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16화 – 입맞춤하다가 죽을 뻔하다

비뢰도 3권 16화 – 입맞춤하다가 죽을 뻔하다

입맞춤하다가 죽을 뻔하다

천수탈혼 당평 노사의

‘강호에 존재하는 108가지 암기에 대한 사색’의

첫 수업은 여러 학생들에게는

배울 것 많은 훌륭한 수업이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정신을 집중해서 새겨듣는 다른 관도들과는 달리 비류연에게는 연신 하품만 나올 뿐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이었다.

‘왜 그 사람은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피를 토하듯 가르치는 것일까?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근데 왜 그걸 생소하게 얘기하는 것일까? 게다가 누구나 다 아는 이 야기에 하품 좀 했다고 철침을 던질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상대를 고슴도치로 만들고 싶다면 우선 정중하게 본인의 양해를 구해야 될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허 락할 리 만무하지만.’

천자조 담당 노사, 온화의 화신 옥현진인과는 상반되게 이곳 천관에는 염도처럼 불 같은 성질의 소유자도 많은 모양이었다. 세수 90세를 헤아리는 노인네의 혈기 왕성함은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염도와도 못 만난 지 며칠 됐지??

천무학관에 들어온 이후로 요 며칠 염도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자신을 안 보게 되었다고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염도를 생각하며 조만간의 방문을 결심했다. 헤어날 길 없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비류연은 기분 전환 삼아 천무학관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로 했다. 여기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지만 그 동안 수강 신청하랴, 동호회 둘러보랴, 이런저런 일이 많아 제대로 구경조차 못 했던 것이다.

아직 오행팔괘의 진법에 의해 구축된 건물들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지만 관광차 산보중인 비류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발견해 내는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취지하에 시작된 비류연의 발걸음은 팔괘오행의 법칙에 의해 그를 한 곳으로 이끌었다. 무심결에 도착한 하나의 장소.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자. 그림 같은 인공 호수와 아름답게 가꾸어진 녹음, 그리고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는 석순. 운치 가 있는 그 정자는 거울처럼 빛나는 수면 위로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정자의 이름은 운향정. 관내에서 특별히 오검룡 이상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신입 관도는 출입할 수 없는 제한 구역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지금입출’이라 적혀 있는 팻말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비류연의 시선이 정자 안으로 향했다. 그의 운명에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시선 이동이었다.

쾅! 그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영혼이 새하얗게 변하며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은 충격. 어찌 하면 그토록 아름답고 고귀할 수 있을까? 주위의 모든 사물을 퇴색하 게 만드는 극치의 아름다움. 한 폭의 그림 같던 정자의 운치도 그녀 곁에서는 단순한 사물에 불과했다.

밤하늘의 별을 무색하게 만드는 순수한 아름다움,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고귀한 기품. 하지만 비류연은 왠지 그녀의 눈이 밤하늘의 별들도 울게 만들 정도로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에 사내를 사로잡아 버리는 고혹적인 자태, 우아한 몸짓, 넘쳐흐르는 기품. 성스러움, 고귀함, 우아함, 고결함.. 그 어떤 단어로도 그녀를 표현하기에 적 당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억지로 표현해 보려는 만용은 그만 두고 비류연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솔직히 비류연은 그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마음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충실히 걸음을 움직였다. 그의 머리 속 계획표에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여자 문제에 관해서는 젬병이었던 것이다. 뭐, 인적도 보기 드문 아미산 깊은 산 속에 틀어박혀 살다시피 한 그였 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의 발걸음이 운향정 층계 계단을 넘어섰고 이제 비류연과 그녀 사이의 거리는 불과 두 발짝 전후였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그녀의 시선이 허락도 없이 운향 정을 밟은 이 무례한 사내를 향했다. 그녀의 눈은 너무 깊어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물끄러미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때로는 무식이 장사라고 비류연은 벼락 맞을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말았다.

사람은 보통 사랑에 빠지게 되면 소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반대로 물불 안 가리며 날뛰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균적으 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사모하는 여성 앞에서는 힘을 못 쓰고, 그 앞에만 서면 소심해진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 그리 고 나서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만 그건 이미 지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적용 사항이 비류연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이없을 정도로 망설임이 없었고, 주저함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목적과 감정 이 바라는 바대로 움직였다. 본능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단호함이 도에 지나쳐 그녀의 존재를 잠시 망각했다 해서 비류연을 비난할 일은 못 된다고 본다.

본디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어딘가 하나가 삐거덕거리기 마련이 아닌가. 사랑은 사람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는 가장 큰 감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 후에도 뭔가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사랑이 분명하니 다시 한 번 상대와의 관계를 고려해 볼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과감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비류연은 행동했다. 그의 행동은 정말 놀랄 만큼 비상식적이고 대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 감미롭고 황홀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 속이 유백색으로 채색되는 듯한 착각과 함께 그의 의식이 희미해짐을 느끼며 그는 황홀경에 빠졌다. 전신을 관 통하는 벼락 같은 전율, 코끝을 자극하는 은은하고 감미로운 향기.

비류연은 겁도 없이 자신의 눈 앞에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천상의 고귀한 선녀 같은 소녀의 입술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자신

을 입술을 무단으로 가져가 벼락 맞을 행동을 양심의 거리낌없이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붉은 보석 같은 입술과 맞닿았다. 그 입맞춤이 태어나서 처음 하는 여성과의 입맞춤인지라 비류연은 왜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있 지도 않은 종이 요란스레 울리는지 의아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고 또 그녀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모두 첫 입맞춤이었다. 달콤하고 감미로움은 순식간에 지나갔 다.

“스릉!”

은빛 섬광이 그와 그녀 사이에 환영(幻影)처럼 나타났다 찰나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둘 사이의 공간을 한 줄기의 은광(銀光)으로 가른 장본인 은 바로 비류연의 눈 앞에 존재하는 여인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내에게 입술을 강제로 – 놀라운 것은 별다른 저항은 없었지만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달빛을 깎아 놓은 듯한 그녀의 표정에는 별다른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분노도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그녀는 그저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로 말없이 검을 뽑아 휘둘렀을 뿐 이다.

그런데 은빛 섬광 같은 그녀의 검기가 그를 벤 순간, 비류연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움직임으로 그녀의 검기를 피해 낸 것이다. 물론 비류연이 한 발짝 뒤 로 물러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비류연의 몸은 아마도 상하 이단 분리를 면치 못했으리라.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내그어진 검. 그 섬뜩함은 전율스럽기까지 했다. 가공할 만큼 빠르고 매끄럽기 그지없는 일검이었다. 아마도 징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리라. 그녀의 검기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살기는 없었지만, 분명 정통으로 적중되었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비류연이 마술 같은 달콤함에 취해 그냥 멍하니 장승처럼 서 있었다면 낭패를 면치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검기를 완전히 피해 내지는 못했는지 그의 앞섶이 잘라져 그 뒤로 맨살이 보였다. 비류연이 싱긋 미소 지으며 조각처럼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실수하셨네요. 저의 뼈를 자르려면 더 깊이 휘둘렀어야죠. 이번에는 좀 얕았어요.”

백만 방울의 새벽 이슬을 모아 놓은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잔잔한 파문 같은 이채가 어렸다. 그 정도의 감정 변화도 그녀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놀라운 반응이 라는 것을 비류연은 알지 못했다. 청초함에 새벽 이슬을 섞어 그대로 빚은 듯한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석으로 만든 듯한 눈동자, 밤하늘을 담아 놓은 듯한 두 눈동자. 천공을 가르는 별님이 길을 잃고 그녀의 두 눈 속에 머물러 있기라도 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 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황홀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런 기분을 매일 매순간마다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류연은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꿈을 꾸 어 보았다. 하지만 그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방비를 했었나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그의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롱하기 그지없는 맑은 소리의 울림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그제야 비로소 비류연은 그녀 가 환상이 아니라 실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비류연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는 뭔가 하나가 부족한 것만 같은 상실감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점이 비류연을 아쉽게 만들었다.

“뭘요?”

“제가 검을 휘두르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미리 방비했었냐는 말이에요.”

그런 못된 녀석에게도 그녀는 경어를 써 주었다. 그녀의 말에 비류연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뇨, 전혀요. 어떻게 당신 같은 미인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할 여지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피할 수 있었죠?”

“당연히 실력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별빛을 얼려 놓은 것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그녀에게 떠올랐던 유일한 감정의 잔재도 함께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실수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죠.”

월광의 여신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싸늘하고 냉랭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것에 굴할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의 무신경함, 그리고 사상 최대 최악의 뻔뻔함은 세상이 알아주는 이름난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지 워지지 않고 있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시네요. 쩝, 아끼던 옷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찢어지고 말았네요. 하지만 달콤하고 황홀한 첫 입맞춤의 대가치고는 싸게 먹힌 거겠죠? 전 손해 보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두 번째로 한광 같은 그녀의 안색에 미미한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천관에서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알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경천동지할 그 일을 그녀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론 비류연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 이 인간이 뭔가를 제대로 파악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참, 아니군요. 입술을 뺏는 대신 마음을 빼앗겼으니 이쪽의 손핸가요? 이거 대단히 밑지는 장사를 하고 말았군요. 이건 저의 생활 신조에 어긋나는 일인데, 거 참.

그녀의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 같은 눈동자가 신묘하게 빛을 내며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백옥 같은 미려한 손가락이 붉은 보석 같은 입술에 가 닿았다.

“어떻게 이럴수가?”

상대의 바로 다음 행동을 읽지 못하고 있다니……. 그녀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상대의 안색이나 미세한 동작, 또는 상대의 숨겨진 버릇, 안색, 안광, 목소리 고저 등을 종합하여 한순간에 상대의 행동과 마음의 일부를 읽을 수 있는 그녀의 능력 이 실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원해서 얻은 능력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이 용안, 혹은 신안(神眼)이라 부르는 능력을 가지고 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실 수인 것이다. 말 그대로 그녀는 진짜로 실패의 대가를 맛보았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틀렸다. 그에게서는 통상적으로 일반 사내들에게서 느끼던 그 모종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텅 빈 허 공처럼, 하얀 백지처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만일 그의 조금 전 무례하기 그지없는 도난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그걸 그냥 방치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의 없이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 다.

그런데, 이 버르장머리없는 못된 도둑놈은 그녀의 예측을 먹통으로 만들고 그녀의 입술을 빼앗아 간 것이다. 영영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무형의 의미를 훔쳐 간 것이다.

“이 무례한 놈! 죽어라!”

비류연이 그녀와 장시간의 대화 단절을 유지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5장 밖에 떨어진 풀숲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빛처럼 한 명의 인영이 살기등등하게 튀어나오며 비류연을 향해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허튼 수작이 아니었다. 맹렬한 분노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분노로 인해 검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비류연은 소녀의 고귀한 첫 입맞춤을 훔친 대가로 죽음을 영원의 반려자로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 반만치도 없었으므로 일신에 지닌 능력을 발휘하여 검기를 피해 냈다. 비류연이 가볍게 옆으로 몸을 비틀자 미친 멧돼지처럼 돌진하던 사내의 검이 그의 몸을 미끄러지듯 비켜 나갔다.

첫 일격을 무위로 돌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인영의 얼굴을 보니 생긴 건 멀쩡한 놈이었다. 우민(愚民)들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는 절세 미남으로 평가받을 만한 용 모의 소유자였다.

“그 더럽고 추잡한 입술로 감히 그분의 입술을 빼앗아 가다니, 저주받아 마땅할 놈! 그 죄, 죽음으로 사죄해라!”

심혼을 태우는 듯한 분노가 그의 동공 가득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 자식이 왜 저렇게 흥분하는지 비류연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입맞춤 하나 가지고 너무 생색내는 거 아닌가요?”

“뭐라고? 이 무례한 놈!”

코 앞에 서 있는 청년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청색 비단 무복에 흰색 술이 달린 화려한 보검을 지닌 청년의 이름은 선풍검룡 위지천. 청성파의 초기재로 청성파의 미래를 한 몸에 짊어지고 있는 기대주였다. 그 의 가슴에 새겨진 칠검룡과 그의 소매에 수놓아진 천무구룡의 표식이 그의 실력을 대변해 주었다. 그런 전력의 소유자가 무엇 때문에 한 여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마치 호위하듯?

“훗! 자신이 가지고 싶은 걸 딴 사람이 가졌다고 해서 남을 핍박하는 건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그래서야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애가 억지 쓰며 우는 거랑 뭐가 틀 리겠어요. 부러우면 솔직히 부럽다고 말하지 그래요?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멀뚱멀뚱 서 있다가 미친 놈처럼 날뛰지 말구요.”

비류연은 계속해서 위지천의 속을 북북 긁었다. 긁는 족족 반응이 있어 오히려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닥쳐! 난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좋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 주위의 공기를 함께 마시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런데 우리들 모두가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만 품어 온 우리들의 신성한 우상을 그 더러운 입술로 모독하다니! 네놈의 그 더러운 입술과 혀를 반드시 토막쳐 육회 뜨고야 말겠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훌륭한 표본이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동반한 진심 어린 협박이었지만 비류연의 눈썹 하나 꿈쩍시키기에도 벅찼다.

“응? 아직 혀는 쓴 적이 없다구요. 생(生)혀 잡지 말라구요. 아쉽지만 아직 입술뿐인 얕은 입맞춤이었어요. 나도 경우와 양식이 있지,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급진도 로 나가진 않는다구요.”

양식 있고 경우까지 있는 인간이 무턱대고 처음 보는 여자에게 입을 갖다 맞춘단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얘기다.

“닥쳐! 닥쳐! 닥쳐! 더 이상 더 그 더러운 입을 놀려 그녀를 모독하지 마라!”

“난 그녀를 모욕한 기억이 없어요. 망상과 착각의 이단 합격술로 생사람 잡지 말라구요.”

“닥쳐라! 그녀를 모욕한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요? 이 잘려진 단벌 무복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꽤 질기고 튼튼한 옷이었는데…….’

비류연이 자신의 잘려진 앞섶을 들고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우민 기준 절세 미남 청년의 쌍심지가 곤두세워졌다. 진심이든 아니든 저딴 말을 지껄이는 놈을 두 눈 뜨고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너의 몸뚱이가 두 동강 났다면 모를까, 그걸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저런 저런 그런 슬픈 이야기를.. 그랬다면 그녀의 손에 피를 묻혔겠죠. 그건 너무 슬픈 이야기잖아요. 안 그래요?”

옆에서 둘의 대화를 무심한 얼굴로 말없이 듣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약간 의외의 빛이 떠올랐다.

“흥! 네놈 말은 꼭 그녀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피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구나. 그 하찮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누구의 목숨이 싸구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안 될 것도 없잖아요?”

자신의 생명이 지금 반 값 판매중이 아닌 것이 확실한 비류연이 대꾸했다. 아직 자신의 목숨은 확실한 신용 보증 아래 정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분노에 눈이 먼 상 도덕이 좋지 못한 손님과 흥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반 값도 제대로 못 받을 게 뻔한 어리석은 거래였다.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 더 이상 상대해 봐야 입만 더러워질 뿐이다.”

위지천이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비류연은 자신을 향해 오직 온갖 악의와 살의로 가득 찬 감정을 지치지도 않고 퍼부어대는 상대방이 왠지 불유쾌했다.

“난 새가 아니야! 그러니 벼가 무르익은 가을 들판에 날아드는 참새 취급 하지 말아 줬음 좋겠군요. 허수아비 선배님!”

“크아아아악! 문답무용! 죽어라!”

다시 한 번 위지천의 보검이 비류연의 전신 요혈을 향해 흩뿌려졌다. 위지천의 실력은 의외로 잘 제련된 보검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 니는 놈 – 어디까지나 비류연의 관점에서 치고는 상당한, 아니 엄청난 수준의 고수였던 것이다.

“절풍검기변(折風劍氣變)!”

매서운 검기가 사방에서 비류연을 향해 쳐들어왔다. 파르스름한 검기와 그 요혈을 노리는 매서운 각도가 결코 녹록한 실력의 소유자가 아님을 밝혀 주고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그의 검초를 당연하다는 듯 슬쩍 가볍게 피해 냈다.

“한수 재간은 있다 이건가?”

백의 사내가 냉소를 지으며 다시 검기를 연달아 뿌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공격이 무뢰배의 숨통을 단숨에 끝내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평 소 그의 자신감과 실력을 고려해 볼 때 갓 입관한 애송이 하나 처리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애송이 하나쯤 요리할 실력은 넘칠 정도로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당신이 먼저 도전해 보시지 그랬습니까? 그녀는 다가가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는 신기루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는 위지천에게 있어서 꿈이자 신기루였고, 또한 여신이었다. 감히 손 대지 못할 신성한 성역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네놈 따위가.”

위지천은 비류연의 조롱에 울분을 토해 내며 무지막지하게 검기를 뿌려 댔다. 하지만 비류연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그의 검을 요리조리 피해 냈다. 무수히 휘둘러 진 검의 그림자 중에서 아직 그의 옷깃을 스치는 데 성공한 칼날은 하나도 없었다.

“예로부터 미인은 용기 있는 자만의 것이라는 말 몰라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불변의 진리지요.”

“헉헉헉.”

위지천은 제풀에 지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 인해 그가 휘두르던, 사납기 그지없던 파괴적인 검기도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요? 더 이상의 발악은 무의미해 보이지 않나요?”

“아직…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네놈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로!”

돌연 사내의 눈빛이 진지해지더니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검극(劍戟)을 비류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검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환상 같은 새하 얀 그림자. 비류연은 그게 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강(劍剛)?”

어라? 환상처럼 피어올라 검에 맺힌 유형의 검기. 아직 형체가 확실히 고정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검강이었다. 마침내 신풍검룡 위지천의 살의가 살인으 로까지 발전되길 바라고 있었다. 결코 적당히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랑에 눈먼 남자는 역시 한 가지 유형으로 귀착되는 모양이었다.

““바보군!”

비류연이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그 조롱마저도 지금의 위지천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천원삼절검격(天元三絶劍擊)!”

동시에 사내의 검이 부르르 진동하며 수십 갈래의 강기(剛氣)를 뽑아 내었다. 물론 강기가 노리는 목표는 오로지 하나, 바로 비류연의 치명적인 죽음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필연이라 말할 수 있었다. 천무학관에서 요즘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는 청성파 최고의 초기재와 그가 판단하기에 뿌리를 알 수 없는 애송이 비류 연의 대결!

빙백봉(鳳)의 가장 큰 추종자이자 자처해서 그녀의 수신 호위 대장을 맡고 있는 천무구룡의 일인 선풍검룡 위지천이 그의 고귀한 여신을 더럽힌 악질적이며 추잡한 오물을 이 세상에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의 여신을 건드린 대가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절대의 죽음. 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에 대해 위지천은 절대 타협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상대가 이 결정에 동 의한다는 가정은 둘째 치고, 만일 거절한다면 강제로라도 집행할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그에게는 그만한 실력과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까지는.

위지천은 그녀를 둘러싼 고귀한 광휘에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주위를 돌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성역에 침범한 최초의 침입자를 살려 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의 성역을 진흙 발로 짓밟은 비류연의 죄는 능히 능지처참 감이었다. 그의 실력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표식인 가슴에 수놓아진 칠검룡(七劍龍)의 문양. 이 천무학관 내에서도 칠검룡의 위(位)를 받고 있는 사람은 단 백 명뿐이었지만 비류연은 그걸 알지 못했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천원삼절검격은 세 번 연속으로 검강을 뿌려 댈 수 있는 상승의 기술이었다. 그 나이 또래에 세 번 연속해서 검강을 뿌려 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 의 실력은 출중했다. 자신에게로 흩뿌려지는 검강의 다발 앞에서도 비류연은 동요하지 않았다. 수십 줄기의 검강이 수많은 변화와 함께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기 직 전, 그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순간 그의 몸이 세 겹으로 겹쳐 보였다.

봉황무(鳳凰舞) 환영비상(幻影飛翔)의 장(章) 비전기(秘傳技) 삼첩영(三疊影)!

시전자의 고속 이동에 의해 발생하는 잔상이 세 겹으로 겹쳐 보이는 환상의 경지. 바로 삼첩영의 절정이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천원삼절검격의 제일절 제일격이 비류연의 몸을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위지천은 자신의 손에서 살이 갈라지고 뼈가 끊기는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폭발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제이절 제이격의 검강이 비류연의 몸에 작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헛고생이었다. 제이절 제이격은 그 폭발적인 검세에도 불구 하고 만장단애에 떨어진 한 조각의 돌멩이 같은 허무함만을 그에게 안겨 주었을 뿐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는 전신의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 마지막 제삼절 제삼격의 절기를 펼쳤다. 이번만은 반드시 성공하길 빌면서…….

“제삼절(第三絶) 팔검검강격(八劍劍剛擊)!”

여덟 줄기의 매서운 검강이 다발을 이루며 비류연의 몸을 난자했다. 이번만은 위지천도 자신의 공격 성공을 굳게 믿었지만 순간의 희열도 잠시, 곧 그의 믿음은 파 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형체도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세 개의 신형 모두 손에 잡을 수 없는 환상이었던 것이다. 셋 중 하나가 실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쓸모없는 환상을 향해 막대한 기를 소모하고 숨을 씨 근덕거리며 헉헉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까운 진기와 체력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막대한 내공의 소모로 인해 녹초가 된 그를 비류연은 여유작작한 눈빛 으로 쳐다보았다.

목표를 적중시키지 못한 공격은, 그 공격이 어떠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다. 비류연의 신형은 선풍검룡 위지천의 3장 밖에 거짓말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그의 분뢰수가 단단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 하면 서러워할 기공이지만, 그는 맨손으로 검강에 대항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빛에 기광이 흘렀다.

비류연의 오른손이 가볍게 떨리며 환상 같은 은광(銀光)의 그림자가 그의 소매로부터 뻗어 나왔다. 천무학관에 들어와 처음 펼치는 절기 비뢰도였다.

비뢰도(飛雷刀) 검기(氣) 회선용권(回旋龍卷)의 장(章) 선풍뇌절!

은빛 섬광의 유성 같은 제비꼬리가 빛살처럼 날아가 회오리바람처럼 위지천의 우수(右)를 휘감기듯이 타고 올라갔다. 위지천은 무방비한 상태에서 어이없게 검 객의 생명 같은 우수를 내주어야 했다. 승부는 일격 단발로 결정났다.

피묻는 옷소매가 갈가리 찢겨지며 핏물 방울과 함께 허공중에 비산되었다. 처음부터 은섬연미(銀閃燕尾)의 목표는 위지천의 목숨이 아니라 그의 오른손과 그곳에 쥐어진 보검이었던 것이다.

선풍뇌절의 타격에 위지천은 강호출두 이후 최초로 자신의 검을 땅바닥에 뒹굴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 한 줄기 은빛 섬광에 담긴 힘은 막강했던 것이다.

“손목은 남겨 뒀습니다. 검은 다시 잡아야 하니까요…….”

무수한 혈선이 나 있는 오른팔을 붙잡고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위지천을 보며 비류연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아쉬운 대로 만족스런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럼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죠.”

이제 위지천에게서는 완전히 신경 끈 비류연은 운향정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를 향해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서는 감정의 변화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운향정 밖이 소란스러워지며 사람들이 몰려오는 낌새가 느껴지자 비류연은 얼른 봉황무의 신법을 발휘하여 신속하게 몸을 숨겼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 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비류연이었다. 괜히 그곳에 있다가 어처구니없이 말려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사람들이 운향정에서 치솟은 느닷없는 검강의 빛에 이끌려 도착했을 때, 비류연의 자취는 이미 운향정 반경 10장 안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다만 선혈로 물 든 오른팔을 부여잡고, 통곡의 괴성을 질러 대는 위지천을 목격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던 일을 놓아두고 올 만큼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설마 천무구룡의 일인이자, 구정 삼인방의 일인이던 선풍검룡 위지천의 그런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게 될 줄이야 꿈에라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이유를 물었지만 위지천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한 가지 다행하면서도 절망적일 정도로 불행한 일은 자신의 이번 추태를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인 그녀가 홍옥 같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일언반구도 내비치지 않 는다는 사실이었고, 그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일은 자신의 한심한 이번 추태를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 을 정도로 위지천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피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관 주위의 산보를 재개(再開)하던 비류연은 자신이 저지른 중대한 실수 하나를 마침내 깨닫기에 이르렀 다. 뒤늦은 득도였다.

“앗! 이런.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 봤네!”

이런 초보적인 대 실수를 하다니. 다음 번에 만나면 꼭 통성명을 나눠야겠다고 비류연은 결심했다. 미미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평화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