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19화 – 윤준호 대 매화가면(梅花假面)

비뢰도 12권 19화 – 윤준호 대 매화가면(梅花假面)

윤준호 대 매화가면(梅花假面)

“저런 화려함의 극의에 이른 검기를 견식하기란 정말 오래간만이군.”

빙검이 감탄했다.

“확실히!”

염도가 짧게 대꾸했다.

비뢰쌍마와의 싸움 이후 더욱더 무공에 대한 집념이 강렬해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현재의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노인장이로군요. 복면으로 얼굴까지 감추고 구애하다니 말이에요.”

비류연은 잠자코 지켜보다가 어이없다는 투로 한 마디 했다.

“확실히 자네 말대로 일지도 모르겠구만. 저 사람은 옛날부터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회의노인이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네!’”

잠시 노인을 일별한 비류연은 ‘으음…….’ 소리를 내며 다시 두 사람의 비무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쾌검으로 승부를 내려 했지만 상대는 가볍게 받아 넘겼다. 자신의 빠르기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고 느낀 윤준호는 변식이 많은 초식으로 다시 복면 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물처럼 촘촘한 검막은 그의 변초가 파고 들어올 틈을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 그 철저한 방어에 윤준호는 절망하며 변초에 의한 공격을 포기했다. 그 다음으로 힘에 중점을 둔 초식으로 상대를 공략하려 했지만 그의 내공으로는 턱없는 일이었다.

벌써 속절없이 칠초나 지나갔다. 매 초식마다 복면인은 아주 손쉽게 윤준호의 검법을 받아 넘겼다. 윤준호의 검초를 흘려내는 복면인의 검기는 놀랄 정도로 미려 했다.

윤준호가 아무리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 들어와도 태산이 버티고 선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저 사람은 눈을 감고도 윤준호의 검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들었다. 윤준호가 매 초식마다 이를 악물고 펼쳐내고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차는 명백했다.

“이대로는 불리하겠죠?”

“그렇겠지.”

비류연의 평에 지팡이로 땅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노인이 응대했다.

“저 녀석 답지 않게 공격이 자질구레하네요. 정직과 소심을 겸비한 녀석이 변초 변식으로 승기를 잡으려 하다니…, 쯧쯧!

윤준호도 꽤나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듯 했지만, 복면인의 촘촘한 검세를 도저히 뚫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공격이 너무 잡다했다. “이대로 지지 않겠나?”

이번에는 노인 쪽이 물었다.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아니에요. 아직 전심전력이 아니거든요.”

“호오? 전력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죠.”

“하지만 왜? 설마 얕보는 건가? 상대를 얕볼 청년으로는 보이질 않는데…….”

노인의 말대로 상대를 얕보는 사람은 저렇게 이를 악물고 덤벼들지는 않는다. 그 말에 비류연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상대보다도 자신을 자주 얕보죠. 자신을 평가절하 하는데 일가견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왜? 저 복면인은 전력을 보존하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 물론 전력을 쓴다 해도 진짜 이길 수는 없겠지만 이 승부에 한해서는 이길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건가?”

그러자 비류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전력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죠.”

“어이, 이봐! 소심쟁이 준호! 이기고 싶으면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봐!

지금까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비류연이 큰 소리로 외치며 충고했다.

‘그때의 감각!’

바로 윤준호 자신이 이송을 추적하던 그 두렵고 무서운 십이혈마대의 대원들과 맞서 싸워 이긴 바로 그날, 그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때의 감각, 그때의 감각, 그때의 감각…….”

그날 그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도 망각한 채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윤준호는 생명의 궁지에 몰렸던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내기 위해 전력으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감각이 도대체 어떤 거였지?’

돌이켜 생각하고, 다시 떠올려 보려고 발버둥을 치듯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리 기억의 짤들을 힘껏 쥐어 짜 보아도 한 방울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그 당시의 기억이 글자 하나 안 써진 새하얀 백지나 다름없었다.

“기…, 기억이 안 나요. 어떻게 하죠?”

볼멘 목소리로 울먹울먹 거리면서 윤준호는 당황해 하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비류연 쪽을 돌아보았다. 비류연은 순간 왼손으로 얼굴을 덮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네 녀석 나쁜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깐 자신을 믿어! 용기를 가지라고. 그만한 용기가 없다면 그 청강검은 뭐 하러 지니고 있 는 건가? 당장에 두 동강 내버리고 엿이나 바꿔 먹지!”

비류연의 힐책은 윤준호의 우유부단한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을 만큼 가차 없었다.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이 기억한다고?’

계속해서 한눈 팔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채, 채, 챙!

아직도 적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윤준호는 일단 비류연을 믿는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은 상당히 무모한 감이 있었지만 그 용기만은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한 것이었다. 비록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의 기억에 비류연이 거짓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문제라면 항상 자신이 본 그대로의 진실이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바깥으로 내뱉어 버린 다는 점뿐이었다.

“뭐냐? 너의 본신 실력이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단 말이냐?’

윤준호를 어린애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루며 복면인이 호통쳤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화산의 검이라는 게 이 정도까지 형편없는 것이었더냐?”

아무리 소심하고 여린 마음의 윤준호였지만 사문을 모욕하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불민한 것은 저 개인의 책임입니다. 화산의 검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화산의 검은 무한합니다.”

윤준호는 다시 시선을 복면인에게로 고정시키고, 장검을 비틀어 버릴 듯 힘차게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직접 증명해 보아라! 그렇지 못하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복면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광(光)이 폭사되어 나와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순수하고 농밀한 살기!

순간 윤준호는 확신했다. 그것은 절대적인 예감 같은 것이었다.

‘죽는다! ‘

갑자기 눈앞이 암흑으로 뒤덮인 듯 캄캄해졌다. 머리 속이 멍해지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것이라 어떠한 발버둥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자포자기할 것인가? 그러자 그 순간 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단단히 묻혀있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눈을 떴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순수한 생명의 몸부 림이었다.

“하압!”

그의 입에서 낭랑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청강검 끝에서 화려한 붉은 검기가 폭죽처럼 터져 나오더니 수백 송이의 붉은 매화가 화려한 꽃망울 을 터트리며 만개했다. 이윽고 은은한 매화 향기가 장내에 가득히 퍼졌다.

“저…, 저것은 검향지경(劍之境)!”

풍매검 양유중은 화산파 장문인답게 지금 윤준호가 짧은 환상처럼 보여준 경지가 저 나이에 비해 얼마나 놀랄 만한 경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장로들도 모두들 경 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윤준호의 붉은 검기에 압도되었는지 복면인은 어느새 장검을 땅에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복면인의 빛바랜 자색무복은 걸레처럼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져 있어

무척이나 볼썽사나웠다. 방금 전 윤준호의 검이 해낸 쾌거였다. 하지만 그런 무지막지한 검기를 정면에서 받아내고도 피부에 상처 하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복면인의 검경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음을 웅변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윤준호는 놀란 듯이 복면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이 출초한 회심의 일격을 막아낸 수법은 윤준호에게 있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초식이었기 때문이다.

‘매염토망(梅艶吐網)!

이십사수 매화 검법 중 최강의 방어 초식으로 그분께서 자신에게 직접 몇 십번이나 손수 지도해 주셨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초식이었던 것이다. 이 독창적인 수 풀 이는 틀림없었다.

잠시 얼이 빠져있던 윤준호는 황급히 검을 회수하고 복면인 앞에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손을 앞에 짚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고두례(叩頭禮)를 취한 것이다. 그리 고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상대가 말릴 틈도 없이 외쳤다.

“화산파 불초제자 윤준호! 삼가 태사부님을 배알(拜謁)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아롱져 지면에 떨어졌다.

화산파 진영이 술렁대며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역시!’라는 침통성을 터트리며 장문인은 이마를 짚었고, 장로들은 윤준호의 부주의함을 책망했다. 여전히 화산파 수행제자들은 물론이고, 천무학관 대표단들을 비롯해 중원표국과 중양표국, 그리고 그 외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특히 윤준호와 사형제지간이기도 한 이경영은 이제 자신의 턱이 빠지든 말든 상관하지 못할 정도로 경악에 휩싸여 있었다.

“어…, 어떻게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뒤이어 붙을 ‘놀라운 무공을 지니게 되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어! ‘란 말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끝까지 이어져 나오지 못했다. 직접 뚫린 두 눈으로 똑똑히 처음부 터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여전히 믿겨지지 않았다. 부릅떠진 그의 시선이 윤준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는 게 아마 더 정 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울보 얼간이가…….”

화산에서 울보에 바보라고 그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전적이 있는 이경영이었다. 윤준호의 왕따 시키기에 가장 앞장섰던 게 바로 자신이었다.

“너 따위는 화산의 수치일 뿐이야!’라고 외치며 얼마나 못살게 굴었던가.

그런데 그는 지금 번듯한 화산지회 대표단이 되어 금의환향했고, 자신은 아직도 천무학관 입관에 벌써 3번째 낙방한 사수생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자신의 신세가 무척이나 처량하고 한스럽게 느껴졌다.

입장이 한순간에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백도 무림의 대표로서 화산지회 대표단에 뽑힌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형제가 있을 리가 없었다. 화산의 수치인 울보에 바보얼간이에서 윤준호는 한순간에 선망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두 다리의 맥이 탁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의 입가가 실룩실룩 요동쳤다.

“핫, 하…, 핫하…….”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그의 멍하게 벌어진 이 사이로 흘러나왔다. 과거의 놀림 받던 울보는 이제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세계에 도달해 있었다. 더 이 상 그는 예전의 울보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그를 놀리거나 괴롭힐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니, 이제는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수많은 몹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만큼 화산지회 대표라는 직함이 지닌 의미는 무거웠다. 화산파의 이름 없는 제자 정도는 감히 올려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윤준호는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화산지회 대표로서 부족함이 없음을 그 무위로서 입증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제 화산파 제자 누구도 그 의 대표 발탁에 대해 일언반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이경영은 갑자기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뼈 속 깊이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신의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현기증이 느껴졌다. 허탈감과 무력 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끝없는 막막함만이 그의 심신을 집어삼킬 뿐이었다.

이렇게 한없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소유경은 다른 의미에서 이 소심한 작은 사형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다른 사형제들이, 아니 사형들뿐만 아니라 뒤늦게 들어온 사제들에게까지 놀림의 대상이 되었 던 심약한 윤준호였다. 다른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못살게 굴고, 괴롭히기를 즐겨할 때 그녀만은 윤준호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따뜻하 게 대해주어 용기를 북돋우는 말을 계속해 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그가 천무학관에 합격했을 때(거의 태사부의 어거지로)도 무척 놀랐지만 지금의 경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외롭고 힘없는 작은 새 같던 윤준 호가 한순간에 커다란 날개로 창공을 가르는 한 마리 매처럼 늠름하게 느껴졌다.

기쁨과 만감이 마음 속에서 교차했다.

‘축하해요, 윤사형! ‘

그녀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에게 축하를 보냈다. 다른 사형제들의 얼빠진 듯한 얼굴과 경악성을 듣고 있는 것은 그녀로서도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이번에 꼭 합격해야지. 그러면 사형과 함께 다닐 수 있을 거야!’

소녀는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낭랑 18세의 소녀다운 생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욕이 샘솟아 나왔다.

“으음…, 끄응…….”

복면인은 윤준호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무척이나 난처해진 모양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당황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복면인의 주름진 눈가 에서 진주 같은 빛이 햇빛에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두 눈에는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거라. 얼굴이 보이지 않는구나.”

윤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쉴 새 없이 펑펑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많이 늘었구나.”

“가…, 감사합니다. 태사부님! “

윤준호가 또다시 감격에 겨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매화가면의 당황은 눈에 확 드러날 정도였다.

“무…, 무슨 소리! 난 그저 단순한 의문의 복면인 매화가면일 뿐일세. 자네에게 태사부라 불릴 아무런 이유도 없네. 자넨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걸세. 내 말 뜻 알겠나?”

“네! 태사부님!”

윤준호가 힘차게 대답했다.

“전혀 못 알아듣고 있잖나!”

복면인이 답답한지 연신 가슴을 두들겼다. 아무래도 여기 더 있어봤자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제가 뭔가 실수 했나요, 태사부님?”

꼬박꼬박 착실히 말끝마다 ‘태사부님’을 붙이는 윤준호였다.

“어허, 아니래도! 알만한 사람이…, 그리고 무릎 아플 텐데 이제 그만 일어나게나.”

윤준호에게 가까이 다가간 복면인이 오른손으로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두드리며 자상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나머지 왼손이 소매치기가 울고 갈 정도로 빠르게 윤준호의 품속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인 윤준호조차 잠시 후에 자신의 품안에서 이물감을 느꼈으니 그 속도가 얼마나 쾌속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이건…….”

윤준호가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복면인이 그것을 제지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윤준호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화산파 제자로서, 아니 검도에 몸담고 있는 검객으로서 광세기연(曠世奇緣)이라 할 만한 인연이었다.

“그…, 그렇게 귀한 것을……. 전 받을 수 없습니다! ”

그러나 복면인은 사양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말게. 그럼 계속 정진하게나. 잘 있게!”

스스로를 매화가면이라 칭한 이 수줍음 많은 노인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다. 정말 신출귀몰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매화가면의 모습이 완 전히 자취를 감춘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참 동안을 그대로 머물렀다. 윤준호는 그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깊숙이 허 리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짓궂은 친구로구먼. 장 국주, 난 오랜만에 옛 친구나 만나 술잔이나 나누어야겠네. 저 친구들과의 인연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구만. 자네의 표국이 만대까지 번 성하길 빌겠네. 잘 있게나.”

작별인사도 채 듣지 않은 채 삿갓노인은 몸을 날려 복면인 매화가면의 뒤를 쫓았다. 그의 신형도 곧 황혼 속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앗! 가버렸다.”

비류연이 외쳤다. 이로서 그 삿갓인의 정체를 확인해 볼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가 버렸군.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될 걸세. 아마도! ”

잿빛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의 말은 마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다들 그것이 한 치의 차질도 없는 사실이 될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윤준호는 여전히 복면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는 어떤 방법을 써서도 태사부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 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그림자가 땅거미처럼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 분은. 혹시……?”

빙검이 먼저 운을 때려 했지만 양유중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 그럼 관 노사! 급한 용무가 있어 본인과 화산파 제자들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소이다. 관 노사와 술잔을 기울이며 검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자 했으나 오늘은 인연이 되지 않은 듯 하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겠소이다.”

양유중의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만큼 그의 실망이 컸던 것이리라. 하지만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가 빙검과 염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지금의 양유중에게 는 없었다. 그와 장로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물론 그들의 이런 좌불안석하는 모습이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었지만, 마음 이 조급하다보니 미처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

“그…, 그러시지요.”

수상한 언동과 어색한 침묵이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다.

“앞으로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전 화산파 제자들과 함께 기원하고 있겠소이다. 그럼!’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양유중은 돌아섰다. 그리고는 뒤가 마려운 사람처럼 서둘러 장내를 빠져나갔다. 마치 포도아문(捕盜衙門:포졸, 포두)에게 쫓기는 범죄자처 럼 도망치듯이!

아마 빙검 염도와 마주 앉아 그 매화 복면인에 대한 화제를 떠올리기가 무척 두렵고 괴로웠던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소란 속에서 중원표국과 중양표국의 대립은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