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5화 – 위기일발! 나예린

비뢰도 12권 5화 – 위기일발! 나예린

위기일발! 나예린

“이…, 이럴 수가!”

모사령은 자신의 시퍼렇게 뜬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노안(老眼)이 올 때가 지나기는 했지만 쌓아놓은 내공 덕분인지 별 탈 없이 지내 온 터였다. 그런데 저 아래 저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그곳에 하나의 작은 원형 빈터가 드러났다. 대략 반경 반 장 쯤이나 될까? 문제는 그 원 안으로는 자신이 키운 귀염둥이들이 접근을 하 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가 서 있었다.

‘설마 이놈들이 얼굴 가리나?’

미모로 미루어 보아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다.

‘확실히 인간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 모두를 매료시킬 만한 미모이긴 한데……. 쩝, 나도 오십년만 젊었어도…….’

잠시 나이를 망각하고 주책스럽게 엉뚱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비사마군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 년을 넘게 살면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남들이 다들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탐욕스런 굶주린 독사 떼를 베어내느라 한창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나예린은 너무나 한가한 자신의 상태를 믿을 수가 없었 다. 그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주위 반경 반 장 안은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둘러쳐진 듯 텅텅 비어 있었다. 죽음과 공포를 몰고 다니도록 철저 하게 훈련된 이 독사들도 그녀에게만은 감히 함부로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여기저기서 독사 떼에 의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나예린에게는 한 번도 독아를 번뜩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슬금슬금 그녀의 주위를 벗어나려 애쓸 뿐이었다.

‘두려워하고 있어!’

분명 독사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순간 그녀의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받아요!’

나예린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를 향했다.

‘부적이에요!’

기억 속에서 비류연이 천진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검은 신월(초승달)처럼 생긴 묘한 장신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작은 물소 뿔을 연상 시키기도 했는데 끝 부분에 섬세한 은세공이 되어 있고 그 밑에 윤기 나는 검은 비단실과 은실의 수실이 달려 있었다.

“이것과 합쳐 한 쌍이에요. 언젠가 이것이 예린을 지켜줄 거예요!’

그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같은 모양의 장신구를 가리키며 웃었다.

“…, 그렇구나!’

비류연에게 부적이라며 받았던 선물. 그것은 바로 묵린혈망이 지닌 두 개의 독아 중 하나를 은세공 해 만든 것이었다. 그때 거절할 이유가 마땅치 않아 받아 두었 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나예린의 가는 허리춤에 항상 매달려 있었다.

비류연은 묵린혈망을 잡은 후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보관해 두고 있다가 일이 끝난 후 그것을 완전 분해해 이곳저곳에 비싼 값에 팔았다.

그 누군가가 은밀히 흘린 묵린혈망의 고기가 내공증진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학관 내를 떠돌자 강해지고 싶은 욕망이 누구보다 강렬한 천무학관도들 중 돈푼 꽤 나 있는 관도들은 앞 다투어 그의 좋은 고객이 되었다.

웬만한 보검으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혈망의 가죽인 묵린피(墨鱗皮)도 비싼 가격에 팔렸다. 가볍고 튼튼한데다 질기기까지 한 방어구를 만드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재료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묵린혈망의 가죽은 능히 천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묵린피를 가공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천무학관의 가장 뛰어난 장인인 천기수(機手)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그 사람 이외에는 감히 이 강철보다 단단하고 질긴 묵린피를 가공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종의 거래가 있은 후 그는 흔쾌히 대량의 묵린피를 가공해 주었다. 그 후 천기수는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모종의 희귀한 재료를 연구하고 가공하기 위해 한동안 자신의 공방에 틀어박 혀 며칠 밤낮을 침식도 잊은 채 정열을 불태우며 몰두했다고 한다.

분명 이 검은 독아에서 풍기는 냄새(비록 사람의 후각으로는 맡을 수 없지만)가 독사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틀림없어!’

‘류연…….’

언제나 두려움을 모르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두려움과 긴장감은 어 느새 먼지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그가 자신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워도, 태워도 끝이 없군! 그 노괴는 뱀이 무한대로 나오는 요술 주머니라도 하나 갖고 있는 건가?”

지글지글 불고기 잔치에 이어 열심히 뱀들을 단체 화장시키던 염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이런 다급한 때에 흰소리는 그만하게! 아직도 위험은 충분할 정도로 남아 있네.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비사진의 무서움은 이 정도가 아닐세!”

“쳇, 시어머니가 따로 없군!”

빠직!

빙검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났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제어하며 간신히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염도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겨 주고 싶었지만, 많이 배 운 자신이 참기로 했다.

“…, 정말 이 사진을 장악하고 있는 자가 비사마군 모사령이라면 그의 청홍쌍각사(靑紅雙角蛇)를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청홍쌍각사? 쳇, 겨우 뱀 따위가…….”

시시껄렁하다는 듯한 염도의 시큰둥한 반응에 빙검이 버럭 호통을 쳤다.

“겨우 뱀 따위라고 무시하지 말게! 그건 이미 단순한 뱀 따위가 아닐세. 물론 자네가 부주의로 인해 덜컥 죽어버린다 해도 아쉬울 건 전혀 없지만 말일세.” 정말이지 이 인간은 남의 충고에 대해 귀 기울이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막무가내 무대포 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말 화딱지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빠직!

이번에는 염도의 구리빛 이마 거죽에 핏대가 불거져 나왔다.

“그것들은 이미 이런 시시한 독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물일세. 그 한 마리가 이런 독사 수만 마리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게다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어떤 모종의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군. ‘청홍쌍각사와 시선을 마주치지 마라. 그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재앙이 따를 것이다.’라는 옛 기록도 있네. 얕보 다가는 순식간에 저승행 일걸세. 물론 강조의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절대로 아쉬울 것이 없네!

하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몽땅 다 재수가 없었지만 쏘아보는 빙검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느껴지자 염도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그가 큰 적을 만났을 때의 눈빛이 었다. 저 재수 없는 얼음덩이를 저 정도까지 긴장시킬 수 있는 적은 많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도 경계심이 무럭무럭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는 너무 변화무쌍하군!’

쉬시시시쉭! 슈슈슈슈슉!

그런데 폭우처럼 떨어지는 화살 비에 연이은 독사 우박!

설상가상, 첩첩산중이 무슨 뜻인지 체득하기 아주 좋은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빌어먹을 상황은 살아가며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청흔이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아직 어떤 뱀이나 화살도 그의 몸을 범접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하염없이 수비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기력이 빠질 쪽은 자신들로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독사들의 공격은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문득 청흔이 고개를 돌려 모용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모용휘가 자신의 옆에서 매섭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위치는 매우 가까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모용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흔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두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는 순간이었다.

삼정태극검혜(情太極劍慧) 오의(奧義)

혼원일시 만변생(混元一始 萬變生)

청, 홍, 황 삼색으로 빛나는 세 자루의 검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청흔이 뛰어올랐다. 청, 홍, 황 삼색의 기운이 그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며 삼색 태극구를 형성했다.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 극한오의(極限奧義)

은하멸절(銀河滅絶)

그를 보좌해 모용휘가 밤하늘의 중심에서 빛나는 북극성처럼 눈부신 은빛으로 빛나는 검기로 온몸을 감싸며 일검충천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검이 청흔이 형성시 켜 놓은 태극구의 중심을 찔렀다.

절세의 두 무공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었다.

쾅! 콰과과과!

태극으로부터 천지를 가득 메우는 유성우의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수천 가닥의 유성이 천지사방을 난자했다. 하늘로 퍼져나간 유성우의 무리가 독사와 화살로 오 염됐던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다시 황혼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 찢어진 공간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사나운 독사도 빠른 화살도 그들의 합격 검기 앞에서는 예쁘게 채 썰어지는 게 고 작이었다.

무당산 합숙 훈련 때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연마해야만 했던 그것이 세상에 화려한 첫선을 보인 것이다.

“좋구나! 그래야 천무학관의 제자이지!”

염도가 호기롭게 외쳤다.

“모두들 사정없이 토막 쳐 버려라! 오늘 저녁은 뱀 구이다, 뱀 구이. 크하하하하!

염도의 도에서 또다시 새빨간 불꽃이 치솟아 올라 사방을 휩쓸었다. 그의 검염기(劍焰氣)에 휩쓸린 뱀들이 순식간에 뱀 구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빙검도 지지 않고 검을 휘두르자 빙루(氷)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한기(劍寒氣)에 휩쓸린 뱀들이 초록 비늘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모습으로 신선도를 유지한 채 딱딱하게 냉동되었다. 개방에서 봤다면 무척이나 탐을 냈을 만한 기술이었다.

“이…, 이놈들이 내 귀여운 새끼들을.

자신이 애지중지하며 가꾸고 키워오던, 손수 번식시킨 아가들이 흉폭한 악도들의 손에 난자당하자 모사령의 여린(?)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파왔다. 마치 자기 자식 이 살해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비사마졸 어디 있냐? 나와서 나랑 놀자!’라는 염도의 도발이 소란스럽게 계속되고 있었다. 비사마군 모사령의 요사스런 사안(眼)에 살기가 충천했다. 그는 아가들의 복수와 분풀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놈들을 쓸 일은 없기를 바랬건만!”

그는 자신의 만사혈장을 꺼내들었다. 청홍쌍각사는 그의 지팡이 안에서 둥지를 틀고 먹이를 받아먹고 산다. 벌써 백 년 동안 키워 온 영물이었다. 이 만사혈장을 평범한 지팡이인 줄 알고 맞상대했다가 낭패를 당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청홍쌍각사는 암수 두 마리가 한 쌍으로 수컷은 푸른 비늘을, 암컷은 붉은 비늘을 지니고 있는데 암수 모두 작은 뿔이 달려있다. 그래서 청홍쌍각사라 불리는 것이 다.

이 놈들은 자신이 훈련시킨 그 어떤 독사들보다 서른 배 이상 빠르고 영활하며 영악한 놈들이었다. 게다가 보통 독사의 오십 배 이상 강한 독을 품고 있었다. “활!”

그가 손을 뻗자 혈마대원 한 명이 얼른 그의 손에 공손하게 활을 바쳤다.

“화살! “

그의 오른 손에 다시 핏빛 화살이 들렸다. 검은 색 활의 시위를 당기고 그 위에 핏빛 화살을 메겼다. 두 개의 붉은 밧줄과 푸른 밧줄이 그의 팔을 타고 화살대를 새 끼 꼬듯 지나 화살촉 끝에 똬리를 틀었다.

그것들은 자기들이 용이라도 되는 냥 이마에 뿔을 달고 있었다. 힘껏 당겨진 화살의 촉끝이 빈터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나예린을 향했다.

비류연은 보았다. 보통은 볼 수 없지만 이미 보통이라 할 수 없는 비류연의 눈은 안개의 벽을 꿰뚫고 명확하게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화살의 폭우가 구름층이 엷어졌는지 그 기세를 잃고 뜸해지고 있을 때, 어떤 늙은 뱀 같은 놈팡이의 손에 들린 활시위에 꿈틀거리는 기묘한 화살이 협곡 아래쪽의 전장을 향하고 있는 것을!

그는 그 꿈틀거리는 불길스런 화살촉 끝이 저 지옥의 입구처럼 갈라진 밑바닥의 원형으로 된 작은 빈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 빈터에는 뱀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류연은 왜 그것이 저 늙은 뱀을 저토록 맹렬히 분노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늙은이의 분노나 신분, 그 어느 것도 알 수 있는 처지가 아니 었다.

다만 비류연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여기저기 눈에 띄는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단히 특출 난 고수였고, 그가 내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저 아래 빈터

의 한가운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과 그 중심에는 나예린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비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다시 한번 부릅떠진 눈으로 모사령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 는 능력이 부족했다.

“멈춰라!

천둥신이 울부짖는 듯한 거대한 대갈성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의지가 해일처럼 모사령의 전신을 사정없이 덮쳤다. 의지의 파도가 무수한 칼날이 되어 그의 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모사령도 천겁혈세를 치러낸 백 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고수였다.

순간 그의 동작이 놀람으로 멈칫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가슴 속으로부터 어두운 욕망의 의지를 끌어내 재차 시위를 당기며 활 을 겨누었다. 잠시 지체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범인(凡人)이라면 비류연의 대갈성 한 번에 다리가 풀려 활을 떨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나 늙은 노물은 역시 영악하고 괘씸했다.

팽팽히 당겨진 활을 바라보고 있는 비류연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가 황급히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주변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했다. 마치 심해의 거대한 압력 속을 걸어가는 듯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협곡 건너편에 있는 늙은 뱀 대가리가 얼마나 악독한 짓을 하려고 하는 지도 마치 손에 잡힐 듯 너무나 똑똑히 보였다.

뒤로 당겨진 깡마른 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그의 팔이 시위를 당기는 것을 멈추었다. 이윽고 아주 천천히 그의 오른손 검지와 엄지가 시위에서 떨어졌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이때 비류연은 아래를 향해 박혀있는 쇠사슬 위를 밟고 있었다. 나예린은 아직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부적은 독사는 막 아줘도 화살비까지 막아주는 영험함은 없는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저 붉은 화살이 결코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는 것을(그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그 위력만큼은) 뼈가 저릴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위험한 물건이었다. 비류연은 전력을 다해 아래로 뛰쳐 내려갔다. 바람이 멈추고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시위를 놓은 모사령의 뱀 같은 두 눈은 희열과 욕망과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일격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위를 떠난 붉은 화살이 공기를 찢고 점점 더 가까이 나예린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찰나에 불과할 만큼 짧은 시간일진데도 지금 비류연의 눈에는 마치 정지해 있는 것 처럼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저쪽이 정지해 있는 듯 느리게 움직이는 만큼 이쪽도 지루할 정도로, 그리고 심장이 울화로 터져버릴 정도로 답답하게 느릿느릿 움직이 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태양을 방불케 할 것처럼 밝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것은 화살과 인간의 속도 경쟁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주는 출발이 빨랐던 붉은 혈마 전의 승리였다. 혈마전이 나예린의 지척에 다가갔을 때 비류연과 나예린과의 거리는 아직 십장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저히 시간 안에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 다. 또한 그녀가 그것을 알고 눈치 채 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였다.

‘안돼에에에에!’’

비류연의 정신이 소리 없는 절규를 터트렸다.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혈마전이 나예린의 몸을 꿰뚫으려는 그 찰나 비류연은 전심전력을 다해 영혼의 실을 뽑듯 오른손을 내뻗었다.

팟!

순간 화살 하나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내리 비치는 태양빛에 기다란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투명한 은색 실이 보석 모래처럼 반짝였다.

상황은 이러했다.

나이를 헛투로 먹은 것이 틀림없는 몰상식하고 개념 없는 어떤 무법자가 쏜 혈마전 한 대가 사정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미의 결정을 파괴하고 능 멸하려는 그 순간 비류연의 오른쪽 소매에서 별빛 같은 은색 섬광이 뇌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날아갔다. 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에서도 그것은 시간의 벽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빨랐다.

은색 섬광은 혈마전이 있는 지점까지 시간과 공간도 뛰어넘은 것처럼 순식간에 도착해 눈 깜짝은 커녕 시늉도 못할 사이에 그 되먹지 못한 폭력의 꼬리 깃털을 감 아올려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한번 자신의 방향을 상실한 화살은 더 이상 살상용으로서의 그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연이 미처 예기치도 못한 일이 있었으니 그 사악한 목적을 지닌 화살은 힘을 잃었지만 그 끝에 매달린 두 마리의 흉측한 짐승은 그 힘과 목표를 잃지 않았다. 또한 주인의 욕망을 충실한 수행할 의사로 가득한 종복이었다.

화살이 치솟아 오른 창공으로부터 청색 홍색 두 줄기 섬광이 쏘아진 화살처럼 떨어져 내렸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일반 독사 천 마리의 독을 품고 있다는 이 사악한 영물의 벌어진 입에서 치명적인 흰 독아가 사신의 낫처럼 번뜩였다.

파앙! 콰콰쾅!

그 순간 대기를 찢어발기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나예린의 주위에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대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세차게 날려 올려진 흙먼지가 그녀의 시야를 순간적으로 가렸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웬 늠름하고 믿음직스런 등이 그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에는 뿔 달린 청색과 홍색의 뱀이 각기 한 마리씩 붙잡힌 채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녀는 자신이 비류연에게 또 한 번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두 마리의 뱀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생물인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 던 것이다.

“류연……..”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나예린의 목소리는 겨울처럼 차갑지 않았고, 봄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뒷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는 난감하기만 했다. 뒤를 이을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아요?”

뒤돌아 본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나예린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에 대한 신뢰가 샘솟듯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는 나예린이었다. “전 언제나 당신의 도움을 받는 군요. 제가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만큼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당신은 언제나 제가 위험할 때, 괴로울 때 항 상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는군요.”

이번으로 몇 번이나 도움을 받은 것일까?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항상 잊지 않고 나타나 주었다. 그리고 곁에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등을 맡겨도 좋겠다 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류연도 마주 보고 함께 웃었지만 쾌활하게 웃을 만큼은 아니었다.

‘…, 무리했나?’

비류연은 전신의 근육이 찌릿찌릿, 전기뱀장어처럼 전율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이 저릿했다. 과도하게 육체가 혹사된 것이 분명했다. 분명 어느 순간부터 육체가 한계 이상으로 운용되었던 것이리라.

‘방금 그것은 뭐였지?’

비류연은 방금 전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그것은 언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그런 세계였다.

“난 또 하나의 벽을 넘은 걸까?’

과거의 기억이 머리 속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이 세계는 점, 선, 면의 3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의 세계가 되지. 인간의 육체는 3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 경계를 깨고 4차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의 정신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지. 그 전에 시간을 따라잡으면 주위의 모든 경물이 느리게 움직이게 되 고, 자기 자신마저 느리게 움직이게 되지. 그리고 마찰로 인해 공기가 뜨겁게 느껴질 것이다.’

“이게 사부가 말한 바로 그것인가?’

아직도 얼굴에는 후끈거리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봤던 세계가 무엇인지 아직 쉽사리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