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14화 – 무조건 방법을 찾아라
무조건 방법을 찾아라
나중해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확인 절차였다.
자신의 목이 무사한지를 파악하는 조심스러운 작업.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나머지 생을 영위할 자격을 박탈당하지나 않았는지 확인해 보는 길이었다.
다행히 목은 무사했다. 몸체와 분리되지 않고 무사히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중해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붓 통에 꽂혀 있던 여섯 자루의 모필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굳어진 목을 돌려 등 뒤를 확인해 보니 벽에는 붓 한 자루가 석벽을 뚫고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루 부분이 아 니라 모필 부분이었다. 장난처럼 만지작거리던 붓을 손가락 한 번 퉁기는 가벼운 한 수로 바람처럼 날려 석벽에 박아 넣은 것이다.
이 한 수로 나중해는 비류연을 경시하던 생각을 머리 속에서 사그리 지워 버렸다. 아울러 자신의 부주의함과 경망함을 자책했다. 강호에서는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 절대 금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 직종에 종사하는 자신이 그런 실수를 범한 것이다.
나중해는 혼비백산했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전신에 오한이 들끓듯이 일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쥐어진 주먹에도 땀이 가득 고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아직도 붓 통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더 남아 있었다. 만약 조준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저 세상 행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실수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 세상에는 고의적인 실수라는 것도 명백히 존재했다. 비류연의 손이 다시 붓 통에 남아 있는 붓들 중 하나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가벼운 눈웃음을 동반한 미소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못 들어간다? 그래서 일 년을 더 기다려라?”
비류연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으로 희롱하던 붓을 거칠게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이 소리 는 나중해의 귓구멍을 뚫고 지나가 그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 부로 그의 수명은 운명의 정량보다 몇 달은 족히 줄어든 것만 같았다.
“일 년은 너무 길지. 기다릴 수도 없고……. 어떡한다?”
“…..”
“근데도 일 년을 나보고 기다리라고!”
“….”
“퍽!”
이번에는 왼쪽 귀 위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한 자루의 붓이 붓 통을 나와 석벽으로 날아가 박힌 것이다. 아직도 남은 붓의 수는 네 개. 나중해의 목숨을 끊기에 충분한 개수였다. 비류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살며시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비류연은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에다 머무르 게 한 채 딴청을 피우며 붓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보지도 않고 날려보낼 기세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나중해의 간은 작아질 대로 작아졌지만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더 조마조마해졌다. 그는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 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거 알아요? 난 기다리는 걸 싫어해요. 아주 싫어하지요. 지긋지긋하거든요. 생기는 것도 없고.”
“…..”
“근데 난 기다렸어요.”
“퍽! 퍽!”
두 개의 격타음이 동시에 울렸다. 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리며 하나도 아닌 두 개의 붓을 날려보낸 것이다. 목숨이 좌우될 만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아무렇지 도 않게 저질러 버리다니, 능력만 된다면 비류연의 뇌 뚜껑을 열어 머리 속 구조를 파악해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나중해였다. 하지만 힘과 능력과 재능이 미 진한 관계로 그는 자신의 장대한 계획을 아쉽게 접으며 꿈 속에서나 모의로 실행해 보기를 갈망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비류연의 손이 아직도 꼼지락대고 있었 다. 그의 손가락이 한 번씩 장난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일 년씩 깎여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는 나중해였다. 여전히 비류연의 얼굴에는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긋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그래서 혹시나 그런 경우에 처하게 되면 조금은 무리를 하더라도 가능성에 도전해 보는 좀 끈 질긴 성격이죠.”
미소 띤 얼굴로 하는 말은 조용한데 그의 손속은 말만큼 조용하지 못했다. 이것은 나중해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퍽퍽!”
다시 두 개의 붓이 그를 스치고 날아가 석벽에 꽂혔다. 이제 붓 통에는 붓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빈 통이 된 것이다. 비류연의 손속에 의해 조금이라도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에 모두 사용되고 남은 것이 없었다. 붓 통에 꽂혀 있던 붓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생명의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람처럼 비 로소 나중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안도는 좀 이른 감이 있었다.
붓 통이 다 비어도 비류연의 말은 끝날 줄 몰랐다. 여전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좀 집요할 정도로 끈질긴 면이 있었던 것이다.
“난 말이죠,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안 되면 되게 해야죠. 그게 당신 할 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난 분명히 그렇게 알고 왔어요. 철석같이 믿고 온 손님을 실망시킬 만큼 이곳이 형편없는 곳은 아니겠죠? 난 이곳이 알아주는 신용과 정보력을 가진 곳이라 해서 찾아온 거예요. 겨우 이 정도로 간단히 포기해 버리다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저놈에게 저런 말을 해 준 놈을 발본색원하여 세상 끝가지 쫓아가 반드시 요절내 버리고야 말겠다고 나중해는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거품 선전과 과대 포장 광고 는 자신과 조직의 이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것이지, 자신과 조직의 파멸의 꼬투리가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목숨부터 보전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었다.
“하… 하지만…….”
나중해는 어줍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때,
“쾅!”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비류연의 손이 붓 통을 후려쳤고, 이윽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쐐애액!”
“파바박!”
나중해는 다시금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죽음의 차가운 공포가 그의 전신을 덮쳤다. 머리 속은 텅 비어 버렸고 그 속에는 살아야 한다는, 죽으면 결단코 안 된다 는 일념만이 남았다.
붓 통이 산산조각 나면서 그 파편들 하나 하나가 무시무시한 흉기로 돌변해 나중해의 전신에 쇄도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급소나 그 근처에 맞는다면 나중해를 염 라전 구경시키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살상 흉기들이었다.
그는 막아낼 엄두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 었다. 열여섯 조각의 빛살로 화(化)한 붓 통의 조각들이 아슬아슬하게 나중해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파편들이 스쳐 지나간 흔적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골고루 명확하게 남았다.
옷은 너덜너덜해지고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은 처량하게 잘려 나갔으며 머리카락은 올올히 흘러내렸다. 그러나 극적으로 생명에 지장을 미치는 흔적은 없었다. 천운 으로 사신의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목 뒤로 흘려 보낸 것이다. 무사히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나중해는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한낮의 미몽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의 옷 위에 남은 열여섯 개의 상처만이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흔적들에서 피는 베어 나오지 않았다. 관대하게도 파편의 화살은 절묘하게 그의 옷감만을 베고, 그의 피부에는 손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비록 신체에 직접적인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이 일로 인해 나중해가 받은 심리적 타격은 막대한 것이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으로 한 바가지는 족히 넘을 만큼의 식은땀을 흘린 나중해는 아마 수명(壽命)이 십 년은 준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비류연은 “내가 방금 뭐라도 했었나?”라는 듯이 능청스럽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라? 부서져 버렸네요. 이를 어쩌죠?”
“괘, 괜찮습니다. 다시 하나 더 사면됩니다.”
나중해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데 아무리 그 자단목제 붓 통이 고급 문방 용품이고 아끼던 것이라 해서 감히 항의할 수 있겠는가.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목숨보다 아깝진 않았기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죠. 붓 통 구입처에 가서 항의 하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약해 빠진 불량품을 상품이랍시고 버젓이 팔아먹다니 정말 형편 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손해 배상을 받도록 하세요. 쯧쯧… 이 나라의 상도덕이 어찌되려 하는지…….”
비류연은 짐짓 개탄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강호 상계의 미래를 걱정했다.
“가증스러운 놈!’
솔직히 나중해가 손해 배상을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류연 자신이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와 줄어든 예상 수명을 생각하면 돈 으로 환산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황금으로 그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생명이라 했을 때 자신이 청구해야 될 금액은 자신의 숫자 개념으로는 근사치의 환산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나중해의 주장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나중해는 비류연의 이 일련의 행동들과 입가에 매달린 빙긋한 미소가 그렇게 가증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남의 수명을 기분 내키는 대로 축소시키 고 있는 그가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물론 나중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런 상황을 겪게 되면 그와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나중해의 이런 딱한 처지는 주위의 동정과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제 발등에 불똥 떨어진 염도로서도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천무학관에 입관해 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비류연의 등쌀에 시달리기 싫었다. 군자처럼 이것저것 남의 사정 다 신경 써 줄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비류연에게 시달린다는 것, 그것은 정말 귀찮고도 짜증나는 일로 수명 단축의 지름길이었다.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으로서 생명에 큰 집착은 없었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제명에 살다 죽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중해를 핍박해서라도 해결책을 찾아낼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해결 방도가 절대로 없다는 건가? 죽어도?”
염도는 특히 뒷부분을 힘주어 말했다. 정말 안 되면 그렇게 라도 해 줄 기세였다. 염도에겐 충분히 그럴 의사(意思)가 있었다.
역시 사람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면 감추어져 있던 잠재 능력이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증명이라도 해 주 듯이 나중해의 뇌(腦)는 그동
안에 축적되어 있던 모든 경험과 지식과 정보를 샅샅이 훑어 냈고, 마침내 상황 타계의 실마리를 건져냈다. 무한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생명의 동아줄을 움켜쥔 것 이다.
“아, 아닙니다. 이, 있습니다. 있고 말고요. 없을 리가 있습니까!”
다급하게 떠는 목소리로 나중해가 대답했다. 빨리 얘기 안 했다가는 냅다 박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술 더 떠서 목숨까지도 거두어 버릴 기세였기에 생각이 떠오르자 부리나케 얘기한 것이었다.
“호오, 그래요? 뭔가요?”
그의 긍정적인 대답으로 비류연의 눈이 반짝이며 생기를 되찾았다. 잠시 비류연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나중해가, 그의 얼굴에 회색이 도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질문은 비류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염도에 관한 것이었다.
“저기…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곽 대협께서도 천무학관에 입관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
미처 비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염도가 직접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던져 주었다. 그가 내뱉는 말은 정말로 짧았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의사 소통 방식일지도 모 른다. 가장 간결하고 짧게!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그랬군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무학관 입관자 자격 규정(天武學館 入館資格者規定)을 보면 학관 입관자를 만25세 이하로 엄격 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젊은 피가 아니면 필요 없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많은 나이에 입관을 하게 되면 자질면에서나 무공 성취면, 모두에서 여러 가지로 불리하기 때문에 연령 제한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승천무제 규정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만25세 이상 절대 사절!’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염도의 눈에서 살기 어린 매서운 적광이 번뜩였다. 그 눈빛에 나중해는 자신의 몸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목이 움츠려 들었다. 눈빛을 한 번 받은 것만으로도, 전신의 근육이 굳어지고 등줄기로 한기가 지나갔다. 번뜩이는 적광의 눈빛 속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 염도의 급한 성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예, 그러니깐… 그래서, 송구스럽지만 지금 곽 대협의 춘추로는 확실한 입관 자격 미달입니다.”
“그래서?”
“예, 그래서 곽 대협께서는 천무학관에 입관하실 수 없습니다. 관원으로서는 요.”
“그래서?”
염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져 갔다. 아마도 이야기를 질질 끄는 나중해의 모습에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의 급한 성격에 나중해의 비비꼬인 우회적인 이야기 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곤혹스럽고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열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염도의 상태를 알기나 하는지 나중해는 눈치 없이 계속 필요 없는 말들을 구질구질 이어나갔다. 결론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 먼 답답한 이야기였다.
“불초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곽 대협 정도의 신위를 지니신 분이 굳이 천무학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래서?”
“꽝!”
염도가 솥뚜껑 만한 무시무시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순간 바닥이 푹 꺼지며 나중해는 자신의 엉덩이가 그 충격파에 들썩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염도의 노기 띤 목소리가 3평 남짓 되는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드디어 참다 못 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염도의 폐부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노갈(怒喝)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 나는 천무학관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한 가지만 대답해라. 들어갈 방도가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살 것이고, 없다면 무사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한 번만 더 딴소리하다가는 번쩍이는 섬광의 순간과 함께 나중해의 목이 본체와 영영 분리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남창 내를 돌고 있 는 정보 중 3할을 장악하고 있는 나중해가 파악하기로는 염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 인간에게는 과거 여러 차례 이미 이와 같은 전적이 화려하 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덧없이 죽어 간 녹림 호걸들과 기분을 거슬린 죄로 절단 난 수 개의 흑도 문파의 전례를 생각해 볼 때 자기 자신 하나 요절내는 건, 식후 한 잔의 차 마시기만큼 간단한 일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중해는 두려움에 몸이 오체투지의 자세로 확 허물어져 내렸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아니 찾았습니다. 있습니다. 방도가.”
한 번의 협박에 너무나 쉽게 금방 나오는 방안, 도대체 믿을 수나 있을지…….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해도 그래도 좀 비범한 축에 속하는 나중해의 두뇌는 인간의 잠재력이 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맹렬한 회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말해 봐.”
“예, 곽 대협의 춘추는 이미 스물다섯을 넘기신 지 오래입니다. 그렇기에 일반 방법으로는 천무학관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규칙은 엄연한 규칙이니깐요. 그러 나 염도 곽 대협께서는 천하 5대 도객의 일인으로 무림의 명망이 높고도 높으신 분. 그런 신(神)과 같은 무위(武威)를 지니신 분이 천무학관에 겨우 문하생 따위의 신분으로 입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 어불성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염도 곽 대협의 무(武)는 천무학관 무사부들과 동등, 또는 그 이상입니 다. 이러한 사실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데 그러한 분이 어찌 한낱 문하생 따위로 천무학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흡사 기름을 칠한 것처럼 나중해의 혀는 지칠 줄 모르고 매끄럽게 돌아갔고, 온갖 미사여구와 아부가 그의 입으로부터 튀어나왔다. 나중해는 얼굴에 강력 무쌍한 철판을 깐 듯 열변을 토하며 아부를 해댔다.
“즉, 배우는 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일순간에 말소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말인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나중해의 말에 염도도 약간 흥미가 이는 모양이었다.
“지금 천무학관은 문하생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사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강호 여타의 문파에 비교한다면, 그 수는 그야말로 질에서나 수에서나 엄청난 것이지만, 현재의 천무학관 규모를 생각해 본다면 현재 무사부의 수로는 턱없이 모자란 상황입니다. 원래 소수 정예의 교육을 지향하고 있던 천무학관에 있어서 요즘 무사부 개인 당 할당된 담당 문하생들을 생각하면 너무 많은 수입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천무학관은 상승의 초고수 영입을 꿈에서마저도 목이 빠져라 바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관(天: 천무학관을 지칭하는 말)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사자(使者)들이 천하 각 처(
심산 유곡(深山幽谷)에 은거하고 있는 기인이사들을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고 있는 실정입니다.” 處)
여기까지 열변을 토하며 쉬지도 않고 내리 설명한 나중해는 지칠 줄 모르는 아부와 변설로 거칠어진 숨을 잠시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제 염도의 성질이 폭 발할 지 조마조마 했기에 나중해는 불쌍하게도 쉴 엄두도 내어 보지 못했다. 힐끔 쳐다본 염도는 지금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눈을 깜박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중해가 설명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왠지 이대로 설명을 멈췄다가는 염도의 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해는 지쳐 가는 자신의 혀와 안면 근육을 격려하며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염도 곽 대협 정도의 극상승 초고수이라면 천관(天館)은 쌍수(雙手)를 들고 열렬히 환영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나중해, 제 정보 매매 사업 30년 인생을 걸고 장담을 드리는 바입니다.”
나중해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늑골이 부서져라 탕탕 치면서 자신 있게 확언했다. 늑골이 부셔져라 가슴을 강하게 쳐대는 나중해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왠지 알 수 없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신뢰야말로 정보 상인의 가장 큰 무기. 역시 남창 최고의 정보 상인이라는 명성은 괜한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 했다.
“게다가 가르치는 자(者). 즉 무사부로서 천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일 년 열두 달 어느 때 어느 날이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천관의 무사부가 되신다면 문하생과 비교해 볼 때 막대한 혜택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천관 내에 문하생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개인 숙소가 주어 지고, 전담 시비(侍婢) 또한 부리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천무학관에서 제공되는 막대한 수고비와 명성, 그리고 백도 내라면 어느 문파의 구역이라도 간섭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생각이?”
“…..”
“흐흠, 아주 흥미로운 제안이로군요. 즐거워지겠어요.”
염도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대신에 비류연이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중해가 열변을 토한 상대는 염도였는데, 대답은 엉뚱하게도 비류연 쪽에서 나온 것이었 다. 나중해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해는 비류연을 경시하던 마음은 크게 가셨지만, 아직까지도 염도를 행동 결정권자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크 나큰 오판으로 지금 이곳의 실질적인 행동 결정권자는 염도가 아닌 비류연이며, 현재 염도는 비류연의 눈치를 살살 보아 가며, 조심스럽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중 이라는 것을 나중해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해 나중해의 어리석음을 추궁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었다. 강호의 누가 천하 5대 도객의 한 명인 염도 곽영희가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아무래도 비류연은 염도를 천관의 무사부로 집어넣기로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래서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대해 나중해에게 물어 보았다. 나중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시험을 칠 필요도, 시험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 면접조차 안 봐도 된다는 것이 나중해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만으로도 까다로운 절차를 모두 건너뛰고 단번에 무사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중해의 이야기였다.
“예, 염도 곽 대협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그냥 맨몸 하나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맨몸에 빈손으로 찾아가서 ‘나 무사부가 되고자 왔다.’ 이 한 마디만 하시면 됩니다.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완료되는 것입니다. 아니, 번거롭게 귀하신 몸을 그곳까지 행차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두 분께서는 숙소에 가셔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천관에 기별을 올려놓겠습니다. 아마 천관에서 맨발로 사람이 달려 올 겁니다. 그러면 곽 대협께서는 그들의 제시 조건을 들어보시 고 그들이 제시하는 대우가 마음에 드신다면 응낙하시고 모든 일을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즉 천무학관의 무사부가 되시는 것입니다.”
일 초라도 빨리 두 불한당을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진 나중해는 모든 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 스스로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자신의 발에는 족쇄를 채웠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옛말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나중해는 안 해도 될 뒤치다꺼리까지 맡고 나서게 되는 꼴이 되어 버 렸다.
“그래요? 그럼 너무 미안해서.
생글생글 잘도 웃으며,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이런 비류연의 태도에 나중해는 잠시 울컥했으나 현실을 직시하고 속으로 분을 삼키며 접대 용의 미소와 대화로 말을 이어나갔다.
“전혀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곽 대협을 위해서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이 일에 임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해요!”
나중해는 계속 염도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대답은 항상 비류연 쪽에서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비류연이 대답했다. 비류연과 염도는 수고한다는 이 간단한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안 떠났다. 그들은 왜 떠나지 않았는가?
두 사람은 뭔가 하나를, 그것도 아주 중요한 하나를 잊고 빠트렸던 것이다. 해서 둘은 돌아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눌러 앉았다. 잊어버릴 뻔했던 어떤 것, 그것은 바로 이곳에 그들이 찾아온 가장 큰 이유이자 목적인 비류연의 천무학관 입관 여부와 그 방법이었다. 염도의 입관 여부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중 요한 목적을 잊을 뻔한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동행(同行)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보기 싫은 궁둥짝으로 방석을 깔아뭉개며 비류연이 다시 나중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참, 이쪽은 그렇다 치고 난 어떻게 해요? 난 어떻게 천무학관에 들어가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