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23화 – 여긴 너무 지루해

비뢰도 2권 23화 – 여긴 너무 지루해

여긴 너무 지루해

하늘의 해마저도 가를 듯한 울창한 초록의 수림이 왠지 눈에 익은 곳.

빛조차도 뚫고 들어오기 힘든 짙은 수해(樹海)!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 여긴 어디……. 아아, 아미산!)

아련한 추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려 하는 게 왠지 눈에 익다 했더니 아미산 수련원의 뒷숲이 아닌가.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인 짙은 초록의 공간 사이로 두 개의 인 영이 희끗희끗 보인다.

(어, 저건 누구?)

(…….)

(어, 저건 궁상이! 어라, 령아도 있네!)

시야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익히 잘 아는 얼굴들이었다. 초록이 우거진 수림 속, 황혼이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좋아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어찌해야 될지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숫기 없는 못난 사내 녀석과 녀석 앞에서 보란 듯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고의적으로 청년의 심장 마비를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염한 자태에 의한 심장 마비로 죽음에 처할 위기의 청년과 그 청년의 생명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아름다운 소녀. 그 둘을 바라보는 자신의 입가엔 알지 못할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마음에 품은 소녀를 앞에 두고도 얼굴만 붉힌 채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사내 녀석은 자신이 익히 잘 아는 궁상 최고봉 남궁상이란 녀석이었다. 검(劍)에 는 소질이 꽤 있는 녀석이 어찌된 일인지 여자 앞에만 서면 허둥지둥 몸둘 바를 모르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녀석 앞에 보란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 고 있는 소녀는 분명 궁상이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 아미산의 진령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지?)

궁금증이 치밀어 올라 둘 사이를 좀더 자세히 바라보려 할 때 갑자기 눈 앞이 흐릿해 졌다.

(어?)

갑자기 주변의 사물과 경관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신기루처럼 장면이 바뀌며 눈에 익은 아이들의 모습이 떼거지로 나타났다. 물론 이제 스무 살에 가 까운 나이를 먹은 이들을 아이라고 칭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눈엔 그들은 단순한 아이들일 뿐이었다. 밥 태워 먹고 어쩔 줄 모르는 화산에 산다는 화 설옥이. 뱀 구이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면 몸을 빼려는 황보 씨 집안의 연화. 너무나 조용해 벙어리 같던 모용취. 빨래를 빠는 것보다도 빨래를 걸레로 만드는 데 더 소질이 있던 단목수수. 그녀는 빨래를 걸레로 만든 책임으로 걸레를 다시 빨래로 만들기 위해 피나는 바느질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걸레로 화(化)한 빨래는 그들 의 유일한 단벌 의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혀 얌전할 것 같지 않던 왈가닥 당문혜, 여자 주제에 기가 드세어 그 녀석 성질을 건드릴 만한 담을 지닌 사내 녀석은 없었다. 당씨 집안 셋째 아들 철영 이, 혹자에겐 당삼(唐三)이라 더 자주 불리는 녀석도 당문혜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 그리고 그녀와 정반대로 지극히 여성스럽고 유난히 요리를 좋아했던 남궁산 산. 이 애가 없었다면 합숙 훈련 기간 동안의 식생활 유지는 인간의 기본적 수준을 망각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에게 매우 소 중한 존재였다. 모두들 그리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사내들?

그러고 보니 사내 녀석들에 대한 기억이 좀 희미하구만. 역시 예쁘고 깜찍한 여자아이들에 비해 거칠고 반항적인 사내 녀석들에 대한 뇌의 기억 용량 할당량은 상 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

사내가 사내를 기억하는 데 뇌내(腦內)의 많은 공간을 활용해서 무엇에 써먹는단 말인가? 그럴 쓸데없는 공간이 남아돌면 차라리 산학 공부나 해 두는 게 나중에 훨씬 유익할 것이다. 그래도 기억의 단편들을 짜내 보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별 보길 좋아하던 무당의 현운, 나중엔 물 속에서 사는 걸 더 좋아했지. 스, 주제에 몰래몰래 고기 먹길 좋아하던 일공(空). 이 녀석을 ‘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놈은 스님이라 불릴 자격조차도 없는 완전 땡초이기 때문이다.

술을 물같이, 고기를 밥같이 뚝딱뚝딱 해치우는 땡초에게 ‘님’자를 붙여 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공은 그냥 ‘스’가 되었다. 그런데 하는 행동에 비 해선 너무 말이 없고 과묵했다. 암기 하나 제대로 던질 줄 모르는 주제에 괜히 자존심만 강했던 당철영.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목걸이 하나는 그나마 제대로 만들 줄 알게 된 녀석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꼴사납게 남에게 얻어터지고 온 녀석이로군.

꼴에 청성산에 있다는 검파의 제자이면서도 검 하나 제대로 못 다루던 청운. 물 위에서 춤추는 데 소질이 있던 곤륜산에 산다는 이자룡이. 거지 주제에 입맛이 까 다로워지려다 얻어터진 노학, 도대체 거지 주제에 뱀 구이, 구더기 볶음을 못 먹는다며 가리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도 이 녀석은 녀석들 중에서 제일 많이 만져 줬던 녀석이라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반항도 제일 많았었다.

그리고 도끼로 매화가 피게 한다고 깝죽거리던 화산의 천우. 나중엔 그래도 그 쓸데없는 노력이 통했는지 가상하게도 매화 한 송이가 피긴 핀 것 같다. 그리고 있 는 건 돈밖에 없고 아는 것도 돈 밖에 없던 금영호. 곁다리로 익힌 무공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 걱정되는 녀석이다. 그래도 자신에게 제일 많은 이윤을 안겨 준 녀석이라 밉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뭔가 할 줄 아는 게 있었나? 돈밖에 딴 건 생각나지 않는군.

이 몸이 땀 냄새 풀풀 나는 사내 녀석들을 이 정도까지 기억해 준 것을 그 녀석들은 삼 생의 광영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모두 모여 입을 모아 자신을 부른 다.

“사부님!”

“번쩍!”

비류연의 눈의 떠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햇살에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두덩이 위에 달린 눈꺼풀은 천근의 무게를 지닌 듯 다시 스르륵 밑으로 내려 앉았다. 아직 자신의 임무를 채 완수하지 못한 채 불려 올라왔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을 비류연이 놀랍도록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하여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그가 발휘한 의지력의 강도가 조금만 더 부족했더라도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당장에 꿈나라로 직행하는 것이다.

간신히 반개(開)를 유지한 부스스한 눈으로 비류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귓구멍이 근질근질한 게 상당히 불쾌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신경이 몹시 거슬렸다. 아직도 다 떠지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아닌게 아니라 몇몇 무사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질책의 눈빛으로 자신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수준은 넘어선 인물들인지 모두들 눈알에 뻔쩍뻔쩍 광택이 이는 듯했다. 아마도 그들 안으로 갈무리된 내공 탓일 것이다.

그제야 비류연은 마침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왜 서 있는지를 자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쏘아지는 주위의 눈총이 왜 그런지도 알 수 있었다. “아하, 여기는 천무학관 입관식장이었지…….’

그렇다. 여기는 장엄하고 신성해야 할 천무학관의 신입 관도 입관식장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입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 서서 졸음을 참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해된 지금,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다시 한 번 그의 무거운 눈꺼풀은 하강을 시도했다. 하지만 주위로부터 지속적으로 보내져 오는 혐오의 따가운 눈총 세례는 신경 둔하기가 절세인 그로서도 끝내 굳건한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이루지 못한 숙면이 못내 아쉬워지는 비류연은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비극적이 게도 그의 숙면은 방해를 받고야 만 것이다.

“내가 실수한 건가?”

비류연은 지금까지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고려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이곳 천무학관에 들어오려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일상의 무료함과 따분함에서 탈피하 여 뭔가 신선하고 상큼하며 뇌 속이 따끔거릴 만한 자극적인 일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가 아니었던가?

물론 여기에는 전에 제자로 두었던 아이들을 향한 그리움도 상당 부분 일조를 했다.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 지만……. 매일 사부로부터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를 당하다 보니 문득문득 그때 자신을 ‘사부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그리움’이란 낯선 감정이 생겨 버리고야 말았다는 의외의 사실에 비류연 본인도 내심 놀랍고 신기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는 있을까? 자신의 밑에 있을 때처럼 매일 얻어터지며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한때 그것이 비록 사기 행 각이라고 해도 – 자신이 가르치고 자신을 사부로 모시고 배웠던 아이들이 아닌가. 그리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류연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 지로 피와 살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인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비류연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달이면 달마다, 한 달 삼십 일, 삼백육십 시진, 천사백사십 식경(食頃), 이천팔백팔십 다경(茶頃), 이천팔백팔십 다향(茶香)! 즉, 밥을 쉬지 않고 먹을 수만 있다면 천사백 공기를 비우고, 차를 쉬지 않고 마실 수 있다면 이천팔백팔십 잔이나 마시고, 끈질기게 지켜볼 용기와 인내가 있다면 향이 이천팔백팔십개 씩 타는 걸 목격 할 수 있는 시간마다 주기적으로 그동안의 수입을 정산(精算)하여 사부 앞에 갖다 바치는 일이 얼마나 아니꼽고 배가 아팠던가! 그럴 때마다 매번 비류연은 느끼는 게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생이 사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착취와 혹사, 그리고 영구적인 학대로 마무리될 지 모른다는 위기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 사태의 위기 극복과 새로운 인생 설계를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아이들이 몸담고 있다는 천무학관에 들어가기로 결정, 아니 작정한 것이다. 자신도 언제까지나 사부 밑에 얽매여 종이나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눈 딱 감고 과감히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솔직히 이 필살 필생의 계획에 대한 준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차곡차곡 심혈을 기울여 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힘겹고 고달프며 아슬아슬한 일이었지만 불 굴의 정신력으로 괴물이나 다름없는 사부 영감쟁이의 눈을 피해 가며 비밀에 만전을 기해 놓고 있었다.

“이제야 말로 영감쟁이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독립해야 할 때!’

사부의 악마같이 예리한 눈썰미와 귀신도 울고 가는 날카로운 육감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깜쪽 같이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조작하고, 초과 노동을 통해 악착같이 돈을 빼돌렸다. 몰래몰래 산적 소굴을 털며 돈과 재물을 모은 것도 다 이때를 대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뭔가? 초반부터 상황은 자신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자들을 받아 가르쳤을 때처럼 비류연은 금방이라도 재미있는 일들이 무지막지하게 일어나기를 내심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야. 여긴 돈도 안 되는 것에 목숨을 거는 한심한 인간들이 득실대는 바보 소굴 같아’

지루하고 실속마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쓸데없는 곳에, 왠지 헛돈은 있는 대로 다 쏟아 부은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 의식 행사가 비류연은 도무지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그의 지극한 금전 지상주의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 이런 데다가 돈을 쏟아 붇는 것은 허공에 공돈 처바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한없이 어리석고 비경제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경제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비효율적인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현실의 절망감에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지만 비류연의 이런 절망을 제대로 헤아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오죽이나 답답하겠는가? 그냥 울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오직 하품만이 지루함과 따분함이라 불리는 감정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을 따 름이었다. 헛되고도 공허하기 짝이 없는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