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권 5화 – 불꽃의 도객(客), 염도
불꽃의 도객(客), 염도
표행은 길을 재촉하며 남창(南昌)까지의 거리를 계속해서
줄여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해는 이제 땅끝 지평선 중간에 걸린 채 붉은 석양을 짙게 뿌리며 밤의 어둠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제 곧 밤의 장막이 무대를 덮을 예정인 모양이다.
곧 검은 비단의 장막이 내려져 어둠이 찾아 들었다.
내려쳐진 흑의 비단은 그들에게 쉬어 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거스를 용기를 가지기 전에는 인간은 그녀의 말을 얌전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수의 무리를 이끌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오늘 의 종착지는 호남성(湖南省) 외곽에 위치한 마을인 주주(株州 : 주저우)였다. 중간급 규모의 번화한 도시로, 동정호에 접해 있는 대도시, 장사(長沙) 조금 아래에 위 치한 마을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길을 가면 남창(南昌)이 있는 강서성(江西省)의 경계가 나온다. 주주(株州 : 주저우)는 호남성(湖南省)과 강서성(江西省)의 경계 부근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워워, 모두 정지.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 가도록 한다.”
장우양이 한 객점 앞에서 말을 멈춰 세우고 모두에게 말했다. 객점의 이름은 ‘화운루’. 식사와 숙식이 함께 제공되는 곳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숙박 업소였다. 일련 의 무리가 객점 앞에 멈추어 선 것을 보고, 문 앞을 지키던 15살 가량 보이는 꼬마 점소이가 안으로 기별을 전하러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상당히 화려한 문양의 푸른 비단 옷을 맞춰 입고, 얼굴에는 알맞게 살집이 오른 통통한 아저씨가 서둘러 걸어나왔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복식으로 보나 생김새로 보나, 편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참으로 객점 주인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 화운루의 주인인 듯 보였다.
“아, 이런. 장 국주님, 잘 오셨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리시는군요.”
“나 대인, 오랜만입니다. 기별은 받으셨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귀 표국에서 보내 온 연락은 잘 받았습니다. 60인 분의 식사와 60인분의 잠자리를 확실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2번 창고도 완전히 비워 두었습니다.”
화운루의 주인인 나 대인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저희 객점을 많이 찾으시더군요. 60석을 남기기 위해 몇 분은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감사하오.”
장우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시를 해 보였다. 표국이 표물을 운반하며 길을 가다 보면 자주 지나가는 길과 마을이 있는 법이다. 쉬기 위해 들른 마을이 니 단골 객점의 존재도 있었다. 어느 한 곳의 객점을 단골로 삼아 서로 계약을 하고 그 마을을 들를 때는 정해 놓은 객점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하면 대우도 훨씬 좋은 것은 물론 훨씬 싼 가격으로 객점을 이용할 수 있다. 표행은 상당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므로 단골 객점의 규모는 자연 클 수밖에 없다.
번화한 도시에서 60인 이상의 숙식을 한꺼번에 해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객점들의 방이 모두 차 있거나 그 수가 모자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군다 나 방이 모자란다고 해서, 함부로 인원을 분산시켜 숙식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인원이 분산된다는 것은 그만큼 경비가 허술해 진다는 것을 뜻하며 표물의 위험도가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특정 객점을 정해 그곳과 계약을 맺고 거래를 한다. 여기 화운루도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물론 언제 묵게 될지는 주인이 신이 아닌 다음에야 모르는 일이므로, 번화한 도시에 만들어 놓은 연락소나 심어 놓은 연락책, 혹은 정보원을 통해 먼저 기별을 보 내 약속을 잡는다. 이것이 매우 발달된 표국에서는 서로 전서구를 이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중양표국에서 쓰고 있는 방법은 선발대나 연락책을 통해 기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좋다. 표물은 제2번 창고로! 교대로 서는 보초 3명 이외에는 모두들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도록!”
“예.”
표사 전원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표사들이란, 마을 한가운데서의 우렁찬 대답은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집단인가 보다. 국주 장우양의 명령(命令)에 따라 표국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을 2번 창고로 옮기고, 말은 풀어서 마구간에 맡겨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리고 정한 순 번에 따라 보초를 세웠다.
남들이 열심히,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노동을 하고 있을 때, 비류연은 장우양 함께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중이었 다. 비류연은 여전히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가장 붐비는 저녁 시간대. 이때쯤이면 항상 활기차고 시끌벅적해야 할 객점 안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침묵의 공기가 객점 전 체를 누르고 있었다.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객점, 그러나 이상하리 만치 조용했다.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속삭이는 듯한 귓속말로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조인 현처럼, 터질 듯한 공기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했다. 이 모든 현상은 단 한 명의 존재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사내의 존재 가 가장 소란스럽고 활기차야 할 이 시간에 고요와 정숙, 그리고 침묵을 한아름 안겨 주고 있었다.
이 객점의 2층은 가운데가 빈 사각형 모양으로, 난간이 달려 있는 빈 공간을 통해 1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화운루는 3층도 2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비류연은 1층 창가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내도 1층에서 자리를 잡고 음식을 들고 있었다. 그가 자리한 위치는 객잔 1층에서도 거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비류연도 장우양과 함께 물끄러미 그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한 사내였다. 타오르는 듯한 불꽃같은 머리카락, 짙은 석양 같은 눈썹, 그리고 거칠게 자라난 붉은 수염. 거기에다가 붉은 적단으로 옷을 해 입었고 허리에 차고 있는 특이한 양식의 손잡이를 한 도(刀)를 꽂아 두는 도집까지도 한결같이 붉은색 일색의 사내였다. 두 눈동자 이외에는 온통 붉은색 일색인 이 사내는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킬 정도로 온몸이 붉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사람이 붐비기로 유명한 북경 시장 한가운데에 던져 놓아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하기 짝이 없는 용모였다.
붉은색으로 휘감은 당당한 풍채에서는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오고 있어서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고수로서의 품격이 느껴진다는 것 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그가 주는 위압감과 존재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비류연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장우양은 갈등으로 인한 심각한 고민에 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우양은 사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특이하고 개성 넘치는 모습을 한 고수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특색 있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썹, 그리 고 붉은 수염은 그가 어떤 무공을 거의 극성에 다다르도록 연성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증표였다. 그래서 장우양뿐만이 아니라 객점 안에 있는 중양표국의 표 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내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이 무겁고 답답한 침묵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 명의 도객 중 한 명이었다. 진홍색 불꽃의 칼날, 사천 제일의 도객(刀客)이라 칭해지는 그를 모른다는 것은 장우양에게 있을 수 없 는 일이었다. 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서 아마도 비류연 하나뿐일 것이다. 지금 장우양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저 사내에게 가서 인사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것이었다. 보통 때라면 냉큼 다가가서 냅다 인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사가 뒤틀려 있는지 원래 험악한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찡그린 채 위압감마저 물씬 풍기면서 앉아 있었 다. 마치 건들면 뻥하고 터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그의 기운에 모두들 압도당해 객점 안의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 하고 불안감에 좁아진 마음 을 감싸쥐며 묵묵히 앉아만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우양은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호에서는 성질이 좋지 못하다고 널리 알려진 사내였기에 괜히 말을 걸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화풀이를 한답시고 시비를 걸어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인사를 안 하자니 나중에 그 일을 걸고 넘어 질지도 모르는 일이라 장우양은 이래저래 기회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내와 그를 어려워하는 장우양을 번갈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비류연의 눈동자가 문득 장난스럽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는 날아갈 듯 싱 싱하고 탄력 있는 생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분위기에는 티끌 만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역시 ‘긴장’과 ‘심각’이라는 감정과는 담을 쌓 은 비류연이었다. 무엇이 그리 기쁜지는 모르지만, 비류연이 싱글벙글 미소를 띄며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비공자. 갑자기 무슨 일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비류연의 느닷없는 행동에 깜짝 놀란 장우양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 저요? 잠깐 화장실이 급해서요.”
씨익,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비류연이 말했다. 난데없는 화장실 타령과 함께 비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점 문 밖으로 사라졌다. 장우양의 눈에는 그가 마치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것만 같이 보였다.
중양표국의 소국주이자 대(大) 청성검파의 촉망받는 인재인 장우강이 볼 일을 보고, 부총표두인 등여호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왔을 때, 식당 안에는 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부총표두 섬연창 등여호가 주주(株州) 제일 객점, 화운루의 주인인 나 대인과 숙박비에 대한 타협을 막 끝내고 돌아서려 할 때, 뒤쪽에서 볼 일을 보 고 돌아오던 장우강과 마주쳐 같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사람이 막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보니 자리는 모두 만원 사례, 그들이 앉을 자리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하나도 없을 만 큼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식당 안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주인인 나 대인이 실수한 것은 아니었다. 화운루 의 주인인 나 대인은 중양표국의 연락원에게 예약 받은 대로 정확하게 60석을 남겨 두었다. 중양표국이 쓸 탁자는 4인용의 원형 탁자 15개, 셈을 해 보면 정확히 60 석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리가 부족한가? 그 주범은 바로 장우양과 비류연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의 탁자를 차지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우강은 늘 장우양과 비류연과는 멀리 떨어진 다른 탁자에서 부총표두 등여호와 함께 식사를 했었다. 장우강과 비류연 둘 사이에 맴도는 분위기가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이 다. 장우강이 비류연에게 품고 있는 불만은 일촉즉발의 폭탄같이 위험했다.
그 불만과 증오의 크기는 정확히 측정하기에는 불가능했지만, 장우양이 어림짐작해 보기에 ‘증오에서 한 발짝 더’라고 느낄 정도였다. 그렇기에 불길함을 느낀 국 주 장우양이 아들을 비류연과 떨어진 장소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화운루의 장사 운이 잘 트이는지 모든 자리가 만원이었다. 등여호와 장우강은 자리 합석을 생각해 보았지만, 객점 안에는 그럴 자리마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유심히 합석할 만한 자리가 남아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 객점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보았다. 아니 그 자는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가 눈에 보여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무림 세력이 밀집되어 있는 와호잠룡의 지역인 사천 땅에서도 그 사내는 제일의 도객이었다. 물론 사천성 일대의 무림 세력은 도(刀)보다는 검과 기문 병기 를 위주로 했다.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사천성(四川省)에서 그를 무시하거나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없었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붉은 머리의 사내 곁으로는 아무도 다가가려 하는 자가 없었다. 탁자도 되도록 그와는 멀리 떨어지도록 애를 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하는 반경 2장의 원형 빈 공간이 그것을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등여호와 장우강이 온 신경을 집중하여 사천 제일 도객인 그 적색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중양표국에서 급여를 받고 일하고 있는 표사들은 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소국주가 자리가 없어 저리 서 있는데 그것도 부총표두인 등여호와 함께 자신들만 편히 앉아 있자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윗사람 눈 밖에
나서는 표국 생활을 편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윗사람에게 찍히는 것은 의외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옛부터 내려오는 격언에 “알아서 기어라!”라는 명구가 있다. 한 단체에 속해 있는 몸이라면 항상 상대방 의 심리와 행동 방식을 읽고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표사들은 서로 찌릿찌릿한 시선을 날카롭게 교환하며 희생물을 찾았다. 누 가 일어나 소국주와 부총표두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
누가 자신들을 이 난처함의 늪에서 끌어 올려 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제단에 바칠 희생물이 필요했다. 그렇게 책임을 미루는 듯한 시선이 잠시 계속 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꽃을 두 눈에 가득 담은 채 표사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불꽃튀는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모든 이의 마음에 극음진기가 실린 빙냉수(氷冷水)를 통째로 끼얹는 일이었으며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 심장을 팔딱, 간을 콩알만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쐐애애액!”
“팡!”
대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깃대가 날아와 거친 소리를 내며 사내의 탁자에 박혔다. 깃대의 끝은 원뿔형을 하고 있어 끝이 뾰족했는데, 바로 끝 부분이 붉은 머리칼과 수염을 가진 사내의 탁자를 뚫고 마루 바닥에 박혔다. 탁자에 박힌 깃대의 각도로 보아 깃대는 지붕을 뚫고 날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지붕을 뚫고 날아와 탁자를 가볍게 관통하고 그 힘의 여세를 몰아 끝이 마루 바닥을 꿰뚫은 것이다.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탁자 위에 있던 음식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뒤집혀 못 쓰게 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 접시와 술잔이 쏟아지려고 하는 찰나 – 붉은 머리털의 사내가 탁자를 한 번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텅, 하는 탁자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뒤집히려던 음식물들이 제 위치를 찾아 고스란히 아무 일 없었다는 모양으로 탁자 위에 착지했다. 자기로 만든 접시가 깨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착지 시의 요 란한 소리도 없었다. 가볍게 보이지만 오묘한 한 수였다. 지붕을 뚫고 날아온 깃대 상반부에는 붉은색의 깃발이 돌돌 말려 있었는데, 탁자를 뚫고 꽂히는 충격으로 인해 활짝 풀어져 사내와 객점 안의 모든 사람들 눈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화등처럼 커졌다. 입은 쩍 벌어져 주먹 하나가 충분히 들어가고 남을 정도였다. 모두들 경악했다. 그 깃발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정체 불명 의 탄성 – 허억! 하는 심장 멈출 때 지르는 소리 같은 – 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더니 이윽고 끝없이 침묵이 이어졌다. 붉은 바탕에 연꽃과 검, 그리고 가운데 중(中) 자, 아무리 뜯어보아도 틀림없는 중양표국의 표기였다. 자신들의 세력을 표시하는 깃발을 던졌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자 도전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부딪치는 이빨 때문에 더듬거려지는 말을 억지로 추스르며 장우강이 외쳤다. 하지만 책임 회피의 변명이 농후한 그의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 미 없는 몸짓이었을 뿐이다. 장내의 공기는 천산 산맥 정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공기처럼 싸늘해졌다. ‘집단 간 수축 증세’와 심장 박동 수 증가에 의한 혈압 상승 증상’이 동시다발적으로 객점 안의 손님들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객점의 자리 대부분을 점하고 있던 중양표국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붉은 사내는 우선 침묵했다. 그 침묵은 무언의 거석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를 짓눌렀다. 그 다음은 폭발할 듯이 불타는 살기, 순식간에 객점 전체를 뒤덮은 뜨거운 살기, 그것은 바로 분노였다. 그 분노의 살기 중심부에 핏빛같이 붉은 머리칼과 수염, 그리고 눈썹을 가진 사내의 존재가 있었다.
염도(焰刀)!
강호 사람들은 그를 공포와 경의의 염(念)을 담아 염도(焰刀)-불꽃의 칼날 이라고 불렀다. 강호 무림에서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천 제일 도객이 자, 저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무림인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백대 고수(百代高手)중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특별하지 않다면 누가 특별하겠 는가.
그의 순위가 몇 번째인지는 정확히 단정할 수 없지만 후 순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백대 고수라고 칭해진 사람들이 서로 직접 맞붙는 경우는 하늘에 별 따기처럼 극히 드문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알려진 사실과 목격자와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위를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백대 고수라는 것도 밖으로 알려진 사람들만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무수한 수(數)의 기인이사와 은거한 전대 고수 들이 있다고 하질 않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여 알려진 사람들을 토대로 하여 소위 백대 고수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백(百)이란 숫자는 강호에서, 그것도 고수를 꼽는 데 있어서 절대로 큰 수는 아니다. 오히려 극히 작은 수라고 해야 옳았다. 천무학관, 마천루, 그리고 백도 무림맹과 흑도의 무림맹인 흑혈맹의 주요 고수들을 대충 합쳐도 족히 백은 넉넉하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강호의 무력이 결집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네 단체에서 초고수로 알려진 인물들만도 그 수가 백은 금방 넘고 이 백은 조금 안 된다고 한다. 거기에 9대 문파와 5대 세가의 수장들과 실세들을 합치면 또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만 보아도 백대 고수의 대단함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대단하게 평가받고 있는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눈썹까지 모두 불꽃같은 붉은색인 까닭은 그의 독문신공이자 그를 백대 고수에 꼽히게 만든 토대가 된 화령신공(火靈神功)의 수위가 거의 극성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검염기(劍焰氣)!
강호에서 염도(焰刀)라 불리는 그가 구사하는 독특한 기(氣)이자 기(技)이다. 도를 사용하니 도기(氣)가 분명한데 왜 검(劍)자가 붙었는지 강호 사람들은 궁금했 다. 하지만 염도(焰刀)가 원래 있던 이름이라 전통에 따라 그대로 쓴다는 말에, 강호에서 똑똑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한다는 천관(天觀) 여량은 다음과 같은 추측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는 그의 독문도법인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은 도법이 아니라 검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대를 이어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패도함 과 극강함을 추구하는 화령신공에 정교함과 변화를 중시하는 검법(劍法)은 맞지 않는다고 판단, 변화보다는 힘과 강함을 중시하는 도(刀)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 다. 검염기(劍焰氣)는 아마도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이 도법이 아니라 검법이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해박함과 높은 신용도가 이런 주장에 무게를 더해 주었고, 강호 사람들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어느새 정론이 되었다. 이에 대 해 염도는 일언반구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침묵했다고 한다. 단순히 도염기(刀焰氣) 보다는 검염기(劍焰氣)가 더 어감(語感)이 좋았기 때문에 검염기가 된 것뿐이 라는 무명(無名)의 만담가 주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웃음 속에 묵살된 후 흔적도 없이 매장되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다들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검염기(劍焰氣)라 불리는 기(氣)이자 기(技)는 화령신공(火靈神功)의 공부(工夫) 영향으로 발생하는 특이한 기(氣)로서, 극강의 화 기를 담고 있어 이에 스치면 살이 타고, 베이면 전신이 불탄다고 한다. 정확히는 그의 독문신공인 화령신공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도법(刀法) 진홍십칠염(眞紅 十七炎)의 위력과 여파에 의해 발생되는 도기(刀氣)의 일종인데, 내려치는 홍염(紅焰)을 막아도, 도에 실린 검염기(劍焰氣)가 상대의 검을 통해 휘어져 들어가 상대 의 팔에 타격을 준다. 그의 독문도법인 진홍십칠염는 무림에서도 절정 5대 도법 안에 들어가는 막강한 도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도 확실히 50 위권 이하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바로 신법(身法)에 있었다.
그의 위력적인 신공(神)과 파괴적이고 극강한 도법(刀法)을 보좌해 줄 만큼 그의 신법은 정교하지도, 신속하지도, 환상적이지도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취약 점이자 옥의 티였다. 움직임, 특히 발놀림의 속도가 그의 무공에 비해 너무 느렸다. 특히 패도(覇道)한 도법에 가장 필요한 돌진력(進力)이 그의 신법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법이 신공과 도법에 따라가지 못하니 일신의 실력이 평가절하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신법이 약하다 해도 초절정 고수들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지, 보통 이상은 충분히 되었고, 그가 강하다는 사실과 백대 고수라는 사실에 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도법(刀法)과 신공(神功). 이 둘만으로도 충분히 강호 백대 고수 안에 들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영예로운 강호 백대 고수 안에 꼽히는 그에게는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정사(正邪), 흑백(黑白)을 막론하고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든 일반 평민이든 왕후장상이 든 염도 앞에서는 그의 불문율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는 정사 중간의 인물이었지만, 이 불문율에 대해서만은 용서가 없었다. 그의 금기(禁忌)를 지키지 않은 자가 무사했다는 예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가 흑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이유란 바로 그의 뭣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참을 인(忍)자(字)란 단어는 어릴 적의 열악한 교육 환경 탓에 배우지 못했는지, 그는 인내심(忍耐心)이란 이 짧은 단어 하나를 실천하지 못 했다. 훗날 좀더 개선된 교육 환경에서 참을 인(忍)자(字)가 들어간 인 내심(忍耐心)을 가르치려 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세 살 버릇은 여든 가고, 성질은 죽어서 유언장에도 남는다는 말을 입증해 주는 좋은 예였다.
화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그의 성질에 사람들은 무수한 두려움을 느꼈다. 거기에 적발, 적염, 적미의 거칠고 험악해 보이는 그의 인상이 합쳐져 그에 대한 두 려움과 공포를 배가 시켰다. 전에 도(刀)를 좀 안다고 염도(焰刀) 앞에서 도(刀)를 들고 깝죽대던 흑혈맹의 행동 돌격대 중 하나인, 흑호단(黑虎團) 단장(團長) 극도 (極刀) 가대난이 염도의 일격에 의해, 꼬챙이에 꽂힌 고기 산적처럼 애도(愛刀) 홍염(紅焰)에 걸린 뒤, 시간 잘못 재고 때를 놓쳐 장작불에 새까맣게 태워 먹은 생선 처럼 불타오른 것은 일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먼저 염도의 애도 홍염(紅焰)에 꿰뚫린 곳 주변의 옷이 불타기 시작하더니 진홍의 불길은 삽시간에 가 대난의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고 당시의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다.
종래에는 멀쩡했던 사람 몸뚱이는 온데 간데 없고, 새까맣게 타 버린 고기 덩어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극도 가대난은 그 당시, 도에 대해 어느 정도 명성을 얻 고 승승장구할 때였는데, 주제도 모르고 염도(焰刀) 앞에서 칼 빼 들고 도(刀)가 어쩌고저쩌고 아는 척하며 깝죽대다가 염도의 일격에 인생 고별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야 말았다.
이 일화는, 가대난이 몸을 담고 있던 흑도 무림 연합 연맹 즉 흑혈맹(黑血盟)이 침묵으로 일관한 채, 염도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얘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만큼 염도의 존재는 큰 것이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야기가 “염도의 눈자위 마저 붉어지면 주변의 풍경은 핏빛 붉은 석양 빛으로 변한다.”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핏빛 붉은 석양 빛이라고 하니 사람 몸에서 나온 피가 주변에 떡칠 되는 것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크나큰 오해다. 그의 무공은 극강의 화기 (火氣)를 담고 있는 무공이라 사람의 피마저도 한줌 재로 태워 버린다. 그러므로, 그의 무공은 의외로 피를 보지 않는 무공이다. 염도의 검기(劍氣)에 신체를 베이면 그 안에 실린 막강한 화기 덕분에 상처 부위가 태워진다. 때문에 사지가 잘려도 고열에 의해 혈관이 막혀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이다.
핏빛 붉은 석양은 상대의 몸이 불타면서 그 불길 때문에 주변이 온통 빨갛게 보이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그의 얼굴 중에서 유일하게 흰색을 띄고 있는 부분이 바 로 눈자위였다. 그런데 염도(焰刀)의 특징 중 하나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면 눈에 핏발이 서서 눈자위마저도 붉게 변하는 것이었다. 적발(赤髮), 적염(赤髥), 적 미(赤眉)에 적안(赤眼)까지 더한 그의 모습은 정말 지옥의 수라(修羅)같이 두렵고 괴기하다는 것이 목격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 번이라 도 본 이들은 모두 앞으로는 절대로 염도의 비위만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라고 굳은 결심을 했다고 입을 모아 합창했다.
적발, 적염, 적미에 적안까지. 그리고, 붉은 옷과 붉은 도, 그리고 피(血). 괴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괴기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아 직 적안(赤眼)의 최종 상태는 아니었다.
분노와 불꽃의 화신 같은 염도에게 지금 다가가서 인사 나누고 대화할 분위기는 맹세코 아니었지만 지금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탁자에 박힌 깃발은 틀림없이 중양표국을 상징하는 연화검기(蓮花劍旗)! 등여호와 장우강은 이 놀랍고도 끔찍한 사태를 어떻게 타계하고 무마시켜야 할지 맹렬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승패의 행방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무력은 절대 불가했다. 일단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그러기에 서로 눈짓을 교환한 후 용기를 내어 염도(焰刀)에게 다가갔다. 아직 그의 눈이 적안(眼)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쥐꼬리 같은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국주 장우양이 냅다 달려와서 염도에게 인사하고 머리 숙여 사죄를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근데 지금 국주 장우양은 이 갑작스럽고 놀라운 사태를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며 고민에 궁리를 거듭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장우강과 등여호가 나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이 붙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중양표국이 당하는 피해는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괴멸될 지도 모른다. 염도에겐 그만한 역량과 실력이 넘칠 만큼 충분했다. 일문(門)의 힘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들이 바로 강호 백대 고수들인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급하면 주워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마른침을 목구멍 속으로 애써 삼키며, 장우강과 등여호는 조심스럽게 염도라고 불리는 이 위험하 기 짝이 없는 사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끊어지기 반 보 전(前)인 비파(琵琶)의 현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였다.
그때, 이마에 수십 방울의 식은땀을 송골송골 맺은 채 조심스럽게 염도에게 접근하는 두 사람을, 재미있고 신난 듯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한 사 람이 있었다. 그는 현재 20세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현재 중양표국 남창행 표행에 끼여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름은 비류연이라 했다. 지 금 비류연이 위치하고 곳은 화운루의 3층 난간 부근이었다.
그곳에서 비류연은 고개를 내민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히 1층 문 밖으로 볼 일 본다며 나간 비류연이 왜 3층에 올라가 있는 것 인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입가에 매달려 있는 초승달같이 장난스런 미소의 끝머리만이 앞으로 누군가에게 닥칠 불길함을 예견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