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명 대 마하령(?)
•치열한 잔대가리의 격전
“끼아아아악!”
“컥”
그것은 오래되어 녹슨 검이 강제로 철제 검집에서 빠져나올 때 나는
소름끼치는 신경질적인 쇠 마찰음 같았다.
창천룡(蒼天龍) 용천명은 자신의 얇고 연약한(?) 고막을 사정없이 유린하는 정체불명의 음공에 하마터면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귀를 틀어막고 제자리에 풀썩 주저 앉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결사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대지 위에 굳건히 버티고 섰다.
‘무…, 무슨 소리지? 이 끔찍한 소리는?’
함께 방을 쓰는 동료의 공포스러운 이 가는 소리만큼이나 끔찍한 그 고문 같은 음공을 용천명은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기시감(旣視感)이 들었다. ‘누구였지?’
저 독특하고 개성적인,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는 쉽게 잊혀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 저 목소리의 소유자는 성격이 괴팍하고 편협하며, 신경질적이고 막무가내임이 분명할거야!’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뇌리 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끼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어딜 다가와! 죽어, 죽어어!’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소름끼치는 비명이 협곡을 무너뜨릴 기세로 울려 퍼질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떠올렸던 ‘저런 비명의 소유자가 가져야 할 덕목의 모든 조건이 그녀와 부합됨을 곧 알 수 있었다.
“역시!”
한쪽 구석진 곳에서 마하령이 새파랗게 질린 핼쑥한 얼굴로 연신 비명을 토하며 악에 받친 듯 마구잡이로 도광을 뿌리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둘러쳐진 도광이 거의 도막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치명적인 광막(光幕) 안에 걸린 독사들은 속절없이 몸통을 육시당해야 했다.
‘헉! 저럴 수가……. 마 소저에게도 저런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다니? 저렇게까지 질겁하며 뱀을 싫어하다니…….?
순간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그의 눈길은 걱정스럽다는 듯 변했다. 자칫 잘못하여 그녀가 이대로 계속 비명을 지를 경우 이 협곡이 붕괴돼 전 원 매몰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현재 그녀의 도는 어떠한 독사의 이빨도 접근을 허용치 않고 있지만 지금 그녀가 펼치고 있는 도법은 결 코 이성적이지 않았다. 평소 그녀가 보이던 깔끔하고 정련된 초식은 그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전심전력으로 휘두르는 도가 어찌 이성적일 수 있겠는가?
사실 비사진의 독사 떼 공격을 막는데 저런 무지막지하고 위력적인 강맹한 초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과도한 진기 사용은 전신의 기력을 신속하게 고갈시 키는 내공 낭비일 뿐이다.
저대로 가다가는 적의 의도대로 제풀에 쓰러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다급한 마음이 된 용천명은 그녀를 돕기 위해 떨어져 내리는 화살 비와 독사 비 의 악천후를 검풍의 우산으로 헤치며 얼른 달려 나갔다. 용천명은 재빠르게 마하령의 곁으로 뛰어가며 주위의 뱀들을 한꺼번에 빗질하듯 쓸어버렸다. 그러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괜찮습니까, 마 소저? 다치거나 어디 물린 곳은 없나요?”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평소 깔끔하던 옷차림은 땅바닥에 한바탕 뒹군 듯이 흐트러져 있었고, 단정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도 격한 움직임에 헤져서 짚 으로 만든 볼품없는 옷처럼 올올이 풀려나와 아무렇게나 방치되듯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만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엉망진창인 모습 이었다.
“도와드리지요, 마소저! ‘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필요 없어요!”
그녀가 ‘빽’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고는 이내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것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용천명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그에 비해 지극히 낭비적인 움직임을 취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녀의 눈에선 핏발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땅바닥을 슬금슬금 기어 다니는 수백 마리나 되는 푸른 비늘 달린 생물의 공격 때문에 그녀의 신경은 이미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있었고, 그것은 금방 해결될 문 제가 아니었다.
“또, 기분 내키는 대로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는군요.”
용천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호의가 개 작두질 당하듯 거절당한 것은 기분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한 번 정도 더 당해 줄 여유와 아량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하령이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만 그동안 수없이 당하다 보니 이제는 이 사나운 암호랑이를 다루는 데에 이골이 나 있 었던 것이다.
“그 말 진심입니까, 마소저?”
용천명은 조용한 호수 같은 두 눈으로 마하령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층 무뚝뚝해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심한 시선에 그녀는 움찔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안 도와줘도 됩니까? 본인은 어찌되어도 상관없습니다만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대답하면 당장 뒤돌아서서 휑하니 그냥 가버리겠다는 의지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그런 협박성 다분한 어조였다.
“그…, 그게…, 저어…….”
평상시라면 절대로 이런 폭거를 오기로라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그녀에게는 오기와 자 존심을 내세울 만큼의 심적 여유가 부족했다. 지금은 비상시였고, 그녀에게는 대위기였다.
어린 시절에 아로새겨진 정신적 충격. 그녀의 열 번째 생일날, 어떤 심술꾸러기 소년 한 명이 그녀의 뒷덜미에 푸른 비늘 달린 징그러운 생물을 한 마리 집어넣은 적이 있었다. 그 비늘 달린 차갑고 끈적끈적하면서도 미끌미끌하고 소름끼치도록 혐오스러운 것은 그녀의 등판을 이리저리 유희를 즐기듯 휘젓고 다니며 어린 한 소녀의 정신을 새하얀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 그녀는 뱀이라고 하면 질색팔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모루 위의 불꽃처럼 튀어나왔던 오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마하령은 가자미눈을 뜨고 자신의 주위를 힐끔힐끔 살펴 보았다. 주변의 광 경은 시선의 초점조차 맞추기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지옥도였다.
“정말 안 도와줘도 됩니까, 군웅회주님?”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용천명에 의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쓸려나갔던 뱀들이 선수교체를 하고, 사방에서 스르륵 스르륵 흰 뱃가죽이 흙을 헤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 다. 그 수는 족히 기백이 넘는 듯 했다.
‘도와 달라고 해, 마하령! 지금 느긋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을 때야? 지금 네가 물불을 가릴 처지냐고? 어서 도와 달라고 해! 조력자로서 저만큼 믿음직스런 사람 도 드물다고!”
그러나 그녀는 이내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아냐! 그럴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 돼. 내가 미쳤다고 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너의 신분을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라고. 저 남자는 그때의 일 따위는 보나마나 이미 까맣게 잊고 있겠지. 십 년도 전의 일이니깐. 그런데 그런 남자에게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할 수 있겠어? 넌 군웅회주 철옥 잠 마하령이야. 절대 구정회주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는 안 돼. 더구나 저 남자에게는 말이야. 오늘 이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해! 아니, 안 해! 하지 만.
두 가지 서로 모순된 생각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쉽게 날 것 같지 않았다.
쉭쉭!
붉고 가는 혀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낼름 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새파랗게 질려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색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새하얗게 탈색되었 다.
“여태껏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정말 안 도와줘도 되는 모양이지요, 하령? 그럼 여기에서 더 이상 볼일은 없겠군요.”
용천명은 뽑아 휘두르던 장검을 다시 검집에 납검(劍)하며 인정사정없이 뒤로 돌아섰다. 평소와 다르게 ‘하령’이라 부른 것도 실수가 아닌 고의였다. 아직 위협 이 끝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아주 심술궂으면서도 위험천만한 행위였지만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의 냉정한 행동에 다급해진 마하령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여유마저 빼앗긴 채 체면치례 하거나 오기를 부릴 일말의 여유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지척에서 수백 마리의 뱀들이 자신들의 치아교열 상태를 뽐내며 포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하령은 울상이 되고 말았다.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던 그녀의 마음 한쪽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마하령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
“용 공자님, 잠깐만요. 제가 잘못 생각한 듯싶네요. 구정회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데 함부로 그 도움을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싶군요. 애써 배려해 주시겠 다는데 그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겠어요, 호호호!”
여인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마치 당연한 것을 말했다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그녀가 정색하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허세임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 보 였지만 용천명은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이런! 과연 하령답군! ‘
용천명은 고개를 저었다. 이 사자처럼 사나운 여인에게 더 이상의 굽힘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또한 그런 면이 더 마하령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용천명이 다시 검을 뽑았다. 오늘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런 때 빚을 만들어 놓는 것도 장래에 유용한 일이었다.
파바바밧!
그는 시원스럽게 달마여래십삼검(達摩如來十三劍) 중 일초인 불광만조(佛光滿潮)를 펼치며 사위를 쓸어갔다. 그와 그녀에게로 접근해 오던 독사 떼들은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래의 후광과도 같은 빛의 물결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