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4화 – 염도의 수난이 시작되다
염도의 수난이 시작되다
한편, 얼마 전 관도들의 열렬한 환영과 뜨거운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귀관해 화상을 입을 뻔했던 주작단원들은
친목을 다지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그들의 우정과 결속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깊고 단단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아미산에서의 수행을 꿋꿋이 견디며 그들은 우정을 단단히 다져 왔고, 그 우정은 학관 귀관 길에 있었던 녹림 산채들의 습격을 처절하게 이겨 내면서 더욱 담금질되어 있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결정(結晶)된 우정은 이제 웬만한 외부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이제 그들은 서로가 이곳 천무학관 내에서 가장 신뢰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치를 떨며 꺼려하고 두려워하는 존재인 합숙 사부의 화신이 지척에 있는 줄 전혀 모르고 있는 주작단원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만일 자신들의 사부 소식과 그 존재의 화신이 자신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밥솥에서 나온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 충격으로 놀라 까무 러칠 것이 분명했다. 분위기도 당장에 백팔십도 급반전되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화기화상 당할 분위기로 변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하여튼, 모르는 게 약이라고 지금 그들은 행복감에 들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마산에서의 일은 단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할 뿐이라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다 해도 지나간 일은 단지 추억의 한 조각일 뿐이다. 이제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 일을 꺼내 다탁(茶卓) 위의 화제로 삼을 만큼 변해 있 었다.
“궁상, 자네 그때 일 생각나나?”
언제나처럼 친구 남궁상을 그렇게 부르며 입을 연 건 현운이었다. 그때 일이란 그들에게 있어 한 가지를 말한다.
“물론 기억하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고…….”
“그때 자네가 장작 하나 제대로 못 팬다고 산꼭대기까지 뛰어 올라가던 생각이 나는군.”
남궁상은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는 묵환(墨環)을 내려다보았다.
“그 당시엔 이 녀석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는데…….?
“어깨 빠지는 줄 알았지.”
현운도 남궁상의 감상에 찬성했다. 그 당시에는 이놈의 팔찌가 죄인의 족쇄처럼 무겁고 힘겹기만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차고 있어도 별다른 무게감을 느끼지 못 했다.
“이게 수련의 성과라는 것인가?”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당철영이 팔을 휘휘 휘저으며 말했다.
“학관에 도착하고 하룻밤을 잔 후에야 나는 비로소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지. 따뜻한 목욕물에 피를 뒤집어쓴 몸에서 나는 혈향(血香)을 씻어 내 고 푹신푹신한 침상에서 하룻밤 자고 나서 아침에 조용한 종소리와 함께 눈을 뜨니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껴지더군.”
현운은 아직도 그때 일을 회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는 말이야. 우리가 어떻게 그 지옥을 견뎠는지 아직도 의문이라니깐.”
“두 번 다시 못할 짓이지.”
“난 아직도 불쑥불쑥 사부가 찾아오는 악몽을 꾸는 걸.”
“이보게 노학, 자네 그 꿈은 정말 무서운 악몽이겠군. 어떤가, 오늘도 그 꿈을 꿀 것 같은가?”
“이보게 친구, 행여나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말게. 그런 악몽은 두 번 다시 꾸기 싫다네.”
노학이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며 진저리쳤다. 모두들 그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트렸지만 얼마 후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무 지가 지금 현재 그들의 행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 있다.
“그땐 참으로 식생활이 고달파 남궁 소저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죠.”
현운이 다과상에 올려진 사등분으로 깔끔하게 나뉘어진 사과 한 조각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때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진수성찬이다. 게다가 초반에는 서투 른 솜씨 때문에 밥과 반찬이 타 버리기 일수였고, 얼마나 배를 곯았던가.
“제가 뭐 한 일이 있나요. 여러분들이 고생하셨죠.”
그렇다. 그때는 먹기 위해서 스스로 반찬을 구해야만 했다. 족쇄가 채인 천근 만근 무거운 발을 이끌고 산을 뒤져 산나물을 채취하고, 온 산을 뒤져 사냥감을 잡았 다. 합숙소에서 사부가 제공해 주는 건 단지 쌀과 요리를 위한 약간의 향신료뿐이었다.
“난 여기 당문혜랑 계곡에서 빨래하면서 사부님 험담하다가 걸려 계곡 물에 처박히기도 했는걸 뭐. 그지?”
단목수수가 당문혜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당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기척을 죽이고 등 뒤에 서 있을 줄 누가 짐작했겠니. 인정사정없이 바로 그냥 밀어 빠트려 버리더라구.”
누구에게나 뼈아픈 일 서너 개는 예사로 가지고 있는 아미산 시절의 이야기였다.
“뭐 건진 건 궁상이 정도일까?”
“자네 왜 또 날 걸고넘어지고 그러나?”
궁상자 남궁상이 도사답지 않게 입이 싼 현운을 째려보며 말했다.
“자네가 돌부린가? 내가 걸고넘어지게. 난 단지 우리 중 유일하게 아리따운 진 소저의 마음을 독차지한 자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뿐이네. 그 날 밤은 정말 별 이 아름다웠지.”
도사답지 않은 능글맞음이었다. 과연 신주 제일 도가에서 연애지도(戀愛之道)를 도통한 사람다웠다. 그 밤이 무슨 밤인지는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 다. 남궁상과 진령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여전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놀려 주는 재미가 있어 쉽사리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험험, 자꾸 그렇게 놀릴지 말게나.”
남궁상이 정색하며 말하자 모두의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하하하!”
아직 주작단에게 치명적인 극독이 담긴 상자의 뚜껑은 열리지 않았고, 그것이 언제 돌발적으로 열릴지 모를 개봉 대기 상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 다. 폭풍 전 고요함 속의 최후 만찬이었다. 마지막 행복의 따스함이었다. 그걸 모르는 주작단원들의 웃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맑게 울려 퍼져 나갔다.
그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존재가 자신들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주작단원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복귀 후 백호, 현무 이 개 단을 단숨에 누르고, 청룡단마저도 비록 압도적으로 누르지는 못했지만 동수를 이룸으로써 그들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이름과 명성도 점점 더 높아져 이제는 학 관 내에서 아무도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은근히 받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손가.
지금 그들이 누리는 꿈과 열락과 행복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이 한순간의 짧은 것임을 추호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야박함을 아직 믿지 않고 있었 다. 하지만 하늘은 그들이 기대한 것보다 더 야박하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염도는 의외의 기척에 놀랐다. 자신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지 벌써 일 분이 지났다. 그런데도 자신이 상대의 기척을 느 낄 수 없었던 것에 염도는 놀란 것이다. 과연 자신의 감각에 이리도 오랫동안 포착되지 않는 인물이 강호에 있었는지 그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염도는 서슴없이 홍령(紅靈)을 뽑아 휘둘렀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홍광의 검기가 염도의 방을 훑고 지나갔다. 전력을 다한 일격은 아니었지만 방 안의 몇몇 기물 을 간단히 파손시키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거세게 거실 안을 휘젓자 죄 없는 목제 가구에서 매캐한 연기만이 자욱히 피어올랐다. 하지만 살 과 뼈를 훑고 지나는 감촉은 아쉽게도 없었다.
‘실팬가?”
염도가 자신의 마음에만 울리는 미세한 목소리로 자책했다.
“이런, 나의 검염기(劍焰氣)도 그 예기와 패기가 많이 느슨해진 모양이로군. 실패라니. 투일염옥살(透日炎玉殺)을 썼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염도는 실패 원인을 곰곰이 짚어 보았다. 단련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요즘 새로 나온 손님 접대법인가요? 인사가 거창하군요. 이런 열렬한 환영은 좀 부담스럽군요. 따뜻해서 좋긴 하지만…….?”
염도의 열렬한 환영 행사는 따뜻함을 넘어 화재(火災)로 발전하려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 안 저 너머 자욱한 연기로 감추어진 곳에서 불청객의 목소리가 들려 왔 다. 불시의 기습에도 얄미울 정도로 동요 한 점 없는 그 목소리의 울림은 염도가 익히 잘 아는 이의 것이었다. 듣고 싶은 마음이 별로 일지 않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예외요.”
염도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방금 전 염도의 일격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대한 특별 예절이었던 모양인데 웬만한 불청객은 뼈도 못 추릴 위력적인 솜씨였다. 사실 염도는 인기척을 느낀 그 순 간부터 그 정체가 비류연임을 알고 있었다. 사부 행세를 하려 드는 비류연의 기척을 못 느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류연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염도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작성되어 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 명단 제일 위 부분에 빙검 관철수와 함 께 비류연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걸 밝혀 괜하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성공도 아니고 미수에 그쳤으니 욕먹을 일도 아니라고 간단히 속 편하게 치부해 버리는 염도였다. 물론 성공했다면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 지만.
초대받지 않은 방문자의 정체가 창 밖을 통해 비집고 들어온 달빛에 의해 나타났다. 염도의 인상이 보기 좋게 구겨져 버렸다. 상대의 정체가 며칠 동안 염도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아 그의 식욕 증진에 지대한 공을 끼쳤던 비류연임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비류연이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제자님.”
염도는 하마터면 치미는 울화를 누르지 못하고 애도 홍령을 끄집어 내 단숨에 휘두를 뻔했다. 하지만 엄청난 인내력을 동원, 가까스로 그 충동을 참아 냈다. 기습 적으로 휘두르는 일도(刀)에 비류연이 두 동강날지 확신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칠 할 이상의 확률만 있어서도 한 번 시도해 보았을 걸 하며 염도는 이를 악 물었다. 요즘 들어 나날이 인내력과 참을성과 끈기와 근성이 늘어가고 있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염도였지만 그런 감성 능력 증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건 전혀 염도답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반갑지 않다는 얼굴이네요. 얼마만의 사제간 해후인데 기쁨과 감동이 없다면 너무 시시하고 초라하지 않겠어요?”
실실 웃으며 비류연이 넉살좋게 말했다.
“어떻게 마냥 기뻐할 수 있겠소.”
요즘 들어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이 빙검 관철수냐, 아니면 엉터리 사기꾼 가짜 사부 비류연이냐, 두 사람 사이에서 오락가락 고민에 고민 을 거듭하고 있었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누가 물어도 서슴없이 빙검 관철수라고 외칠 수 있었던 염도였건만 요즘은 그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비류연에 대 한 그의 악감정은 컸다.
“그래도 기뻐하는 게 신상에 좋지 않을까요?”
묘한 어감이 담긴 말투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아뇨.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란 얘기죠.”
비류연은 그저 사람 좋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염도는 그게 더 불안했다.
“무슨 일..
입니까?”
염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요즘 들어 존댓말이 점점 더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혀를 확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냥 간단한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
난데없는 비류연의 부탁에 확실히 염도는 동요했다. 하지만 자신이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절한다 해서 그것을 “아, 그러세요. 그럼 할 수 없죠.”라고 순순히 용납해 줄 비류연도 아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염도의 당찬 거절을 순순히 받아 주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 리다.
“아주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면서도 쉬운 부탁이죠.”
절대 신용 못할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왠지 불길한 그 미소에 염도는 내심 불안해졌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동요하지 말자. 아무런 용건 없이 방문할 사람이 아님은 익히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속으로 이렇게 되뇌며 염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칭 사부라 칭하는 놈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이 분하고 원통할 따름이었다.
“그래, 내용은 뭡니까?”
“아, 그저 아이들 몇 명을 맡아 줬으면 해서요.”
“아이들?”
염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보모도 아닌데 웬 아이들이란 말인가?
“그래요, 아이들! 아직 철딱서니 없는 애송이들이지요.”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불길한 미소에 담긴 의미 그대로 그의 부탁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았다.
넓고 웅장한 대청 안. 용봉(龍鳳)이 호기롭게 양각된 상석의 태사의에 지금 철탑을 연상케 하는 한 명의 장년인이 정좌하고 있었다.
만인을 압도하는 범상치 않은 기도의 소유자. 겉보기에는 사십 대 중년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세수 120을 훌쩍 넘긴 그 사람은 바로 백도 이대 세력 중 하나인 천무학관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천무학관주 철권(鐵券) 마진가였다.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는 올해 들어 세 가지 일에 기뻐하고 놀라워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경사가 세 가지나 – 그 중 한 가지는 아니다 – 한꺼번에 일어난 것 이다. 천관 측으로서나 백도 정파로서는 대대적으로 풍악을 울리며 성대한 자축연을 열 만한 일이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주작단의 놀라운 실력 증진이었다. 이렇다 할 소식도 없이 학관 복귀가 늦어져 천관 수뇌부 측에 많은 걱정을 끼치기도 했지만, 복귀한 그들의 무공 실력 증진은 그 동안 있어 왔던 걱정들을 일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한 것처럼 놀랍도록 변모해 있었다.
천관에 복귀한 주작단원들과 처음 대면했을 때, 마진가는 전혀 다른 타인을 마주보는 듯한 생소함에 경이감마저 느꼈다. 그리고는 이들을 가르친 철담비환 진 노 사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를 전했다. 비록 감사의 대상이 틀리고 한때 철담비환 진조운으로 불리던 진 노사는 지금 천상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어 천관주의 감사 인 사를 제대로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가 신(神)이 아닌 이상 그를 탓할 일은 못되었다.
다시 만난 그들은 사신단 중 최강이라는 청룡단과 겨루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초강 고수로 변모해 있었고, 그들의 실력 증진에 마진가는 그저 뛸 듯이 기쁠 뿐이었다.
두 번째로 놀라웠던 일은 바로 염도(焰刀)의 천무학관 무사부 취임이었다. 이는 그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사이자 충격이었다. 설마 사람하고 어울리기 극도로 꺼려한다는 독불장군 염도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천무학관 무사부 취임 의사를 밝혀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염도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물론 마진가는 당장에 그의 취임을 허락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을 판에 자진 취임 의사 타진이라니……. 쌍수 들고 열렬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니 그가 거절할 하등의 이유 가 없었다. 모든 제시 조건을 수락하고 염도를 천무학관 무사부로 맞이했다.
웬만한 수준의 고수 가지고는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는 기재들의 집합소가 바로 이곳 천무학관이었다. 요즘 같은 인력난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스승 역할을 맡아 줄 절정 고수의 영입이 절실하던 차였다. 현재의 인원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천관의 사자들이 무림 강호의 심산 유곡을 샅샅이 뒤지며 기인 이사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염도 정도의 거물급 초절정 고수가 그 성질 때문에 기대도 안 했는데, 스스로 입관 의사를 밝혀 온 것은 뜻밖의 횡재였다. 처음엔 관주 자신도 염도의 전언 을 가지고 온 순풍나대이 나중해가 순간적으로 정신 나가 장난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입관 전부터 벌써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초기재의 입관이었다. 그 기재의 이름은 바로 칠절신검 모용휘였다. 슬슬 때가 된 줄 알고 있 었기에 당연히 그의 입관은 기정 사실화되어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벌써부터 천무삼성 중 일인인 검성(劍聖)의 후계자로 이름높은 초기재였다. 당연히 천무학관주 로서의 그의 관심도 지극히 높았다. 천무학관은 성격상 수십 명의 평범한 인재보다는 한 명의 특출한 천재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잠정적으로 결정된 일이었기에 앞의 두 가지만큼 놀랍고 기쁘지는 않았다. 비록 경악하는 맛은 떨어졌지만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세 가지 일 때 문에 천무학관은 더욱더 발전할 것이다. 그 동안 있어 왔던 일들을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마진가는 한 명의 방문자를 받았다.
뜻밖에도 방문자는 바로 그에게 세 가지 기쁨 중 하나를 안겨 준 염도였다. 방문자의 인물이 밝혀지자 보고차 대청에 들어와 있던 대무사부 빙검 관철수의 안색이 돌연 실패한 화가의 화폭처럼 구겨졌다. 정기 보고차 들른 자리에 느닷없이 자신이 가장 꺼려하는 존재의 출현이 그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 변화에 유일하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염도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관주 앞이라 내색하지는 않았다. 염도와 달리 그는 이성으로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걸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명호만큼이나 항상 언제 어디서나 평정심과 냉철함을 잃지 않는 관철수였지만, 오직 한 사람 앞에서는 얼음처럼 냉철 하지 못하고, 이성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곽 노사.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관주 마진가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답례로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하던 염도의 안색이 빙검 관철수를 보는 즉시 두 배 이상으로 험악하게 구 겨졌다. 설마 저 자식이 있을 줄을 몰랐다는 태도였다. 알면 결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곽 노사께서 이곳을 방문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오늘의 방문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만큼 그에 비례해 궁금증도 컸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관주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무슨 부탁이길래 곽 노사께서 몸소 절 찾아왔는지 궁금하군요.”
부탁이라는 염도의 어색한 말에 빙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염도가 웬만해선 남에게 부탁 따위를 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극도로 싫어하는(증오에 가까운)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의 냉철한 이성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탁?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고개 숙이기 지독히 싫어하는 자가 부탁이라고? 얼마나 거창한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 건가?”
저 뻣뻣하기 그지없는 작자가 난데없이 부탁을 한다니 갑자기 그의 마음 속 심연 밑으로부터 한 줄기 호기심이 떠올랐다.
“특별히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면 충분합니다.”
“그래요? 무슨 일을 말입니까?”
어떤 부탁이라도 어지간해서는 다 들어줄 용의가 마진가에게는 있었다. 염도는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다(물론 본인은 귀찮아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주작단을 저에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주작단을 말입니까?”
천관주 마진가의 얼굴에 놀라움과 경악이 한데 섞여 떠올랐고, 그것은 곧 환희로 바뀌었다.
“그 일이라면 제가 두 손 모아서라도 먼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로군요.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부탁을 드려야 할 쪽은 오히려 이쪽이군요.”
관주 마진가는 염도가 스스로 주작단을 맡기를 청하니 기쁘기 이를 데 없었다. 짐 싸들고 다니며 빌어서라도 성사시키고 싶었던 일이었다. 그 아이들의 재능과 가 능성을 보아서라도 먼저 부탁하고 싶었던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무하다시피 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아니던가.
“귀찮다는 이유로 제자도 안 키우는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 주작단을 맡는다는 건가? 진심인가??
관철수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빙검의 마음 속에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의외의 감정이 허락도 없이 불쑥 일어나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 다.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경쟁심 또는 승부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럼 제가 청룡단을 맡지요.”
그 기습적인 의외의 제안으로 인하여 염도와 마진가는 경악에 휩싸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진심을 말하고 있는지 그 진위 여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주작단을 전담하겠다는 의지는 염도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귀찮은 일을 염도 스스로 자청할 리 없었다. 그 의지의 주인은 바로 비류연이었다. 비류연은 자신 의 제자들인 주작단이 청룡단과 비긴 사실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주변의 극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자신의 제자가 남들과 동등하다는 따위의 평가를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모두를 경악시킨 장족의 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막무가내였다.
아직은 주작단에게는 엄청나게 피눈물나는 단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본인들의 의사 타진 없이 염도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가 직접 나설 때는 아직 일렀다. 그 리고 염도 정도면 충분하다는 잠정적인 판단도 뒤따랐다. 여차하면 자기가 뒤에서 도움을 주면 될 것이다.
염도는 염도대로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은 꼴이 되어 그 일에 별다른 의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조금 전까지의 일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빙검이 염도에 대항해 청룡단을 맡겠다고 한 그 순간부터 얼어붙은 잿더미 속의 불씨 같던 염도의 의욕에 뜨거운 활화산 같은 불꽃을 지피는 꼴이 되었다. 빙검이 경쟁 상대로 나온 이상 이쪽도 절대 호락호락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작단을 청룡단에 이기게 하고야 말겠다고 염도는 굳게 결심했다. 그의 마음 속으 로 뜨거운 승부욕이 용솟음쳐 올랐다.
한편 빙검의 느닷없는 제안은 마진가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설마 빙검까지 일을 자청하고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건 또 의외의 제안이군요. 진심이십니까?”
확인 차원에서 마진가가 물었다. 한 번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인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미있겠군!”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염도와 빙검이 돌아다보았다. 자신의 이목을 이렇게까지 속이고 접근한 상대에 경계심을 품으며 찬찬히 살펴보 았다.
“오셨습니까.”
먼저 상대를 알아보고 예의를 표한 건 빙검이었다. 대무사부의 높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인사는 매우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저 얼음탱이가 웬일로 저렇게 공손하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인물이기에 목뼈가 냉동되다시피 한 저 자식이 저렇게 공손한지 염도는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허허, 예의를 거두시게. 이 늙은이야 항상 건강한 걸 관 노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매일매일 그렇게 인사 받다간 더 빨리 늙어 버릴지도 몰라. 과한 예의는 오 히려 무례가 되는 법이지.”
신선 풍의 노인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비범한 기운이 노인의 일신상에 물 흐르듯 흐르고 있었다.
영혼을 옥죄는 듯한 묘한 압박감. 자신에게 이런 압박감을 줄 만한 인물은 매우 적다 할 수 있었다. 염도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인정 하기 싫지만 바로 상대가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초고수라는 뜻이었다.
“허허허, 세월도 감히 공손 선배님의 기력을 꺾지는 못할 겁니다.”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받은 건 관주 마진가였다. 이로 미루어 신선 같은 노인은 관주 마진가로부터도 공대를 받을 정도의 신분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제야 눈치 둔한 염도도 이 선풍도골의 노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랐다.
“저 녀석이 저리도 공손한 게 당연하군! ‘
빙검의 예의는 같은 길을 걷는 한 사람의 검객으로서 자신보다 먼저 높은 도(道)를 성취한 무인에 대한 경의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검존(劍尊) 공손일취. 검성(劍聖) 모용정천과 함께 강호 사대 검신(劍神)으로 추앙 받는 초절정 검도 고수로 그의 검도는 신선경의 지고무상한 경지에 올랐다고 칭 해지고 있다. 현 천무학관의 원로원 원주임과 동시에 천관 최고 상담역이자 조언자이며,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조차도 감히 그 존재를 경시하지 못했다. 천무학관 내에서 관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했다.
세간으로부터 뻣뻣한 목의 소유자라 평가받는 염도도 이번만큼은 얼른 예를 표했다. 검존 공손일취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존성대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염도 곽가입니다.”
공손일취의 시선이 그제야 염도를 향해 움직였다. 방금 전만큼의 웃음이 담겨 있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화령염천탈혼도(火靈焰天奪魂刀)라는 곽 노사의 고명(高名)은 이 늙은이도 일찍이 들었구려. 그런데 검객을 아주 경멸한다는 평이 들려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였소이다.”
염도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붉어졌다. 평소 그는 화가 날 때마다 검을 쓰는 녀석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는 식의 비방을 일삼아 왔던 것이다.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지 고무상한 경지의 검도 고수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아무리 성격이 괄괄한 염도도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성질 그대로 발끈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못했다.
공손일취도 더 이상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자네 말은 진심인가?”
검존 공손일취는 빙검 관철수를 향해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 앞에서 허언을 입에 담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곽 노사가 주작단을 전담한다면 제가 청룡단을 전담하겠습니다. 그래야 형편이 맞을 것 같군요.”
“흥, 그래도 여전히 그쪽이 불리한 것 같은데 한 명 더 영입하지 그러나?”
독(毒)가시가 숭숭 돋친 염도의 말에도 관철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염도보다 낫다는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염도가 들었다면 노발대발 할 테지만.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나인 것 같지 않나? 자네가 언제 나한테 이긴 적이 있는지 금시초문이로군.”
빙검은 염도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이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아물지 않은 최악의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뭐라고? 말 다했나?”
염도는 발끈했지만 명망 높고 권위 높은 관주 앞에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철권 마진가는 그들조차도 한 수 접어주어야 하는 최절정 고수인 것이다. 아무나 백 도 무림 이대 세력 중 하나인 천무학관의 관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실력과 인품, 그리고 경험과 수완이 완비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검존 공손일취까지 옆에 있었다. 분하지만 화를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전임 사부가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분 모두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험악해지는 쪽으로 흐르는 분위기를 막기 위해 얼른 마진가가 입을 열었다. 염도와 빙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보냈다. 물론 둘은 모두 그 뜻이 무엇 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들의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앞으로 그들의 모든 걸 책임져야 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그럼 두 분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증인이 됨세!”
검존 공손일취가 증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강호에 이름 높은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기른 제자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룬다는 것은 지켜보는 것만으 로도 흥미진진한 일임이 분명했다.
염도와 관철수, 그리고 검존 공손일취가 모두 떠나고 대청 안에는 마진가 홀로 남게 되었다.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을 확인하자 그제야 마진가가 입을 열었다. “그래, 하는 일에는 차질이 없느냐?”
“예, 관주님. 아직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태사의 뒤에 위치한 휘장 안이었다.
누가 감히 천무학관주 철권 마진가의 등 뒤에서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감찰 활동에 수고가 많구나.”
“과찬이십니다. 의당해야 할 일이지요.”
휘장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예의를 잃지 않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아이들은 어떤가? 쓸 만한 아이들이 있던가?”
“예, 역시 칠절신검 모용휘가 단연 군계일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 보니 과연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내의 칭찬에 마진가가 돌연 홍소를 터트렸다.
“허허허, 그 아인 정말 뛰어난 놈이지. 기대하는 바가 크다네.”
모용휘의 입관은 올해 그를 가장 기쁘게 했던 일 중 하나였다. 그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휘장 안의 사내가 말끝을 흐렸다. 사내의 뇌리 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 그러나? 자네를 감탄시킨 또 다른 용봉기재가 있나?”
“아…… 아닙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나중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자네의 안목을 혼란스럽게 만들다니 여간내기가 아닌 모양이군. 내 기대하고 있겠네.”
“송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그 인물에 대한 기대는 십중팔구 실망으로 끝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잠시 무안함을 느꼈다. 괜히 말을 꺼냈다는 후회감도 일었다.
“그건 그렇고 관내에 수상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가?”
“예,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주의하게. 요즘 마천각 쪽에서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오고 있다네. 간자의 존재는 매년 어김없이 있어 왔던 일. 틀림없이 어딘가에 존재할 게 틀림없네.”
심지어 천무학관 쪽에서도 심심치 않게 간자를 침투시키는 실정이었다. 현 무림 상황처럼 쌍방이 지루한 대치 관계에 놓여 있을 때는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게 바 로 정보의 수집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가장 효과적인 요인 침투를 안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쪽에서도 보내는데 그쪽에서 안 보내 올 리가 없었다. 그건 지금 까지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런 숨바꼭질은 매년 있어 왔던 연례 행사라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휘장 뒤에 숨어 있는 사내의 역할은 간자를 찾기 위한 술래 역할인 것이다.
“항상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감찰은 무엇보다 비밀 엄수가 우선되어야 하네.”
그것을 잊을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마진가는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존명!”
마지막 복명 소리와 함께 휘장 뒤에 존재했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천무학관주 마진가는 조용히 몸을 태사의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조심하게나, 홍(紅)…….”
한창 천무학관 전 관도와 무사부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주작단원 모두는 여러 가지 각기 다른 감정이 잔뜩 담긴 눈으로 자신들의 눈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들의 전담 사부라고 밝힌 인물,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자격을 증명해 보이는 인물, 바로 염도였다.
주작단은 자신들이 눈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처음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무림 강호가 아무리 넓고 기인 이사가 수두룩하다지만 눈 앞의 염도처럼 특색 있는 모습을 지닌 이는 없다.
주작단원 모두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을 보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도 쟁쟁한 천하 오대 도객의 일인인 염도에게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고 무된 모양이었다.
“내가 바로 앞으로 너희들의 특별 지도를 맡게 될 염도다.”
주작단을 둘러보고 나서 염도가 먼저 자기 소개를 했다. 그의 말투에는 박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목소리도 사자가 포효하는 듯 우렁찼다.
“제자들이 노사님을 뵙습니다.”
열여섯 명이 일제히 포권지례를 취하며 인사했다. 그들의 예는 극진했다. 과연 염도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범상치 않은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가들아!”
“예?”
“한 명씩은 귀찮으니 세 명씩 덤벼 봐라.”
염도가 말했다. 무림에 명망 자자한 고수답지 않게 그의 말투는 거칠었다.
“진심이십니까?”
몇 마디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덤비라고 하다니 그들로서도 황당했다. 그러나 염도는 진심이었다.
“이놈들 보게? 그럼 내가 너희들하고 한가하게 농담 따먹기 할 것 같으냐? 네놈들의 실력을 알아야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것 아니냐!”
주작단원들은 염도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염도가 강호 오대 도객의 일인이라지만 세 명을 한 묶음으로 해서 덤비라는 것은 너무나 그들을 무시하는 처 사라고 여겼던 것이다.
“뭐해, 안 덤비고.”
그의 말에 주작단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염도가 최절정 고수라 해도 그들 세 명의 공격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미산 에서의 혹독한 수련은 장난이 아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운의 말은 어디까지나 연장자의 안위와 건강 보존을 고려한 말이었지만 염도에겐 무시하는 말투로 들렸다.
“긴 말 말고 덤벼 봐라.”
여기까지 재촉하는데 사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조심하십시오!”
맨 처음 염도에게 도전한 것은 남궁상과 현운, 그리고 노학이었다. 삼재진의 천(天), 지(地), 인(人) 방위로 염도를 둘러쌌다.
“그럼, 시작할까?”
“합!”
기합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운이 염도의 전신으로 피어올랐다. 일반인이라면 그 사나운 기운에 옭매여 한 발자국도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율이 세 명의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그제야 주작단원들은 감히 경시할 수 없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남궁상은 가문 비전 검법인 백뢰검법(百雷劍法)을 펼치며 그의 우측 옆구리를 쓸고 들어갔 다.
“백형만뢰(百萬雷)!”
검 끝으로부터 새하얀 검기가 일어나며 염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과연 그의 아미산에서의 공부는 헛된 게 아니었다. 그의 부드러움과 다르게 검 끝에는 묘한 살기 마저 어려 있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제법은 제법일 뿐이었다. 염도가 장난처럼 우수(右)에 쥔 홍령을 휘두르자 백색 검기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염도의 우수가 다른 일에 사용중인 때를 놓치지 않고 좌측에서 현운이 송문고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뿌렸다.
“구궁연환(九宮連環)!”
딴 걸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처음부터 태극혜검을 제외한 비전 검식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구궁영을 있는 힘껏 펼친 것이다. 아홉 줄기의 청색 검기가 세 번 연달아 염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든 청죽장 – 일명 타구봉이라고 불리는 을 휘두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노학이 가세했다.
“연수연화(連華)!”
개 잡기에는 너무 거창한 변화가 타구봉 끝에서 일어나 염도의 전신을 휘감았다. 최초의 일격이 어처구니없게 무위로 돌아가 넋을 놓고 있던 남궁상도 다시 가세 했다.
“백열낙뢰(白熱落雷)!”
검기 검풍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염도의 두 눈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 오의(悟意) 제팔식(第八式) 검염기(劍氣) 염풍(風)!
“콰쾅!”
강호에 이름을 떨친 세 가지 무공이 한가운데 얽히자 붉디붉은 홍광(紅光)과 함께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거센 충격파가 분진과 함께 주위를 덮쳤다.
세 명 모두 엄청난 충격을 전신에 뒤집어 쓴 채 흙바닥에 널브러지는 것으로 결판은 났다. 의외로 싱거운 결말이었다. 비류연과의 대결 이후 염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대 앞에서 방심하는 일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염도는 단숨에 전심전력으로 세 명을 차례로 쓰러뜨린 것이다.
“아직 멀었다. 멀었어! 앞으로 확실히 그리고 철저히 개조시켜 주마. 절대로 타인에게 패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으하하하!”
꼴사납게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세 명을 바라보며 염도가 광소(廣笑)했다. 비류연에게 쌓였던 스트레스를 염도는 주작단원들을 통해 풀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빙 검과의 경쟁까지 맞붙었으니 적당히란 있을 수 없었다. 윽박지르며 인정사정없이 몰아갈 뿐이다.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두 번째 악몽이 그들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앞으로 다가올 그들의 불길한 미래를 예고 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가 맞나?”
세 명이 한 묶음으로 덤비고도 염도의 털오라기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다음 날 순하게 생긴 청년 윤준호는 한 장의 서신을 들고 염도를 찾아가고 있었 다.
비류연은 염도에게 일을 맡기는 김에 화산 저능아 윤준호도 맡기기로 결정했다. 염도 정도 되는 과감성과 저돌성이라면 소심한 윤준호에게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작단원들과 함께 수련하다 보면 검술에 대한 이해도 훨씬 깊어질 것이다. 이대로는 윤준호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자 신과 효룡과 장홍만으로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성과를 보기 위해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할 것이다. 비류연은 그것이 무엇보다 귀찮았다.
해서 비류연은 윤준호에게는 과감한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 일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단지 귀찮아서 염도에게 냅다 떠넘긴 것뿐이 다.
검술을 익힌 유준호를 염도가 좋아하지 않을 게 뻔했지만 거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쓸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주작단원들도 거의 대부분이 검을 쓰는 사 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도(刀)를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염도의 성깔이 눈에 선했지만 간단하게 마음 편히 외면해 버렸다.
비류연이 대충 적어 준 한 장의 쪽지를 의지해 찾아간 윤준호는 자신이 만나야 될 상대에 대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바로 그 유명한 불꽃의 화신(化身) 또 는 화령염천탈혼도(火靈焰天奪魂刀)라 불리는, 그건 단지 듣기 달콤한 말일 뿐이고 항간에는 불타는 개차반 또는 염마왕(焰魔王) 등으로 더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염 도였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윤준호가 건네준 비류연의 서찰을 받아 들고 염도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흡사 지옥 대왕처럼 구겨진 염도의 인상에 심약한 윤준호는 울고만 싶었다. 비류연이 자신에게 신경 써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건 사양이었다. 염도가 성질을 가라앉히는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힌 염도는 바싹 긴장하여 뻣뻣해진 윤준호를 힐끔 한 번 쳐다보더니 턱으로 주작단원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 옛!”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윤준호가 재빨리 주작단원들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줄을 섰다. 염도의 박력에 압도당했는지, 아니면 전날의 일이 교훈이 되었는지 주작단 원 열여섯 명은 오와 열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염도의 악명을 귀가 따갑게 들어온 데다가, 잠시 겪어 본 그들로서는 군기가 잔뜩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일 학년 애송이의 존재에 대해 주작단원들은 모두 의아한 시선을 보냈지만, 겁 없이 질문 공세를 퍼부어 염도를 짜증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늘부터 너희랑 같이 내 밑에서 교육을 받게 된 윤준호라고 한다. 이상.”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심지어 윤준호에게 자신을 소개할 기회마저도 비정하게 박탈해 버렸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주작단은 스스로의 발로 뛰고 입 을 놀려 그 노동의 대가로 알아내야 할 것이다. 무척이나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열일곱 명이 모두 모이자 염도는 내키지도 않는 수업을 시작했다. 자연히 염도의 횡포도 서막이 올랐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염도가 잘근잘근 씹어내듯 말을 뱉어냈다. 윤준호는 괜시리 오금이 저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