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2권 8화 – 쌍마의 개입

비뢰도 12권 8화 – 쌍마의 개입

쌍마의 개입

다시 찾아온 위기

“이대로는 피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후퇴해서 전력을 보존해야 합니다.

이 이상은 무의미한 희생일 뿐입니다.”

혈검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묵으로 답하는 적혈의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참패였다.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벌써 전력의 삼할 이상이 작살나 있었다. 물론 본진이 위태로울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피해를 입는 일 자체가 없었어야 했다. 그들은 지금 매복 포위 기습전을 펼치는 것이지 섬멸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참담한 상황은 무엇인가?

삼봉공 중 한 명이자 비사진의 주재자인 모사령은 어느 순간부터 곁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더 그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크으으윽!”

침통한 침음성이 악다물어진 이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후퇴의 시기를 놓쳐 이런 상황까지 오도록 만들고야 만 것이다. 어차피 몰살이 목적이 아니었다. 애초의 작전은 적 전력의 일부를 매복 기습으로 타격을 입힌 후 바람처럼 재빠르게 후퇴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예상치 못한 거센 반격에 이 정도까지 지독한 타격 을 입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혈궁대와 혈쇄조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이(二)개 대(隊)와 맞먹는 전력을 보유한 비사진이 완전 궤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 이상의 손해를 입으면 십 개 대 로도 재편이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아직 제 1대 혈검대를 비롯한 아홉 개 핵심 대가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의 전력 소모는 만용일 뿐이었다. 좋은 지휘관은 공격할 때와 후퇴할 때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은 후자 쪽이었다.

“퇴각한다.”

평소의 강인함은 찾아볼 수 없는, 힘이 턱없이 빠져 있는 목소리였다. 참담한 패배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십이혈마대 역사상 처음 맞는 참담한 패배 로 기록될 것이다.

작전은…, 실패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회수하라. 네 놈들 목숨 값보다 귀한 것들이다.”

조장이 불의의 사고(?)사를 당해 버렸기에 대신 임시조장을 맡고 있는 부조장 901호가 고함쳤다. 철쇄봉혼진의 철쇄는 숙련된 특수한 방법에 의해서만 회수가 가 능했다. 그 전에는 어떤 강한 힘으로도 뽑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숙달된 훈련이 필요했다.

십이혈마대조차도 혈쇄조 조원이 아닌 이들은 이 철쇄의 자유로운 회수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도 지금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증거를 남기지 마라. 영리한 맹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들에게 존재의 증명 따위는 필요 없다. 모두 지워버 려!”

침통한 표정으로 적혈이 큰소리로 명령했다.

이들은 후퇴하기 전에 먼저 쇠사슬로 쳐진 철쇄봉혼진을 해제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그 비싼 도구를 내버려두고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 쇠사슬 하나 에 든 만년한철의 양이면 천하에 이름을 남길 보검을 쉰 자루 이상 제련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검장(劍匠)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귀한 철들이었다.

“어라? 이 녀석들이 갑자기 뭔 짓거리지?”

자신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하던 철쇄가 갑자기 사라지자 어리둥절해진 염도가 외쳤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그거랑 저 빌어먹을 쇠사슬을 걷어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저들이 지금 후퇴를 결정했다는 이야기일세! 이미 쓸모를 다한 물건을 회수하는 것 당연한 일 아닌가?”

“왜 후퇴해? 자네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아직 어느 한쪽도 전멸하지 않았네. 그런데도 벌써 싸움을 끝낸단 말인가? 양쪽이 둘 다 멀쩡한데? 근성 없는 녀석들! 염도는 그의 상식으로 지금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있어 싸움이란 어느 한쪽 숨을 쉬는 사람이 몽땅 사라지거나, 아니면 백기를 들고 항복하 는 것 두 가지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단순하고 호쾌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으으으, 그런 건 직접 자네 혼자서 생각해 보라구! 이 싸움을 계속해 봤자 아무런 득도 없다는 걸 왜 모르나? 자네 머리통은 도대체 뭐하는데 사용하는 물건인가?”

마침내 빙검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서둘러 철쇄를 회수하고 화골산으로 동료의 시체를 녹여버리며 증거인멸에 여념이 없는 부산한 이들의 모습을 뒷짐 진 채 조용히 지켜보는 두 명의 노인이 있었 다. 냉막한 인상에 마른 체구를 지닌 노인은 마치 한 자루의 칼을 연상시키는 기도를 풍겼는데 그는 짙은 남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갈색 비단옷을 두르고 허리에는 흉폭한 살기가 흐르는 대도를 차고 있었다. 그의 덩치는 크고 뚱뚱했으며 얼굴에는 후덕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그 속에서 차 갑게 빛나고 있었다.

“빚을 졌군, 그것도 아주 큰 빚 말이야.”

남의노인이 안색을 찌푸리며 말했다.

“꼴사나운 일일세. 이대로 대공자의 얼굴을 어찌 다시 뵙겠는가?”

덩치 큰 노인의 얼굴은 수치와 치욕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리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벌써부터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버섯구름처럼 뭉게 뭉게 피어올랐다.

“갈 때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겠지? 그것도 되도록 성대하게!”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냉막한 인상을 지닌 남의노인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심연하게 빛내며 싸늘하게 말하자 갈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산 제물은 되도록 아름다운 게 좋겠지, 흐흐흐흐!”

퉁퉁한 배를 출렁이며 음흉한 웃음을 터트리는 갈의노인의 시선이 협곡 아래 한 지점을 향했다. 그에게는 아까 전부터 눈여겨 봐 둔 제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하얀 보석을 갈아 만든 흰 안개 같은 냉기를 뿜으며 검을 휘두르는 여인이 있었다. 은은한 검광을 흘리는 보검을 쥔 가냘픈 두 팔은 백 진주의 영(靈)처럼 새하얀 광채를 띄고 있었고, 보법을 밟으며 춤추듯이 신형을 뒤틀 때마다 찰랑이는 잡티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머릿결은 맑고 드높은 밤하늘처 럼 깊고 심해의 흑진주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 피보라가 휘몰아치는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불결함을 모르는 듯, 그녀의 몸은 성결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어떠한 더러움도 그녀를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 은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전장의 참상도, 휘몰아치는 참혹한 피보라도 천상의 보옥처럼 빛을 발하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어둠을 가르는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는 이 지 옥도의 한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흙탕의 한가운데서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부처의 연꽃처럼 찬연한 빛을 발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갈의노인의 눈에 화염지옥의 불꽃같은 어두운 검은 욕망의 불 꽃이 이글거렸다. 새벽의 샛별처럼 찬란한 저 빛을 빼앗아 어둠으로 다시 칠하고 싶었다.

무릎 꿇리고 굴복시킨 후, 더럽히고 범하고 싶은 추악하고 잔인하며 더럽고 불길한 욕망.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고, 사악한 도를 움켜진 그의 손에 억센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용암처럼 들끓는 추악한 욕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이이이! ”

악마처럼 변해버린 갈의노인은 혀끝으로 자신의 윗입술을 핥았다. 그의 입가에 초록색 비늘 뱀처럼 차갑고 사악한 흉소가 맺혔다. 맹독을 품은 독사들이 보아도 비늘이 발딱 설 만큼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괴물의 얼굴이었다.

“성격이 나쁘군.”

침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공패를 본 동방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 년을 함께 지내왔지만 오늘처럼 이성을 잃고 감정의 소용돌 이에 휩쓸린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방학에게 이것은 무척이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빚을 갚고 경고와 경각심을 일깨워 줄 두려움을 심어 주기 위한 발걸음이다. 잔인하고 흉폭할수록 그 효과는 극대화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동방학은 자신의 동료를 진정시키지 않고, 고삐가 풀린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방치하기로 했다.

세봉공이 나선 이유는 대가를 치루고 본보기를 보인 뒤, 특급 최우선 제거 대상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공포와 실속, 이 두 가지를 한칼에 획득하기 위해 이들은 이 자리에 선 것이다. 상대가 오십이라 해도 그들은 결코 위축되거나 쫄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라도 몸을 뺄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십이혈마대가 그들의 뒤를 완벽하게 지원해 줄 것이다.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전심전력으로 자신들의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간단하게…….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이 받았던 초상화가 첨부된 명단을 떠올려 보았다. 모두 제거할 필요는 없고, 두어 명 정도만 본보기를 보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직 치매 증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억 속의 명단이 머리 속에 금방 떠올랐다.

‘창천룡 용천명, 삼절검 청흔, 철옥잠 마하령, 칠절신검 모용휘, 빙백봉 나예린…….’

마침 그들이 노리는 제물은 번듯하게 명단에 올라 있었기에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초상화 속의 나예린과 지금 눈으로 보는 나예린 사이에는 너무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 그녀의 신비로움이 그림 속에는 일 할도 채 담겨있지 않았다. 부가 설명이 없었으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

“아무래도 이번에 돌아가면 초상화 그린 놈은 감봉강등 조치와 함께 엄벌에 처해야 할 듯 하군. 슬슬 움직여 볼까?”

“좋지!”

두 명의 노인이 자신들의 먹이를 향해 새하얀 강철로 만들어진 이빨을 드러냈다.

나예린은 전장 한가운데서 극한으로 발달되어 있는 예리한 감각으로 그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느끼고 위기를 알리는 경고를 들었다. 나예린이 이토록 거대 하고 추악한 검은 욕망을 대하는 것은 그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사지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과 깊이를 알 수 없 는 혐오감이었다. 그녀는 심연하게 빛나는 용안으로 사위를 살폈다. 그러나 그 특정화된 위험을 느끼기만 할 뿐 시야 안으로 포착할 수는 없었다.

‘고수!’

그녀는 다급한 마음으로 경계를 확장시켰다. 이런 기운을 발할 수 있는 자는 평범한 고수라 할 수 없는 초고수일 것이다. 검후의 진전을 이은 그녀였지만 아직 대 성하지 못한 검술로 과연 이 강대한 기운의 소유자를 이길 수 있을지 그녀는 감히 장담하지 못했다.

‘류연…….”

갑자기 그녀의 뇌리 속으로 항상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을 모르는(도가 지나칠 정도지만)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붉은 석류 같은 입술에 엷은 미소 를 머금었다. 언제부터 북해의 빙정이라 불리던 자신의 마음이 이리도 여려졌단 말인가? 언제부터 남자 따위에게 의지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게 과연 나 자신이 맞 단 말인가?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도 확신도 할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그녀는 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나예린은 어느새 자신을 전후로 포위하고 있는 두 개의 강대한 기 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이 주는 압박감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녀가 배후의 기운에 대해 신경을 늦추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 제법 살집이 붙은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한 손에 상어 이빨같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를 들고, 야차(夜叉) 같은 두 눈에 검은 욕망의 추악한 불길 을 불태우며 입가에 비릿하고 소름끼치는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과연 직접 보니 명불허전이구나. 백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웬만한 미녀는 다 이 두 눈으로 보고, 이 몸으로 섭렵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너를 보니 내 생각은 다만 나만의 착각이고 오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흐흐흐, 정말 너를 보고 있자니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이 들끓는 정욕을 참을 수가 없구 나!”

공패라 불리는 갈의노인의 입에서 차갑고 날카로우면서도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질척질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목 소리. 이 노인의 내면에서 이글거리는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은 용안을 지닌 나예린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 정도였다.

“흐흐흐.”

마치 칼로 찌르는 듯한 잔인한 웃음이었다. 공패는 다시 한번 혀로 자신의 윗입술을 핥았다. 먹이를 앞에 둔 독사의 표정이었다. 동방학은 입을 굳게 닫은 채 석상 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예린은 더욱더 그에게 방심할 수가 없었다.

나예린은 천무학관을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자칫 잘못하면 능욕당한 후 가장 치욕스런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한 사람도 벅찬 지금, 같은 동 급의 최고수 두 사람이 자신의 전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만일의 경우 자결도 서슴지 않고 실행할 것을 결심하며 전신의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 다.

“언니이이이!”

나예린의 위기에 놀란 이진설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쌍검은 나비의 날개 짓처럼 화려했지만 이 두 노인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역량 미달이 었다.

효룡은 한눈에 지금 이진설이 하고자 하는 일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십장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저 끔찍할 만큼 가공할 존재감은 저들이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를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당연히 이진설로는 어찌해보지 못할 초고수였다.

효룡은 이차 삼차 숙고할 겨를도 없이 튕겨지듯,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이진설의 뒤를 쫓았다. 여기서 이진설을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이때 비류연은 비사마군 모사령을 상대하기 위해 협곡 위에 있어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푸확!

끊어진 녹색건(綠色巾)이 붉은 피에 흠뻑 젖은 채 허공중에 날리었다. 순간 이진설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위의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자신이 휘두른 쌍검 사이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볍게 뚫고 그녀의 목젖을 노리며 뱀처럼 영활하게 다가온 한 자루의 붉은 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절체절명 의 위기에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의 검이 사신의 숨결처럼 차갑게 다가오던 그 살기 어린 검을 막아내자 끼끼 낑’ 거친 소음을 내며 불꽃이 튀었다. 사방으로 불티가 날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는 남색 옷을 입은 괴노인의 검을 저지하기가 힘겨웠던 모양이다. 검 한 자루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의 앞을 막아선 사내는 다시 한 자루의 검을 뽑아들어 가위로 맞물리듯 한 자루의 사악한 마검처럼 느껴지는 노인의 검을 막아내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직진을 저지당한 피처럼 붉은 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푸확!

귀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리가 허공중에 울려 퍼졌다.

이진설은 아득한 정신 속에서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독히 성격 나쁜 몽마의 장난질 같은 악몽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녹색건이 끊어지자 사내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풀어지며 어깨 위로 흘러 내렸다. 단정했던 그의 머리가 사형장의 망나니처럼 산발 이 되어 혈향 짙은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미간 사이로부터 그의 오뚝한 콧날과 볼을 지나 강인해 보이는 턱밑으로 한줄기 붉은 피가 실개천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쿵!

효룡의 무릎이 반으로 접히며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끼아아아악!”

마침내 이진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비탄과 절망, 그리고 공포에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몸은 물 속에 잠 긴 솜뭉치처럼 무겁기만 했다.

지금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니 방금 벌어졌는지 뒤엉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판단과 분석이 불가능했 다. 하늘이 무너지는가? 그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짙은 암흑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진설이 달려들어 앞으로 고꾸라지는 효룡을 안아들었다. 효룡은 아직도 눈을 멍하니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의 두 눈동자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피맺힌 목소리로 절규했다. 저 멀리서 모용휘와 염도, 빙검 노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귀는 자신이 뭐라고 외치고 있는지, 그리고 또 저기 달려오고 있는 저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 소란스러움은 절벽 위에 있는 비류연에게도 확실하게 들렸다.

동방학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의 검을 막은 쌍검의 검로가 왠지 손에 익었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 이런 느낌의 무공과 붙어본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은 너무나 생생한 것이라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비록 강산이 열 번 바뀌었다 해도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3개의 무공 중 하 나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설마 굉천혈영도(轟天血影刀)?”

그러나 그것은 도법이지 검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도의 인간이 그 도법을 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찌 흑도의 하늘로 추앙받는 이의 도법을 백도 나부랭이가 쓸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여기 올 때 군사로부터 뭐라고 듣고 왔었던가? 요즘 심심하실 텐데 오래간만에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시지요.’라고 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입안된 작전이 천무학관 대표단의 몰살이라 해도 별다른 피해 없이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성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눈앞에서 자신의 판단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했단 말인가?’

그의 마음 속에서 한줄기 경계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몇 시진 전만 해도 이들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는 버러지, 쓰레기들이었지만, 이제는 상황 이 바뀌어 조금 한 가닥 하는 짐승들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차갑게 빛나는 빙검의 검이 가공할 속도로 그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비류연의 고개가 급작스럽게 아래를 향했다.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비류연에게 그런 거리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은 체구의 이진설이 누군가를 안 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쓰러진 그 청년이 지닌 두 자루의 쌍검은 무척이나 눈에 익은 것이었다. 비류연의 한쪽 검미가 순간 벼락 치듯 꿈틀 거렸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옆으로 옮겼을 때 비류연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오열하는 이진설 옆에서 웬 뚱땡이의 파도처럼 몰아쳐오는 흉악스러운 도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나예린의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태양처럼 빛났다.

비류연이 한눈을 판 틈을 타 ‘죽어라!’라는 진부한 대사를 외치며 달려들던 모사령은 순간 비류연의 태양처럼 빛나는 눈빛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멈칫거렸 다. 그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충격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척이나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문이 체면불구하고 고개를 치켜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듯한 아주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어떤 미지의 엄청난 기운이 자신을 덮쳐오는 걸 느꼈다. 그 힘 앞에 그는 여섯 마리 준마가 이끄는 가속 붙은 쇠수레를 맨몸으로 가로막는 한 마리 작은 사마귀일 뿐이었다.

입에 한 움큼 물고 있는 흙모래를 내뱉으며 모사령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희뿌연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전신 을 사정없이 휘저어 버리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자신이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유용한 정보지만 지랄 맞게 엿 같은 정보라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차분한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자신이 땅바닥에다가 자신이 지나온 흔적의 기념으로 긴 고랑을 요란스레 남기며 땅에 박히듯 파묻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달려오는 쇠수레에 짓눌린 사마귀 같은 신세였다. 삐이이이익!

그 순간 상공을 스쳐지나가듯 미끄러지며 지나간 것은 푸른 깃털을 지닌 하늘의 제왕 해동청 우뢰매였다.

투확!

모사령은 뭔가 따뜻하고 뭉클하며 찝찝한 것이 하늘로부터 자신의 얼굴위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상하고 고약하며 지릿한 냄새가 순간 그의 후 각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그는 이 끔찍한 악몽 속에서 비명이라도 시원스레 질러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변비 걱정을 떨치고 시원스러운 배변을 통해 건강한 장의 운동을 확인한 우뢰매는 자신의 시선 아래로 삼장 정도 되는 기나긴 도랑이 파여 있고, 그 끝에 사람 비스무리 한 것이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랑 주변은 광폭한 폭풍우에 휩싸인 것처럼 나무들이 팔방으로 제멋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곧 자신의 주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품은 채 드높이 울었다.

“삐이이익!”

그곳은 비류연이 서 있던 반대쪽 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