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에 오르다
– 세 개의 관문
그날 밤, 매화객잔의 한 객실.
“에에에엑!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의 발단이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 지금 염도와 빙검을 경악하게 만들 지경까지 와 있었다. 방금 소리 지른 이는 염도였다. 그것은 한 노인의 말도 안 되는 제안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제안을 중개한 사람이 바로 비류연이라는 점이었다.
염도과 빙검, 두 사람이 경악으로 혀를 빼물고 있는데도 비류연은 태연하기만 했다.
“안될 것도 없잖아요?”
두 사람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 소리!
“절대로 안 됩니다!’
염도와 빙검은 웬일로 마음이 맞았는지 동시에 외쳤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회의노인을 미친 늙은이라며 함부로 삿대질 하지 못하는 것은 노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류연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였다.
회의노인은 이채를 띈 시선으로 처음에는 염도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빙검에게로 옮겨 두 사람을 해체하듯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 시선의 칼날에 전신이 관 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노인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허허허, 여기서 재미있는 아이들을 만나는군. 이것도 하늘이 인도해 준 또 하나의 인연이란 말인가?”
노인은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주름진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소리 내어 웃었다.
“…..?”
노인의 느닷없는 홍소(笑)는 염도와 빙검에게 한보따리의 수수께끼만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나이를 떠나 충분히 무례로 보여질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두 사람 중 그 어느 누구도 노인의 웃음을 제지하지 못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막연한 예감일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이 두 사람은 노인 앞에서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 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그 노인이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는 제안 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다.
“혹시 황금덩어리라도 받은 겁니까?”
역사를 생각해 볼 때 빙검보다 훨씬 비류연과의 생활이 오래된 염도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순간 비류연은 흠칫 한 듯 했지만 금세 태연하게 대꾸했다.
“거기에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맞는 말이었다. 사부가 제자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 마음이 내킬 때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염도의 예리한 지적대로 이미 배후에는 노인과의 금전적 거래가 있었던 듯 하다. 허위의 주렴 뒤에 숨겨진 그 진실을 폭로하지 못하는 것이 염도는 못내 아 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게다가 장난이 아닙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빙검의 말에 노인이 대꾸했다.
“걱정 말게, 아무도 신경 안 쓸 걸세.”
회의노인의 태도는 비류연과 인척관계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뻔뻔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무사태평 낙관론을 듣고 있자니 그런 의혹이 더욱더 짙어졌 다.
쇠못으로 참을 인(忍)’자를 심장 속에 박박 새기며 빙검이 외쳤다.
“신경 쓸 겁니다! ”
염도와 빙검, 이 안하무인의 두 사람이 잿빛 머리카락을 지닌 정체불명의 노인에게 경어를 써주고 있는 것은 이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미지의 느낌 때문이었다. 왠 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일견하기에 볼품없는 저 왜소한 노인을 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것은 그 느낌이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척 친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왠지 막연하게 돌아가신 사부님의 향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자연 말투가 공손해 질 수 밖에 없었다.(여기서 사부님은 당연히 현재 사부인 비류연이 아니 다.)
이 두 사람은 아무리 노인이 대하기 어려워도 그 제안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의 굳건한 방어는 결코 함락할 수 없는 난
공불락(難攻不落)의 철벽을 두른 강철의 성과도 같았다.
그러자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노인이 입을 열어 한 마디 했다. 그것은 염도와 빙검을 지금까지 느꼈던 황당함과는 그 본질부터 다른 진정한 의미의 경악과 혼란 에 빠트리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자네 두 사람! 태극의 인재는 찾았나?
관도들은 왜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저 노인이 자신들과 화산행에 동행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염도와 빙검의 서슬 시퍼런 눈빛은 그 어떠한 반항도, 질문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화산지회 진행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이라는 말로 모든 설명을 대 신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 알아서 기라는 의미를 지닌,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패기가 촘촘한 그물처럼 삼엄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목숨이 여벌로 몇 개 상비되어 있지 않는 이상 질문내지는 이의를 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노인의 천무봉 동행은 결정되었다. 천무 봉은 원래 화산에서 가장 높은 다섯 개의 봉우리 중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원래 이름은 기러기도 날다 떨어진다는 의미를 지닌 낙안봉(落雁峯)이었다. 다섯 봉우 리 중 가장 산세가 험하고 협곡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규약지회가 이곳에서 열리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 이곳은 무림인들로부터 천무봉이라 불리기 시작해 지금은 아무도 낙안봉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일 화산 천무봉(天武峯)에 오르겠다.”
빙검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많은 의문과 의혹을 앙금으로 남긴 채 마지막 회의는 해산되었다.
날이 밝았다.
천무학관 대표단의 모두는 잿빛 어둠 속에서 천천히 밝아오는 여명(黎明)을 바라보며 각오를 새롭게 하며 각자 자신들의 병기를 정성스런 손길로 신중하게 손질 했다.
이 대부분이 각자의 사문이나 가문에서, 혹은 존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애병(愛兵)들로 그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그 손에 명예와 영광을 안겨줄 유일한 친구이자 분신을 손질하는 그들의 마음에 어떤 각오와 맹세가 깃들어 있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그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다. 생각보다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목적지인 화산 천무봉이 그들을 오만하 게 굽어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그들은 그곳을 오른다. 새로운 세계와 놀라운 경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져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
“음냐, 음냐, 음냐…….”
그러나 이 엄숙한 각오의 시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이불 속에 몸을 만 채 침상에 뒹굴고 있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이 종교의 식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에 흥을 깨고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였다. 바로 비류연이었다.
혹자는 불쾌감이 자르르 흐르는 눈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혹자는 저 태평성대한 무신경함에 경의와 부러움을 표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조찬 시간이 다되어서였다. 객잔은 천무학관 대표단이 통째로 전세 냈기 때문에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대표단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게다가 그들은 너무나 유명인이라 너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평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서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아침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다 먹었느냐?”
빙검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예!
모두 힘차게 대답했다.
“그럼 가자!”
대표단 일행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얼굴에 각오가 단단했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그쪽 길이 아니다!”
빙검이 관도들의 발걸음을 제지했다.
“아니…, 야?”
말끝을 올리며 뒤를 돌아본 이는 아직도 자신이 내딛던 발걸음을 완전히 내딛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염도였다. 빙검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엣? 그럼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엉거주춤한 상태로 씨근덕거리고 있는 염도를 대신해 남궁상이 재빨리 물었다. 자칫 잘못하여 염도의 성깔이 폭발할 수 있기에 그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행한 일이었다.
빙검은 인적도 드물고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왼쪽의 나무 숲 어귀를 가리켰다. 그들이 지금까지 걸어가고 있던 잘 정돈된 길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길이었다. 염도의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험악한 인상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얼굴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고울 리가 없었다.
“저어기이?”
빙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척 보기에도 꽤나 험난하고 올라가기 귀찮게 생긴 곳이었다.
“저렇게 훤하게 뚫려있는 대로를 놔두고 저런 다람쥐들이나 다닐 법한 험할 것이 뻔한 샛길로 가야 한단 말인가?”
빙검은 대답하기도 귀찮은지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왜? 이유가 뭐야?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게 있었으면 이 기회에 좀 알려주지 그래?”
염도의 시비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빙검이 천천히 대답했다.
“저기는 일반인이나 초대객과 물품이 지나가는 길이다. 화산지회 대표단들은 저 포장된 길로 갈 수 없다. 우리들은 여기에 유람 온 게 아니라 시련을 겪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아이들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빙검이 가리킨 곳은 잡목이 우거져 숲이 짙게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데, 곳곳에 험한 협곡과 바위 언덕이 있어서 척 보기에도 험난할 것 같았다. 당연히 일행을 고 되게 만들 요소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음이 분명했다.
“시험?
염도의 말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난 못 들었는데? 게다가 저번 대회 때도 시험이나 관문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정말로 금시초문이었다.
“자네는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네. 그리고 관문은 이번 대회부터 새로 생긴 것으로 알고 있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3개의 관문을 지나며 3개의 고난을 겪고 난 뒤, 3가지 공포를 이긴 후에야 비로소 원하던 장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했네.”
“왜 난 못 듣고, 넌 들었다는 거지? 이게 말이나 돼? 불공평하잖아?”
갑자기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든 염도가 버럭 화를 냈다.
“당연하지. 네가 신용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잊고 있는 모양인데 본인이 자네보다 계급이 높다네.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무척이나 불쾌하니깐 말일세!”
무심한 어조로 빙검은 또박또박 거침없이 말했다. 사실 염도 그는 일개 무사부였고, 빙검은 그 무사부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총무사부의 일인이었다. 그러나 그 렇다고 염도의 성질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비류연이 아니었으면 이런 조직체제 속에 몸을 투신할 염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모두 비류 연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던 주전자가 마침내 넘쳐흐르고 말았다.
“뭬이이야!”
염도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드잡이 질 때문에 대표단의 출발이 한참이나 지연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싸움이 끝났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의 싸움이 끝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
“이제 다 끝났으면 출발했으면 하는데요?”
비류연의 이 한 마디에는 신비의 힘이라도 깃들여져 있는지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었다. 빙검과 멀찍이서 떨어져 아직도 숨을 고르지 못하고 씨근덕거 리던 염도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지난 화산규약지회 참가자 신유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 유성! 너도 저번에 이 길로 갔었냐?”
“아…, 아닙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일인데요?”
그 무시무시한 살기덩어리에 찔끔 놀란 신유성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그럼 너가 그때 걸어 올라간 길은 어디냐? ”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씨근덕거리며 염도가 다시 물었다.
“저 길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신유성은 손가락을 들어 아주 정리가 잘되어 있는 널따란 대로를 가리켰다. 그 길은 빙검이 가리킨 길에 비해 정말 넓고 편안해 보였다. 경공을 사용하면 한 시진 도 안 되어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그 길은 천무봉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운송하기 위해 닦여진 길이었다. 소문의 화산규약지회를 구경하고 싶은 많은 무림인들이 이 길을 밟고 천무봉에 오르 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초청장을 받은 일부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수도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으음, 아무래도 이건 제 개인적인 예감이지만, 이번 화산지회는 이제까지 있어왔던 그 어느 대회와도 차원이 다른 대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 다.”
굳어진 얼굴로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신유성이 진지하게 말했다.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위화감이 자꾸만 염도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