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15화 – 화산파의 영역

비뢰도 12권 15화 – 화산파의 영역

화산파의 영역

매화검선 유환권

“대사형!”

주작단원이자 화산파의 일대 제자인 조천우가 비류연을 불렀다.

“?”

태평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비류연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비류연은 잠시 동안 침묵한 채 조천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

조천우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 생면부지의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대사형의 시선이 내심 못마땅했던 것이다.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저 시큰 둥한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기나긴 시간이 힘겹게 침묵을 실어 날랐다.

“…, 너 누구냐?”

마침내 비류연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떨어진 건 청천벽력이었다.

“네엣?”

경악과 충격에 조천우의 눈이 달걀처럼 휘둥그레졌다. 비류연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휘이이이잉!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자신의 존재를 무시당한 조천우는 말뚝처럼 자리에 붙박인 채 멍하니 비류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무표정하던 비류연 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맺혔다.

“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래, 화산파의 제자이며 주작단의 일원이자 내 사제인 조천우군! 무슨 일인가?”

왠지 보이지 않는 제 3의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듯한 어조라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조천우는 애써 인내심을 발휘해 참기로 했다.

곧 자신을 추스른 조천우가 말했다.

“이, 이제 곧 화산파의 영역입니다.”

“흠, 그렇군.”

“그렇지요.”

“그래.”

그걸로 두 사람의 대화는 막을 내렸다.

휘이이이잉!

산들바람이 그들 사이를 살랑이며 스쳐 지나갔다.

화산파(派연화봉 중턱 제 3 연무장(練武場) “휴우-.”

화산파 제자 이경영은 화산파 절기인 이십사수 매화 검법을 일초부터 마지막 이십사초까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다음 검집에 갈무리 했다. 기초 훈련 과정을 지 나 처음으로 진산절기인 매화 검법 이십사수를 사사 받은 이후 칠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똑같이 반복해 온 검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최후 사초식은 제대로 풀 려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되어야 묘경에 들 수 있는 건가?’

백날 휘둘러 봐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부님과 사숙님들은 한결같이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을 고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경영은 벌써 3번째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번이 4수째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천무학관의 꿈은 접어야할지도 몰랐다.

2년 전 자신이 떨어진 대신에 사제인 윤준호가 붙은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날 그는 머리 속을 하얗게 태우는 질투의 불꽃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길길이 분노했다.

그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울보 겁쟁이가 자신 대신에 천무학관의 관도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태사부의 후의(厚意)가 없었으면 그런 거짓말은 일어나 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절치부심 다시 한번의 입관 시험을 더 치렀지만 결과는 보는 대로였다. 또 다시 어이없게 떨어져 지금 이렇게 연무장에서 미친 듯이 검이나 휘두르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아직도 그는 왜 자신 대신에 윤준호가 뽑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과거의 쓴 기억과 함께 되살아나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젠장! 망할! 썩을!

명문의 제자로서 차마 내뱉기 힘든 말도 이런 꿀꿀한 기분 상황 하에서는 거침이 없었다. 검도의 길은 멀기만 했다.

“이 사형, 이 사형(師兄)!”

이때 봄바람처럼 싱그러운 목소리가 저편 멀리서 들려왔다. 암울했던 그의 마음을 단번에 밝게 만들어 주는 봄의 훈풍 같은 목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 다. 무척이나 귀엽고 발랄해 보이는 생명력이 가득 넘치는 소녀였다.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전의 꽃 봉우리 같았다. 곧 저 꽃망울이 터지며 아름다움의 향기를 사방에 흘릴 것이 분명했다. 소녀의 이름은 그의 사매로 이름은 소유경이었다. 그녀는 그 귀엽고 깜찍함 때문에 현재 사문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소녀는 현재 올해 천무학관 입관 시험을 준비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동년배 중에서 매화 검법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뛰어났기에 장로들 중 누구도 그녀의 낙방 을 예견하는 이는 없었다. 4수생인 자신과는 대접 자체가 달랐다.

어느새 소녀는 그의 옆에 다가와 있었다.

“이 사형!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말이냐?

“천무학관 화산규약지회 대표단에 조천우 사형이 뽑혔데요!”

“당연하지! 조사형이 안 뽑히면 누가 뽑히겠느냐!”

이경영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일응이라 칭해지기도 하는 조천우는 이경영의 우상이기도 했다. 같은 남자라도 반할 만큼의 기개와 빼어난 검기의 소유자 였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화산파 제자가 뽑혔다고 했는데…….”

“호, 혹시 정 사저냐?”

다급하게 되묻는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열망으로 차올랐다. 정 사저란 화산일선녀 정하경을 칭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조천우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의 동경의 대 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에요. 분명히 남자라고 들었는데…….”

금세 이경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얼굴에는 노골적일 정도로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만일 정 사저였다면 이번 기회에 먼발치에서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 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기대 심리를 품었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누굴까요?”

“글쎄다. 곧, 알게 되겠지.”

그러나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예전 같은 열정이나 호기심은 이미 사라져버린 이후였다. 그때 또 한 명의 후보가 남자라는 말을 들은 그때부터……. 어린 사매 앞에서 속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경영도 소유경도 나머지 한 사람의 대표가 그 울보 겁쟁이로 정평이 나 있는 윤준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못하고 있었다.

화산(華山) 연화봉(蓮花峰)

화산파(派상궁(宮) 대회의실 섭매전(葉梅殿)

이곳에는 지금 화산파 장문인을 필두로 한 12명의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의 주제는 이제 곧 화산파의 영역으로 들어온다고 연락이 온 화산지회 대표단을 어떻게 환영하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백 년간 그 일은 매번 화산파의 소임이라고 단단히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화산파도 이 일을 영예로 알고 항상 성심성의껏 수행했다. 때문에 올해도 그 대접 에 감히 소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대표단 환영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노인들의 한담 정도로 치부될 정도의 사소한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들은 그것에 더 욱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고 싶군요.”

장문인이 별 대수롭지 않은 화제라도 입에 올리는 것처럼,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죠. 한번 보고 싶죠.”

그러자 이에 동조하기라도 하듯 검련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검을 가르치는 입장이었다. 특히 타류의 검법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 록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번 일에 대해 누구보다 안달이 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으음…….”

잔잔한 호수 위에 풀어놓은 물감처럼 감정이 번져 나갔다. 이번 대표단 일행의 구성이 무척이나 이 노인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천하오검수 중 일인인 빙검이 대표단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 사건의 발달이었다. 이들은 검의 길을 함께 걷는 자로서 그의 검기를 한번 견식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튼 채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욕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을 고하는 행위가 될 것 이다.

한 문파의 장로쯤 되면 큰일이 없는 한 사문을 비우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소식과는 아득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한 검객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강호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란 하늘의 별따기 같은 것이다. 물론 구대문파 중 하나에 검문(劍門)으로 이름 높은 화산파인지라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매번 줄을 잇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어중이떠중이로 그중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자는 백의 하나 정도에 불과했 다. 즉 진품을 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세상도 살만큼 살다보니 흥미로운 것보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 점점 더 늘어난다. 게다가 수십 년씩 똑같은 일정에 따라 반복적인 생활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아무리 수행에 몸 바치고 있는 입장이지만 하품과 함께 흐르는 눈물에 익사하고 만다.

그럴 때면 사문의 것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 어린아이처럼 흥밋거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흥밋거리가 천하오검수 중 일좌인 검호(劍豪)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사실 예전에 빙검과 한번 검을 겨뤄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승리를 빼앗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쉬운 석패가 그 결과였다. 때문에 더욱더 발전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의 검기를 견식하고 싶은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을 설욕의 기회로 삼는 것도 좋으리라. 어찌 생각해도 남는 장사였 다. 회의실에 모인 모든 이들이 두 눈을 감은 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가 당기는 일임을 그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견이 없다면 빙검 관 노사께 다같이 한 번 가서 시연을 부탁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화산파의 검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장문인도 사실은 순수하게 빙검의 검기가 보고 싶은 것이다. 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그 이야기는 그렇게 정해진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화산규약지회 대표단 말인데 설마 준호 그 아이가 대표단에 뽑혔다니 믿겨지지 않는 일입 니다. 조사님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도저히 일어나기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 한 명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심약한 아이가 이런 큰일을 이루어 내다니 일대의 쾌거라 할 수 있지요.”

동조의 끄덕거림이 전해졌다. 장문인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한 노인이 그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문인의 눈에 노여움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화산에서 저기 숙면을 취하며 앉아 있는 노인보다 높은 배분을 지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래 보여도 현 화산파의 최고 어른 인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낮잠은 회의실 말고 처소에 돌아가셔서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차마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노인 앞에서는 장문인 자신 도 귀여운 어린애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노인이 바로 화산검의 최고봉(最高峰)이자, 천하오검수의 수좌(首座)인 매화검선(梅花劍仙) 유환권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은 납득되었다.

한낮의 햇살 속에 계속해서 꿈나라를 헤맬 것 같던 노인이 눈을 뜬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제, 끝났는가?”

잠에서 깨어난 노인이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습니다!”

12장로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으하암, 과연 언제나 이 섭매전은 따뜻해서 좋단 말이야. 여기선 항상 맛있는 낮잠을 잘 수 있지. 나같이 힘없는 늙은이에게 참으로 고마운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네. 자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 질문에 대답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이곳에 없었다. 다들 들어도 못들은 척하는 현명한 대처로 이 난관을 타계했다. 여기 있는 이유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라 기보다 낮잠을 자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노인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다들 이 노인의 괴벽이나 기행에는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니 이 늙은이는 이만 가보겠네!”

노인의 숙면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노인이 가고자 하는 것을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이곳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인이 자신의 신분과 권위만을 믿 고 함부로 전횡을 일삼거나 하는 법은 결코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노인이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노인이 억지에 가까운 부탁(거의 명령에 가까운)을 한 것은 2년 전 윤준호를 천무학관에 입관시킬 때 그때뿐이었다.

“태사숙님, 어디 가십니까?”

검련 장로가 일어나며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 차가 얼마나지 않을 것 같은데도 백발이 성성한 검련 장로에게 태사숙이라 불리는 유환권이었다.

“잠시 산책 좀 나갔다 오겠네. 며칠 걸릴지도 모르니 찾지 말게나.”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유환권의 눈은 캐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수고들 하게나!”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한낮의 회의실도 좋지만, 탁 트인 화산의 기경이 펼쳐져 있는 문밖도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나른한 노인의 육신에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가을의 남풍에 몸을 내맡긴 노인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맺혔다.

“설마 그 아이가 여기까지 해낼 줄이야.”

비록 회의 중에 눈꺼풀을 닫고 자고는 있었지만 들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들은 터였다. 특히 윤준호의 얘기가 나왔을 때 노인은 체면도 잊고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를 뻔 했다. 그만큼 그가 귀여워했던 윤준호의 일은 장문인과 장로들뿐만 아니라 노인 본인으로서도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2년 전 화산을 떠나 천무학관으로 갈 때만 해도 심약하고 겁많은 아이였다. 그 성격 때문에 주위의 괴롭힘도 많이 당했으리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아이에게 천부 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매화 과민증이라는 천부(?)적인 약점이 그 보석 같은 재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물론 여린 마음도 큰 걸림돌이 었다.

그런데 2년 전 돌연 검을 휘두르다 검향지경(劍之境)에 든 윤준호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노인은 자신의 눈과 코를 의심했지만 그 독특한 향은 틀림없 었다. 유환권이 억지를 써서라도 윤준호를 천무학관으로 보내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한 아이에 대한 이유 없는 편애라고 얼마나 비난을 받았던가? 비 록 배분과 위치가 있어 그 앞에다 대고 손가락질 하지는 않았지만 장로들의 불만은 익히 아는 바였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 다. 장로들도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천무학관에 가서도 그 심약한 성격 때문에 많이 고생하리라 여겼는데 인연이 있었는지 그 어려운 화산규약지회 대표 선발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올렸다고 한다. 그동안 수면 밑을 흐리던 의혹의 시선들을 말끔히 처리해 준 것이다.(물론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지만.)

주위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친손자처럼 윤준호를 귀여워하던 이 노인으로서는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늠름하게(?) 성장해 그런 의혹의 시선들을 말끔 히 처리해 준 것이다.

“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녀석이 나타났는지도 모르지.’

그 동안의 수행이 성과가 있었는지 일년 전 오늘 그는 검을 통한 명상 속에서 하나의 깨우침을 얻었다. 지난 일년은 그 깨달음을 정리하고 다듬기 위한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년 후,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원래 무공의 전수란 비급이 2라면 사부의 가르침이 8이다. 비단 기술뿐만 아니라 오의라 불리는 기술의 핵은 모두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구전을 책으로 옮긴다면 열권의 책이 있다한들 그 안에 모두 담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비급이란 것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은 종종 뭔가를 잘 잊어버린다. 비급이란 사람의 머리 속에서 기술과 기억을 끄집어 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때로는 비급 이라는 번거로운 작업의 귀찮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안다 해서 남도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비급을 만드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무공은 비급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절세의 무공이라 불리는 것이라 해도 터득이 불가능한 것이다. 비급으로 그나마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것은 내공 심법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장 속에 깨달음을 담을 수 있는 천재가 기술했던가.

그러나 비급에도 여러 가지 유용한 점들이 있다. 특히 이미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바탕이 깔려 있을 경우, 그 가르침에 대한 연장선상의 이론서는 본인에게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도움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생의 깨달음이 담긴 것이다. 아무에게나 전수해 줄 수는 없다. 우선 그릇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비급이란 것을 써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땅히 전해 줄 녀석이 없었다. 장문인은 너무 늙었다. 같은 급수인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피에게 이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나 이걸 본다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급만으로 그 깨달음을 전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자 사문의 후계자 가 아닌 별도로 자신의 후계자를 갖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이 생겼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가을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렀으며, 구름은 하얗고 햇빛은 따사 로우며 바람은 자유로웠다.

“어디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번 시험해 볼까?”

백이십 살이 훨씬 넘은 이 노인은 문득 자신이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피식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무척이나 마음이 쾌활 하고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노인이 자신이 가야 할 곳, 가 보고 싶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축지법이라도 쓰는지 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상궁으로부터 멀어져 쭉쭉 아래로 내려갔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중원오악(中原五嶽)의 하나인 화산(華山)이 위치한 지역이다.

그 안에 자리한 거대한 시진(市塵), 이곳은 실제로 화산의 그림자가 아침 저녁으로 드리워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화산에 닿기 전에 위치한 가장 큰 마을이기도 했 다. 성벽만 없다 뿐이지 화산파의 그늘 속에 차곡차곡 성장한 그 거대함은 일개 성(城)에 필적할 정도였다.

낙뢰곡의 큰 싸움 이후 그들은 별다른 방해 없이 수월하게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부상자들 때문에 조금 행보가 늦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일정에 차질을 줄 정 도는 아니었다. 여기서부터는 화산파의 앞마당이기 때문에 사방 곳곳에 화산파의 이목이 퍼져 있어 천겁우는 물론이고 흑도 세력마저도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조천우를 앞세운 천무학관 대표단들은 매화객잔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이 마을 제일 큰 객잔 앞에 와 있었다.

“이곳입니다.” 

“으음, 수고했다.”

빙검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묵기로 되어 있는 숙소는 이곳 지리를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조천우가 있었기에 조금도 헤매지 않고 올 수 있었 다.

화산파 바로 앞에 위치한 도시에서 가장 큰 주루의 소유주는 누구일까? 아마 백이면 백, 화산파 제자의 주루일 것이다. 아니면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던가. 이곳뿐만이 아니다. 다른 대문파가 위치한 곳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문파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마을의 가장 큰 이익 집단은 백이면 백, 이들 문파와 연관 을 지니고 있다. 객잔뿐만 아니라 표국, 주루 심지어는 기루까지 관련된 경우도 있다.

그들은 사문의 비호를 받으며 그 성세와 세력을 넓혀 나간다. 어디 감히 뒷골목 무뢰배 따위가 그들에게 삥을 뜯을 수 있겠으며, 상납금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목 숨이 여벌로 서너 개나 된다면 모를까, 어불성설이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간판의 모퉁이를 보니 화산파의 독문 문양인 매화 모양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화산파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하긴, 이름부터가 매화객잔이니 얼마나 적나라하게 화산파와의 관계를 광고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역시 이곳의 주인 또한 공식대로 화산파의 은혜를 입은 속가제자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연줄과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예라고 할 수 있었 다.

“들어가지!”

빙검이 말했다. 앞으로 그들은 이곳에서 며칠 묵어갈 예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화산 제일의 명소인 매화객잔에 잘 오셨습니다. 저희 매화객잔은 항상 손님 여러분들의 편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막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이들이 범상치 않은 무리인 것을 눈치 챘는지 총관이 급히 달려 나와 인사한다. 투철한 직업 정신 탓인지 서론이 좀 긴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긴 서론이 끝나자 그제서야 손님을 여지껏 밖에 세워두었다는 것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검과 용이 춤추는 곳에서 왔네!”

검룡(劍龍)은 천무학관의 상징이었다. 빙검의 대답에 총관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가시고자 하는 곳은 어디십니까?”

망설이지 않고 다시 빙검이 대답했다.

“매화가 지지 않는 곳!”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주인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문답이 끝나자 총관은 부리나케 몸을 돌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밖에까지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화산파의 기별이 들어간 것이 분명했 다.

“오늘 영업은 끝이다. 남은 손님들은 모두 돌려보내도록!”

그리고는 2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황급히 달려 올라가며 외쳤다.

“등(燈)을 일제히 밝혀라. 귀빈께서 왕림하셨다. 모두들 나와 극진히 영접하라!”

빙검을 위시한 대표단들은 왕후장상에 부럽지 않은 요란한 대우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영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정중한 사 과의 말을 들으며 객잔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사죄의 의미로 음식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곧 수그러들었다. 객잔의 각 방에 묶고 있는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곧 가까운 객잔이 수배되었고, 그들의 짐은 일사분란하게 그 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들 역시 지금까지의 숙박비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불만불평을 삼켜 버렸다.

곧 문이 닫히고 ‘영업 종료’를 알리는 팻말이 내걸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팻말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2시진 낮과 밤을 잊고 해와 달과 더불어 휴일 도 영업하던 매화객잔에 ‘영업 종료’의 팻말이 걸렸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몇몇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매화객잔에 접근했지만 그 내막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채 정중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다른 천무학관 대표들은 모두 식당으로 향했지만 모용휘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욕탕이었다. 아마 그동안 자신의 몸에 쌓였던 먼지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평소의 그도 남들이 보기에는 과연 저게 오랫동안 여행을 한 자가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깔끔하고 깨끗했다. 그가 즐겨 입는 백의에는 무슨 조화가 부려져 있는지 때도 끼지 않았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산해진미가 그들의 탁자 앞으로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술도 나왔다. 빙검과 염도는 오늘만큼은 술 마시는 것을 허용했다. 계속 해서 이어져 나오는 갖가지 미 주(美酒)를 본 염도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동안 굶주렸던 술 벌레가 그의 뱃속에서 요동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화산 도착을 알리는 성대한 축하연은 한밤이 깊어가도록 그칠 줄 모르고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비류연을 비롯한 대표단들은 오래간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따뜻한 욕조에서 묵은 때를 씻어낸 뒤 폭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 깊 어가고 달이 점점 기울어감에 따라 쌓였던 피로가 푹신한 이불 속으로 풀려나갔다.

다음날!

비류연은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계획을 들어보니 내일까지 출발할 예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마을 구경을 결정한 것이다. 일단 최우선적으로 나예린을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 이 미녀는 그동안 빚을 졌다고 생각해서인지 거절하지 않고 비류연의 제안을 쉽게 받아 들였다. 모든 남자 관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만한 일이었다. 나예린이 간다고 나서자 이 의외의 결정을 들은 독고령이 보호자 자격으로 가세했다. 이에 흥미를 느낀 은설란도 함께 했다. 이들 3명이 모이자 그 미모 때문에 주위가 황금빛 안개라도 깔린 듯 환해졌다.

그 외에 장홍과 모용휘, 남궁상, 윤준호가 이 행운의 나들이에 동참했다. 그리고 효룡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이후로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일 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듯하지만 현재 대화상대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적격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머리는 제대로 묶지 않는 산발이었고, 수염도 듬성듬성 정리 되지 않은 채 자라 있었다. 그래도 손질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 무척이나 추레한 모습이었다. 때문에 과거의 활달했던 그 모습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다만 이마에 새로 난 날카로운 뇌인(刃) 모양의 상처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항상 이진설이 붙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히 지극정성이라 할 만했다.

은설란의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걸 잊고 기분 좋게 놀기로 했다. 효룡에게도 기분 전환이 되리라. 낙뢰곡 이후 화산으로의 여정을 서두른 그들에게 이처럼 번화한 시가지는 오래간만이었던 것이다.

은설란과 나예린은 예상되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면사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빛나는 그 우아한 자태는 그런 얇은 천쪼가리 따위로 숨길 수 있 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독고령과 이진설의 미모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면사를 가리지 않은 이 둘만의 미모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때문에 길을 걸을 때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것은 그녀들에게 숙명적으로 따라다니는 업인 것 같았다.

많은 이들이 가던 길도 다시 되돌아서서 쫓아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선녀들을 힐끗힐끗 훔쳐보았지만, 그 중 한 명인 외눈의 선녀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서슬 퍼런 살기에 감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