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6화 – 청홍쌍각사의 수난!

비뢰도 12권 6화 – 청홍쌍각사의 수난!

청홍쌍각사의 수난!

“호오, 그나저나 무척이나 특이하게 생긴 놈들이네?

뱀 주제에 건방지게 뿔까지 달리고 말이야.”

비류연은 청홍쌍각사의 목덜미를 잡은 채 감정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훌떡훌떡 뒤집어 보았다. 무척이나 난폭한 동작이었다.

쉐에에에엑!

영특한 영물답게 이 두 녀석은 반항을 시도했다.

“어쭈? 꼴에 반항이냐? 한 번만 더…….”

쉐에에에엑!

비류연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숫놈인 청린사가 꼴에 사내라고 다시 한번 사납게 독기를 내뿜었다.

끼-엑!

청린사의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뚝 멎었다. 뿐만 아니라 아가리를 있는 데로 쩍 벌인 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미물의 눈동자에는 당황의 빛이 역력했다. 옆 에서 보면 마치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했지! 한 번만 더 반항하면 가만 안 놔둔다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청린쌍각사는 ‘뭐 이런 무식한 놈이 다 있어!’라며 하늘에 항의하고 싶었다. 대지를 기어 다니면서 자신의 몸보다 십수 배나 큰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2백 년을 살 아왔지만 이렇게 황당한 인간을 만나기란 처음이었다.

하지만 청린사는 아가리를 닫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납고 난폭하며 먹이를 가리는 미식가(?) 생물로 정평이 나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지금 모사령이 독기 를 올리기 위해 며칠간 굶겨서 배가 좀 고프다고 해도 자신의 아내인 홍린쌍각사를 낼름 삼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 비류연의 청린사에 대한 처벌은 아가리를 벌이고 독아를 번뜩이던 그 속에 홍린사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처박아 넣는 것이었다. 터무니없이 무식하고 난 폭한 방법이었지만, 그 효과는 절대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청린사는 완전히 침묵했다.

“이대로 확 밀어 넣어 버릴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뇌까렸다.

청동 오리 발버둥치듯 거칠게 요동치던 청색 홍색 두 가닥 꼬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영물은 영물인지라 그 말이 분명한 진심이며 수틀리면 진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말의 자비심은 남았는지, 아니면 두 마리 값이 한 마리 값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이 영 못마땅했는 지 비류연은 그 말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비류연이 까불면 죽어, 라는 듯한 험상궂은 얼굴로 두 마리를 자신의 눈앞에 치켜들었다. 순간 청홍쌍각사의 눈에서 시뻘건 요광(光)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사 람을 돌처럼 마비시킬 수 있는 청홍쌍각사의 숨겨진 비장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반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키이이이익!

오히려 벼락 맞은 것처럼 놀란 놈들은 바로 청홍쌍각사였다. 이 간특한 뱀들이 지닌 비장의 주특기도 비류연 앞에서는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살기 위 해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지만 이 인간에게만은 전혀 통용되기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반발력으로 반탄 되어오는 살기의 파도가 이 미물들의 정신에 까지 강력한 타격을 입혔다.

“호오, 재미있군. 최후의 반항이냐? 이 몸이 최후통첩을 날렸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건방지게 뿔 달린 뱀이면 단 줄 알어? 뱀술로 만들어 줄까? 아니면 뱀 구이로 만들어 줄까? 아니면 피로회복(疲勞回復) 정력증진(精力增進) 근력강화(筋力强化) 불끈불끈 영양만점(營養滿點) 보양강장제(保養强壯劑)로 만들어 줄까? 하찮은 미물 주제에 어디서 감히 눈알을 부라려?”

두 마리의 건방진 반항에 비류연은 화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퍽 퍽 퍽 퍽!

길쭉한 청홍쌍각사의 몸뚱이가 철퍼덕 철퍼덕 번갈아가며 땅바닥을 서너 차례 왕복했다. 비류연이 손목을 돌리며 바닥에 패대기친 탓이었다.

“한 번만 더 반항하면 국물도 없다, 알았어?”

비류연이 눈을 부라리며(그런다고 해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으름장을 놓았다.

끼익, 끼익!

하찮은 미물도 생명의 위협은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직 이들의 생존본능은 망가지지 않은 듯 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칼날 같은 기세는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사 라지고 온화한 애완동물만이 그의 손아귀에 남았다. 물론 비류연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이빨을 세우던 것들이 갑자기 여염집 규수처럼 얌전해진 다음 자신의 손

등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는 게 같잖을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단숨에 모가지를 비틀고 가죽을 벗겨야 했겠지만.

“생김부터가 괴상한 게 값이 꽤 될 것 같군. 희귀한 독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당삼이네 집이라고 했던가…….”

원래 세상의 법칙이란 오래되거나 희소성을 가진 것은 저절로 가치를 지니게 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였다.

“장형은 어떻게 생각해? 이게 큰 돈이 되리라 생각해?”

어느새 악천후를 뚫고, 그들 옆에 다가와 있는 장홍을 보며 비류연이 물었다.

“물론일세. 팔면 엄청나게 돈이 될 걸? 그것도 아마 푼돈이 아닌 떼돈이겠지. 누가 뭐래도 그건 백 년에 하나 구할까 말까한 희귀한 물건이니 말일세.”

그는 나예린의 곁에서 터져 나온 ‘쾅’하는 소리와 풀풀 날리는 먼지에 기이함을 느끼고 쫓아왔던 것이다. 이런 격전의 수라장 한복판에서도 그는 어느 한 군데 상 처 입은 곳이 없었다. 그의 옷 여기저기에는 덕지덕지 붉은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가 다 저 바닥을 기는 미물들의 것이었을 뿐, 그의 피부 아래에서 나온 것은 단 한 방울도 없었다.

“그렇다면 산 게 비쌀까? 죽은 게 비쌀까? 아니면 둘 다 비슷할까?”

순간 청홍쌍각사의 몸에서 식은땀이 흐른 것 같이 보인 것은 아마 장홍과 나예린의 착각일 것이다. 하지만 이 미물들의 공포 섞인 오돌거림은 확실히 두 사람에게 도 전해져 왔다.

‘악독한 놈 손에 걸린 너희들의 운명을 저주해라!’

측은지심이 잠시 장홍의 눈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물론 싱싱하게 살아 있는 쪽이 더 비싸지. 게다가 이 두 마리는 암수 한 쌍이거든! 그쪽 청린사가 숫놈이고, 이 홍린사가 암놈이지!”

비류연은 그의 말을 시세(만일 그런 게 있다고 가정하고)의 다섯 배 이상을 부를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다. 청홍쌍각사의 생태계 따위는 그의 관심과는 만 년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죽은 놈은 값이 별로라고 하니깐 살려두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확 모가지를 비틀어놨어야 되는데……. 쯧쯧, 난 너무 마음이 여리단 말씀이 야.”

어째 앞에 한 말과 뒤에 한 말이 전혀 맞지가 않았다. 다시 비류연이 말했다.

“네가 이놈들 대장이겠지? 네 녀석들이 비록 하찮은 미물이지만 살고 싶은 마음은 여느 사람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청홍쌍각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것 같다고 느낀 것은 장홍 혼자만의 착시 현상이었을까?

‘하하하! 설마? 잘못 봤겠지!’

그는 곧바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부정해 버렸다. 기가 허해졌나,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것들만 보이는 것 같았다. 비류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너희들도 자신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에게 은혜갚음은 해야겠지? 아무리 미물이라도 이 세상에는 경우가 있는 거야! 그러니…, 살고 싶으면 졸개들 보고 당장 물 러나라고 그래. 지·금·당·장!”

두 마리의 영혼에 직접 말하는 듯한 거역할 수 없는 의지의 힘이 담겨진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이글거리는 태양 같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비류연의 안광이 예리 한창처럼 청홍쌍각사의 사안을 관통했다. 이 두 생물이 선보인 조잡한 위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의 안광이었다.

“거참! 말 못하는 뱀을 협박하다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기문(奇聞)이로군. 이보게, 류연! 내 별다른 나쁜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그런데 시간 투자할 일 있 으면 이 놈들이나 떨구는 데 할애하는 게 어떻겠나? 아직도 우린 완벽하게 안전한 게 아니야. 그런 헛수고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건 정말 어리석은 헛짓거…….. 어느 새 곁에 다가온 장홍이 비류연에게 장황한 충고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이이익!

비류연에게 목줄기를 붙잡혀 있던 청린사의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협곡 내에 울려 퍼졌다. 이런 조그마한 몸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높 고 큰 소리였다.

키이이이이익!

뒤를 이어 홍린사의 울음소리가 따랐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들을 공격하던 뱀 떼들이 하나씩 둘씩 주위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말도 알아듣는다는 희대 의 영물, 청홍쌍각사! 이들의 충심이란 겨우 이 정도 생명의 위협에 굴하는 좀스러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모사령은 지난 백 년 동안 애지중지하게 키워오며 친자식처럼 아껴 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던 자식새끼들에게 배반당하고 만 것이다. 지나온 백 년이 참으 로 무상하게 느껴질 만한 배신이었다.

“허허! 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거참, 협박으로 뱀의 군단을 물러나게 하다니……. 정말 자네의 엉뚱함과 기이함에는 당할 재간이 없군. 당해낼 재간이 없어.”

항상 비류연에게는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황당함이든, 경이든 매번 놀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딱지를 키워낸 거지?,

그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아니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는 불가사의였다.

“이…, 이럴 수가……?”

비사마군(현재 염도에 의해 비사마졸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모사령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괴사가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수족이나 마찬가 지였던 것들이 자신을 배반할 수 있단 말인가? 팔다리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도 있는가? 그 두 마리는 자신의 검이자 방패였으며 수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항상 일심동체라고 여기며 지난 백이십 년 세월을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잠시 허탈한 무력감에 몸을 맡긴 채 실소를 흘리며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이윽고 품에서 녹색 피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의 사부로부터 물려받은 사문의 보물 중 하나인 사충적(蛇蟲笛)이었다. 사령술(蛇術)을 익힌 자가 불면 뱀과 벌레를 마음먹은 대 로 조정할 수 있는 효능을 지닌 피리다. 하지만 그의 사령술의 수위가 깊어짐에 따라 지난 오십 년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내 생전에 다시 이 피리를 필요하게 될 줄이야…….”

정말 인생이란 불가해한 일의 연속이었다.

“삐이익! 삐이이이일! 피리리리…….”

사충적이 결코 귀에 즐겁지 않은 소리를 내뿜으며 울려 퍼지자 슬금슬금 물러나던 뱀들이 동작을 멈추고 다시 천무학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쉬에에엑!

다시 한번 뱀들의 새빨간 혀와 독아가 그들을 향해 번뜩였다. 비릿한 독기가 잔뜩 피어올랐다.

“어라? 저놈들이 왜 저러지?”

돌연한 반전행위에 놀란 비류연이 반문했다.

“비사마군의 사충적(蛇蟲笛)이네. 그는 한때 이 피리 소리로 뱀들을 자유자재로 조정했었지. 아까부터 저 소리가 없는데도 뱀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의아하게 생 각했는데, 아마 피리 없이도 뱀을 부릴 만큼 그의 사령술이 진보했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먼지 쌓인 피리가 필요한 모 양일세.”

“…, 바로 자네 한 사람 때문에!’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던 장홍의 시선이 비류연을 향해 꽂혔다. 그러나 비류연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뱀 땅꾼의 뱀 피리 소리란 이야기로군.”

간단한 감상이었다. 여러모로 체면 구겨지는 비사마군이었다. 백 년 전 떨친 악명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정말 사람 번거롭게 만드는군. 민폐가 따로 없어. 자, 잘 들었지? 너희들이 살아나려면 좀더 노력해야 되겠다. 안 그러면 어찌될지는 말 안 해도 충분히 알겠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삐이이이익!

키이이이이익!

청홍쌍각사로부터 필사적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혼쌍각사의 울음소리와 비사마군이 부는 사충적과의 본격적인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지난 백 년 간의 우 애는 이미 머리 속에 없는지 이 두 마리는 무척이나 필사적이었다.

두 가지 계통의 서로 상반된 명령은 시대를 막론하고 군대에게 혼선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우왕좌왕!

두 지휘관 사이에 끼인 뱀 떼들은 좌충우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언제나 쫄따구들은 괴로운 법이었다.

“역시 명령 계통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해!”

우왕좌왕하는 뱀 떼들을 보고 있는 장홍의 감상이었다.

“역시 아저씨는 사고방식도 젊은이들과 다르군. 겨우 뱀 떼의 움직임에서 그런 것까지 보다니 말이야.”

“누가 아저씨라는 건가? 자연은 우리와 완전히 떨어진 존재가 아니네. 항상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스승 같은 존재이지. 자연을 바라보다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네.”

“네네, 고명하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비류연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그런데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뭔가?”

“이 뱀 쪼가리들, 너무 시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내가 이 두 녀석의 목을 베어주길 원하나?”

순간 뜨끔했는지 청홍쌍린사의 울음소리가 멈추었다. 그러자 뱀 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쭈, 죽기 싫음 계속해!’

비류연의 째려봄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청홍쌍각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내 뱀 떼들은 또다시 접근을 멈추고 다시 혼란 상태에 빠졌다.

“아니, 그것들 말고. 우리 주위에 시커멓게 널려 있는 것들 말이야. 내가 이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 주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

“좀 시끄럽긴 하지. 내가 어쩌면 좋게나?”

“어쩌긴? 저기 있는 더 듣기 싫은 피리소리를 멈춰야지.”

“그럴까?”

비류연은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피리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의 거리를 격해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 얽혔다.

순간 비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라? 잠깐!’

비류연은 모사령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는 자신이 잠시 경황중에 잊었던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저 자는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악질 채무자가 분명하다고 그의 본능이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저자에게 받을 빚이 있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

비류연은 잠시 침묵하며 과거의 기억 속으로 조심스럽게 거슬러 올라갔다. 저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 속에서 불길이 이는 것이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깐…, 확실히…….’

그의 머리 속에 서서히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저 얼굴은 분명 협곡 위에서 갈라진 절벽 사이를 두고 본 얼굴이었다. 그래, 그것은 분명 나예린을 향해 죽음으로 인도할 활을 겨누었던 바로 그 몰지각한 늙은이의 낯짝이었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럴 수가, 내가 그걸 이제까지 잊고 있었다니…, 왜 잊고 있었지?’

그때는 온 정신이 나예린에게로 달려가는 것과, 그녀를 구하는 것에만 쏠려 있어 다른 것은 하나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접한 새로운 영역에 대한 의문과 청홍쌍각사의 처리 문제가 겹쳐지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저 자식이 아직까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멀쩡한거지? 왜?’

그녀에게 사신의 낫을 갖다 댄 놈이었다. 정말 본인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잠시 정신이 없었군. 채무자를 앞에 두고도 아직 계산을 끝마치지 않았다니 말이야.”

뭔가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왜 그런 찝찝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청산할 빚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경황중에 방치된 사그라졌던 분노가 다시 격렬한 불꽃이 일며 화산처럼 폭발했다.

“네-이-놈! ”

협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뇌룡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비류연의 시선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변해 협곡 위의 괘씸한 노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헉!’

모사령은 그 순간 수십 장의 거리가 있음에도 저자와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마치 바로 코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칼에 가려 눈도 안 보이는데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다니 자신도 무척이나 웃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애송이 따위에게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이 쫀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자신은 저런 벌레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모사령이 막 자신을 추스르려고 하는 그 찰나, 분노에 찬 외침이 비류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감히!”

협곡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소리. 천둥신의 망치가 모루를 때리는 듯한 음성 같았다. 모사령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부르르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파파팟!

비류연은 감히 자신의 나예린을 노린(언제부터 그의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도한 놈을 향해 거대한 분노를 내뿜으며 뛰쳐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