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우정
곧 인생의 크나큰 시련과 부딪쳐야 할 친구에게 다가온 현운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친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뭔가? “
그러자 현운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다시 한번 남궁상이 물었다.
“주게!”
그제야 현운이 대답했다.
“뭘?”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지만 현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가면을 씌워놓은 것처럼 무뚝뚝했다. “뭘 달란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남궁상이 다시 한번 언성을 높여 묻자 그제야 현운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언장! “
그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우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현운은 행동하고 있었다.
“유언장?”
“전해 주겠네!”
무뚝뚝한 목소리로 현운이 말했다.
“자네가 빼돌리지나 말게나!”
“믿지는 말게!”
“물론일세!
22
그렇게 대답하며 남궁상은 친구(아직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의 내밀어진 손 위에 동봉된 서신 하나를 올려놓았다. 주작단원들은 비류연과 어울려 다닌 이후 모 두들 품속에 유언장 하나씩을 품고 있었다.
남궁상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에다 걸었나?”
“…….”
현운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침묵은 곧 긍정을 의미했다.
“자네도… 실패 쪽인가?”
궁상의 어깨가 탈골이라도 된 듯 축 늘어졌다. 그러자 현운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험, 무량수불! 사람은 때론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지.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네!”
“이런 상황 속에서 감히 어떤 게 희소식이 될 수 있는가?”
무척이나 맥 빠진 목소리로 남궁상이 대꾸했다.
“허허! 그렇게 낙심하지 말게나. 그리고 솔직히 기뻐하게! 진 소저만은 자네가 성공한다는 데 걸었다네. 그러니 자네가 성공하면 그녀는 크게 기뻐할 걸세!’ “…만은?”
남궁상의 준미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현운은 푸른 하늘이 그리운지 시선을 위로 향했다.
“어험! 날씨가 참 좋구만!’
그러나 현운의 말과 달리 하늘에는 남궁상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 짙은 구름이 가득했다. 그림자가 길게 그들 주위로 드리워졌다.
“…자네에게 줄 재산은 없네.”
남궁상이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게. 원본만 있으면 위조는 언제든지 가능하지. 친구들끼리 잘 갈라먹고 영원히 자네를 기억하겠네.”
이 녀석들을 물 먹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고 남궁상은 굳게 결심했다.
“거참 보기 좋은 우정이구만! 젊다는 것은 역시 좋군!
현운과 남궁상의 주거니 받거니를 지켜보던 회의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 어디가?’
“그럴 리가 없잖아!”
주작단원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괴생물체를 보는 듯한 눈으로 회의노인을 쳐다보았다. 그 옆에는 비류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참! 저 노인네가 함께 있었지!’
그제야 염도의 주의가 회의노인을 향해 기울어졌다. 자신들의 과거의 일부를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노인. 잠시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 노인은 아주 당당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으음, 저분은?”
그제야 종쾌도 회의노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염도는 대답할 말이 궁했다.
“에…, 그러니깐 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염도가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같이 온 인솔노사 중 한 분이신 모양이로군.”
오히려 그를 난관에서 구원해준 것은 종쾌였다. 아무래도 인원편성에 관한 상세정보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염도가 얼른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정말 그래요……. 하하하하!”
염도가 식은땀을 훔치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비공답운 종쾌가 회의노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것은 분명 나름의 예의를 갖춘 인사였다. 노인도 살 짝 고개를 까닥였다.
‘응?’
잠시 의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염도는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희대의 볼거리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도망칠 곳은 창천 아래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남궁상도 알고 대표단도 모두 알게 되었다.
드디어 궁지에 몰린 이상적인 상태가 된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이걸 정말 건널 수 있긴 건널 수 있는 건가요?”
역시 막막했다.
“난 감시자일 뿐 자네의 조언자가 아닐세. 보아하니 머리 없는 생물은 아닌 듯하니 직접 쭈그리고 앉아 천천히 생각해 보게나! 치사하게 지정된 시간 안에 통과해 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네.”
“친절하시군요!”
“과찬일세!”
종쾌의 호의(?) 어린 말도 남궁상에게는 별 도움이나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편한 점은 있구나!’
비류연 덕분에 미리 작성해둔 유언장이 꽤나 많은 까닭에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고심하는 수고를 다행히도 덜 수 있었다.
남궁상은 마음 속으로 유언장을 조용히 읊조렸다.
‘아아! 드디어 오늘 나 남궁상이 이 자리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는구나!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으면 진령 그녀는 얼마만큼 나의 죽음을 슬퍼해줄까? 아아, 그리 운 님이여…….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당신 곁에 내가 없더라도 슬퍼하지 마오. 아버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고 지존무상(至尊無上)하 시며 독보강호(獨步江湖)하시고 군림천하(君臨天下)하십시오. 흑흑흑! ’
[야, 임마! 궁상쟁이!]
“예…, 옙!’
벼락처럼 귀청을 때리는 전음에 화들짝 놀란 남궁상이 의식의 폭주 상태에서 퍼뜩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튀어나와버렸다. 전음은 상당히 어처구니없어 하는 울림이었다.
[너 지금 뭐하냐? 이름값하려고 궁상 떠냐? 이렇게 간단한 일 하나 하는데 뭘 그리 밍기적거려? 굼벵이랑 경주하냐? 기다리기 지루하다 못해 하품이 다 나려 그 런다!]
비류연의 전음 불호령에 남궁상은 찔끔하며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간단한 일?’
참담했다. 간단한’이라는 말의 용법이 언제부터 본래의 의미를 잃고 이토록 변질되고 왜곡되고 훼손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반론은 용납되지 않았고 그럴 틈도 없었다.
다시 한번 전음이 귀청을 때렸다.
[이 바보야! 눈앞에 멀쩡하게 계단이 있는데 뭘 그렇게 고민하냐? 네 동태 눈깔은 장식품이냐? 눈 두 개가 잠잘 때 꼭 감으라고 황송스럽게 달려 있는 줄 알아? 저 기저…….]
비류연의 호통인지 설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전음을 들은 남궁상의 등줄기를 타고 벼락 같은 전율이 관통했다. 갑자기 손톱만하던 시야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 졌다(사실 지금 대낮 맞았다).
‘줄을 매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방법을 써도 상관없다!’
종쾌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그런 수가 있었지!”
‘왜 여태껏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남궁상은 어두운 미명에 깨어나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고승의 심정이 되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런데도 자신은 능공허도(凌空虛渡)의 기술도 없는 주제에 단번에 저 반대편에 닿을 턱도 없는 생각을 궁리했던 것이다. 해법이 틀렸는 데 정답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대사형의 말대로라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절망과 포기만이 가득했던 황량한 불모의 대지에 희망의 비가 내리고 용기의 새싹이 돋아났다.
“좋아!”
두 주먹을 불끈 쥔 사내는 두 눈을 매처럼 빛내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힘차게 내딛는 그의 한 발짝 한 발짝에는 희망과 용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 달리기는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했다.
딱!
백만 개의 별들이 찬란한 백색 광휘로 그의 시계(視界)를 불태웠다.
날쌘 사슴처럼 바람을 가를 기세로 달려가던 남궁상의 몸이 순간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볼썽사납게 면상으로 지면에 대패질을 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질끈 하게 만드는 돌발사고였다.
지면에 보기 좋게 머리를 처박은 남궁상은 빵빵하고 탱탱한 엉덩이를 늠름하게 하늘로 향한 채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기묘한 정적이 장내를 지배했다.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죽었군!’
‘죽었어!’
“잘 가라.”
‘아미타불!’
‘무량수불!’
‘원시안진(모든 것이 원활하고 평안하길)! ’
이미 다들 남궁상의 생사에는 초탈(超脫)했는지 생존확인은 제쳐두고 마음 속으로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종교에서 기원(起源)한 나름의 극락왕생을 기원(祈願)해 줄 뿐이었다.
“..아직 안 죽었는데…….”
그러나 모기소리보다 작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었던 진령마저도 여기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야! 뭐하냐? 너, 벼랑 밖으로 던져진 쇠뭉치처럼 추락사하고 싶냐?]
비류연의 쏘아보는 눈초리가 잡아먹을 듯 사납기만 했다.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 예리함과 사나움과 분노가 얼굴 피부를 따끔따끔 자극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방금 남궁상의 뒤통수를 향해 뭔가를 던진 사람답지 않게 뻔뻔스러웠다.
[대사형…, 그게 무슨…….]
비류연의 느닷없는 폭력과 이유 없는 갈굼에 남궁상은 억울할 따름이었다. 아직도 뒤통수가 불에 덴 듯 ‘화끈얼얼’거렸다. 지면에 밭고랑을 파내는 장한 일을 해 낸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던졌던 모양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세운 채 달려가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끝이었다. 조금 전 한 방으로 겨우 세웠던 각오가 돌바닥에 떨어진 백자화병처럼 산산조각 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비류연이 화내는 이유는 그의 잘 배운 머리로도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상의 사정이 어떠하든지 비류연의 독설은 가차없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너 어째 지금 네가 뭘 달고 있는지 잊어버린 거냐? 갑자기 네 기억력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구나!]
“헉!”
비류연의 지적을 들은 남궁상은 그제야 헛바람을 들이켰다.
잊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오랫동안 그것들은 자신의 신체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몸을 움직이는데 시냇물 속에 섞인 빗물처 럼 어떤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이걸 찬 채로 그대로 뛰었으면.”
구름 같은 너울이 일렁이는, 푸른 파도 넘실거리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한 개의 작은 돌멩이처럼 저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바짝 곤두서는 오싹한 느낌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축축하게 젖은 등 뒤로 식은땀이 실개천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이럴 수가!”
남궁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내 몸이 이렇게 가벼웠지?’
오래간만에 합이 200근이나 나가는 족쇄 덩어리인 묵환을 풀어놓자 온몸이 깃털처럼 날아갈 듯 가벼웠다.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느낌에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묵환을 풀었을 때가 언제였지?’
기억을 못하는 것을 보니 꽤 오래 전의 일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그 이질감은 곧 적응이 되었고 그것은 또다시 자신감으로 뒤바뀌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그의 소심했던 가슴이 자신감과 용기로 가득 채워졌다. 만장절벽도 단숨에 뛰어넘고, 구름도 가볍게 뛰어넘고, 바람도 저 멀리 따돌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족쇄는 족쇄였던 모양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까지 관점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저곳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무한의 거리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단숨에 저 반대편에 가뿐히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옥의 입구 같던 낭떠러지는 폭신한 모래사장으로, 지옥 문지기의 흉소 같던 물 소리는 가을 더위를 몰아내는 청량한 바람소리로 돌변했다. 악귀들의 재잘 거림 같던 새소리도 아름다운 가인(佳人)의 음악처럼 들렸다.
참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 모양이다.
“내년 이맘 때쯤 뛸 모양이구먼! “
멀리서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종쾌가 목발로 땅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남궁상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다시 그의 발이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너무 가벼워 마치 바람을 밟고 달리는 것 같았다.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빠른 속도였 다.
세찬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점점 더 빠르고 강해지기 시작했다.
남궁상은 자신이 문자 그대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엔 진짜였다.
공력을 한껏 돋운 남궁상의 다리가 힘차게 협곡 가장자리를 박찼다. 쏘아진 활처럼, 나는 새처럼 그의 단련된 신체가 바람의 벽을 헤치며 날아갔다. 마치 가장 날 쌔고 용맹한 숫산양의 늠름한 도약 같았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기엔 이 틈새가 너무 멀었다. 현재 남궁상에게는 능력의 한계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솔직히 지금 이 시련 은 버거웠다. 그리고 지금 비정한 결과가 도출되려 하고 있었다.
남궁상이 이 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그 혼자만의 착각이자 터무니없는 오만이었을까? 그리고 그 오만에 대한 대가는 생의 종결로밖에 치를 수 없는 것인가?
한참 동안이나 중력의 속박을 받지 않던 비상하는 한 마리 새 같던 사내가 또다시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네 발 달린 들짐승이 되어 심연의 아가리처럼 벌어져 있는 어둠의 심처로 추락을 시작했다. 도저히 저 반대편까지 닿기에는 추진력이 부족했다.
“어어어어어!”
“끼아아아아악!
“안 돼!”
친구들은 다급한 경호성을 터트렸고, 여관도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진령은 여린 가슴에 심장이 벌렁거려 더 이상은 차마 볼 수 없는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를 이 시험에 내보낸 대사형을 원망할 정신적 여유마저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만은 팔짱을 낀 채 차분한 시선으로 끝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내리고 있는 남궁상의 몸을 쫓고 있었다.
‘지금!’
비류연이 속으로 외쳤다.
“타핫!”
협곡의 한가운데서 낭랑하게 터져 나온 창룡음.
그와 함께 남궁상의 혁피신발 끝이 협곡 사이를 날아다니는 이름모를 산새의 새알만큼 작은 머리를 찍었다. 그 반동으로 남궁상의 몸이 더욱더 위로 날아올랐다. 신기에 가까운 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강호에는 풀잎 위를 밟고 달리는 초상비(草上飛)라는 경공이 있다. 눈 위를 걷고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는 경공의 경지도 있다. 그리고 등평도수(登萍渡水)라는 물 위를 달리는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가 있고 그 위에 아무런 디딜 곳 없는 허공 위를 달린다는 능공허도(凌空虛道)라는 신화경의 경 지도 있다.
그러나 다들 새대가리를 밟고 나는 경지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다는 경공의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각별한 성취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경지였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분명히 여섯 마리째라고 생각했을 때 남궁상은 어느새 마르고 단단한 땅을 굳건히 밟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 어깨 너머로 뒤를 바라보자 어둠이 드리워진 심연의 깊은 낭떠러지가 여전히 웅장하고 위압적인 자태로 위세를 떨치며 버티고 있었다. 저 아 래의 그림자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새들이 깃털을 날리며 시야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건너편의 친구들이 산다 람쥐만큼이나 작게 보였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저 저승의 다리를 자신의 능력만으로 무사히 건너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공!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전율이 이는 짜릿한 쾌감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포효가 터져 나왔다.
첫 번째 시험은 합격이었다.
다리가 내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리라고 하기에는 종래에 존재했던 다리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그런 다리였다.
남궁상이 천겁간 반대편에 도착해서 본 것은 그저 두 개의 단순한 밧줄 뭉치뿐이었다.
용도는 명백했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남궁상은 자신이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설명을 미리 듣지 못했다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절 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쌍의 아름드리 나무에 두 개의 높낮이가 다른 밧줄이 천길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걸렸다. 간격은 보통사람 키 정도였다.
두 가닥의 밧줄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어떻게 다리일 수 있냐고 묻자 종쾌는 서슴없이 그럴 수 있다! ‘고 대답했다. 다리란 원래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건너갈 모종의 수단에 불과하며 그 형태와 재질을 따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이 종쾌의 주장이었다. 생명안전 요대 같은 고급스런 장치 따위는 물론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가다가 떨어져도 절대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친절하고 자상한 설명도 잊지 않았 다.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었다.
수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밧줄을 이용해 저편으로 건너가든가 아니면 좀 단수가 높지만 남궁상처럼 새대가리를 계단처럼 밟고 건너가든가.
무엇을 택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노인장! 이제 여기서부터는 위험합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염도가 그답지 않게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정체불명의 회의노인에게 말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오만방자함으로 말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염도마저 도 신기하게도 “사부님을 대하듯,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걱정 말게나! 이런 곳에서 떨어져서 꼴사납게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깐. 아직 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한 업이 남아 있어서 말일세. 애석하게도 벌써 죽을 수 있을 만 큼 편한 팔자가 못 된다네!”
노인은 호언장담했다. 순간 염도의 눈에 노인이 무척이나 위엄 있고 엄숙해 보였다. 그가 다시 눈을 세차게 비볐을 때 일순간의 거인은 금세 본래의 왜소한 노인으 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노인장께서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누가 말인가? 아! 저 사람 말인가?”
노인의 손가락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두 개의 목발을 짚고 서 있는 종쾌를 가리켰다. 바람이 그의 빈 바지를 흔들고 있었다.
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외쳤다.
“이보시게, 종 노인! 이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도 되겠는가?”
‘당연히 안 되지요!’
염도는 이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시죠!”
맥빠질 정도로 간단한 허락! 염도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그렇게 간단히?!”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이런 때는 보통 안 된다고 말하는 법 아니었나? 그러나 종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염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아차, 아까 전에 인솔노사라고 소개했었지!’
스스로 말해 놓고서도 남궁상 일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노인은 정식허락이 떨어져서인지 싱글벙글이었다.
“휴우우, 마음대로 하시죠.”
마침내 염도는 백기를 올리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장력이 유지되고 있는 밧줄다리를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다들 무공에는 한가락 하는 자들이라 큰 어려움 없이 짧은 시간 안에 다리를 건너갔 다. 아직 맨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효룡은 장홍이 들쳐메고 줄다리를 건넜다. 혹시나 버리고 갈까 봐 걱정했던 이진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비류연과 나예린, 회의노인뿐이었다.
그때 비류연이 종쾌를 돌아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비류연은 아무래도 그 뒤가 궁금한 모양이다. 종쾌가 대답했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자네들은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그리고 만일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싶다면…….?
종쾌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저 청년에게 하고 있는지 본인으로서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저 청년 에게 그렇게 될 희망은 없어 보이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로 결심했다.
“만일 자네가 능력이 된다면 천무봉의 정상에 올라 화산규약지회에서 우승하게! 그렇게 되면 자네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있을 것일세. 아니, 그 자리에 선 누 구라도 이 이야기의 전말을 알 수 있게 될 걸세! 그러나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마지막 말은 옹알이처럼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비류연은 그 얘기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생각보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