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17화 – 중원표국과 중양표국의 조우

비뢰도 12권 17화 – 중원표국과 중양표국의 조우

중원표국과 중양표국의 조우

견원지간

나들이를 마치고 의외의 동행 한 명과 함께 대로 삼거리의 중앙에 위치한 매화객잔 앞으로 돌아와 보니 마을 한쪽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웠다.

마을 사람들 중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이미 그 소란의 중심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연 비류연 일행의 관심도 그쪽으로 쏠렸다.

그것은 하나의 행렬이었다. 건장한 갈색 말을 탄 무사 몇 명이 긴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여러 대의 짐수레와 그 수레를 보호하듯 감싸며 함께 걸 어오는 창검으로 무장한 무인들로 미루어 보아 어느 이름 높은 표국의 표행이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속과 신분을 알리기 위해 각 수레마다 깃발을 꽂아두고 있었다. 푸른 바탕 위에 연꽃과 검이 수놓아진 연화검기. 비류연과 그 일행은 그 깃발이 어디 표국의 상징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표행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며 말을 타고 오고 있는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은 중양표국의 국주 십팔검 장우양이 분명했다.

“좀 늦었군.”

지켜보던 비류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때 비류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비류연의 고개가 약간 삐뚜름하게 기울어졌다. 장우양과 나란히 말을 달 리는 삿갓인은 애초에 그들의 일행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만났다 헤어진 후 일월의 운행이 서른 번도 채 바뀌지 않은지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삿갓의 그림자 속에 흔들리는 은빛 수염으로 미루어 보아 노인이 분명했다. 그리고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 수염 같았다. 과거의 어디에선가 만난 듯한, 왠지 생면 부지가 아닌 듯한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누굴까?”

비류연이 한참 기억의 책장을 뒤지며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때 다시 한번 웅성거리는 소란스러움이 대로의 반대편에서 일기 시작했다. 그곳은 중양표국 행렬과 정반대되는 서쪽대로였다.

게다가 이번 웅성거림은 중양표국 때보다 훨씬 더 크고 요란스러웠다. 수십 대의 마차바퀴가 지면을 구르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은은하게 울렸다. 멀리 들려오 는 소리의 두께만으로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행렬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삼거리의 중심에서 장우양이 오른손을 치켜들자 중양표국의 표행이 걸음을 늦추었다. 장우양은 뒤따르는 아들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한 채 천천히 걸어가며 다가올 무언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은은했던 파도 소리가 점점 더 높고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소수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수의 사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군대의 행진 같은 일사 불란한 발걸음 소리는 힘이 넘쳐흘러 사뭇 위협적이었다.

반대편 서쪽 대로에서 인파의 웅성거림을 헤치고 나타난 이들의 행색은 중양표국과 판에 박은 듯 흡사한 모습이었다. 외견으로 미뤄보아 마찬가지로 어느 표국의 표행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들은 중양표국의 표행보다 더욱 화려하고 더욱 더 강대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무척 젊어 보였는데 화려한 금의(錦衣)로 몸을 감싸고, 허리에는 갖은 보석을 박아 넣고 금은으로 상감한 번쩍이는 보검을 찬 채 눈처럼 흰 백마를 타고 있었다.

“저 녀석, 돈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안달난 건가?”

비류연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금의청년을 바라보았다.

‘돈은 자랑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힘을 비축하듯 몰래 모으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비류연에게 저런 차림은 사치이자 쓰잘데기 없는 겉치레 였던 것이다. 검에 금은보석을 덕지덕지 박아놨다고 해서 검술이 강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그들의 검은 깃발에는 황금빛 황소라는 매우 특별한 상징을 수 놓여 있었다. 검은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황금빛 황소는 바로 중원제일표국인 중 원표국의 독문표식이었다.

수레를 지키고 있는 표사들은 하나같이 허리가 꼿꼿하고 몸집이 장대하며, 전신에서 기운이 넘쳐 보였다. 도무지 일반적인 표사라고 보기 힘든 기도였다.

“허허허, 저런 사람들을 고작 표사로 쓴다는 것은 인력 낭비에 금력 낭비일 텐데? 얼마나 귀중한 짐들이기에 저런 자들을 표사로 고용한단 말인가?”

회의노인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은 모두가 세상에 나가면 어느 표국에라도 가서 표두급은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 점점 더 비류연 일행이 묶고 있는 매화객잔을 향해 다가오던 양측 표행이 동시에 멈추었다.

길은 좁고 행렬은 컸다. 즉 두 곳의 행렬이 동시에 지나가기에는 길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었다. 북쪽대로가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은 모양 이었다.

“이제부터 재미있어 지겠군! “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비류연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제부터는 두 표국간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전운이 고조되는 것을 느낀 비류연은 일단 은빛 수염의 노인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일행을 남겨둔 채 백마를 탄 청년과 그를 보좌하는 듯한 도객 한 명이 함께 걸어 나왔다.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듯 그 도객은 청년의 반 마보 뒤에 자리 잡고 있었 다.

장우양이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쪽이 소국주니 네가 나가거라!”

상대가 소국주인데 국주인 자신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중원표국에 비해 세가 작다 해도 이제는 어엿한 중원 4대표국의 하나로 발돋움한 중양표국이었다. 무시당하거나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일종의 피해 의식도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국주 대신 국주 아들내미가 대신 나서자 중원표국의 후계자 소천표 종무윤의 얼굴이 무시당했다는 불쾌감으로 살짝 찡그려 졌으나 금세 다시 펴졌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종 표두.”

마상 위에서 장우강이 중원표국의 소국주 종무윤에게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같은 표국업에 종사하는 국주들의 아들딸들은 상대가 비록 국주의 아들이라 해 도 서로를 ‘소국주’나 ‘공자’ 혹은 ‘소협’이라 부르지 않고 예외 없이 ‘표두라 호칭한다. 지위가 실제 표두’라기 보다 일종의 상징적 의미이다.

“오랜만입니다, 장 표두 장 국주님께서도 안녕하신지요? 아버님의 지난 칠순 잔치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군요?”

이 소국주에게 장우강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장우강의 인사는 건성으로 받는 둥 마는 둥 금세 장우양과 대화를 텄다. 장우강따위는 안 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때는 큰 대접을 받았소, 감사하오.”

물어오는 말에 답하지 않을 수가 없어 마지못해 대답하고 말았다. 장우강의 얼굴이 석탄을 달궈놓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장우양이 그런 아들을 눈짓으로 제지 했다. 역시 자평하기에도 아직은 이 젊은 능구렁이에 비해 모자란 감이 있었다.

아들 장우강은 꼴사납게도 완전히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였다. 이대로는 아예 중원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장우양은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이 불꽃처럼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부족한 아들에게 좀 더 철저하고 엄격한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남몰래 다짐했다.

“그런데 저분은? ”

장우양이 종무윤 옆에 서 있는 훤칠한 키에 단단한 몸을 가지고, 무지막지한 기백을 뿜어내고 있는 무사를 가리켰다. 기세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대표두 이상의 인 물이었다. 지적을 받고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종무윤은 급히 소개를 한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이분은 저희 중원표국의 총표두이신 삭풍도(朔風刀) 송책, 송 표두이십니다.”

그제야 장우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중원표국 팔표의 한 분이신!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과찬이십니다.”

송책이 정중하게 답례했다. 하지만 왠지 상당히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현재 강호 제일의 표국으로 자타에게 공인을 받고 있는 중원표국에는 자국의 모든 표사들 (분타국주 포함) 위에 위치하는 여덟 명의 총표두가 있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공이 초일류로 인정받을 정도로 높고 강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웬만한 중소 표국의 국주보다도 업계 내에서는 훨씬 위상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표사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일단 이들이 표행에 나서면 실패하는 일이 결코 없다할 정도로(정말인지 아닌지는 차지로 치고)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요즘은 특 일급 표행이 아니면 아예 나서지도 않는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까지 나서다니 도대체 무슨 보물단지라도 운반하는 건가?’

장우양은 속이 편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다. 중원표국과는 표행 속도를 경쟁한 것이지 그 안에 든 물품의 가치로 승부한 것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업계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송책이 아까부터 시종일관 모든 대화를 종무윤에게 일임한 채 보좌관처럼 반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종무윤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데 대한 어떠한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 감복하고 진정으로 섬길 만큼 이 소국주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중원표국의 위광인가?’

그러나 종무윤은 중원팔표 중 한 명을 보좌관처럼 데리고 있어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당당했다. 아직 모자란 자신의 아들내미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가 없었다. 방금 전보다 교육에 대한 열의와 열망이 곧 바로 두 배로 급증했다.

잠시 교육열에 들끓고 있던 장우양은 중원표국의 표행을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허허, 사고가 있었나 봅니다, 그려?”

중원표국의 표행을 자세히 뜯어보니 선두 행렬에는 별 문제가 없는 듯 했지만 뒤로 갈수록 짐수레의 여기저기가 그려져 있고, 깃발 몇 기도 그 끝자락이 시꺼멓 게 타 있었다.

종무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하, 참 곤란했었지요. 갑자기 오는 도중에 큰 산불에 휘말려 버려서 말입니다. 하마터면 표물을 몽땅 날려버릴 뻔했지요. 이 정도 소소한 피해로 끝난 게 얼마 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난색을 표하며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왜? 우리 표물이 몽땅 소실되지 않아 분하시겠소이다.”

겉과는 다른 마음이었지만 그는 젊은이답지 않게 쉽게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이 젊은 나이에 겉과 속이 같지 않은 표리부동(表裏不同 신공을 대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공은 사업을 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필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장우양도 피차일반이었다.

“그래! 왜 그때 몽땅 소실되지 않았단 말인가? 정말 아쉽다, 아쉬워. 조금만 더 화재가 드셌더라도……..

하지만 내심과 다르게 나오는 말은 청산유수였다.

“저런, 저런. 그것 참 고행이었겠소. 정말 큰 봉변을 당할 뻔했구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알거지가 된 채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있었던 듯 싶소이다, 그려. 허허 허허!

표리부동 신공은 장우양도 만만치 않은 수련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공격은 역시 노련함을 보여주듯 장우양이 더 날카로웠다. 장우양의 능글 맞은 말에 종무윤의 한쪽 관자놀이가 가볍게 요동쳤다.

“그것보다 제가 소문으로 듣기로는 오는 도중에 녹림왕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 놀라운 소문이 사실인가요?”

장우양은 중원표국의 정보력에 잠시 깜짝 놀랐다. 그때라면 이들도 반대 방향에서 표행 중이라 정보를 얻기가 용이치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허허허, 그런 일이 있긴 있었소. 그 어떤 표·국·도 피해갈 수 없다는 녹림왕을 산에서 만나고도 표물의 아무런 피해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니 저희 표사들이 그 저 자랑스러울 뿐이오. 이제 곧 이 놀라운 업적과 검증받은 신용도를 모르는 강호인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오.”

그 ‘어떤 표국’에는 물론 중원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우양은 그 업적에 대한 공로를 은근히 자기네들 중양표국만의 힘으로 돌리며 은근히 자랑하 였다. 자신의 표국에 대해 자부심이 가득한 이 오만한 소국주에게 그것은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귀표국이야말로 그 무시무시한 녹림왕에게 걸리고도 무사했으니…, 그야말로 행운이 하늘에 닿았겠군요. 천지신명께 감사해야겠습니다.”

운이 아닌 실력이었으면 어림없으니 까불지 말라는 이야기를 무척 정중하게 돌려 말한 것이다.

“쯧쯧, 역시 종 표두는 아직 젊은 것 같소. 이 세상은 결과가 중요할 뿐이라오. 속 좁은 자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재잘재잘 종알종알 떠들어도 우리 중양표국이 녹림 왕과 만나고도 무사히 표물을 운반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오.”

“장 국주가 이겼군. 쯧쯧, 잘 드는 좋은 칼 놔두고, 왜 대화로 이야기를 하는 건지.

비류연의 관전평을 장홍이 받았다.

“과연, 늙은 생강이 맵긴 매운 법인 모양일세.”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장우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종무윤의 눈에는 비웃음으로 비춰졌다. 굴욕감에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살기가 솟구치는 것을 그는 애써 참아야만 했다.

‘늙은 너구리!

“여우같은 놈!”

시선과 시선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었다. 아직 싸움의 불길은 전혀 꺼지지 않고 활활 타고 있었다.

“이보게, 자네들은 이 늙은이를 언제까지 이 길거리에 세워 둘 셈인가?”

좀처럼 두 사람의 불길이 꺼지지 않자 장 국주의 옆에 말을 타고 있던 삿갓을 쓴 노인이 투덜투덜 불평을 터트렸다.

“이, 이런 죄송합니다. 노 선배님.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젊은 친구가 길을 막고 좀처럼 보내 주지 않는군요. 할 수 없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의 태도를 보니 전신에 진심 어린 공경과 존경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벌벌 떠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노인을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종무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 노인을 향했다. 저 늙은 너구리가 저렇게까지 존경을 표하는 노인의 정체가 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보게, 젊은 친구. 거기서 가자미눈 뜨는 거 그만두게나. 눈동자 돌아가겠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날이 갈수록 건방져지는구만.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모르고 말이 야. 안 그런가, 장 국주?”

노인이 은근슬쩍 장우양을 부른다.

“맞습니다, 노 선배님. 지당하신 고견이십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왠지 벌레 씹은 듯한 종무윤의 떫은 표정을 보며 장우양은 무척이나 통쾌한지 환하게 웃었다. 마음속으로 노인에 감사를 표 하며.

수모에 익숙지 않은 이 젊은이는 수치심에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한 표국의 국주인, 게다가 요즘은 경쟁 운운하며 중원표국의 명성까지 감히 넘보는 간이 부운 장우양이 저렇게까지 존경을 표하는 인물이니 보통 인물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멀뚱거리나? 빨리 길을 비키게! 우린 갈 길이 바쁜 사람일세.”

노인의 재촉에 종무윤은 벌컥 소리를 지를 뻔 하다가 얼른 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애써 골이 파이는 얼굴 가죽을 강제로 편 다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핫하…, 저희보다 표행 규모가 작은 장 국주께서 선심을 써서 비켜 주시면 훨씬 더 능률적이고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 했던가? 장우양의 귀에는 그 말이 중원표국과는 규모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 중양표국이 당연히 주제를 알고 물러나야 되는 게 아니냐는 말로 들렸다.

“허허허, 정말 요즘 젊은 것들이란 왜 이리도 예의를 모르는 건지……. 쯧쯧쯧, 중원표국 아이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예의를 잃어버렸느냐! 니 할애비인 천표 종무 극도 내 앞에서 그렇게까지 버르장머리가 없지는 않았다. 천표가 존장을 대할 때 그렇게 대하도록 가르치더냐?”

“저…, 저희 증조부님을 아십니까?”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쩌억 벌리며 종무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증조부였냐? 그 녀석이 지 애비 따라 표행 다닐 때부터 좀 알고 지냈지. 우리 산에도 자주 왔었거든.”

이제는 너무 놀라 더 이상 경악할 힘도 없었다.

“노…, 노 선배님께서는……?”

“참 궁금증이 많은 청년이로군. 자네한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네. 나중에 자네 증조부에게 물어보게나.”

“저…, 그분께서는 이미 십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아참! 그랬었지. 깜빡 잊었었군, 그래. 그럼 계속해서 까불다가 저 세상 가서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종무윤에게 가까이 다가간 노인이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했다.

“사람들은 노부를, …라고 부른다네. 자넨 아마 잘…….”

모를걸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전에 반응이 튀어나왔다.

“히에에엑!”

노인의 짧은 속삭임을 들은 종무윤은 혼(魂)의 뿌리가 뽑혀 나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기겁했다. 그대로 기절한 채 뒤로 쓰러져 낙마하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 었다. 어지간히도 놀랐던 모양이다.

“진짜 누구지?”

비류연은 여전히 긴가민가한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역시, 분명히, 확실하게, 저 할아버지! 어디선가 한번 만나 본 사람 같은데…….”

비류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듯 했다.

“전생에서 만난 건 분명 아닌데 말이야…, 그렇다고 내세도 아니고…….”

분명 기시감(旣視感)은 아니었다. 확실히 현세의 인연이었다.

“무슨 일 있는가?”

비류연과 마찬가지로 두 표국간의 신경전을 유심히 바라보던 회의노인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삿갓노인을 어쩐지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확실히…, 자네가 그런 말이 하니 노부도 저 사람을 어디선가 만나본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군.”

그건 노인의 진심이었다. 진짜 예전에 저 삿갓노인을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류연과 노인의 의혹을 탐구하는 사색은 또 다른 소란 때문에 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