 향했다.
비류연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의리보다는 목숨! 정(情)보다는 자신의 이익이라……. 미물들의 삶도 타락한 인간의 삶과 그리 다를 바 없군요.”
모사령은 비류연의 시선이 저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곧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패배를 시인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 었다. 청홍쌍각사는 뿔 달린 이마로 비류연의 양쪽 신발을 부비부비 비볐다. 아무래도 재롱까지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 가증스런 모습은 모사령에게 삶의 희망마저 앗아가 버렸다. 비류연의 시선이 다시 한순간에 오십 년은 더 폭삭 늙은 듯한 모사령을 향했다.
“이런, 이렇게 된 걸 어쩌죠? 당신도 보다시피 이 녀석들이 좋다고 절 찾아온 거예요. 대자연의 의지를 일개 개인의 의지가 꺾어서는 안 되겠죠?”
비사마군의 참담함과 비통, 그리고 절망감은 감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이제 부끄러워 비사마군이라는 이름도 쓸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내, 내가…, 져, 졌다!”
비사마군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입가에 해맑은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모사령을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그런 미소였다.
“허허허허. 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
허망함이 짙게 깔린 힘없는 목소리가 노인의 헤벌려진 이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오늘로서 비사마군 모사령의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은 그 끝을 고한 것이다. 그가 재기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한 무인의 무림인으로서의 존재 가치 상실! 그것이 바로 비류연이 모사령에게 내리는 죽음보다 가혹한 벌이었다.
헤프게 웃음을 흘리는 노인의 곁에는 반 토막 난 만사혈장이 모래 바람과 함께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었다.
“이이이이익!”
염도의 얼굴이 화로 속의 석탄처럼 시뻘개졌다. 반대로 옆에 있는 빙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만은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이들을 지켜보 고 있었다.
“이 망할 영감탱이! 죽여 버릴 테다!
얼굴을 벌겋게 달군 채 씨근덕거리는 염도의 입에서 마구 폭언이 튀어나왔다. 이 빨간 머리의 중년 사내는 벌레라도 씹어 먹었는지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리고 있 었다. 그렇잖아도 험한 인상이 더욱 더 진화되어 귀신보다 더 험악해졌다.
“어떻게 그딴 게 우리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단 말이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우린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염도는 무저항의 노인이라도 상관치 않고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옆에서 빙검이 간신히 뜯어 말렸다. 벌써 질문이 두 개나 지나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두 사람 다 좋은 기분일 리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노인이 말했다.
“그러길래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나? 신중하게 생각해서 질문하라고. 난 미리 경고했네…….”
“이, 이건 사기야!”
염도가 분연히 외쳤다.
“사기라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노인의 눈이 일순간에 섬광처럼 빛났다.
“노부의 명예에 따라 대답하고 있는 걸세. 난 진실을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고, 이게 진실일세. 내 대답 안에서 해답을 찾는 것은 자네들의 몫이지. 내 몫은 아닐 세.”
“이런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
염도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완전히 당했다! ‘
이게 두 사람 모두의 생각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염도가 했었다.
“당신의 배후 세력은 어디요?”
대답은 간단했다.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천겁령(天劫靈)일세! 이제 두 개 남았군.”
너무 허탈한 대답에 염도가 길길이 날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모사령의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며 격렬히 날뛰었지만 빙검과 비류연의 제지로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두 번째 질문은 빙검이 했다. 염도보다는 좀더 정보로서의 효용가치가 높은 질문이었다.
“당신들 천겁령의 근거지는 어디요?”
두 번째 대답도 허탈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거울의 그림자!’
그리고는 한다는 한마디가 이제 하나 남았군! ‘이었다. 꾹꾹 누르고 있던 염도의 화가 폭발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딴 게 대답이 될 수 있냐고 염도가 길길이 날뛰 자 돌아온 대답은 ‘될 수 있다’ 였다.
“뭘 그리 질질 끄나? 이제 하나 남았네. 빨리빨리 질문하게!”
염도의 속을 벅벅 긁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앞의 두 전적이 있는 관계로 섣불리 질문할 수가 없었다. 염도와 빙검은 잠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항상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하나의 의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다니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떠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듯한 일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오랜 숙의를 마치고 빙검이 다가왔다. 드디어 마지막에 물을 한 가지를 정한 모양이었다.
모사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하던 빙검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오. 우리의 세 번째 질문은.”
“가게 놔둬도 됩니까?”
짙게 깔린 황혼 속으로 빨려들어 갈 듯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모사령의 등을 바라보며 염도가 물었다. 저런 거물을 그냥 놓아준다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빙검의 반대는 더 격렬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 무인의 명예와 긍지를 위해서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괜찮아요. 어차피 저자는 더 이상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방금 전까지 무림인이었던 비사마군은 이 자리에서 죽었어요. 지금 저기 걸어가는 건 그냥 한 명의 힘없 는 노인에 불과할 뿐이죠. 앞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예요.”
염도와 빙검의 시선이 다시 모사령의 작아지는 그림자를 향했다. 확실히 지금 저쪽에서 비척비척 걸어가는 노인의 걸음걸이는 바람이 불면 휙하고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웠다. 생명력이 모두 소진된 마치 심지가 다 타버린 양초 같았다. 아마 작은 바람에도 저 불은 곧 꺼져버리고 말리라.
“뭐 이것저것 받았는데 마지막 하나 남은 것까지 받을 수는 없잖아요?”
비류연이 품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기절한 모사령의 신체검사(?)를 할 때 슬쩍, 아니 정정당당하게 압수한 것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 다.
비류연이 당삼을 불렀다. 당장 당삼이 달려왔다. 비류연은 일언반구도 없이 그의 눈앞에 하나의 물건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색 피리였다. 피리의 겉면 에는 세심한 솜씨로 뱀과 지네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당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흥분으로 손발이 떨렸다. 당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독을 다루는 자에게 있어서, 독의 궁극 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무척이나 귀한 보물이었다. 독을 다루는 자에게 독사와 벌레를 마음껏 부릴 수 있도록 만드는 피리가 어찌 천하의 보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검객이 전설의 신검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이, 이걸 어떻게.”
흥분이 혈관 곳으로 퍼져간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이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류연은 여전히 사충적을 코앞에 들이민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눈은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그제서야 당삼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비류연과의 오랜 생활로 그의 눈치도 이미 상당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예전의 눈치 둔한 당삼이 아니었다. 눈칫 밥이란 비류연과의 생활에서 가장 먼저 절대적으로 필요로 되는 덕목이었다. 당삼이 독수리가 토끼를 움켜잡듯 피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황금 열 냥입니다!”
비류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보물이 황금 열 냥이면 너무 싼 값이었다. 당삼의 양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열 냥이라 부른 것은 아마 비류연의 영향일 것이다.
“황금 스무 냥입니다.”
당삼이 다시 외쳤다. 어느새 황금 열 냥이 올라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러나 그것이 비류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비류연의 시 선이 당을 향했다. 대사형과 시선을 마주친 당삼은 찔끔했다. 찔리는 게 있었던 것이다.
“문혜를 부를까? 아니면 딴 사람이라도?”
너 말고도 여기에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황금 스무 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문을 믿고 외치는 배짱이었다. 설사 가문의 돈을 썼다 해도 그 공 적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어쩌면 이 피리의 사용권을 자신이 가질 수도 있다. 그보다 더한 행운은 없다.
“서, 서른 냥입니다. 대사형, 제발 봐주십시오. 더 이상은 당가의 재력으로도 무리입니다.”
물론 뒤집으면 더 나온다. 그러나 그런 건 흥정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마침내 비류연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잡고 있던 피리의 아래쪽 부분을 놓았다. 사충적을 받아든 당삼의 얼굴은 희열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법으로(이런 방법으로 이렇게 귀한 것을 얻어도 되는가 하는 회의가 일 정도
로) 보물을 얻은 것이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것만 있으면 사문의 어른들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자신이 누나라고 주장하는 문혜도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마치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당삼이 물러가자 비류연은 곧장 당문혜를 불렀다. 이번에 비류연이 꺼내든 것은 한권의 책자였다.
사충음보(蛇蟲音譜)! 바로 사충적을 불기 위해,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 앞에서 그녀는 금세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틀림없 는 진품! 소용돌이 같은 흥분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그녀 역시 당가의 직계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사문의 어른들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이고, 항상 자신이 오라비라고 주장하는 당삼도 날 누님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당문혜는 먹이를 채는 독수리처럼 책자를 덥석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외쳤다.
“황금 열 냥!”
“정말로 끝이 났군.”
“그렇군요!
장홍의 감상에 모용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도 협곡 여기저기에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대표단 측에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효룡은 겨우 목숨은 건진 것 같았지만, 정신이 든 이후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의 눈은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한줌의 생기도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런 효룡을 보고 이진설은 다시 오열을 터트렸다.
그 외에도 십여 명이 화살에 부상당하고, 몇몇은 독사에 물려 중독되었다. 만일 모사령을 닦달해 얻어낸 해독제가 아니었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바보 얼간이 같은 놈들!’이라는 염도의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성대한 격전을 치르고도 사망자가 없는 게 오히려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다들 누적된 피로와 긴장으로 몸도 정신도 엉망진창이었다. 내기에서 져서 거의 얼이 나간 모사령은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명쾌한 해답을 알려 주리라 기대했던 세 가지 질문은 더욱더 많은 의문을 그들에게 남겨 놓았다. 애초부터 성실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던 빙검과 염도는 아까 전부터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아무도 이들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붙이려 하는 이가 없었다.
다시금 안개가 밀려와 이 추악한 광경 위에 하얀 장막을 드리웠다.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옮기고 치료하며 장내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안개 저편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누구냐?”
챙!
고약한의 도가 눈부신 속도로 도집을 빠져나왔다.
카캉!
누군가의 검이 그의 도를 막았다.
“하하하, 설마 진심으로 베지는 않겠죠?’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유쾌한 목소리와 함께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자 긴장해 있던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약한만은 진심으로 ‘베어버릴까?’하는 참을 수 없는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성이 돌출된 충동을 억눌렀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건가? 여기 펼쳐진 이 험한 아수라장이 보이지도 않는가?”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고약한이 분노의 일갈을 터트렸다. 미꾸라지 같은 놈! 저 뺀질뺀질한 얼굴을 주먹으로 뭉개 주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났다. “하하하,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리적 욕구야 언제 어느때든 생길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두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이런 모습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나? 자네의 신경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모양이로군!
고약한은 이런 참상을 보고도 태연한 늑기한의 면상을 뭉개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고약한의 눈에 어떤 것이 들어 왔다. “그 왼손에 들고 있는 건 뭔가?”
“아! 이거요.”
그가 팔에는 한 사람이 들려 있었다. 전신을 흑의로 감싼 복면인이었다. 정체는 번거롭게 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살아 있나?”
그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퇴각했다. 실로 암습인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퇴각이라 할 만했다. 그것 하나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고도 로 숙련된 공작원들인지 두려울 정도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때문에 포로라면 무척이나 귀중했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한 거물은 그 약속이란 것 때문에 이미 놓아줘 버렸던 것이다. 늑기한은 애석하다는 표정 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는요.”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쳇! 자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딴 시체 가져다가 어디다가 쓰겠나? 죽은 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초보적인 이야기도 알지 못하는가? 겨우 그런 헛수고 좀 했 다고 자랑하고 싶은 건가?”
일일이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응대하는 늑기한도 신경 굵기로 따지면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이야기 를 시작했다.
“아까 전에 참 곤란했었죠.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갔는데 느닷없이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일은 급한데 무척이나 곤혹스러웠죠. 저도 고생하 다가 왔습니다. 정말 이대로 볼일도 못보고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그러다가 일행과 떨어진 걸 알고 급히 이쪽으로 달려오려 했죠. 그런데 하늘에서는 화살이 비처 럼 마구 쏟아지죠, 그 다음은 쇠사슬이 떨어져 앞길을 가로막죠, 나중에는 독사 떼들까지 기어 다니지 도저히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죠. 그러다가 이놈을 사로잡 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슬렁거리고 있더라구요. 사로잡느라 힘 좀 들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의 백의는 여기저기가 찢겨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살갗까지 닿은 상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멀쩡하군. 그래? 배설은 시원스럽게 했는가? ”
‘똥 잘 쌌냐?’라고 묻지 않고 우회한 것은 고약한답지 않은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늑기한의 옷은 표면만 베였을 뿐, 핏자국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칼침, 화살침, 독사침, 골고루 제대로 맞았으면 하고 바라던 고약한으로서는 무척 실망스런 결과였다.
“실력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시는 편이 훨씬 더 듣기 좋겠군요.”
“실력이란 게 있었다면 그렇게 너덜해질 정도로 옷자락이 베이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포로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만들지 않았을 걸세. 난 또 그들이 기습 공격 하기 전에 미리 자네에게 알려 준 것인 줄만 알았네. 자네 같은 겁쟁이한테는 무척이나 편리한 일이었겠군!”
고약한의 폭언에 늑기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그러고 보니 고 노사께서는 얼마나 장렬하게 싸우셨는지 그 무용담을 꼭 듣고 싶군요. 혹시나 관도들 뒤에 숨어 계시지나 않았는지 벌 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뭐, 뭐라고!”
고약한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만들 하게! 자네들은 왜 그렇게 붙어만 있으면 싸우나?”
견원지간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려는 둘을 말린 것은 빙검이었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북풍한설이 씽씽 날리던 좀 전보다는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이 두 사람도 빙검에게는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갈 길이 뭐네! 서두르세!”
빙검이 다시 말했다. 고약한과 늑기한의 시선이 한순간 마주쳤다.
“흥!”
두 사람은 서로가 피차 꼴 보기 싫은 면상을 강하게 외면했다. 그렇게 해서 낙뢰곡의 싸움은 그 끝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많은 의문만을 남 겨주었다.
빙검은 이 싸움이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오. 당신들 천겁우들의 이번 목적은 무엇이오?”
“붉은 꽃이 만개한 화산!”
아직도 모사령의 마지막 대답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며 떠나지를 않았다.
그날 밤은 피부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웠다.
차가운 바람에 스치는 별들이 칠흑의 바다 속에 잠긴 채 아물거린다. 평화롭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 쪽에는 불꽃의 화분(花粉)을 날리며 모닥불 이 타오른다. 낮에 있었던 피 비린내 나는 결전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단편적으로 알려줄 뿐이었다. 결국 가까운 마을까지 가지 못하고 노숙을 하게 된 이들이었다. 다행 이란 점은 시급을 다투는 중환자가 없다는 정도일까…….
그러나 낮의 일도 있고, 그들의 형색으로 보아 순순히 물러났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처지이기에 경계를 늦출 수도 없었다.
부상자 치료를 위한 물은 부상당하지 않은 남자 관도들이 근처 개울가까지 가서 퍼왔다. 모두들 경공이 출중하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여행 중이라 나무와 철 사를 엮어 만든 번듯한 물통은 없었지만, 대신 특수하게 만든 얇고 커다란 물주머니가 있어 물을 긷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물을 끓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행에 무쇠 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해결책은 나름대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이 물 끓이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머 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자 비류연이 아무 말도 없이 한쪽 바위로 걸어갔다. 밥공기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의 둥근 바위였는데 높이는 허리 정도에 면적은 상당히 넓 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려 경도를 측정해 본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비류연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번쩍! 은빛 섬광이 짧게 빛났다. 모두들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했기 때문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단 한 사람, 나예린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본 것은 ‘스르릉’ 소리를 내며 단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커다란 반구형의 바위뿐이었다. 비류연은 밑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취했다. 어떤 무기로 어떤 수 법을 썼는지 잘려진 단면이 거울처럼 매끄럽다.
그 깨끗한 솜씨에 다가온 빙검이 감탄했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대표단에게 이 정도 바위를 자르는 일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손을 들거나 발로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깔끔하고 매끄러운 솜씨를 지닌 이는 이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도검도 없는데 도대체 뭘로? 알면 알수록 더욱더 불가사의한 인간이었다.
비류연이 말했다.
“파세요!”
빙검은 지금 비류연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했다. 어둠을 밝히는 별과 같은 빛을 한 순간 반짝이며 빙루가 뽑혀 나왔다. 그의 시선이 거울처럼 매끈한 바 위 단면의 중심을 향했다.
스윽!
빙검의 검이 그림처럼 깨끗한 호를 그리며 움직였다. 바위를 두부처럼 도려내는 것이 마치 신기루 같은 검법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훌륭한 돌 냄비가 탄생됐다. 마술처럼 파여진 냄비의 두께는 무척 얇았다. 그만큼 빙검의 검기가 놀랍도록 뛰어나다는 반증이었다.
사람들이 빙검의 솜씨에 경탄하며(비류연의 실력은 이때 주목을 받지 못했기에 감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 위에 길어 온 물을 붓고 장작을 모아 불을 땠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작은 반딧불처럼 밤의 어둠을 밝혔다.
“효룡은 어떠냐?’
염도가 다가와 환자를 돌보는데 여념이 없는 당삼에게 물었다.
“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의원으로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당삼이 말했다. 모든 무림인들은 기본적인 응급조치를 할 만큼의 의료 지식이 있지만, 당가의 자식은 좀더 본격적인 의원과 정을 배운다. 독과 약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대사형으로부터 받은 재미있는 물건을 한시라도 빨리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상자 치료가 최우선이었 다.
“다만 뭐냐?”
“아무래도 섬뢰마검의 검기에 정신이 타격을 입은 것 같습니다. 아직 눈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백치 같다고나 할까요.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긴 합니다만, 회복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무리도 아니지. 그만한 고수의 검기를 그 정도로 가까이 쏘였으니…….”
검기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완전 백치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 소저의 간호가 극진합니다.”
이진설은 그 때 이후로 침식도 잊은 채 효룡을 돌보며, 그의 곁을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오로지 효룡에게만 집 착하고 있었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보기에 너무 딱해 보여 독고령이 좀 쉬었다 하라고, 잘못하면 네 몸이 먼저 망가진다고 충고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저 효룡의 수발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한 남자를 위해 과연 저렇게까지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것일까?
이진설의 그런 모습은 나예린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나예린은 이진설을 자신으로 바꾸어 보았다.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광경은 그녀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이해가 간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쪽 이 맞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갑자기 비류연의 모습이 뇌리 속에 떠오른다.
‘또!’
왜 요즘 들어 자주 그가 떠오르는 걸까?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녀 자신도 모른다. 점점 더 그가 자신의 마음 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의 마음 반대편에서 생성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점점 더 증폭되어 갔다.
‘설마…….?
그녀는 곧 자신의 생각을 인정치 않고 부정해 버렸다. 자신의 심연 깊은 곳에서 자라난 그 조그만 감정은 선뜻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두려운 감정이었던 것이다. 무 의식중에 시선이 비류연을 좇는다. 그는 모닥불의 한쪽 곁에서 염도와 빙검을 상대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고 있는 두 중년인 쪽의 얼굴이 더 심각했다. “설마 그가 저런 부상을 당할 일은 없겠지…….’
왠지 근거를 댈 수 없는 믿음이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후일 나예린은 비류연이 만능이자 불사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뼈아픈 대가를 치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