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1화 – 제자의 가출 사유서

제자 장성하여 나이 스물.

사내 나이 스물에 세상을 보지 못했다 함은 실로 부끄러운 일!

제자, 이제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보고,

다시 나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제 세상에 나아가 사부님의 이름을 떨치고,

사문의 이름을 빛내고 돌아오겠습니다.

제자의 가출 사유서

하늘에서 백색(色)의 여신이 내려와 주위를 감싸고,

송이송이 떨어져 내린 결정들은 이불처럼

대지를 온통 새하얗게 뒤덮었다.

아미산의 초겨울, 첫눈이 내리는 매서운 날씨였지만 계곡의 물줄기는 아직도 힘찬 움직임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거친 듯한 폭포도 동장군(冬將軍) 의 위세에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들은 어느새 백설의 결정에 덮여 동면을 시작하려는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차가운 냉기를 가득 품고 있는 계곡, 겨울의 계곡은 그 짙은 심연의 청남색만큼 차가운 냉기로 가득하여 다가가는 사람에게 언제든지 시린 기운을 뿜어 낸다. 여름 날씨에도 시린 차가움을 몸 속 깊이 느낄 수 있는데, 겨울에는 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조용하던 계곡담 수면 위에 작은 파문이 하나 생겨났다. 처음엔 손가락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았을 때의 크기 정도였다. 그런데 조그맣고 작은 파문 주위로 다 시 조금 더 큰 파문이 생겨나고, 그 위로 다시 또 하나의 파문, 하나씩 둘씩, 한 겹 두 겹 연속적으로 파문의 원이 그려지는 과정이 수십 번 반복되었다. 이윽고 지름 반 장 정도의 파문이 다시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생긴 가장 큰 파문의 원으로부터 가운데 중심까지 나선의 회오리가 생기면서 가운데 중심점을 축으로 해서 회전하 는 팽이처럼 함몰되어 들어갔다.

조용하던 겨울의 계곡담에 지금 거친 소용돌이가 막 생겨나려는 순간이었다. 자연의 이치를 곧게 따르자면 이 담에는 소용돌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소용돌이가 자연의 조화가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소용돌이의 나선은 점차 거칠어지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그런데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분쇄시킬 것 같던 나선의 회오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거렸다. 그와 함 께 물의 회전력으로 만들어진 팽이는 움직임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회전력과 속도가 줄어들면서 소용돌이는 점차 그 힘을 잃어 갔다. 이때, 점점 작아지고 소멸되 어 가는 소용돌이 나선의 중심으로부터 파문의 고리를 뚫고 인영이 뛰쳐나왔다. 젊은 청년이었다.

“케엑, 켁! 커억! 허ᅳ억, 허억!”

물가로 떨어져 내린 청년은 대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거칠고 불규칙한 호흡이었다. 안색 또한 파리 하여 더욱 힘겨워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듯, 불규칙하고 고통스런 숨을 쉴새없이 내뱉었다. 체내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얼 굴이 창백했고, 사지(四肢)는 물을 먹은 솜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 거친 숨결을 내뱉던 청년은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있는 하얀 결정 위에 몸을 큰 대(大)자로 만들며 벌렁 나자빠졌다. 그의 거친 숨은 아직 잦아들지 않은 상태 였다. 차가운 겨울, 계곡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뛰쳐나온 청년은 바로 현재 비뢰문의 유일한 계승자이며, 현 비뢰문 문주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또한 비뢰문의 하 녀 겸 식모 겸 살림꾼이며, 유일무이한 노동력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노동력이란 노동의 대가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그의 늙은 사부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밥은 손수 해야 되며, 반찬도 직접 구해 와야 하고, 직접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 청년, 즉 비류연이 있었기에 세상 편한 사부는 사냥이나 채집을 하지도 않 고, 살림을 꾸리지도 않으면서 공짜로 빈둥빈둥 놀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부에게 비류연은 매우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은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몸으로 맞으며, 백색 점들이 떨어져 내리는 은빛 하늘을 지긋한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억, 허억! 헉… 헉, 칫!”

비류연은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지 거친 숨결 뒤로 어린애의 투정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엄청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쉬운 듯한 눈빛 으로 계속해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뇌신(神)의 힘을 손에 넣기엔 아직 무리란 얘긴가…… 허억, 허억.’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비류연은 시위하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둘러쳐진 하늘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차가운 대지에 누워 비류연은 겁도 없 이 두 눈을 감았다.

뇌신(雷神)! 번개를 다스리는 신성(神聖)! 비뢰도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마지막 힘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몸으로는 시전하기는커녕 얻을 수조차 없었다. 이대로 는 더 이상 발전이 없을지 모른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머리 속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으로 행하지 못할 뿐이었다. 이치를 알고 방법을 알지만 실행할 수가 없었다.

지금 비류연이 놓인 상태는, 말하자면 가야 할 길은 알지만 그 길이 너무나 거칠고 험난하여 그 길을 갈 수 없는 사람과도 같았다. 거칠고 험난함에 굴하지 않고 몸 과 마음을 다스려, 그 험로를 걸어 올라갈 힘을 가질 때, 비류연은 비로소 소망하던 뇌신(雷神)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끝의 힘을…….

그러나 그는 지금 걸을 수 없었다. 얻어야 할 궁극의 것을 얻지 못해 낙담을 한 것일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 할 게 있을까만, 한 겨울 물에 젖은 옷을 입고 눈 속에 파묻히는 방법만큼 좋은 방법도 드물지 모른다. 잠들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가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 문에 겨울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잠에 빠져들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뺨을 올려붙이고 하는 것이다. 겨울 산에서의 아무런 대책도 없는 잠은 곧 죽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지금 비류연은 안락한 자살을 위한 매우 슬기롭고 유용한 방법을 실행하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는 사지(四肢)를 큰 대자로 뻗고 순백의 이 불에 누워 냉기를 마시며 은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세상을 하직하고, 저승 문안 인사를 드리기에 딱 좋은 방법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혹, 겁을 상실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옛날부터 없던 겁이 갑자기 생겨났다 다시 사라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것이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몸

위로 하나 둘 눈꽃이 지며 그의 몸을 덮었다. 한 겹 한 겹 쌓여 가는 눈송이를 보며, 비류연은 차가움과 추위보다는 시원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비류연의 몸은 은빛으로 빛나는 눈의 이불 속으로 조용히 잠겨 들어갔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 같은, 비류연의 알 수 없는 행위는 하늘마저도 당황시킬 정도였다. 아직 비류연은 ‘생각’이라는 사고 활동을 멈추진 않았다. 다행히 정신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이제 곧 새해 원단(元旦)이 시작된다. 지금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펼 쳐지는 것이다. 천계의 선녀가 겨울을 알리기 위해 뿌리는 눈을 맞으며 비류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새해 원단이라……. 곧 때가 되겠군, 떠나야 할 때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비류연은 눈 속에 몸을 묻었다. 포근하다는 생각을 하며 비류연은 잠을 청했다. 시원하고 포근하고 달콤한 잠 을…….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마침내 비류연의 몸은 지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눈 속으로 파묻혀 들어간 것이다. 새하얀 솜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자는 어린아 이처럼 비류연의 형체는 새하얀 백색 결정으로 이루어진 이불 속으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첫눈이었다.

‘으아악! 봉, 봉뢰함이… 봉뢰함이 없어.’

그것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경악할 일이었다. 악랄한 사부는 어처구니없이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만한 일에 화도 내지 못하고 멍하니 한 장의 서찰만을 뚫어져라 바 라만 볼 뿐이었다. 흰 바탕 위의 검은 얼룩이 아마 글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제자가 남기고 간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남기고 간 물건은 하나였지만 가져간 물건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봉뢰함 (封雷函)이 없었다. 뇌금(琴), 묵뢰(墨雷)도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계승의 의식을 끝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전승의 의식은 아 직 끝내지도 못한 놈이, 사문의 비보(秘寶) 중의 비보, 보물 중의 보물인 진산지보 봉뢰함을 가지고 나가다니. 비뢰문의 역사 속에서 이런 몰지각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인간은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하나도 없었다. 봉뢰함이란 뇌(雷), 즉 번개를 봉인(封印)한 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상자였다. 하지만 상자 본래의 가치보 다도 그곳에 들어가는 물건이 더욱 비중 있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봉뢰함은 바로 비뢰도를 넣어 두고 보관하는 상자였기 때문이다.

봉뢰함은 보석 같은 붉은 바탕에 은실로 수를 놓았고, 안에는 오른쪽 왼쪽 교대로 각각 5개씩 도합 10개의 비뢰도를 넣어 보관하는 함이다. 이 봉뢰함은 특이한 성 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비뢰도를 보관하면 뇌인(刃)의 날카로운 예기가 상하는 일도 없고, 뇌령사(雷靈絲)가 힘을 잃고 늘어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는 보 물이었다.

사실 그 동안 비류연이 써 오던 비뢰도는 쉽게 말하면 짜가, 좋게 말하면 연습용이고, 나쁘게 말하면 모조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타 다른 무기에 견주어 그 위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진품(眞品)에게는 한 수 접어 주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진품이 라고 불리겠는가.

비뢰문은 다음 대(代)의 제자가 일정한 수준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면 계승의 의식을 거쳐 사부는 진(眞) 비뢰도를 제자에게 넘기고 스승은 위(僞) 비뢰도를 사용하 게 된다. 진품과 모조품을 교환하는 것이다. 사부는 이미 진본에 익숙해 있지만 제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진품을 가지고 충분한 수련을 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 이다. 영사(靈絲)의 강도(强度)부터가 틀린 탓에 제자는 어느 정도의 경지에 들어서면 진(眞) 비뢰도를 가지고 수련을 쌓게 된다. 그것이 바로 비뢰문에 계승되어 오 는 전통이었다. 그런데…….

‘이, 이 녀석이. 아니, 이놈이… 허허, 이 노무 자슥이 헛… 허.”

이제는 화낼 기력도 없는지, 아니면 경악하느라 기를 다 소모한 탓인지 사부의 목소리는 무기력하게 허탈하기만 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씁쓸하고 허무한 울림만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봉뢰함은 허락한 적이 있어도 뇌금과 묵뢰는 허락한 적이 없는 사부였다. 그런데 하나뿐인 제자이며 다음 대의 전승자라는 놈이 밤새 도 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와 사문의 보물을 마음대로 가지고 가출하다니……. 그런 일을 당하고도 정신이 온전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지금 사 부는 너무 황당해서 화낼 기력조차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냥 멍하니 흰색 바탕에 꼬불꼬불한 글씨가 있는 편지 혹은 서찰이라고 부르는 물체를 바라보는 것밖에 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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