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3권 8화 – 천겁 혈신 위천무에 관한 전설

비뢰도 3권 8화 – 천겁 혈신 위천무에 관한 전설

천겁 혈신 위천무에 관한 전설

오늘은 대망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날씨도 폭풍우가 느닷없이 몰아치거나,

예고 없는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거나,

혹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일 없이 화창하기만 했다.

천무학관에 들어와서 처음 있는 수업이었다. 그 동안 이 한 수업을 듣기 위해 얼마나 복잡한 절차를 극복해야만 했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침부터 감개무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수업은 검무각에서 이루어졌다. ‘무도 총론’이란 명칭의 수업이었는데 천관(天) 1학년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기초 과목이었다. 비류연과 효 룡, 장홍, 윤준호는 모두 함께 1학년 천자조에 속해 있었으므로 수업도 같은 시간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용휘도 같이 있었지만 원체 사람과 어울리기 꺼려 하는 특이 체질인지라 있어도 없는 것 같았다. 모두들 모용휘를 잘 알고 있는 듯 끊임없이 자신들의 화제 대상으로 삼고 그를 혀끝에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휘 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의 화젯거리를 단호히 노코멘트함으로써 비사교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우뢰는 비응각에 맡겨 놓고 있었다. 지금쯤 비응각의 매 사육 전문 관리 요원들의 친절한 보살핌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우레는 한 곳에 얽매여 있는 것보다 창공을 누비는 쪽을 더 흥미롭게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강의실은 50명 정도가 들어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고, 정면에는 가로 2장, 세로 반 장 크기의 널찍한 흑판이 걸려 있었다. 오늘 수업은 무학 전반에 관한 기 초 강의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천자조의 담당 노사가 정해지는 수업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담당 노 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기대에 찬 마음으로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교실 안에 존재하던 약간의 웅성거림이 갑자기 사라졌다.

“왔다!”

효룡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른 관도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했다. 상대가 일부러 기척을 지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3장 안에 접근한 존재를 알아채 지 못할 바보는 적어도 이 교실 안에서는 없었다.

“드르륵.”

마침내 문이 열리고 앞으로 그들을 담당하게 될 사부가 걸어 들어왔다.

“저분은!”

그를 제일 먼저 알아본 건 언제나 노티 나는 장홍 아저씨였다. 비류연은 심심할 때마다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그는 이 방면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건지 노력의 산 물인지, 강호 전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누군데?”

장홍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비류연이 물었다.

“윽, 아프다네. 자넨 저 유명한 분도 못 알아보나?”

다시 한 번 비류연에게 핀잔을 줄 생각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지만 이내 포기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짓거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침묵했던 공기 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주위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노사의 정체를 알아본 건 비단 장홍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다시 한 번 장홍의 옆구리를 찌르며 – 이번엔 핀잔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조금 강도를 높였다. – 빨리 알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크흑, 저분은 바로 무당산의 검도 고수 옥현진인이란 분일세. 저분의 검은 죽어 가는 이도 살린다는 엄청난 검도의 절정 고수시지.”

장홍이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흥분된 상태로 설명했다. 그의 말에는 옥현진인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흠모의 염이 담겨 있었다.

‘별일이군.’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장홍이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상대를 존경하는 것은 오늘 처음 보는 생소한 일이었다. 언제나 아저씨처럼, 때로는 늙은이처럼 불평과 불만의 언행을 주로 삼아 왔던 터였다. 쉽게 말해 잔소리꾼이라고 보아야 했다.

장홍이 이미 말했듯이 비류연이 속한 1학년 천자조를 담당할 사부, 무당파의 장로 옥현진인은 첫 인상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었다. 특히, 가슴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수염과 말아 올린 백발이 인상적인 노고수였다. 설화 속에 나오는 선인을 연상케 하는 그의 풍모에 걸맞게 그의 눈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그를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비록 모습은 한없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네의 그것이었지만 그는 검기를 애들 장난처럼 뿌려 댈 수 있는 최절정 고수였다. 검강지기(劍之氣)도 아마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검 하나로도 산을 허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50여 명 가까이 되는 관도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제 드디어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첫 수업의 감동에 그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 었다. 수업은 옥현진인의 인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에 ‘무도 총론’을 담당하게 된 무당파의 옥현입니다.”

운회검 옥현진인은 사부의 신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도들에게 반 존칭을 써 주고 있었다. 물론, 모든 무사들이 그처럼 관도들에게 존칭을 써 주는 것은 아니 었다. 여기에도 개인차가 존재했다.

천무학관의 수업은 대부분 필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해와 원리의 응용에 중점을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필기구, 즉 지필묵의 이용을 규제하거나 하지는 않 았다.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천무학관은 관도들이 어느 수준 이상이라는 전제하에서 교육을 시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강론이 무공의 기초적인 내용은 모두 건너뛰고 본론부터 들어가는 경 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을 못 따라가서 백기를 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체로 거르고 걸러서 가려 낸 최상의 인재들이 아닌가. 기초 기본에 대한 강의는 그들에 대한 모욕일 뿐이었다.

그런 무림의 뛰어난 후기 지수들을 빠르게 목적지인 절정 고수의 고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안내자 역할이 바로 천무학관의 목적 중 하나였다.

“이봐, 옥현진인이라면 무당팔검에 드는 초고수가 아닌가?”

한 관도가 아는 척했다. 오늘부터 그들의 담당 사부가 된 옥현진인은 소림과 더불어 무림의 양대 산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당파의 최고수 8명 중 한 사람인 최절 정 고수였다. 무당팔검은 강호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존경의 대상이자, 동시에 무당검파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지난번에 하삭 7웅을 일검에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로 유명하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단 일검으로 하삭 7웅을 무릎 꿇게 했다는 5년 전 사건 말인가?”

“그래, 그 사건 말일세. 자네도 잘 아는군.”

“물론이지.”

5년 전, 길 가던 상인을 핍박하던 하삭 7웅이라는 7명의 놈팡이들의 짓거리를 보다 못한 옥현진인이 그 일에 끼여든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옥현진인은 아미파에 볼일이 있어 길을 재촉하던 중이었는데, 그만 남의 시비에 끼여들고 만 것이다. 온화하기 그지없는 그로서는 의도하지 못했던 불유쾌한 사건과의 조우였다. 어쨌든 잘못은 그들 하삭 7웅에게 있었으므로 옥현진인은 무림의 명사 신분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몰랐다면 모르되 버젓이 그런 일 이 눈 앞에 벌어진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핍박당하는 사람을 못 본 척한다는 것은 강호의 도의로 보나 사문의 가르침으로 보나 매한가지로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하찮은 하삭 7웅을 상대로 황송스럽게도 검을 뽑아 들었던 것이다. 웬만하면 말로 끝내고 싶었는데 상대가 말을 들어 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화의 창구를 통한 평화 교섭은 결렬되고, 옥현진인은 내키지 않는 검을 휘둘러 새로운 창구 하나를 더 개설하기로 결정 내린 것이었다. 승부는 단 일검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 따위 쓰레기 사촌 같은 놈팡이들에게 이검(劍)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시작부터 정해진 승부였다.

그의 송문고검에서 뿜어져 나온 청색 검기 다발이 단숨에 7명의 검을 산산조각으로 부셔 버렸고, 무기를 잃은 하삭 7웅은 무기와 함께 먼지가 되어 버린 자신들의 자존심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오체복지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단 일검에 몸도 움찔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생계 수단을 모두 폐품 처리했으니 그들의 공포가 얼마나 컸을지 능히 짐작이 갈 만한 일이었다.

원래 사람 좋기로 유명한 옥현진인은 그들에게 가볍게 훈시를 하고 단순 가담 정도의 훈방 처리를 해 주었다. 그 후로 그들이 어디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이야기는 전해져 오지 않았다. 나쁜 일을 하려고 마음 먹을 때마다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청색 검기 다발로 인하여 엄두 자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해져 오 는 소문에 의하면 업종을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하였다.

그만큼 그는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최절정 고수로서, 검술뿐만 아니라 인품 면에서도 무림의 존경을 받고 있는 뛰어난 무인이었다. 등 뒤쪽 여기저기에서도 옥현 진인의 실력과 신분에 대해 쑥덕거리는 소리가 비류연의 귀에 포착되었다.

“여러분이 이곳 천무학관에 들어온 이유는 첫째, 개인적으로 새로운 무도(武道)의 경지에 오르기 위함이요, 둘째로는 정도인의 입장에서 저 가증스런 흑도 사파의 핵심적인 적대 세력인 마천각(魔天閣)과 흑천맹(黑天盟)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강대한 피와 살육의 세력으로부터 백도 수호의 방패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본인을 위시한 본 천무학관에서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무공을 이해하고, 수련에 맹진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조 성하기 위한 전폭적인 지원과 막대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백도에 정천맹과 천무학관이 있다면, 흑도에는 흑천맹과 백도의 천무학관과 동일한 흑도 사파 인재 수련 양성소의 대부 격인 마천각이 있었다. 마천각은 흑도의 최정예 무인을 기르고 양성하기 위한 흑도의 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것이다. 천무학관의 최대 경쟁 상대라고 보면 옳다. 자존심으로 보나 명예로 보나 서로가 절 대로 질 수 없는 경쟁자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둘의 관계는 지독히 좋지 못했고, 심심하면 서로가 서로를 매도하고 욕하며 지난 백 년의 시간을 흘려 보내 온 것이다.

“오늘의 수업은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는 차원에서 어두웠던 지난 백 년 간의 무림의 역사와 정사가 어떻게 현재의 미묘한 긴장 상태를 유발했는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수업은 그 백 년의 역사를 상식 차원에서 모두 알고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한편으로는 기적적인 일이지만 혹시라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를 관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옥현진인은 그 기적을 경험하고 말았다. 무림인이라면 세 살배기 어린애라도 알고 있을 오늘의 수업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는 비류연이라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차마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여러분들도 모두 천(天) 겁(劫) 령(靈)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겁니다.”

옥현진인은 그 저주스런 이름을 마치 목에 걸려 있는 이물질을 토해 내듯 내뱉었다.

“천겁령!”

천겁령이란 이름이 나오자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은 기겁을 하고 놀라 자빠졌다. 비류연을 제외한 학생들의 놀람으로 교실 전체는 일순 경악으로 정지된 듯했다.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강호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도뿐만 아니라 흑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그 이름은 흑백 양도를 불문하고 누구나 가 장꺼리고 기피하는 저주스런 이름이었다. 반응은 옥현진인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리고 천겁(天劫) 혈신(血神)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장내가 침묵의 심해 속에 급속도로 가라앉아 버렸다. 일체의 소리는 허무의 심연에 삼켜져 버리고, 공기마저 싸늘하게 얼어붙은 채 침몰되는 듯한 착각 마저 일 정도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름이기에 숨소리마저 꺼져 버리는가? 비류연은 도대체 왜 이름 하나로 인하여 이렇듯 분위기가 싸늘해져 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입술 을 굳건히 다물고 있었다.

“노사님, 그런 참담한 이름을 입에 담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굳은 얼굴의 한 관도가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저주를 당하거나 뭔가 공포스러운 일을 당할 것이라는 징크스를 가 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이름이 가진 공포에 비하면 천겁령의 공포는 단지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천겁령의 공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는 피와 살육과 공포의 집합체였다.

“물론 여러분들은 그 이름이 직접 거론되길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은 어쨌든 무림에 백여 년 동안 존재한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 온 이름이기 때문이지 요.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직접 그 이름을 거론한 것은 여러분이 좀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무공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 리 천무학관의 교육 방침이기도 합니다. 우리 천무학관에서는 늘 그렇듯이 신입생에게 제일 먼저 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외면하길 원하고 떠올리기 싫어하 는, 어쩌면 영원히 감추어 두고 싶은 그 깊고 어두운 절망과 공포의 덩어리를 여러분 앞에 꺼내 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외면하진 마십시오. 여러 분들은 자랑스런 천무학관의 학생들이자, 나아가 앞으로 무림의 빛이 될 인재들입니다.”

교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 동요하고 있음을 피부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제 여러분들은 눈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백 년 동안 강호 무림에 묻혀 있던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합니다. 항상 무림의 음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존재해 온 어둠의 그림자, 그것에 대항해 나가는 힘을 기르는 것이 천무학관에 입관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옥현진인의 목소리에는 비장감마저 어려 있었다. 옥현진인의 고요하고도 힘있는 열변에 학생들은 확연히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교실 안의 긴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자꾸 울면 천겁령에서 잡아간다.’

강호 무림인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어린 시절에 심심찮게 들어 보았던 말이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무림인 부모들이 최후 수단으로 쓰는 이 한마디 의 말이 신기하게도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든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여론 조사를 통해 성공률을 집계해 본 통계 자료도 존재한다. 특히, 말을 좀 알아먹는 어린애들에게는 직빵이었다.

백 년 전, 그날 이후 부모들의 이런 말로부터 무림인들은 어릴 적부터 천겁령의 공포를 몸에 새기고 살아왔던 터였다. 공포는 흑사병만큼이나 지독한 전염성을 가 지고 있었다. 게다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느 순간 살이 붙고 각색되어지면서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 종국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생물이 되기도 했다. 천겁령의 경 우는 백 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승은 물론, 생존하는 경험자들 – 그럼 도대체 나이가 몇이란 말인가? – 까지 있는 형편이라 더욱 더 그 공포가 생생하 게 전해져 왔다.

그리하여 천겁령은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금기가 되었고, 또한 이름조차 떠올리기를 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술자리나 잔치, 또는 모임에서 천겁령과 혈신에 대 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가장 몰상식하고 무례한 일로 여겨질 정도였다.

만일, 천겁 혈신의 이름을 빌려 상대를 욕한다면 그날로 두 사람은 사생결단을 낸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날로 어느 한쪽이 이승 거주자 명단에서 이름을 빼는 것 이 되거나, 가끔은 둘 다 사이 좋게 저승 연명부에 이름을 기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그것은 철천지원수한테도 어지간하면 쓰지 않는 가장 악질적이며 무서운 욕이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오랜 시간 전부터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는 피를 동반한 반목에 반목을 거듭해 왔다. 피는 피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아, 그 생산의 대가로 수많은 인간의 생명들이 하늘의 제단에 바쳐졌다. 제단에 바쳐진 희생자들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혈해(血海)를 이루자, 무림에 몸담은 모든 사람들은 한 가지를 기 원했다. 한 명의 절대자가 홀연히 나타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의 고리를 끊고 혼돈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강호를 하나로 통합시켜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무림 통일의 절대자!

물론 그 절대자는 자기 진영에서 나와야만 했다. 그러므로 원하는 바는 같았지만 그 목적성이 서로 다르므로 해서 싸움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끊임없는 신경전과 힘겨루기를 거듭하며 승부의 향방을 가늠하지 못하던 강호에 한 명의 무인이 나타났다. 그는 한 마디로 절대자였다. 그는 오직 자신의 무력만으로 절대자의 위치에 올랐고, 강호를 오만하게 굽어보며 차례로 각 문파들을 자신의 발 밑으로 복속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모두들 – 특히 흑도 측은 ‘그야말로 정사 무림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무림을 일통할 천지개벽 이래의 유일무이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열광했다. 마침내 꼴 보기 싫은 백도 무림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자신들이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곧 엄청난 착각임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에 대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또한 밝혀졌다. 그 대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흑도 출신으로 알려진 – 어디에도 증거는 없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강력한 지도력과 무력으로 자신의 추종 세력을 규합하여, 무림을 단숨에 피의 소용 돌이로 몰아넣었다. 그때까지 출신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그는 거듭되는 반목과 싸움으로 쇠약해진 무림을 한순간에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고, 계속되었던 소 모전으로 인하여 비축된 힘마저 거의 탕진한 강호 무림은 그의 칼 아래 뼈아픈 수모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흑도 측의 치명적인 계산 착오였다. 그는 자신이 사파 출신이라고 해서 사파 측만 어여쁘게 봐 주거나 하는 알량한 자비심을 극소량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 쪽으로 쪼개진 채 언제나 서로간의 반목과 비방만을 거듭하는 정과 사 양측의 무리들은 모두 다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귀찮고 성 가신 돌부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는 장애물에게 가차없는 응징을 가했고, 무림은 다시 한 번 피로 씻겨졌다.

그자의 이름은 바로 하늘을 위협하는 피의 화신, 천겁 혈신 위천무였다.

그가 처음부터 무림 일통을 꿈꾸었는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었지만, 자신의 무공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흑백 양도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립을 한심하게 느끼면서, 마침내 그 지루한 상황을 타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무림 일통, 천하 제패를 이루었다. 그 당시 그의 능력으로 딱히 불가능한 일 도 아니었다. 그는 신화경(神化境)에 다다른 초절정의 강력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림에서는 강자 밑에 수많은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세력을 거미줄처럼 형성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세력은 주인의 무공 수위에 비례해 점점 커져 가게 된다. 강호 무림에 시체로 산을 쌓고, 흘러내린 피로 바다를 이루게 만든 그들을 강호 사람들은 공포와 절망을 담아 천겁령(天劫靈)이라 부르며 두 려움에 떨었다.

흑백 양도 무림을 통틀어 천겁 혈신 위천무의 신과 같은 놀라운 무공을 감당할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은 그 역사의 시작과 함께 한 명의 절대자를 꿈꿔 왔지만, 막상 탄생한 절대자는 악마처럼 잔인하고, 북해의 얼음 결정처럼 비정했다. 그는 인정사정 없이, 너무도 간단하게 무림 전체를 최단시일 내에 공포와 피의 웅덩이 속으로 떠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그 절대자에게 대항하기에 정과 사, 양 무림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강호는 정사 양도로 양분된 것만으로 모자라는지, 백도 무림은 이념과 이익에 의해 산산조각으 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런 사정은 흑도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더군다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분열 세력은 큰 힘을 낼 수 없는 법이라고 생각한 혈신 위천무는 우선 무림 일통 사업의 일환으로 흑도 통합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강력한 힘을 지니기를 원한 것이다.

백도 침공은 흑도 통합 이후로 미루어졌다. 백도는 잠시 한숨을 돌릴 여유를 얻었지만 안심하기에 일렀다. 이번 휴식은 더욱 더 끔찍하고 처참한 미래에 대한 예고 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버거운 상대인데 흑도 세력마저 통합하여 손아귀에 넣는다면 승부는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인 것이다.

만일 그의 손에 흑도가 하나로 통합된다면, 아직 하나의 힘으로 집결되지 못한 백도는 그의 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히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현재로서도 버티기 힘든 판국에 흑도의 엄청난 힘까지 하나로 모은다면 그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 일이 불가능함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백도는 자신들의 살 길 을 도모하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마침내 백도는 그 동안의 반목과 질시를 접어 두고 하나의 깃발 아래 그 힘을 규합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하나로 뭉쳤다. 그렇게 해서 바로 백도 강호 무림 연합총연맹인 무림맹이 탄생된 것이다.

정천맹(正天盟)이라고 불리는 이 세력은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적었다. 워낙 급하게 결성된 것이다 보니 아직 체계 하나 제대로 잡히지 않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급조된 것이나 다름없는 무림맹으로는 끝없는 힘과 공포로 결집된 혈신 위천무의 장난스런 집적거림 하나를 막아 내기에도 벅찼다. 그는 이때 한창 흑 도 통합에 열을 쏟고 있어서 아주 가끔씩 잊어버릴 만하면 백도를 살짝 건드렸다. 하지만 백도는 간신히 힘을 한데 모아 무림맹을 결성하고도 그 혈신 위천무의 장 난 하나 받아 주기에도 벅찼다. 아직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사상누각은 금방 무너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은 백도를 완전히 내팽개치지는 않았다. 하늘은 한 명의 구성(星)을 보란 듯이 내려보내 준 것이었다. 절대적인 공포와 절망의 대명사인 그에게 유일하게 대적했던 무림의 구성이자 혜성처럼 나타난 천하 제일인, 바로 태극신군(太極神君) 무신(武神) 혁월린과 흑도의 구성 패천도(覇天刀) 무신마(武神魔) 갈 중혁이었다.

이 둘의 존재는 무림에 있어서 신의 선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신의 존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무림은 천겁 혈신 위천무의 지배 아래 더욱더 깊은 절망과 공포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 그는 모든 정사 무림인들을 자신의 십초지적 이하로 전락시켰던 혈신 위천무의 엄청난 무공에 대항하여 최초로 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 다. 게다가 한방 제대로 먹이고 돌아오는 쾌거를 이루기까지 했다. 그가 없었다면 백도 강호도 애초에 혈신의 산하 세력 집단 표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태극신군 무신 – 나중에 백도에서 무신(武神)으로 추앙받았다. – 혁월린의 독문무공은 ‘건곤태극음양일원신기(乾坤太極陰陽一元神技)’였다. 이는 음양이기를 동 시에 사용하여 절대적인 힘과 파괴력을 끌어내는 궁극의 무공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염령(焰靈)과 빙백(魄)의 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신공이 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태극청홍신령빙염공(太極靑紅神靈氷炎功)’이라 불리는 이것이야말로 당시 혈신의 무공에 유일하게 맞상대할 수 있었던 희대의 신공(神)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신의 무공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신공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공을 이어받았다는 전수자는 아직까지 전해져 오고 있지 않았다. 그가 젊 은 나이에 요절하지도 않았고, 일반인 이상의 천수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무림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최근 20년 전까지만 해도 행방이 명확했었다. 일설에 의하면 너무나 대단한 그의 신공을 마땅히 전수받을 만한 인재가 없어 사장되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 있게 무림을 떠돌고 있었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무림은 또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무공이야말로 강호에서 유일하게 혈신의 무공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 무공이 절전됐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의 무공이 강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비급이나 안배가 있을 것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한 사실로 나돌면서 전 무림을 헛된 망상에 부풀게 하고, 일확천무(一擢千武 :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가공할 무력을 얻게 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의 몽상에 일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하늘도 붕괴시킨다는 절세도법의 소유자 패천도(覇天刀) 무신마(武神魔) 갈중혁. 그는 한창 천겁령에게 얻어맞아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흑도 를 하나로 모아 대항 세력을 형성했던 흑도의 구세주였다. 갈중혁도 나중에 흑도 쪽에서 무신(武神)으로 추앙 받았는데,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과 겹친다 해서 마 (魔) 자를 하나 덧붙인 것이었다.

그는 지리멸렬한 흑도의 깨진 사기 그릇 같은 힘들을 하나로 모아 결집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흑도 무림 연합 연맹이자 대(對) 천겁령 조직체인 흑천맹(黑天盟)의 탄생이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흑도의 유일무이한 생명 줄에 모든 흑도인들이 달라붙었다. 신기하게도 생명 줄은 많은 사람이 달라붙으면 붙을수록 약해지기는커녕 더 튼 튼해지는 희한한 성질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 또 하나 벌어졌다. 정말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절대자 천겁 혈신 위천무는 그 엄청난 신화경의 무공과 절대적인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광기 어린 힘과 폭력, 그리고 공포로 흑백 양도로부터 동시에 외면을 받 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림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하지만 무림의 공적으로 지정하고 외면하는 것도 힘과 실력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무리 왕따를 시키려 해도 힘에서 꿀리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것 이다.

그리하여 한창 혈신의 칼 아래 엉망진창이 되어 가던 흑도가 패천도 갈중혁의 굉천도(轟天刀) 아래, 좀 아니꼽기는 하지만 백도를 본받아 흑도 사파 연합 연맹인 흑천맹을 결성하고, 혈신의 존재에 조직적인 대항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원래 흑도라는 데가 이익을 중시하는 문파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기에 그들의 결합은 더욱 힘들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결성 된 이 연합 세력을 혈신이 곱게 봐 줄 리 만무했다.

당연히 혈신이 발끈하고 나섰다. 자신의 출신지이자 근원이나 다름없는 흑도에서 – 해준 건 피와 공포의 세례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작당하여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나오자, 그는 심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 물론 좀(?) 심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통합책은 너무나 강경하 고 막무가내여서 흑도 측에서조차 외면받았다.

그리고 일어난 기적. 그것은 바로 정천맹과 흑천맹의 연합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긴장과 대립으로 보낸 정사 무림이 하나의 공통된 적 아래 공동 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정과 사,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 꿈에서라도 이루어지면 그것이 개꿈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정사 무림의 공동 연합 전선이 결성된 것이다. 그때까 지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 하나의 공동 강적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가히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백도의 무림맹(일명 정천맹)과 흑도의 무림맹(일명 흑천맹)의 연합 전선 형성. 혈신 위천무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와 그의 그림자 천겁령은 잠 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난처함도 잠시, 그는 이런 사면초가와 진퇴양난의 지경에서도 자신감과 오만함을 잃지 않았다.

정천맹과 흑천맹은 그들의 무력을 있는 대로 짜내어 그때까지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천겁령의 소굴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짜고 실행에 옮겼다. 양측 모두 배수진을 친 절체절명의 필사적인 격돌이었다. 이쯤 되면 두려움도 한번쯤 느껴 볼 만하건만, 혈신은 오히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양측 무력을 상대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다. 3개의 세력은 정면으로 격돌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이제 우리도 뭉쳤다고 자만하던 흑도도, 저쪽(흑도)도 뭉쳤으니 우리도 좀 수월하겠군 하고 마음을 놓았던 백도도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패배의 쓴 잔을 양 동이 채 들이키고 인사불성에 빠졌다. 아직 연합 동맹을 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무리하게 전력을 움직인 결과였다. 조직 운영의 미숙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흑백 양도는 모두 막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의 타격이 얼마나 컸으면 강호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도 30년 이상의 세월과 마차 수천 대 분량의 막대한 금력을 소모해야만 겨우 회복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런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그를 제거하지 못했다. 그건 정말 최악의 불행한 소식이었다. 흑백 양도 동시 작당 치사 비겁 공격마저도 그의 존재를 이 무림 에서 말소시키 데는 실패하고 말았으니…….

최후까지 막아 섰던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도 혈신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에 낭패를 당하고서 3년 간의 요양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바로 앞서 그와 맞붙었던 패천도 무신마 갈중혁은 더욱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는 4년 간의 요양을 필요로 하는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물론, 천겁 위천무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종적은 만장단애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대해(大海)에 삼켜진 모래알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전 무림 강호의 공포와 악몽으로 등극했던 그의 존재가 생사의 확인 여부 없이 – 실종 당시 부상당했지만 분명히 생존하였다. – 짙은 안개 속에 사라져 버렸으니 전 강호인의 잠자리와 안녕이 편안할 리 없었다. 전력을 다한 일격의 최종 목표인 혈신의 존재 말살을 이룩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 버렸는데 어찌 안심하고 잠자리 에 들 수 있겠는가.

혈신의 무공화후로 보건대, 만일 그가 도피 잠적 후 자신의 본래 무공 수위를 되찾는다면, 끔찍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족히 2백 살 이상의 생을 보장받을 거라는 것 이 무림 강호의 판단이었다. 무공이 일정 수위 이상을 지나면 유체가 환골탈태, 반로환동하며 젊음과 힘을 되찾게 되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소림의 전대 장문인 일각대사가 세수 140세, 무당검파의 무당팔검 중 첫째인 무량진인의 나이가 세수 150세에 육박했다. 게다가 세수 120세를 모두 넘긴 몸으로도 늙고 꼬부라지기는커녕 20대 청년처럼 뽀송뽀송한 피부와 탄력 있는 근육, 그리고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세월의 흉포함마저 잠재울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바로 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러므로 신화경에 다다랐다는 혈신의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삭고 약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일각대사와 무량진인도 자신의 힘으로는 그 당시 수준의 혈신과의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다고 자평하건만, 누가 감히 자만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옥현진인 자신만 해도 지금 세수 120세를 헤아린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어떤 젊은이에게 패한다거나 밀린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직 그의 검을 꺾을 만한 젊은 인재 는 사문인 무당파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그 당시 혈신의 나이가 50세였으니 그로부터 앞으로 최소한 150년 간은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후계자의 존재가 있을 확률이 높은 만큼 무림은 결코 아직도 안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거의 모든 무림인들이 그날 이후 부인과의 밤일에서조차 심각한 단발성 조루 증상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각지의 의원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원인 모를 이 경악 할 만한 증상은 전염병처럼 무림 전역을 강타했다. 부인과 애첩 모두에게 외면받는 무림인들이 급증하고, 그들은 심각한 식욕 저하와 더불어 불면증을 호소하며 의 원을 찾았다. 각지의 의원들은 비슷하거나 동일한 증상의 환자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당연히 집단 거국적 조루 증상과 우울증이 팽배해져 버려 그 당시의 홍등가는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었다. 그나마 술집은 자포자기 내지는 술기운으로 불안을 없 애 보려는 어리석은 도전자들 덕분에 장사가 잘됐지만 기녀들이 운영하는 일일 잠자리 상대 대여 업체들은 심각한 불황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누우면 자갈밭 이요, 앉으면 가시 방석이니 어느 누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그들은 하루 빨리 조루 증상 퇴치와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천겁령과의 싸움 에서 내린 결론은 최종적으로 그의 존재와 맞겨룰 만한 절대 고수의 존재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바로 뛰어난 인재의 필요성이었다.

만일 백도의 태극신군 혁월린과 흑도의 패천도 갈중혁이 없었다면 과연 강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걱정은 보통 무림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직접 그와 손속을 나누어 살아 남은 유일한 사람인 무신 혁월린과 패천도 갈중혁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천겁 혈신 위천무의 재래(再來)와 그의 그림자인 천겁령과 맞부딪쳐 무너지지 않을 힘을 길러야 한다는 필요성을 두 사람은 동시에 느 낀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은 그 동안 자신을 도와 천겁령과 맞섰던 당시 강호의 최고수 천무삼성의 도움을 받아 하나의 무림 무학 종합 교육 기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천무학관의 시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