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7화 – 비사마군 모사령의 수난

비뢰도 12권 7화 – 비사마군 모사령의 수난

비사마군 모사령의 수난

“어떻게 벌써?”

모사령은 경악했다. 어느 새 웬 놈 하나가 협곡 아래에서

불쑥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설마 그 긴 거리를 이렇게나 순식간에 좁혀 오리라고는 미처 예기치 못했다. 그때 십이혈마대 대원인 듯한 흑의 복면인 하나가 양손에 창을 꼬나쥔 채 비류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자는 예리하게 빛나는 창끝을 비류연의 얼굴을 향해 겨누며 외쳤다.

“멈춰라! 난 혈창조 조장…….”

“비켜라, 방해다!

퍽!

용기가 가상하게도 비류연의 앞을 가로막아 섰던 혈창은 자신의 대사도 다 내뱉지 못하고 비류연이 거칠게 휘두른 주먹에 왼쪽 면상을 얻어맞아야 했다. 그는 정 신을 잃은 채 오른쪽 저편의 고목으로 날아가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머리통을 땅바닥을 향한 채 예술적으로 처박혔다. 눈의 흰자위를 까뒤집은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생사의 경계에 절반쯤 접어든 모양이었다. 모사령에게 잘 보이려다 자신의 명을 단축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은 현재 비류연의 안중에도 없었다. 다급한 때에 때를 모르고 꼬인 한 마리 파리에 불과했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온통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 었다.

‘혈창을 저토록 간단히!’

어이없게 나가떨어진 혈창을 바라보는 모사령의 눈에 경계심이 일었다. 자신마저도 저토록 간단하게 창법의 달인인 혈창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놈이냐?”

이글거리는 태양의 파편 같은 시선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네 놈이야 말로 웬 놈이냐? 밝힐 이름정도는 있겠지?

“떨거지에게 가르쳐 줄 하찮은 이름 따윈 가진 기억이 없다!”

“떨거지?’

모사령은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떨거지’로 분류되어 본 적이 없었다. 강호에 초출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수천 마리의 독사 떼를 거느리고 강호에 나온 그를 감히 떨거지라 부를 만큼 강단을 지닌 자는 없었던 것이다.

“시건방지구나!”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눈은 빨갛게 증오로 불타올랐다. 분노로 시뻘개진 모사령이 만사혈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이 필살의 공격을 위해 또아리를 트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제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 소원대로 죽여주마!

그가 뱀처럼 쉭쉭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만큼 끔찍한 변모였다. 백수십 년을 뱀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그 자신도 뱀의 기에 동화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백으로 모사령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세 싸움에서 밀린 모사령은 입으로만 떠들 뿐, 실제 행동은 아무 것도 하 지 못했다. 비류연의 살벌한 시선에 겁을 먹었는지 모사령은 한 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비류연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범한 죄는 모두 세 가지다!”

모사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비류연을 노려만 보았다.

“첫째, 내가 가는 길에 징그러운 뱀들을 무더기로 풀어놓아 행보를 방해한 것!

비류연이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모사령이 보조라도 맞추는 듯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다.

“둘째, 간악무도하게도 나의 예린의 목숨을 노려, 그녀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 것!

글쎄 그 누구도 나예린이 니 꺼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자신보다 강한 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쓸모없는 눈을 가진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발자국을 내딛으며 비류연이 선언하듯 말했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서서히 다가서는 비류연이 모사령에게는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싸움 시작 전부터 기백에서 밀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 자신을 회복했다.

‘잠깐, 내가 잠시 얼이 나갔었나? 내가 지금 애송이를 앞에 두고 뭐하는 추태지?’

순간적으로 뭔가 괴상망측하고 흉물스러운 것에 홀렸음이 분명했다. 아무튼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애송이는 벌써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온 몸은 호언장담한 것 치고는 빈틈투성이였다.

“할 말은 끝났느냐? 이 애송아?’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모사령이 말했다. 비류연은 손가락을 한 번 더 치켜세우며 말했다.

“당신은 그 말을 함으로써 한 가지 죄를 더 지었다. 뭐, 그렇지만 귀찮으니깐 일단 끝난 것으로 해두지.”

“그렇다면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 그럼 이만 죽어라!”

간악한 뱀을 연상시키는 사이한 눈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그 순간 비류연의 발밑이 검게 변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응?”

그 순간 검은 땅이 파도처럼 솟아오르며 비류연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움직이는 땅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수백 마리에 달하는 뱀 떼였다. 묵린혈망의 부적도 이때만큼은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묵린혈망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만큼 강력한 지배력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케헤헤헤헤! 어떠냐? 이 비사마군님의 지사진(地蛇陣)이? 그 안에서 노부를 무시한 대가로 독에 녹아 한줌 혈수가 되어라! 크하하하하하하!”

 비사진이 하늘에서의 공격이라면 지사진은 땅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지금까지 이 불의의 습격에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 년 전, 천겁혈세 때 종남파의 다섯 장로를 한줌 핏물로 저 세상으로 보낸 바로 그 진법이었다.

비류연이 완전히 지사진에 사로잡힌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모사령은 자신을 그물처럼 얽매고 있던 두려움에 대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크하하하! 크하하하! 크-하-하-하-하!

흑단 보자기처럼 완전히 비류연을 감싼 검은 바위 덩어리 같은 뱀 떼를 뒤로한 채 돌아선 모사령의 입에서 통쾌한 승자의 쾌락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이제 다 웃었나?”

모사령에게 그것은 저승으로부터 지옥문 틈새를 지나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모사령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리고 고개가 뽑혀져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거칠게 돌아갔다.

그러나 지사진의 필살 포위망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모사령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이내 어떤 위화감을 발견해 냈다.

움직임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던 바위가 시간이 멈춘 듯 우뚝 정지해 있었다. 모사령은 혈관 속의 피가 얼어붙는 듯 했다. 으스스 오한이 일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윽!

그 순간 가느다란 은빛이 밤의 어둠을 가르는 달빛처럼 검은 장막을 사선으로 갈랐다.

비뢰도(飛刀) 오의(奧義)

검기(劍)

은검풍인(銀劍風刃)의 장(章)

은섬풍(風)

사라라락!

그것은 어둠의 장막을 갈기갈기 찢는 별빛의 칼날이었는지도 모른다. 피가 점점이 떨어지고, 살점이 우박이 되어 쏟아졌다. 후두둑 쏟아지는 피륙의 진눈깨비 속 에서 비류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옷자락을 조용히 나부끼며 서 있었다.

빛나는 은빛 섬광의 바람이 비류연의 주위를 휘감으며 불고 있었다. 은빛 바람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독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 이런 바보 같은.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모사령은 악몽 같은 심란한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다.

“그럼 이로써 당신이 범한 죄가 다섯 개로 추가되었군요? 이제는 죽음으로 속죄하기에는 너무 지은 죄가 크군요. 애석하게도 당신의 편안한 죽음은 보류되고 말았 습니다.”

비류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조용하며 차분했다. 그러나 모사령에게 그것은 이미 염왕의 판결문 낭독이었다.

“으으으으, 으으으으.

그는 저승사자처럼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비류연의 기세에 놀라 어느새 벼랑을 등지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연신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열 발자국도 너무 많을 정도였다.

발뒤꿈치에 물린 흙과 모래가 ‘푸스슥’ 작은 소리를 내며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만큼 강렬한 공포를 느끼기기는 그 분을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끼아아아악!”

바로 그때 낙뢰곡 아래에서 비통에 잠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돌도 쪼갤 것 같던 앞전의 비명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잠긴 절망과 경악 과 비탄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처음 듣는 비명이었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소유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진설의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