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우리라고 부르지 마
은설란이 사란의 부름을 받기 반 시진 전, 가까운 동굴 안.
“이보게, 빨강 머리.”
꽁꽁 묶인 채 버둥대던 사내, 빙검이 돌아보지도 않고 염도를 불렀다.
“왜? 얼음땡아.”
마찬가지로 여전히 여의삭에 묶인 염도가 고개를 들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대로 더 끌려가다간 점점 더 무창에서 멀어질 뿐이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나도 그 정돈 알아. 그 얘긴 왜 꺼내는 건데?”
염도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같이 위기에 빠졌는데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직 협력이라는 말과 상생이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봐, 불꽃땡이. 자넨………… 어린 사부가 서찰에 적힌 대로 무당산에 갔을 거라 생각하나?”
그것은 의외로 평범한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흥, 뭐 언젠가는 거기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겠지.”
“자네랑 의견이 똑같다는 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내 생각 역시 그래. 역시 맹주님은 아직 무창에 있는 것 같군.”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저 아줌마들, 귀가 귀신귀라고.”
염도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전음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처럼 제압당한 상태에서 그나마 남은 내공을 전음 같은 데에 쓸 수는 없었다.
“여길 빠져나가야겠네. 지금 당장.”
염도는 의외라는 눈으로 빙검을 바라봤다. 이 얼음땡이가 웬일이지? 그런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걸 하자고!”
“안 한다며?”
“하겠네.”
빙검이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그걸 하겠다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각오는 되어 있네. 하지만 지금 쓸 수 있는 소량의 진기만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비법, ‘비기(秘) 온냉 교차뿐일세. 왜? 겁나나?”
“무슨 소리! 네놈만 겁먹지 않는다면 난 전혀 무섭지 않아. 다만 네놈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상황과 나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날 뿐이야.” “피차 마찬가지네.”
그리고 잠시 후.
“이보게, 좀 뜨거운 것 같네.”
“어.”
그리고 또 잠시 후.
“…이봐, 뜨겁다니까………….”
빙검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러나 염도의 대답은 여전히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 그래.”
그리고 다시 잠시 후.
“이. 이, 이, 봐! 뜨겁다… 니・・・・・・ 깐, 자네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자식!”
여의삭 덕분에 양손이 부자연스럽지만 않았다면 단숨에 염도의 멱살을 십자로 졸라 경동맥을 조이며 전후좌후로 뒤흔들었을 것이다.
“으잉? 일부러라니? 자넨 내가 그런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이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대며 염도가 애석하다는 투로 한탄했다.
“당연하지, 이 자식아! 희희낙락한 눈동자 들이대면서 뭐가 어째? 자네… 너, 풀리면 두고 보자고!”
이성과 감정이 뒤섞인 뒤죽박죽인 말투였다.
“어쩔 수 없잖아?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내가 즐거워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룰루룰루.”
“그럼 그 콧노래부터 짚어치워!”
현재 빙검의 몸을 감고 있는 여의삭은 어쩐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염도가 ‘검염기(劍焰氣)’를 주입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물론 밧줄만 달구게 하면 좋을 텐데, 밧줄에 몸에 묶여 있는 이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 이제 식혀. 차갑게.”
빙검은 잔뜩 인상을 쓰며 ‘검빙기(劍氣)’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이걸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나?”
“그것도 몰라? 당연히 끊어질 때까지지.”
빙검은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염도가 제안했던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무한한 탄성을 자랑하는 여의삭이 무력화되려면 열탕냉탕을 왔다리 갔다리 시키는 것밖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의삭도 물질인 이상, 급격한 변화에 약하게 마련일 거라는 희망사항을 품고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름하여,
비법(秘法) 극대일교차(極大日較差)
열열냉냉(熱熱冷冷) 열냉열냉(熱冷熱冷)
팽창수축(膨脹收 수축팽창(收縮膨脹)
염과 빙의 최대 장점.
뜨거움과 차가움을 급격하게 교차시키는 것으로 사물을 팽창, 수축시켜 그 어떤 단단함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급격한 일교차는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 사람의 몸을 병들게 하듯이, 급격한 급냉 급열의 교차는 사물의 내구력을 약하게 만들어 붕괴를 초래하는 것이다.
쩌저적.
아무리 여의삭이라도 염도와 빙검이 발하는 검염기와 검빙기의 교차 공격에는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드디어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타는 붕괴의 조짐.
작은 균열은 금세 여의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매미가 허물을 벗듯,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오듯 껍질들이 흉하게 갈라지며 여의삭이 주욱 늘어졌다.
“됐–다!”
염도와 빙검이 자유의 함성을 내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자!”
여전히 여의삭을 팔과 다리에서 완전히 끊어내진 못했지만, 일단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얻은 게 어딘가.
염도와 빙검은 잡혀 있던 동굴 입구를 향해 힘껏 경공을 전개했다.
저동굴만 빠져나가면 자유가 코앞에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를 그리 바삐 가시나요?”
염도의 코앞에 차가운 한빙지기가 한가득 밀려왔다. 이대로 부딪쳤다가는 그대로 얼음덩어리로 변할 만큼 충분히 차가운 한기였다. 빙륜갑을 낀 한 쌍의 손이 내뻗는 차가운 장력, 신마팔선자의 셋째인 갈효혜였다.
염도는 서둘러 양손을 내밀어 검염기를 양손에 일으켰다.
쾅!
엄청난 굉음이 함께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염도는 자신이 약간 손해를 봤다는 사실에 놀랐다. 갈효혜의 장력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묶여 있다가 막 풀려난 상태라 내력의 수발이 자유롭지 못하다곤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아녀자 혼자서 우리 둘을 막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시오.”
한걸음 물러난 염도를 보란 듯이 제치고 빙검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양손에는 갈효혜의 손에서 빛나는 것과 똑같은 색의 장력이 빛나고 있었다. “그럼 혼자가 아니면 되겠구나.”
순간 엄청난 화력의 불꽃이 빙검이 내뻗은 검빙기의 장력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염도와 빙검은 불꽃의 장력이 날아온 곳을 향해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들도 한 소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서, 설란이?”
그곳에 서 있는 것은 그 둘도 익히 잘 아는 은설란이었던 것이다. 언제 은설란이 이런 무시무시하고 무식한 화염장을 익혔단 말인가? 마치 백 년은 묵은 듯 무시무시를 넘어 무식무식한 장법을?
“대체 어딜 보는 게냐?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껄끄러운 듯 몸을 움츠리는 은설란의 뒤에서, 여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호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큼직한 발걸음 소리과 함께 커다란 호리병을 등에 맨 붉은 옷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다, 당신은!”
그녀는 바로 삼대낭랑의 둘째, 단혜였다.
“저희를 막으실 생각입니까? 더는 여의삭으로도 저희를 묶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단혜는 혀를 차며 단언했다.
“쯧쯧, 애초에 너흰 풀려났던 적도 없다.”
“에? 그게 무슨?”
그 순간, 길쭉하게 들어나 있던 여의삭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힘으로 수축되더니 원래보다 세 배나 강한 인장력으로 그들을 묶어버렸다. 그리고 둘은 묶이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게 그리 쉽게 풀릴 줄 알았더냐? 설란아, 가서 셋째 마님 좀 모셔 오거라.”
“네, 둘째 마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사란을 찾아온 설란은 그녀의 부름을 듣게 된 것이다.
***
은설란을 부른 사란은 용무를 듣더니 즉시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랬구나. 가기 전에 내 너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하나 있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그 질문에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은설란이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 거역하겠습니까?”
그러자 이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거역해도 상관없느니라.”
“예?”
“편치 않은 일이 될 것이니 그런다.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러니 싫다면 지금 먼저 거절해도 된다. 절대 너를 탓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라.” 너무나 자상한 목소리와 따뜻한 배려가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자상한 말이 차가운 협박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닙니다. 위험은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제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요?”
은설란이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둘째, 그 아이에게 극비리에 소식을 전하는 일이니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에 휩싸인 상황이라 아무도 믿을 수가 없구나. 그 때문에 네가 직접 가주었으면 좋겠다.”
돌려 말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믿을 건 너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 두터운 신뢰가 은설란을 기쁘게 했다.
“그토록 쉬운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용기백배한 은설란이 호언장담했다.
“그래? 하지만 너는 곧 쉽다고 말한 자신의 말을 정정해야 할 것이다. 극비리에 전해야 하는 만큼 각별한 각오와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란의 무거운 어조에도 은설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제없습니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마님.”
결의에 찬 눈동자로 은설란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은설란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란이, 이내 손짓으로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함 속에서 다가간 은설란의 귀에 사란은 귓속말로 속닥속닥 몇 마디를 전했다.
“예에에엑!”
그리고 금세 튕겨나듯 홱 물러난 은설란의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그런・・・・・….”
부끄러움과 낭패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은설란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는지 마음이 쉬이 추슬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 보거라. 내 쉽지 않다 하지 않았느냐. 왜? 하기 싫으냐?”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투로 사란이 조용히 말했다.
“그, 그게 저, 부끄러워서…………….”
우물쭈물하며 은설란이 대답했다. 그러자 빙령선자 사란이 북풍한설이 오돌오돌 떨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알겠다. 그렇다면 돌아가거라.”
“예?”
우물쭈물하던 은설란이 언뜻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너에겐 이 임무가 너무 가혹했던 것이겠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걸 던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가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은설란이 얼굴을 치켜들며 사란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하겠습니다.”
가늠해 보는 시선으로 사란이 은설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의의 정도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정말 하겠느냐?”
사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더 이상의 번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기세가 역력했다.
“예, 소녀 다시 한 번 각오를 세웠습니다. 하겠습니다!”
사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시작하자꾸나.”
다시 한 번 은설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 안에는 좀 전과는 다른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
“왜 그랬나, 동생?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어? 여자애잖아. 굳이 안 해도 되는데, 그런 거.”
그날 저녁. 출발 채비를 갖추기 위해 멀어져 가는 은설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혜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사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렇게까지 설란을 몰아쳤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남자의 시선이 그물망처럼 뻗어 있을 무한입니다. 백 번을 조심해도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인가?”
이토록 강하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사란을 단혜는 지금껏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마천각을 손에 넣기 전에도 그분께서 이미 그자를 주시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자, 마천각주는 지금까지 수상한 움직임은 많았어도 뭔가 뚜렷하게 꼬리가 잡힌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그의 둥지 마천각을 들쑤시기에는 부족한 것들뿐이었다.
“하긴 비밀이 많긴 하지. 항상 물과 안개로 둘러싸인 마천각 안에 꽁꽁 숨어 있으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말이야.”
때문에 지난 백 년간 마천각와 흑천맹, 그리고 신마가는 매우 미묘한 균형과 견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의 중심이 격렬히 흔들리게 된 지금, 그 중심에 선 것은 바로 그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마천각주였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좀 너무했던 것 아닌가, 자네?”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은설란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란이, 이내 손짓으로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알 수가 없어 의아함 속에서 다가간 은설란의 귀에 사란은 귓속말로 속닥속닥 몇 마디를 전했다.
“예에에엑!”
그리고 금세 튕겨나듯 홱 물러난 은설란의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그런・・・・・….”
부끄러움과 낭패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은설란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는지 마음이 쉬이 추슬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 보거라. 내 쉽지 않다 하지 않았느냐. 왜? 하기 싫으냐?”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투로 사란이 조용히 말했다.
“그, 그게 저, 부끄러워서…………….”
우물쭈물하며 은설란이 대답했다. 그러자 빙령선자 사란이 북풍한설이 오돌오돌 떨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구나. 알겠다. 그렇다면 돌아가거라.”
“예?”
우물쭈물하던 은설란이 언뜻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다.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너에겐 이 임무가 너무 가혹했던 것이겠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걸 던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가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은설란이 얼굴을 치켜들며 사란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하겠습니다.”
가늠해 보는 시선으로 사란이 은설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의의 정도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정말 하겠느냐?”
사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더 이상의 번복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기세가 역력했다.
“예, 소녀 다시 한 번 각오를 세웠습니다. 하겠습니다!”
사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시작하자꾸나.”
다시 한 번 은설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 안에는 좀 전과는 다른 굳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
“왜 그랬나, 동생?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어? 여자애잖아. 굳이 안 해도 되는데, 그런 거.”
그날 저녁. 출발 채비를 갖추기 위해 멀어져 가는 은설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단혜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사란이 침착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렇게까지 설란을 몰아쳤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남자의 시선이 그물망처럼 뻗어 있을 무한입니다. 백 번을 조심해도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인가?”
이토록 강하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사란을 단혜는 지금껏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마천각을 손에 넣기 전에도 그분께서 이미 그자를 주시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자, 마천각주는 지금까지 수상한 움직임은 많았어도 뭔가 뚜렷하게 꼬리가 잡힌 적이 없었다. 무엇이든 그의 둥지 마천각을 들쑤시기에는 부족한 것들뿐이었다.
“하긴 비밀이 많긴 하지. 항상 물과 안개로 둘러싸인 마천각 안에 꽁꽁 숨어 있으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말이야.”
때문에 지난 백 년간 마천각와 흑천맹, 그리고 신마가는 매우 미묘한 균형과 견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의 중심이 격렬히 흔들리게 된 지금, 그 중심에 선 것은 바로 그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마천각주였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좀 너무했던 것 아닌가,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