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22화 – 우승의 행방

비뢰도 24권 22화 – 우승의 행방

우승의 행방

-생각지도 못한 암습

왈칵!

연비는 참지 못하고 피를 한 사발쯤 토해냈다. 투기장의 흙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이렇게 피를 토해본 게 얼마만이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이기긴 이긴 건가?”

손가락 까딱할 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이 너덜너덜한 넝마 조각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공격당했다가는 바로 끝장날 듯했다. 그래서 칠상흔의 모 습을 찾았다. 일단 앞에도 없고 좌우 옆에도 없었다.

몸 안의 기혈이 뒤엉키고, 피를 한 사발 토해냈고, 신경이 불에 타고, 사지가 찢어지는 듯 고통에 시달렸지만, 어쨌든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은 연비 자신이었다. 아 직도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지만.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살(殺)! 살(殺)! 살(殺)! 살(殺)! 살(殺)! 살(殺)!”

혈염제 칠상흔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자 장내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닥쳐!”

연비가 일갈했다. 원통투기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연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박력이 수천 명의 군 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게 장난인 줄 알아? 내가 왜 너희들의 재미를 위해 살인자가 돼야 하지? 이런 게 재미있나? 물론 재미있겠지. 하지만 난 죽일 생각 없어! 승자는 나야. 너희들이 아니고! 그러니 참견하지 마! 이자를 죽일지 살릴지는 내가 결정하니까! 불만있으면 여기로 나와. 그럼 상대해 주지. 지금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아직 바보들을 훈 계해 줄 정도의 힘은 남아 있거든. 그럴 용기가 없으면 거기에 찌그러져 있어! 죽이네 살리네 떠벌리지 말고. 이의있나?”

조용했다. 정말 조용했다. 저런 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폭언이었지만, 충격 탓인지 아무도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의없나 보군요? 그럼 승자 선언을 해줘도 될 것 같은데요, 젊은 해설자 씨?”

연비의 시선이 수십 장의 거리를 넘어 유진에 꽂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유진이 목청껏 외쳤다.

“드디어 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겉은 아름답지만 입은 험한 분입니다. 하지만 멋진 분이군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지요. 왜냐하면 그녀는 바로 승자니 까요. 자, 모두 승자에게 박수를, 승자에게 경의를, 승자에게 영광을! 그리고 승자에게 돈을! 삼십만 냥 대회 우승자! 연비! 우승 조! 미소저 연대!”

“와아아아아아!”

순간 고요하던 군중들 사이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가씨 멋져, 최고다! 나랑 사겨줘! 내 뺨을 날려줘. 난 궁둥짝. 등등등의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 왔다. 그러나 연비는 어느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했다.

미성공자 유진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드디어,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무패를 자랑하던 투기장의 제왕 혈염제 칠상흔이 패했습니다!”

연비는 환호에 답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연비는 속으로 외쳤다.

‘봤어요? 이 망할 사부! 난 안 죽었다고요!’

그 마음속의 외침 그대로 연비는 멋지게 살아남았다.

‘자, 그럼 이제 이 사람을 어떡한다?”

***

그때 기절한 칠상흔의 몸을 옮기려고 투기장 측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 하나와 나약한 인상의 사내 하나가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막 칠상흔의 몸을 실으려는 그 들의 손길을 연비가 막았다.

“잠깐!”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두 명의 사내가 돌아보았다. 어딜 봐도 의원이나 의생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한 힘꾼 같지도 아니었다. 불끈 솟은 태양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중지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다지 특색있는 반지는 아니어서 그들

의 소속은 나타내 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무슨 분부라도 계십니까, 소저?”

두 사람 중 눈썹 위에 상처가 있는 건장한 사내가 물었다.

“그 사람을 우리 쪽으로 데려가겠어요. 용건이 좀 있거든요. 그러니깐 두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이 사람은 지금 부상을 입었으니 당장 의무실로 데려가서 치료해야 합니다.”

허드레 일꾼 주제에 꽤나 언변이 유창했다. 게다가 배짱까지.

“싫다면?”

한 음절 한 음절 조용하지만 위압적인 무게를 그 위에 실어 말했다. 역시 수련한 자들답게 연비가 발산한 짙은 살기를 민감하게 느낀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연비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검은 표범의 으르렁거림처럼 보였다.

“설마 이겼는데 데리고 가서 튀겨 먹기라도 하겠어요? 그냥 무공에 관해 이야기나 한번 나눠보고 싶을 뿐이에요. 과거의 유명했던 사람이라고도 하고. 이 대회에 서 우승한 사람에게 그 정도 편의는 봐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일개 들것꾼들이 대회 우승자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하지만 한 시진이 넘도록 깨어나지 않으면 의원에게 보여야 하니 그때는 저희들이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해도 좋아요.”

연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저희들이 대기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말귀는 알아먹는지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칠상흔을 들것에 옮기려 했다.

“잠깐! 멈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비는 검은 질풍이 되어 두 사내를 향해 휘몰아쳤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인 연비가 한 손으로 건장한 사내의 오른팔을 낚아채더니 사정 없이 뒤로 잡아 뽑았다. 그 사내의 관절에서 으드드득, 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내는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왜, 왜 그러십니까, 소, 소저?”

나약해 보이는 남자가 식겁해서 벌벌 떨며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왜냐고? 물론 이것 때문이지.”

연비는 싱긋 웃으며 그 나약해 보이는 남자 앞에 오른 손바닥을 내보였다.

“헉! 그, 그것은!”

나약사내가 깜짝 놀라 외쳤다. 사내의 중지 가운데에 뾰족하고 날카로운 침이 솟아나 있었다. 그 바늘은 사내가 중지에 끼고 있던 반지의 뒷면에 달려 있었다. “요즘 들것꾼들은 희한한 걸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군요.”

반지의 침은 살을 찌르면 내부에서 약물이 분출되는 방식인 것 같았다. 바르는 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양을 투여하기 위해 만든 구조 였다.

“이럴 줄 알았지. 너무 호화로운 들것꾼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

마치 예상했다는 투였다.

“어, 어떻게?”

“아무런 표식도 없는 반지를 끼고 다닐 상판으로 보이지 않았거든. 게다가 나르려고 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고수야.”

여기서의 고수는 어디까지나 일반 들것꾼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고수를 의미했다.

연비는 사내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반지 안에 들어 있는 건 뭘까? 정말 궁금하네. 독? 아니아니, 그쪽도 들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니깐 강력한 수면약이겠군요. 흐흠, 갑자기 깨어나면 골치 아 프니 미리미리 재워놓자는 계획이었나요? 아냐아냐, 역시 입막음을 위해서 독인 게 분명해.”

“아, 아니 이, 이건 그저 수면제일 뿐입니다.”

“에이, 거짓말.”

우두둑!

쓸데없는 변명을 하려길래 다시 한 번 팔을 비틀었다.

“저, 정말입니다.”

“그래, 그럼 시험해 보면 되겠네. 찔려서 안 죽으면 수면제가 맞는 거겠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나약한 얼굴의 사내가 쉴 새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몰랐습니다, 참말로 몰랐습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사내는 수십 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연비는 그의 사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뭐, 됐어요.”

그리고는 낚아챈 사내를 심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연비의 등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순간 고개를 직각으로 숙이고 있던 사내의 눈빛이 날 카롭게 번뜩였다. 동시에 그의 몸이 날랜 늑대처럼 움직였다. 연비를 향해 쏘아가는 그의 손엔 어느새 소매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들려 있었다. 매우 숙련되고 군더 더기없이 깔끔한 솜씨는 지금껏 이 방법으로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암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너무나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암습 이라 대다수의 관중들은 이 암습을 눈치 채지 못했다. 소수의 절정고수들만이 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한 번 탄성을 터뜨렸다.

연비의 등을 노렸던 단검은 연비의 등에서 손가락 하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정지해 있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단검을 날을 막고 있었다. 나약한 사내를 잡고 있지 않은 나머지 손이었다. 그것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날아오는 칼날을 손가락 두 개만으로 잡아챈 것이다.

연비는 고개를 살짝 돌려 공포에 질려 있는 나약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어떤 이에겐 사신의 미소처럼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 단검의 날이 반 토 막으로 부러졌다. 연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마 이 들것꾼 나름대로 본능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눈에 띄게 피로해 보이고 피까지 한 사발 쏟았으니 승산이 있어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아무리 지치고 힘겹다 해도 연비는 이 거대한 비무대회의 우승자였다. 어지간한 고수라 해도 암습해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곤란했다. 명령을 내리는 자가 이 상황까지 고려했다면 절대로 어떤 수상쩍은 움직임도 보이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예상 밖의 상황이었고, 여기까지 명령을 내리지 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한 사내의 임기응변이었고, 그것은 명백한 실패였다.

연비는 이놈들을 떡이 되도록 팰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실 그렇게 만들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지금은 쉬고 싶었고, 이런 비겁자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칠상흔에겐 뭔가 비밀이 있다. 본인은 숨기고 싶어하고, 남은 알고 싶어하는 비밀이. 그는 그의 정체 이상의 것을 숨기고 있었다. 이제 그의 정체가 알려졌다. 까발린 것은 연비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을 막거나 비밀을 캐내고 싶어하는 조직, 혹은 조직들이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끄흐흑.”

두 사내는 비명만 내지를 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연비는 두 사람의 오른팔 관절을 가볍게 비틀어 뽑은 다음 각자의 오른손으로 서로의 뺨을 한 대씩 쳤다. 당연히 반지의 날카로운 바늘이 그들의 뺨을 꿰뚫고 약액 을 분출했다.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고, 그리고 곧바로 쓰러졌다. 확실히 효과 하나는 끝내줬다. 그러나 죽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곤 연비가 한마디 했다.

“쳇, 독이 아니라 수면제였나 보네.”

연비는 쓰러진 칠상흔을 어깨에 둘러멘 다음 천천히 반대쪽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 자신의 대기실에선 나예린이 쉬고 있었다.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 지 않았다. 그렇다고 칠상흔한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납치나 입막음을 하려고 사람들이 잔뜩 줄서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연비는 칠상흔을 들쳐 엎고 그의 대기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이 맞다면 그곳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연비의 예상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아니, 하나만 맞추고 둘은 예상치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칠상흔의 대기실에는 이미 혁중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연비의 눈이 재빨리 혁중노인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영감님, 저분들은……..”

“응? 소개시켜 줄 필요는 없겠지? 얼마 전에 투닥투닥 사이좋게 싸워본 사이니까.”

혁중노인의 존재까지는 예상했지만 설마 장인, 장모까지 함께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본인들한테 그런 소릴 하면 미친 것 아니냐고 길길이 날뛸 테지 만 말이다.

“우승을 축하하네.”

나백천이 먼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또 만났구나.”

부인인 예청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어흠, 저 그건 그렇고 대형, 이 녀석이 정말 그 녀석 맞습니까? 변해도 너무 변했지 않습니까?”

“그럼, 맞고말고. 자넨 그럼 내가 제자 하나 못 알아볼 것 같나? 제자라고 꼴랑 몇 명 있었다고 그걸 까먹겠나. 노부가 치매에 걸리려면 아직 멀었네. 그건 그렇고, 의식은 돌아왔나?”

“아직이요.”

“하긴 이 젊은 처자가 어지간히 두들겨 패놨어야 말이지.”

혁중노인이 기절해 있는 칠상흔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혀를 찼다.

“약속대로 숨은 확실히 붙여놨잖아요. 불평하지 마세요. 조건은 같았어요. 나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살려서 이곳까지 데려온 것만으로 자신의 역할은 끝이었다. 그 이외의 일로 이런저런 소리 들을 이유는 있었다.

“머리까지 심하게 두들겨 패서 바보로 만들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 말아요. 척 보기에도 튼튼하게 생겼는데요 뭐.”

연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장점이긴 하지.”

혁중노인이 한숨을 내쉰 다음 동의했다.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

“뭐, 옛날에 많이 패봤으니까.”

“아, 그러세요?”

별로 추억에 잠기면서 할 대사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칠상흔이란 사내고 꽤 불쌍한 과거를 가진 모양이었다.

그때 혼수상태에 있던 칠상흔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저러죠?”

“글쎄다?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