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암들의 잔치!
· 죽음의 비사진(飛蛇陣) 발동
“혈궁이 죽었습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혈검이 보고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적혈은 침음성을 흘렸다. 대가 없는 승리는 없다고 했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의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지 만 그들은 아직 그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한 실정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희생은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설마 조장급까지 희생될 줄은 정녕 몰랐다.
“지금까지 저 정도 피해만으로 버티다니 정말 놀랍군. 우리는 벌써 혈궁을 잃었는데, 저들은 아직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으니…….”
적혈은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서서히 뒤로 돌아섰다. 부끄럽지만 아무래도 그분들에게 조력을 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아무래도 모(某) 봉공께서 나서주셔야겠습니다.”
그러자 나직하면서도 왠지 심드렁한 느낌의 음성이 곧바로 들려왔다.
“알겠네!”
뒤편에서 조용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세 명의 노인 중 녹색 옷을 입은 노인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몸에 얼굴은 염소처럼 강퍅했고, 가늘고 길게 찢어진 두 눈은 독사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 소름끼치는 사안(眼)이 발산하는 요사한 안광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전신에 당연히 있어야 정상일 비늘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얇고 길게 찢어진 창백한 회색빛 입술에서는 금방이라도 두 가닥으로 갈라진 새빨간 혀가 낼름거릴 듯한 오싹한 분위기였다.
이 녹의노인이 바로 이번 작전에 투입된 3명의 봉공 중 한 명인 비사신군(飛蛇神君) 모사령이었다.
“닭잡는데 소 잡는 칼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흘흘흘, 괜찮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게. 다 그 분을 위한 일이 아닌가. 이 정도는 소일거리도 안 되는 일일세. 흐흐흐, 사실 언제 이 늙은이를 불러줄지 첫날밤 새 색시처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네. 오랫동안 방치해 놓기만 한 녹슨 뼈다귀에 기름칠 한 번 못해보고 싱겁게 끝날까 봐 노부가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아마 자네 는 모를 걸세. 맡겨 주게나.”
흉물스런 괴소를 흘리며 호언장담하는 모사령의 오른손에는 뱀의 형태를 하고 있는 요사스런 사장(杖)이 하나 들려있었다. 붉은 보석이 뱀의 눈 부위에 박혀 있 는 독액처럼 거무튀튀한 색으로 주조된 이것이 바로 그의 독문병기인 만사혈장(萬蛇血杖)이었다.
모사령이 만사혈장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수천 마리의 뱀들이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그 뱀들 모두가 다 황소도 단숨에 잠재우는 강력한 맹독을 지닌 독사 들뿐이었다.
“자, 내 귀염둥이들아. 잔치 시간이다! “
삐이이익!
쉬이이익!
비릿한 미소를 얄팍한 입가에 매단 채 사납게 만사혈장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대기 중에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모사령 주위의 대지가 검게 요동치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물결 속에서 ‘쉬쉬’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날카롭고 높게 울려 퍼졌다. 수천 마 리 뱀들이 동시에 합창하는 듯한 모골이 송연한 소리였다.
그 꿈틀거림과 울음소리는 해변의 잔물결처럼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협곡 반대쪽에서도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쉬쉬’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혈검은 무의식중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언제 보아도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담력과 배짱 하나만은 그 누구와 견주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수천 마리 뱀들의 향연을 보는 순간 전신의 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파바바바박!
수백 마리의 뱀들이 검은 물결에서 빠져나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협곡 아래로 몸을 날렸다. 협곡의 하늘은 검은 뱀들의 그림자로 순식간에 가득 메워졌다. 비사 신군 모사령의 절대사진 중 하나인 비사진(飛蛇陣)이 발동된 것이다.
이때 비류연은 막 봉무등천(鳳舞騰天)의 수법으로 철쇄 위를 줄타기 곡예사처럼 올라타고 비상하는 봉황처럼 깎아지른 벼랑 위를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예린의 비명이 울려 퍼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철쇄봉혼진(鐵鎖封魂陣)의 한 쪽에 갇힌 채 변덕스런 악천후 날씨(?)를 향해 쉴새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용천명은 갑자기 들려온 한 여인의 외침에 잠시 몸을 움찔했다.
천상의 악기들이 한데 모여 합주를 하는 듯한 저 미성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 대상을 향한 무한한 부러움과 질투심이 샘솟아 올랐다.
‘저 맑게 울리는 투명한 애달픈 목소리의 주인을 위해서라면 숭산(崇山)에 있는 선사님들 중 얼마나 많은 고승들이 파계할까?’라는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을 정 도의 불온한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아니 쟁취할 티끌만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승적(籍)을 버리고 파계(破戒)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리라.
소림사(少林寺)에서 수행에 용맹정진하고 계신 그분들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최고의 행운과 다시없는 불행을 동시에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모순되는 말이지만, 하늘도 시샘할 정도의 아름다운 그녀를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시없는 불행이었다. 하지만 보지 않았기에 정념의 유혹에 빠 져 번뇌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고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으니 그들은 행복하다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녀의 의도하지 않은 유혹에 넘어갔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용천명 자신 또한 나예린을 처음 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치솟는 욕정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심법인 금강부동심법(金剛不動心法)을 전력으로 운용 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암송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겨우 욕정으로 가득 드리워진 미망(迷妄)의 유 혹에서 빠져나와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의 수련이 조금만 얕았어도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의 업적을 이루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땐 오랫동안 사문에 머물러 있었던 터라 이성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었지.’
바로 그때였다.
“끼아아아악!”
용천명이 잠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그 순간 조금 전 그를 과거로 인도했던 비명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지닌 신경질적인 비명이 공기를 갈기갈기 찢으며 갈라진 협곡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듣는 이의 귀청이 터져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름 끼치는 그런 비명이었다.
용천명은 잠시 귀를 막았다 떼며 질린 눈빛으로 양쪽 협곡의 사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이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너지지는 않겠군.”
콰과과과과쾅!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는 비차륜이 사나운 이빨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흉폭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을 가르는 하얀 칼날의 난폭한 회전에 휘말린다면 인간의 물렁한 몸이 마치 넝마조각처럼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이에 대한 비류연의 대응은 줄타기 곡예사처럼 절묘했다. 오른발로 살짝 쇠사슬을 박찬 그는 그 탄력을 이용해 새털처럼 가볍게 비차륜의 잔인한 이빨을 뛰어넘었 다.
저 밑에서 나예린의 걱정 어린 외침이 들려 왔다. 비류연의 귀가 쫑긋해졌다. 갑자기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손 흔들며 씨익 웃어주고 싶었지만, 위에 버티고 있는 짜증나게 성질 급한 놈들이 그럴 짬을 주지 않았다.
십수 대의 화살이 파공성을 일으키며 그를 표적 삼아 날아 왔다. 비류연은 그들의 연습용 과녁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다시 한 번 더 오른발을 박찼다. 그리 고 그의 양 손이 부드럽게 휘둘러졌다.
여섯 대의 화살이 비류연의 손길에 파리채 맞은 파리처럼 후두둑 떨구어졌고, 나머지는 모두 그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혈궁조 조원들은 ‘뭐 저딴 놈이 다 있어!’하고 치를 떨었다. 비류연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때 하늘이 한 순간 검게 변하며 그것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비사신군 모사령의 비사진이 발동된 것이었다.
“이건 또 뭐야?’
이제는 손도 쓰기 귀찮은지 비류연은 봉황무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몸을 중심으로 세찬 기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바람의 방어막은 독사 떼의 접근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에 토막 난 뱀들이 후두둑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게 뭐지?”
철쇄봉혼진을 담당하고 있던 제 10대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으로 추정되는 희끗한 그림자 하나가 갈라진 협곡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불쑥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리 같은 두 발 달린 짐승이지만 조류와 인간은 종(種)이 다른 법이거늘, 비류연이 보여준 신법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안녕!”
비류연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타고 올라온 철쇄를 담당하던 일천십일호는 얼떨결에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말았다. 그 순간, 비류연의 왼손으로부터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빛이었다.
“이…, 이놈이! 웬 놈이냐? 모두 진(陣)을 펼쳐라!
동료의 어이없는 죽음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 10대 대원 열 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혈쇄조(십이혈마대 제 10대의 별칭)의 독문병기인 철쇄를 꼬나들며 그를 사방에서 에워싸듯 포위했다.
이 상황에서 대화 따위는 무의미했다.
‘누구냐?’, ‘웬 놈이냐?’, ‘나이와 소속은?’, ‘부모님은 모두 강녕하시고?’, ‘혹 예쁜 누이나 여동생이 있나? 소개시켜 준다면 어쩌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등등으로 시작되는 신원 조회 따위는 생사의 경계에 선 그들에게는 길에 널린 개똥만큼도 쓸모가 없었다.
십로철쇄진(路鐵鎖陣)이 발동되자 건태리진(乾兌離震), 손감간곤(巽坎艮坤)의 팔괘(八卦) 방향과 상하를 합친 열 방향에서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촤라라 락’묵빛 쇠사슬이 날아왔다. 십방에서 단숨에 그를 속박한 다음 묵빛 쇠사슬로 으스러뜨려 죽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 녀석들은 날 멀뚱히 서 있는 통나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가소로운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비류연은 자신이 통나무처럼 뻣뻣이 서 있는 허수아비나 목각인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챠라라라랑!
열 가닥 쇠사슬이 독 오른 검은 뱀처럼 거친 쇳소리를 내며 비류연의 몸을 사형수 포박하듯 칭칭 휘감았다.
“헉!”
순간 부릅떠진 얼굴이 된 열 명의 입에서 경악성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없었다.
분명히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하여 인정사정없는 열 가닥의 철쇄가 내리는 처벌에 전신의 뼈가 산산조각 나는 고통을 겪고 있어야만 할 그 대상이 없었다. 열 가닥의 철쇄가 난마(亂痲)처럼 뒤엉켜 있는 쇠사슬 뭉치만이 가라앉는 황토색 먼지 속에 횅댕그렁하게 떠 있을 뿐이었다. 열 명의 시선이 동시에 허공을 향했 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고 느꼈다.
새하얀 구름을 황금빛으로 태우는 태양광에 가려져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무의식은 확실히 그것을 보았다. 태양을 등진 사신의 미소를!
파바바바밧!
슈슈슈슈슉!
그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으로부터 열 개의 광창(光槍)이 예리한 가시처럼 번뜩이는 섬광을 토해내며 튀어나왔다. 신의 권능처럼 빛나는 빛의 창들이 창졸지 간에 열 개의 심장을 꿰뚫었다.
열 명의 혈쇄조원들은 자신들이 바라본 마지막 태양을 직시하며 빛을 갈구하는 해바라기처럼, 하늘을 건너 태양에 다다르길 갈망하는 석상처럼 굳어진 채 그대로 두 번 다시 숨을 쉬지 못했다.
“네…, 네 이놈!”
자신의 부하 열 명이 숨 한 번 채 내쉬기도 전에 몽땅 비명횡사하자 십이혈마대 제 10대 조장 혈쇄는 이를 뿌드득 갈며 증오 어린 시선으로 비류연을 째려보았다. 태양에서 하강하듯 사뿐히 내려선 비류연의 시선이 씨근덕거리는 혈쇄의 이글거리는 독기서린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구구한 말은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였다.
“끼아아아악!”
아직 운무가 채 가시지도 않은 갈라진 협곡의 아래로부터 집채만한 바위도 단숨에 한 줌 가루로 만들 법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좁은 협곡 사이에서 반향 된 탓인 지 까마득히 위에서 듣는 그 소리는 더욱 괴상망측했다.
비류연의 눈 꼬리가 순간 꿈틀거렸다.
“시끄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