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학관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을 손으로 꼽으라면
항상 모든 이의 접혀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백향관이다.
절대 금남(禁)의 성지(聖地),
철저하고 엄중한 경계 경비…….
빙봉영화수호대의 집회
칠흑같이 까만 비단 위에 촘촘히 박힌 듯, 어지러이 하늘에 흩뿌려진 별무리.
천공에 걸린 달마저도 반쯤 어둠에
형체를 숨긴 반월의 밤.
희미한 월광보다도 차라리 별빛에 의지한 듯
움직이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무학관 한구석에 위치한 건물로 속속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분명 학칙에 명시된 취침 시간을 훨씬 넘긴 한밤중의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당당히, 그리고 거침없이 학칙을 어기며 몰려드는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백건(巾)이 둘러져 있었다. 반월의 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백건은 그들이 서로를 분간할 수 있 게 해 주었다. 비단 오늘 모임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들의 행사에 있어서 이마에 두른 백건은 그들만의 신호이자 약속이었다.
동호회가 밀집해 있는 거리에 위치한 그 건물은 쾌 넓은 편이었지만,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안쪽 공간에 들어차자 이내 면적의 한계가 생겨났다. 건물 안은 사람 들로 인하여 비좁을 정도였다.
건물 안의 맨 앞 단상 위에는 한 장의 초상화가 정성을 기울인 듯 구김 하나 없이 붙어 있었는데, 모든 이들의 소망과 희망과 감동과 염원이 골고루 섞인 눈으로 그 초상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얼룩 하나, 흠집 하나, 자잘한 구김 하나 없는 최고급의 비단 폭 위에 자리한 초상화의 주인공은 과연 그들과 같은 종족적 특성을 지닌 인간인지, 아니면 천상에 길 을 잃어 지상을 헤매는 선녀인지 그 정체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극치미의 결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그림을 만일 비류연이 봤다면(물론 이 자리엔 없지만) “어? 저 여인은!”이라고 가볍게 외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피의자 비류연이 바로 일 주일 전에 정처 없이 목적 없이 천무학관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다다른 구름 향기가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의 운향정(蕓香 亭)이라는 이름의 정자에서 만났던 도난 피해자였다. 그 날 그녀는 비록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유형의 것은 아니지만, 만일 피의자가 얼굴에 철판을 삼중 사중으로 겹겹이 깐 뻔뻔한 인간이라면 “닳는 것도 아닌데.” 하고 감히 주장할 수도 있을 의미심장한 한 가지를 비류연에게 불의 불식간에 빼앗기고 말았었다. 그 일은 매우 기습적으로 당하였기 때문에 그녀로서도 미처 방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윽고 운집한 백건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수려한 용모의 청년이 초상화를 등지고 단상 위에 섰다. 원래의 수려하고도 화려한 용모는 어쩐 일인지 사라지고 얼굴 이 창백할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청년의 얼굴은 뭇 여인들의 가슴을 미소 한 방으로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잘생겼지만, 일 주일 전 느닷없이 발생한 모종의 사건 과 그 사건 이후 겪어야 했던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것이다.
검을 쥐고 검기를 휘둘러야 할 소중한 그의 오른손은 무슨 연유에선지 새하얀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는데, 여전히 움직이기 불편한 모양이었다. 비류연이 보았다 면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누구세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선풍검룡 위지천이었다.
원래 오늘의 모임은 정기 집회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 천관도를 경악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버리고도 남을 운향정 사건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집회가 긴급 소집되 었던 것이다. 일 주일 전에 발생한 운향정 사건의 실체와 진실은 은밀하게 특정 소수의 귀에만 들어갔을 뿐 대대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오늘 여기 모인 이들이 바로 그 특정 소수들인 것이다(근데 한 건물을 가득 채울 정도의 수라면 소수라고 칭하기엔 너무 많지 않은가?).
일 주일 전 비류연의 소녀 입술 도난 사건 발생 직후 그 소식을 접한 한 관도는 심장이 찢어질 듯한 분노로 치를 떨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나의 두 귀는 오늘부로 그 기능을 다해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난 지금 듣지 못해야 할 말을 들었다. 이런 사실을 거르지 못하고 전한 두 귀 따위는 더 이상 나에게 쓸모가 없다.”
분노로 인해 온몸의 피가 역류하고, 심장이 파열될 듯 옥죄이는 끔찍한 기분이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또 한 관도는 “그건 절대 거짓말이야. 그런 일이 우리의 여신에게 일어날 리 없어!”라고 외치며 괴로움으로 인하여 자신의 왼손을 바늘로 사정없이 찌르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왼손을 찌른 것은 차마 검을 쥐는 오른손을 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눈을 까뒤집으며 자신의 두 귀를 짤라 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운 이들도 있었는가 하면, 사건의 전말을 알리러 온 전달자를 명예 훼손죄, 혹은 허위 사실 유포죄로 즉결 처분하려는 과격 분자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하여 괴성을 지르며 발악과 발광을 거듭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귀를 자르거나 고막을 갈가리 찢어서라도 소문 청취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기적적으로 없었지만 그만큼 그 사건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단지 말로만 전해 들은 평대원의 반응이 이럴진대, 그 당시 유일무이한 목격자이자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장 격인 선풍검룡 위지천의 분노는 능히 짐작할 만한 것이 었다.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헤아릴 수 없는 분노와 경악과 절망과 수치심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려고까지 독 심을 품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자신이 목격하고 당한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은 그토록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 일을 실행하 지 못한 이유는 아직 그에게는 한 가지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악적에 대한 철저한 응징과 처벌과 복수, 바로 그것이었다. 그 복수심이 오늘 집회의 원 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 이 야심한 시각에 잠도 자지 않고, 학칙마저도 서슴없이 무시해 버린 백건인들은 바로 그녀의 친위대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범 관도들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내던질 수 있도록 만
드는 초월적 존재를 모시는 그들. 오직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친위대. 그녀의 미소를 한 번만이라도 얻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는 광신자들의 집단.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미친놈들. 사람들은 그들을 자칭 타칭으로 빙봉영화친위수호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광신자 집단의 발기인이 바로 선풍검룡 위지 천이었다.
선풍검룡 위지천. 그의 뛰어난 무위와 지력과 재능과 지닌 자격으로 미루어 그가 샛길로 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학관 내에서 도 단연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출중했다. 그런 그의 인생행로는 빙백봉 나예린의 천무학관 입관으로 급히 궤도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인은 바로 갓 입관 한 나예린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넋을 빼앗겨 버린 탓이었다.
그녀의 극치미는 신의 예술성을 극찬할 만큼 빼어났고, 무수한 사랑의 열병 환자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수많은 청년 기협의 열렬 무쌍한 구애도 얼음같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닫은 채 이성의 그 어느 누구와도 교류를 가질 생각이 없음을 천명했다. 그녀의 반응이 만년빙정처럼 차 가우면 차가울수록 추종자는 더욱더 불어만 갔다.
그녀를 노리는 눈은 너무나 많았다. 이에 위지천은 한 가지 보호막을 치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친위 조직 빙봉영화친위수호대의 창설 배경이었다. 위지천 정 도씩이나 되는 인물이 당사자인 그녀가 원치도 않는 집단을 임의로 구성하여 몰고 다니는 짓을 굳이 해야만 했는지 의문스럽다.
일 주일 전까지만 해도 빙봉영화친위수호대, 줄여서 빙봉수호대의 대주로서 멀쩡한 청년 기재들을 뒤꽁무니에 줄줄이 달고 다니면서 열렬한 사랑의 구애 전선을 펼치던 선풍검룡 위지천은 일 주일 전의 사건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는 그녀의 신변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뭐 하러 조직한 친위대였던가? 그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신분도 얼굴도 모르는 신입 관도 애송이한테 처참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 하다니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하늘같이 높은 자존심이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른팔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 아 있는 뱀이 기어가는 듯한 상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그 녀석에게 당한 상처…… 그것도 철저하게 굴욕을 당하면 서…….
위지천은 설마 구룡칠봉의 구룡 중 일인인 자신을 한 수 접고 상대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수치심과 오욕과 분노의 칼날이 무참하게 그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당연히도 그는 크게 상처 입은 마음을 움켜쥐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자는 절대로 놔두어서는 안 될, 반드시 제거해야 할 오물인 것이 다.
한가운데 애(愛)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면 딱 어울릴 만한 백건을 한결같이 이마에 두른 그들이 모인 이유는 한 인물을 탄핵하고 징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 의 여신에게 불경 대죄를 저질러 그들 전체의 공분(公憤)을 산 그 당사자는 현재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만일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팔다리를 분지르고 내장을 꺼내 탕을 끓인 다음, 가죽은 벗겨 포를 뜨고 몸뚱어리를 서른여섯 토막 내줄 텐데 하고 모두 아쉬워했다. 그들의 분노는 그만큼 강렬했다. 위지천의 지시에 의해 단상 뒤에 걸려 있는 빙백봉 나예린의 초상화가 치워지자 모두의 눈에서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현상금 수배 전단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초상화가 걸리자, 다시금 모두의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수배용 초상화의 주인공 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비류연의 빌어먹을 얼굴이 나자 감정의 붓은 분노와 증오와 살의의 먹물을 담뿍 묻혀 모두의 눈동자와 마음 속에 일필휘지로 그 얼굴을 새겨 넣었다. 영원히 지워 지지 않을 각인처럼.
증오의 대상에 대한 인식 절차가 끝나자 모인 모든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기세가 자못 흉포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그들의 검 에서 발산된 분노와 증오와 살의로 똘똘 뭉친 검기가 비류연의 초상화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발겼다. 그어진 검기 한 선 한 선마다 찢겨진 초상화의 한 조각 한 조각마다 그들의 증오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초상화의 실물도 이와 똑같이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사(死)! 사! 사! 사! 사! 사!”
모두들 광분한 채 오른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그들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서 살의가 넘실거렸다.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건강한 사고 방식을 지닌 이들이라면 꿈 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지만 이미 그들은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비류연은 일 주일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사고를 친 순간부터 그들의 제일 큰 공적이 된 것이다. 그 리고 그 사실은 비류연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말살될 때까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증오로 인하여 초상화 조각이 찢겨져 눈처럼 휘날리며 떨어지는 가운데 서서 위지천이 외쳤다. 그것은 선동의 목소리였다.
“증오해야 마땅할 우리의 주적은 누구인가?”
“비류연! 비류연!”
광신도처럼 군중들이 손에 든 병장기를 일제히 치켜들며 외쳤다.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 악적은 누구인가?”
“비류연! 비류연!”
“우리의 제일 원수는 누구인가?”
천겁령이라는 말이 당연히 나와야 할 그들의 입에서는 그것이 나오지 않았다. 흑백 양도를 막론하고 제일 공적으로 지목되어 있는 천겁령, 그 이름이 지금 이 순간 에는 무시되고 있었다.
“비류연! 비류연!”
그들에게 있어 토막쳐 씹어 삼켜도 시원찮을 존재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렇다, 동도들이여! 우리들의 신성한 여신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몸소 실감나게 해주자. 천겁령의 검은 소굴에 던져 넣어도 시원찮을 놈이…… 감히 우리의 나 소저에게…… 그 더러운 입술을…… 크흐흐흐흑!”
위지천은 감정이 복받쳐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그만큼 그 일은 그를 비롯한 오십 명의 빙봉영화수호대에게는 초강력 충격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곁에 있었으면
서도 그 악행을 막지 못한 것이 아직도 천추유한으로 위지천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의 모임은 그 사건의 실행자이자 원흉인 악적 비류연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살시키기 위한 자리였다. 그들의 공통된 분노와 증오로 범벅된 살의는 오직 비 류연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모인 거대한 음념(陰念 사악한 생각이나 염원)은 거대하고 다양한 살인 처단 계획들을 초단위로 토해 냈다. 하나 하나가 모 두 그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제안들이었다. 너무 다양하다 보니 선뜻 어느 하나 선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모두 비류연에 대한 처단은 곧 하늘의 뜻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한 인간에 대한 수백 가지 살인 계획이 그들의 머리 속을 도배했고, 그것은 구체적인 방법을 띠고서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하지만 구상된 계획을 과감히 현실 화시킬 만한 인물은 그곳에서 전무했다. 지금 그들은 이성을 잃고서 목소리만 높이고 있을 뿐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살의를 띤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휴우, 이거 일이 어렵게 되어 가는데..
그들 틈에서 냉정을 유지한 채 한숨을 내쉬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의 몸집은 다른 이들에 비해 세 배나 크고 네 배나 더 무거워 보였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를 신 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극도의 분노로 뭉쳐진, 자신을 원한의 대상으로 삼는 집단의 존재를 알기나 하는 건지, 한편 비류연은 그녀의 친위대가 알면 극악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을 짓을 저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훔친 입술의 주인공에 대한 신상 내력 조사였다.
실수로 이름조차 묻지 않고 현장을 떠났기에 천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비류연으로서는 그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류연이 그녀의 주위 반경 삼백 장 이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친위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의외로 방법은 간단했고, 게다가 그가 찾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그것은 바로 얼떨결에 가입한 미소녀 전문 십팔금 포함 정보 수집 동호회 애소저회의 존재였다. 그 정도의 미녀를 애소저회가 모를 리 없다는 판단 아래 비류연은 비연태의 변태적 성향과 어두운 욕망의 정열과 그 성과를 믿고 애소저회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우와, 정말이에요? 이외로 쉽게 알아내는군요.”
결과는 기대했던 대로였다. 설명을 몇 마디 들을 것도 없이 그날 비류연이 있었던 날짜와 시간과 장소만으로도 비연태는 그가 접촉한 그녀가 누구인지 상세히 가 르쳐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일 주일 전의 일은 천무구룡 중 한 명인 위지천의 느닷없고 난데없는 원인 모를 부상으로 꽤나 유명해져 있던 관계로 보다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정향운’에 있었던 그녀의 이름이 나예린이라는 거군요.”
“그렇네. 일 주일 전 그 시각에 운향정에 있었던 사람은 빙백봉 나예린 소저시지.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그분을 아나?”
돌연 두 눈을 음침하게 빛내며 비연태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류연은 그녀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가 않았다. 웬만큼 접근이 까다롭더라도 비연태가 이런 푸 념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우연찮은 기회에요. 왜요?”
비류연은 미소와 함께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이상한 소문이 자꾸만 귓가를 간지럽혀서 말이야…….”
그러면서 비연태는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한쪽 상자에서 꺼내 보였다. 짠하며 비류연의 눈 앞에 펼쳐 보인 그림은 바로 비류연이 만났던 바로 그녀의 모습이었다. “맞아요. 그녀가 틀림없어요! 근데 정말 똑같네요.”
초상화는 그림에 대한 조예가 남달리 없는 비류연마저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림 속에서도 그녀의 신비롭고 청초하며 고결 한 기품은 전혀 퇴색되지 않은 채 생생히 살아 있었다. 초상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한 폭의 종이 위에 재현해 놓고 있었다. 마치 기적처럼…..
일견하기에도 엄청난 정성을 쏟아 부어 제작한 초상화임이 분명해 보였다. 필선 하나 하나에 담긴 무시무시한 정성과 정념은 비류연의 피부로도 생생히 느껴졌다. 도대체 이 그림의 화가는 무슨 생각과 정신 상태로 그렸을까? 제정신인 상태로 나올 수 있는 그림은 분명히 아니었다.
“놀랍지 않나? 화도 명인 소령화의 최고 최후의 걸작품이라네!”
그림의 제작자인 천화필력(天畵筆力) 소령화는 하늘의 재능을 가졌다는 초상화의 대가로, 그의 필력으로 완성된 그림에는 대상 인물의 영혼마저 담겨져 있다고 칭송될 만큼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였다. 원래 그는 그녀의 친위대인 빙봉영화수호대의 의뢰를 받고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려 이곳에 왔었다. 그에 따르는 막대한 보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천화필력 소령화는 그녀를 직접 대면하는 영광을 안은 후 한눈에 완전히 반해 버려, 시름시름 상사병을 앓으며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증세가 너무 심해 그림은 커녕 붓 하나 들기도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여태껏 일생을 살아오면서 수백 명의 미인들을 작업상 만나 보았지만 한 번도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충격은 그의 영혼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했다.
그렇게 수십 일 동안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그림은 딴전에 제쳐 두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붓을 잡고 화폭 앞에 섰다.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채 잠도 잊고 휴 식도 내팽개쳐 두고 그림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그리고 몽롱한 정신으로 칠 일 밤낮을 광기로 붓을 놀린 후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시켰다. 그의 실력과 노력과 정신 이 한데 어우러져 집대성한 필생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미완성이었다.
소령화는 지닌 바 혼신의 열정을 모두 연소시키며 미친 듯이 그림을 완성시켰지만, 오직 그녀의 눈동자만은 끝내 그리지 못한 채 하얀 여백의 공간으로 남겨 두었 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닌 화봉점정(畵鳳點睛)이라 불러야 마땅할 마지막 마무리를 맺을 실력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미진한 실력 에 절망하고 부끄러워했다. 도저히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심연(深淵)의 우주를 자신의 붓끝으로 표현할 수 없다며 미친 듯이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미친 듯이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의식 속에서 붓을 휘두르는 그의 두 눈에는 지울 수 없는 광기가 흐르고 지나갔다.
한 달여 기간을 광기 속에서 보냈을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두 개의 점을 찍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봉황의 두 눈동자 가 그려진 그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마력을 뿜어내었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력을 뿜어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솜씨라 하기엔 너무나 경탄스러운 것이었고, 그때 이미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침내 완전히 자아를 잃고 미친 듯이 붓을 휘둘러 그녀의 눈동자를 완성한 후 모든 사람들의 격찬 속에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절필을 선언했다. 신기 (神技)라고 극찬하는 그 작품도 그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혼을 모두 불살라 그림을 완성시킨 그에게 더 이상 다른 그림을 그릴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 이상 자신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그릴 수 없다며 절필을 선언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그는 전설을 남긴 채 사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그가 완성시킨 최후의 작품이자 최고의 그림인 초상화를 찾아 나섰지만 누구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초상화야말로 살아 있는 듯한 그녀의 모 습과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그녀의 신비로운 자태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유일무이한 걸작이었다. 모든 이가 눈에 불을 켜는 것도 당연했다.
특히, 그녀의 친위대인 빙봉수호대는 전심전력을 다해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찾지 못했으며 아직도 찾고 있는 전설의 초상화 가 지금 이곳 애소저회의 한쪽 벽면에 소중하게 걸려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 가치가 엄청났을 텐데 도무지 무슨 수를 썼기에 비연태가 그 그림을 가질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비류연은 지금 나예린에 대해 애소저회가 그 동안 수집한 자료를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료를 찬찬히 훑어보던 비류연이 문득 비연태에 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가 별로 없네요.”
사실이었다. 그녀의 존재 가치를 생각해 볼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녀에 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녀 정도의 절세미인에 관한 자료치고는 책 세 권 분량은 너무 작았다. 적어도 다섯 권 이상 되는 특급 미녀에 대한 자료들에 비교해서 너무 부족했다. 원래대로라면 열다섯 권 정도는 족히 넘어야 정상이었다. “말도 말게. 그녀에 대한 자료 수집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이만큼 모으는 데 들어간 노력과 희생도 적지 않다네. 그녀에 대한 자료 수집은 너무 힘 들어. 이 정도도 겨우 수집한 거라구. 그녀를 겹겹이 둘러치고 있는 인(人)의 장막(帳幕)은 너무 두터워.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상처 입기 십상이지.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긴 하지만…….”
“흐흠, 그렇군요.”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 빙백봉 나예린
나이 : 21세
신장 😕
체중:?
두발 : 흑색
눈 : 흑색
삼부 수치 : 알아내려다 많은 사람 다침.
특이 사항 : 자타가 공인하는 천무학관 최고의 미녀. 조사해 본 바로는 미약한 자폐증 증상이 있음. 무림맹주 진천뢰검신 나백천의 친손녀이자 천무삼성 검후(劍 后) 이옥상의 의발전인. 소유하고 있는 무공은 무림맹주 나백천의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과 검후의 한상옥령신검(寒傷玉靈神劍)으로 백도 사대 검신(四 代劍神) 중 두 명의 진전을 한몸에 지니고 있음. 그녀의 무공 수위는 현재 예측 불허.
“한 마디로 말해서 쉽지 않은 상대라 이거지 뭐. 이 정도는 돼야 해 볼 마음이 드는 거 아니겠어!”
아무래도 비류연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