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18화 – 돌아오다 (3권 끝)

비뢰도 3권 18화 – 돌아오다

돌아오다

비류연은 지금 막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하게 지나간 하루였다.

아침에 있었던 천수탈혼 당평 노사의 ‘암기 응용 수업’에서 시범용 기관 암기가 폭발한 일과 그 파편에 관도 3명이 다친 것을 빼면 말이다.

천수탈혼 당평은 이상하고도 위험한 물건만을 관심 가지는 나쁜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당평 노사는 용수철과 화약을 동시에 이용한 기관 암기의 개 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 신제품 실험을 학생들에 맡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때문에 사고가 잦은 편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 비류연의 신경을 긁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어쩐 일인지 자신의 주위에 파리가 자꾸 꼬이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를 유혹하는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 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먹을 게 있다고 자신의 주위를 뱅글뱅글 정신 사납게 맴도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체하고 있자니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주변에 꼬이는 해충을 박멸할 수 있을지가 요즘 들어 생긴 고민이었다. 고민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만한 인내력이 애당초 없는 그였기에 빨리빨리 처리해 버릴 계획을 잡아 놓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높디높고 햇살이 상쾌하기까지 한 오후, 느닷없이 천무학관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모이고, 곧 군중이 되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는 것일까? 몰려드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막 진법 수업으로 자신의 두뇌를 가혹하게 혹사시키고 오는 길인 비류연이 효룡에게 물었다. 아직도 그의 머리 속은 진법 설치에 필요한 음양 오행 이론과 팔괘, 그리고 수리 산술 계산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다.

“글쎄?”

효룡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 시간에 대정문이 소란스러워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일 이 시각에 정문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었다.

“한번 가볼까?”

“좋지.”

거절할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는 궁금한 걸 오래 품고 있으면 병이 된다고 믿고 있는 왕성한 호기심과 지적 탐구심의 소유자였다.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관계로 인간 장벽을 뚫고 들어가서 안을 확인해 보는 일에는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었다. 간신히 인간 장벽을 뚫고 최후의 저항선에 목을 들이밀자 수십 명의 관도들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행색으로 보아 여러 날 이곳 천 관을 떠나 있었던 사람들이 분명했다. 너덜너덜해진 신발과 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무복이 그 사실을 잘 알려 주고 있었다.

“누구죠?”

연신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환영하고 있는 관도 한 명을 붙잡고 비류연이 물었다.

“자네 신입인가 보군.”

환호성을 울리던 관도 한 명이 비류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뻔히 알면서 꼭 확인해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도대체 그런 헛고생이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인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잘 보게.”

그 사람의 손가락이 무리를 가리켰다. 물론 비류연은 잘 봤다. 하지만 아무리 자세히 뚫어지게 쳐다본다 해도 뇌가 없던 정보를 만들어 전달해 줄 리 없었다.

“잘 보고 있어요.”

그 관도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 아무 것도 못 봤군. 좀더 자세히 보게.”

그냥 가르쳐 주면 될 것을 뭐 하러 빙빙 돌려 말하는 건지……. 여전히 그 사실이 불만이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다.

“16명이군요.”

또 한 번 그들을 쳐다본 비류연은 그들이 남녀 혼성의 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 비율이 남자가 9명, 여자가 7명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쯧쯧, 여전히 자네는 아무 것도 못 봤군.”

“전 장님이 아닌데요? 자세히 봤다구요. 더 이상 뭘 보라는 겁니까?”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 같은 사람을 보고 눈 뜬 장님이라고 한다네.”

비류연의 마음에 쏙 드는 평가는 아니었다. 그 관도의 검지손가락은 무리의 가슴을 향해 있었다. 뭐가 보이냐는 무언의 시위였다.

시력이라면 회전하며 날아오는 구슬에 빼곡이 적힌 시(詩)한 수도 읽어 낼 수 있는 비류연이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눈 뜬 장님이라니……. 그가 장님이라면 이 세상에 장님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시력을 의심당하다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이 바로 유명한 3학년 청룡단이라네! 천관 최고의 인재들이지.”

그러고 보니 그들의 왼편 가슴에는 칠검룡의 수가 놓아져 있었다. 삼, 사 검룡 수준의 실력만 되어도 보통 문파의 적전 제자보다 뛰어난 실력이라는데, 칠검룡이라 면 입이 아프고 혀를 고달프게 놀릴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항! 그렇군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간다는 투였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군중들의 시선은 청룡단이 아닌 그들 등 뒤에 아직 활짝 열려 있는 대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엔 뭐죠?”

비류연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촐랑거렸다. 청룡단의 시선도 그들의 등 뒤를 향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좌중들의 환호성이 더 커진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승리자처럼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던 청룡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은 지금 막 천무학관의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 일련 의 무리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청룡단의 얼굴은 심한 비바람에 깎인 화강암처럼 굳어 있었다.

“아니!”

비류연의 눈이 경악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막 정문을 들어서는 16명의 인물들은 강호 정세와 천무학관에 대해 거의 백지나 다름없는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었기 때문이다. 비류연과 그들의 관계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피보다 진하고 금강석보다도 단단하다는 사제의 인연으로 묶인 관계였던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연출한 그들의 정체는 바로..

“주작단이다!”

비류연의 오른쪽에 모여 있던 관도들이 동시에 외쳤다. 역시 그들은 비류연이 지난 여름날 끊임없이 부려먹고 착취했던 그의 사랑스런 그리운 애제자들이었던 것 이다.

“그 동안 찾아 봐도 없더니 밖에 나가 있었군. 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가 있나…….”

허탈한 어조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가 이곳 천무학관에 어거지를 써서 들어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존재였다. 자신을 위해 철저히 희생과 봉사를 하던(?) 그들을 못 잊어 천관에 들어왔던 것이다. 절대 그들을 다시 우려먹거나 부려먹기 위해 들어온 게 아니었다. 어쩌면.

“주작단이 청룡단과 동시에 귀환했다.”

어떤 무리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무엇을 불신하고 있는 것인가?

“그럼 승부는 어떻게 되는 거야?”

거대한 체구를 지닌 흑의 무복의 사내가 옆에 있던 깡마른 인상의 황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 둘의 대비는 뚱땡이와 홀쭉이를 연상케 했다.

“반 각이라도 빨리 들어온 청룡단의 당연한 승리가 아니겠는가.”

당연한 것 좀 물어 보지 말라는 투로 홀쭉이 사내가 뚱땡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아닐세. 비록 청룡단이 먼저 학관 정문을 밟았다 하지만 어찌 반 각 차로 승부가 났다 할 수 있겠나.”

뚱땡이는 고개를 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안 되나? 승부는 승부일세.”

“설마 자넨 걸음이 남보다 반 각 빠르다 해서 그들이 더 우수한 무공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얼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닐세. 어쨌든 이번 평가의 규칙은 누가 먼저 과제를 수행하고 빨리 학관으로 귀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세. 그리고 그 조건에 충족되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청룡단이지.”

홀쭉이 청년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깡마른 그의 체형 때문에 그의 얼굴이 더욱 신경질적으로 비쳤다.

“고맙네.”

뜬금 없는 덩치의 말에 홀쭉이 청년은 의아했다.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가? 내가 자네의 처참한 이해력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줘서 그런가? 그 일이라면 괘념치 말게.”

홀쭉이의 말에 덩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참이나 잘못 짚었다는 태도였다.

“아닐세, 자네의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넬 얼간이라 불렀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세. 고맙네.”

홀쭉이 청년의 눈매가 뱀 눈처럼 가늘게 좁혀졌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꼴이었다.

“나의 죄의식을 덜어 주었으니 고마워해야 될 일 아닌가. 큰 선행 하나 했다고 여기게.”

“…..”

능글맞은 덩치의 말에 홀쭉이는 말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저 인간을 상종하지 말자고 굳게 결심했다. 아무래도 말싸움은 홀쭉이 청년의 판정패로 막을 내 린 모양이었다.

점점 더 좌중들의 언쟁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여름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하계 합숙 훈련에서 돌아온 주작단 일행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왠지 집념과 야 성이 함께 빛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그들의 정신과 육체는 벼리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섬뜩한 예기는 천하 명검을 무색하게 할 지경이었다.

하계 합숙 훈련을 떠나기 전만 해도 청룡, 백호, 현무, 주작 4개 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던 그들 주작단이었지만 아미산에서 돌아온 그들은 이미 예전에 천관에서 알 던 그들이 아니었다. 그해 연말 평가 시험에서 그들이 보여 준 무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백호단과 현무단을 가볍게 제압하여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 준 그 들은 천관 최고의 화제로 급부상했다. 이제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것은 3년 차 최고의 기재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콧대 높은 청룡단뿐이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무당산에서 3개월 간 수련을 쌓고 무공에 정진해 온 청룡단도 시작했을 때의 넘치는 자신감과는 달리 필사의 각오와 노력 끝에 무승부로 승부를 마무리하는 데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단 상황은 종료되었다. 누구도 예측치 못했던 결과였다. 설마 4개 단 중에서 최하 순위였던 주작단이 최고라 불렸던 청룡단과 무승부를 이루어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강호 무림의 승부에 무승부란 있을 수 없었다. 끝나지 않은 결말에 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청룡단과 주작단은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르게 되 었다.

다음 평가의 내용은 개인 대 개인의 승부가 아닌 집단 대 집단의 승부였다. 천관 측에서 제시한 과제를 어느 쪽이 먼저 해결하고 무사히 천무학관에 다시 귀환하는 가 하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원래 과제 수행으로 관내를 벗어나 강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3학년 이상에게만 해당되고 주어지는 일이었는데 특례로서 이번 일이 인정된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은 오래 걸렸다. 엄중한 심사를 거쳐 선택된 2가지 각기 다른 과제가 – 그러나 심사에 의해 그 난이도는 동일하다 판단된 – 예상 외의 시간을 잡아먹 음으로써 3개월이란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는 형편없었다. 이번 평가의 가장 큰 목적인 두 집단의 실력 고하를 가름하는 데 실패해 버린 것이다. 이번 평가를 통해 천관 3년생 최고의 실력자로 등극하려던 쌍방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하! 그렇게 된 거로군요.”

인산인해 속에서 감동의 조우를 한 임성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비류연은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었다.

“우두둑!”

“무슨 소린가?”

비류연의 손가락 마디 관절에서 발생한 난데없는 소리에 임성진이 의아함을 표시했다.

“손가락 관절 운동 소리죠. 일종의 준비 운동이라고나 할까요.”

“누구 팰 일이라도 있나? 꽤나 준비 운동을 살벌하게 하는군.”

비류연이 슬쩍 미소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괘념치 마세요. 제가 볼일이 있는 건 선배님이 아니니까요.”

“그럼 누군가?”

“제가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 저의 제자들이죠.”

임성진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의 제자씩이나 되는 놈들이 겨우 저따위 놈들에게 이기지 못하고 무승부를 내다니.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철저한 정신 교육과 철저한 수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야 말겠어.’

제자들을 위한 애정 넘치는(?) 굳은 결심으로 마음을 단단히 다지는 비류연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비뢰도』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