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10화 – 애송이의 제자가 된 고수
애송이의 제자가 된 고수
‘제자(弟子)!’
‘제자(弟)란 무엇인가?”
“사부(父)의 반대말이다!’
‘정답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누구 밑에서 배우는 사람을 제자라 한다.’
“제자는 사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사부가 있기에 제자가 있다.’
사부는 대단해야 한다. 시시한 존재는 결코 사부가 될 수 없다. 자신은 이제 제자가 아니다. 자신은 충분히 남의 사부가 될 자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남들도 다 인정한다. 자신은 강하다고. 자신은 훌륭하다고. 그러니 단 한 수만이라도 좋으니 그 강함의 비결을 일부분이나마 가르쳐 달라고, 자신의 사부가 되어 달라고, 열심 히 부탁하고 애걸을 한다. 하지만 자신은 모두 거절했었다. 귀찮았었다.
물론 자신도 한때 제자였던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이 제자였으므로, 자신이 제자이기 위한 사부라는 존재(存在)가 당연히 있었다. 사부는 강했다. 자신은 그 강함 이 너무나 좋았고, 그래서 존경했다. 그리고 배웠다. 그래서 배웠다. 사부의 강함을 원했다.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 위해 그는 배웠다.
사부는 제자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다.
사부가 일어나신다. 제자가 세숫물을 떠다 드린다.
사부가 시장하시다. 제자가 밥을 한다.
사부가 술을 드시고 싶어하신다.
제자가 산골짜기를 뛰어내려가 술을 사 온다.
사부가 계시는 방이 지저분하다. 제자가 청소를 한다.
사부가 부른다. 제자가 달려간다.
사부가 시킨다. 제자가 한다.
사부가 시킨다. 제자가 한다.
한다, 한다, 뭐든지 한다.
사부가 시켰다. 제자는 해야 한다. 해야 한다.
사내는 꿈을 꾼다. 사부가 있었다. 자신의 무(武)의 스승. 자신의 꿈, 자신의 갈망. 끝없이 강했던 사부. 누구도 사부의 위치와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그만큼 사부 는 강했다. 사부에 비한다면 자신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염도에게도 동문수학한 친구가 있었다. 이제는 친구가 아니다. 그 놈이나 그 녀석이라 부르자. 그런 호칭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런 놈은 이제 생각도 하지 말자. 재 수 없다.
사부는 절대적이었다. 사부는 위대했다. 나는 사부의 반쪽이었다. 사부의 나머지 반쪽은 그 녀석이었다. 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다. 완벽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와 그 놈은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태극청홍신령빙염공(太極靑紅神靈氷炎功)!’
사부가 지니고 있던 극상 극대의 신공의 명칭. 무도(武道)의 극의(極) 중에 극의(極義)였다. 홍염(紅焰)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청염(靑焰)은 모든 것을 얼게 한 다.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모두 지닌 초절정의 신공(神功).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지면 두려울 것도 막아설 것도 없었다. 하지만 두 가지를 한 몸에 지닐 수는 없 었다. 사부는 둘을 한 몸에 지닐 수 있었지만 그 놈과 나는 둘을 한 몸에 지닐 수가 없었다. 사부는 특이 체질이었고, 우리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홍염(紅 焰)을 택했다. 사부가 그에게 신도 홍령(神刀紅靈)을 주었다. 자신의 친구는 청염(靑焰)을 택했다. 사부가 그에게 신검 청령(神劍靑靈)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딸이 있었다. 사부의 딸이었다. 그녀를 사랑했다.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 놈에게 주었다. 이건 기 분 나쁘다. 아니 참을 수가 없다. 그런 얼음덩이 같은 놈이 어디가 좋은 거야. 화가 난다. 그래서 싸웠다. 싸우고 또 싸웠다. 결판이 안 난다. 그러나 내야 한다. 패배 자가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택한다. 결판이 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그를 택했다. 나는 사부가 택하게 했다고 하고, 그녀는 자신이 택했다고 한다. 화가 난다. 자꾸 화가 난 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사부에게 따지려 들었다. 그런데, 사부가 죽었다.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던, 죽음마저도 제압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사부가 죽었다. 나는 그곳을 나왔다. 뛰쳐나왔다. 무작정 뛰쳐나와 강호 천하를 헤매었다. 나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며 나는 강호를 떠돌았다.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것이다. 그곳으로…..
사내는 오른 손에 들린 자신의 애도를 바라본다. 저녁의 황혼보다도 짙은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범상치 않은 신도(神刀).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거 나 실망시킨 적이 없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지니던 진명(眞名)대신에 홍염(紅焰)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도(刀). 그는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피처럼 붉은 불꽃을 피우는 자신의 애도(愛刀)를!
손이 하나 있다. 자신의 손은 분명히 아니었다. 자신의 손은 틀림없이 자신의 붉디붉은 애도를 꽉 쥐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태로 자세를 고쳐 잡고 있는 그에게 여 태껏 함부로 덤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목숨이 아까웠던 터이다. 하지만 저기 떠있는 저 손은 예외였다.
저기 저편에서 장난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손에게는 거칠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손은 거침없이 움직여 사내에게로 다가왔다. 두고 볼 것 없이 붉은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자신의 애도를 휘두른다. 그러자 자신의 애도로부터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거친 불꽃들이 피어올라 둥글게 벽을 형성하여 사내 자신을 보호했다. 사내 는 흡족해 했다. 사내는 확신했다.
‘그 무엇이라도 이 불꽃의 벽을 뚫고 나에게 도달할 수는 없어. 그러므로 나는 안전하다. 그러므로 나는 강하다.’
하지만 사내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한줌의 티끌과 같이 부스러지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너무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손은 그가 만든 불꽃으로 쳐진 방어 벽을 뚫고 다가와 그를 덮쳤다. 갑자기 새하얀 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 배, 두 배, 세 배, 손은 더욱 더 커지더니 곧 사내를 덮어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의 공격을 모두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그 손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끝내 손이 사내를 덮쳤다. 사내는 막을 수 없었다. 암흑이 주위를 덮쳤다.
잠시 후, 넋이 나가 있던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새하얗고 커다란 손바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서유기에 나오 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처럼……. 그리고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손바닥이 발랑 뒤집혔다. 사내도 같이 뒤집혔다. 세상이 전부 뒤집혀졌다고 사내는 생각했 다.
이 손바닥 뒤집힘의 동작 하나로 사내는 자신의 모든 것이 뒤집혀 지고 바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바닥 위에 있을 때 그는 강했다. 너무나 강하다고 하며 사 람들은 접근조차 꺼려했었다. 그 강함에 이끌려 자신에게 한 수만이라도 가르쳐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무리들도 수도 없이 많았다. 사내는 강했다. 그는 그렇게 인정 받고 있었고, 그 대우와 평가에 대해 매우 흡족해 했다. 강호상의 어떠한 인물도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내는 자신감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명예가 오색 찬연히 빛을 발하고 명성이 드넓은 천하를 울렸다. 그랬었다.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손바닥이 뒤집혔다. 갑자기 자신이 보잘것 없어졌다. 사내는 그 렇게 느꼈다. 손바닥 위의 세상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남을 가르칠 사부가 될 자격이 충분했었다. 하지만 손바닥 아래의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사내는 한없이 초라 해지고 왜소해지고 위축되어 졌다. 이제는 또다시 제자가 되어 사부를 모셔야 될 몸이 되어 버렸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는 방금 전만 해도 저 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저 밑에 있었다. 명예(名譽)는 그 광휘(光輝)를 잃어 버렸고, 명성은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수치스럽고 억울했다. 사내는 그러한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울부짖었다.
“으아아악, 난 인정할 수 없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이것은 한순간의 악몽일 뿐이야. 깨어나면 사라질 한순간의 나쁜 꿈.’
사내는 울부짖었고 그 울분의 외침 때문인지 아닌지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내는 자신이 뒤집혀진 세상에 거꾸로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내 주변 의 세계가 서서히 조각조각 붕괴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내도 함께 떨어졌다. 곧 완전한 무(無)의 세계가 그를 삼켰다. 사내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잃어버렸 다.
또르륵, 또르륵. 두 눈동자가 쉴새없이 굴러간다. 그 눈동자는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인데 관찰 대상자를 속속들이 파헤쳐 보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 다.
“왜 이렇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던지 옷이 다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인상은 팍 우그러뜨려진 채 헛소리 해 대며 경련을 떠는 모양새가 가위에 눌려도 아주 단단히 눌린 모양이었다. 큰 내상을 입지 않았으면서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 며 일어날 줄 모르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특이한 생김새의 관찰 대상자를 바라보며, 비류연은 참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꿈틀!”
갑자기 비류연의 관찰 대상이 꿈틀거리며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튀겨져 오르는 공 같이 격렬히 움직이던 관찰 대상, 즉 염도의 눈이 뻔쩍 떠졌다. 괴이 한 비명과 더불어..
“으아아악!”
염도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나빠도 아주 더럽게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매우 찝찝하고 끔찍하고 무서운 가위에 눌렸다가 겨우 깨어났는데 바로 눈 앞에 확 들어오 는 기묘한 얼굴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무슨 장난감 마냥 호기심 어린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놈의 면상은 그의 기분을 끔찍하게 상하게 했다.
그 얼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고, 그와 만나서 행해지고 이루어졌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절망적인 사실을 인식하고 인지하는 데는 잠시의 시간이 필요했다. 염도 의 머리는 상당히 혼란해져 있었던 터라 제정신의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여유가 필요했다.
마침내 염도는 인식했고, 곧바로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차라리 깨어나지 말 것을.. 내가 왜 깨어났을까?’
하지만 이런 후회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염도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방향과 방법으로. 날 염도는 비류연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무림의 고수가 애송이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