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5화 – 음모가 깔린 습격 내기
음모가 깔린 습격 내기
일렁이는 촛불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추일태의 검이
순간 허공중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보였다.
그 다음 바닥에 흔들리던 촛대의 그림자가 여덟 조각이 났다.
그리고 방 안에서 불빛이 사라졌다.
한창 수련중이던 일은무영 추일태의 방 안으로 한 명의 인영이 스며들 듯이 흘러 들어왔다. 범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완벽한 은신잠행술 로, 만인(어둠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은자들)의 귀감이 될 만한 실력이었다.
“일비인가?”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암흑 속에 고정된 그의 존재도 추일태의 이목까지는 속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추일태는 스며든 어둠의 존재를 정확히 꼬집어 냈다.
“실력이 아직 녹슬지는 않은 모양이군. 어떻게 알았나?”
일비의 신형이 추일태의 왼편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느닷없이 추일태의 등 뒤에 나타나 불의의 기습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왼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이다. 원래 자신이나 추일태 같은 은신술의 대가들은 자신들의 등 뒤에 또 다른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공통된 묘한 특징이 있었다.
“나와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 중에 내 이목을 속이고 여기까지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이 자네 말고 누가 또 있겠나.”
말은 담담한 듯 내뱉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도 동요는 있었다. 일비가 자신의 존재를 사전에 들켜 동요한 것처럼.
그가 동요한 이유는 모습을 드러낸 일비의 위치가 자신의 왼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오른쪽보다는 미숙할 수밖에 없는 왼쪽을 선택한 것은 가장 일반적이 면서도 보편 타당한, 그렇기에 칭찬할 만한 정도의 위치 선정이었다. 왜냐하면 상대가 오른손잡이인 이상 왼손의 숙련도는 오른손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왼편에 위치한 상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동선이 길어지고, 대처 능력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문시 예의는 아니었다. 적과의 대적시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 사이에 친분 관계라는 게 존재했었던가?”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아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비가 무뚝뚝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추일태는 그의 한기 풀풀 날리는 냉랭함이 타고난 성격이려 니 하며 별 신경 안 쓰는 모양이었다.
“쳇! 얼음탱이처럼 쌀쌀맞은 건 여전하군. 근데 무슨 일인가? 자네가 여기를 다 찾아오다니 내일의 기상 이변이 기대되는군.”
혹시나 좀더 거창하면 해가 서쪽에서 뜨는 천지운행(天地運行)의 이변까지 기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추일태가 이런 몽상적인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비가 모른다는 것은, 안 그래도 껄끄러운 두 사람 사이의 인간 관계에 있어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더 이상의 악화는 막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론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해야 될 때가 종종 있지. 나에게 있어선 재수 없게도 그 날이 오늘이었을 뿐이다.”
북해신궁의 빙하신공(氷河神功) 십성 공력 발출을 입으로 해내는 듯한 차갑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추일태는 태양궁의 태양신공(太陽神功)이라도 훔쳐 배 웠는지 일비의 극심한 냉정함에도 상처 하나 타격 하나 입지 않았다.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
‘부탁’이라는 두 마디에 일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이성과 감성 모두 이 ‘부탁’이라는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부탁이 아니다.”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입술에서 성대의 울림을 통해 한파(寒波)를 토해 냈다. 자신이 추일태에게 부탁을 하러 왔다는 사실을 일비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럼 뭔가? 그 외의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군.”
“십비대(秘隊)의 장(將)으로서 전한다. 구정회 상부로부터의 명령이다. 한 가지 일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 아니 맡아야 한다는 게 더 정확하겠군.”
일비는 명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만일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비는 부탁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추일태한테는 부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 았다.
“쯧쯧, 이 친구야. 그런 걸 우리 세상에선 부탁이라고 한다구.”
딱하다는 표정으로 추일태가 말했지만 일비는 무시했다. 지금 그는 공무 집행중이었다.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말은 정확히 하라. 우리는 친구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불쾌한 표현을 쓰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혀 밑에 만년 한설을 얼려 만든 얼음 송곳을 숨겨 놓은 것 같은 일비의 말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추일태는 더 이상의 말싸움을 삼갔다.
“예이, 예이, 알아모시겠습니다. 그럼 용건이나 한 번 들어볼까? 갑자기 구정회에서 잊고 살았던 날 찾는 이유는?”
비록 한동안 구정회의 일에 소홀했다고는 하지만 그도 구대 문파의 일원인 이상 구정회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만일 그랬다가는 눈 앞에 서
있는 일비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시험!”
그것이 바로 일비(一秘)의 용건이었다.
구정회(正) 최고의 두뇌 백무영은 평소 신조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쓸모가 없어 보이는 무능한 사람일지라도 가끔
은 소용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주변에서 아예 포기한 사람일지라도 그 자신이 만약 쓸모가 있다 여겨지면 주위의 만류에도 서슴없이 패로 사 용했다. 이번 추일태 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큰 기대 없이 추진된 일이었다.
헌데 추일태가 다음에 벌인 일은 그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중에 백무영은 이때 내린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저기요…….”
함께 길을 걷던 윤준호가 우물쭈물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한참을 고민하다 간신히 용기를 낸 모양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비류연이 반문했다.
“아뇨. 저기…… 아까부터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의 감각에 확신이 서지 않는지 그의 말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쯧쯧, 정말 재주가 부족한 친구들이군.”
불쌍하다는 듯 연민에 가득 찬 얼굴로 비류연이 말했다.
“무슨 뜻인가?”
옆에 있던 효룡이 물었다. 그도 이미 미행자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던 터였다.
“뒤편에 몰래 숨어서 우리들 뒤꽁무니 쫓는 사람들 말이야. 준호의 이목에도 걸렸으니 볼장 다 본 것 아냐?”
“허긴 그것도 그렇군.”
얼마나 미숙했으면……. 효룡도 동의했다.
다시 비류연이 효룡에게 물었다.
“몇 명인 거 같아?”
“음, 두…… 두 명이요.”
“땡! 틀렸어. 세 명이야. 확인해 볼까?”
갑자기 비류연이 소리를 높여 외쳤다.
“자, 미행 미숙자 아저씨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참인가요?”
그러자 뒤편 수풀을 헤치며 인영들이 나타났다. 그 수는 모두 둘이었다. 두 명 모두 청의를 입고 허리에는 청강검을 차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머리에는 하얀 백 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류연의 판단이 틀렸단 말인가?
“누구죠?”
예의상 한 번 물어 보는 비류연이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이름 석 자씩이나 물어 볼 필요는 없지.”
그때 등 뒤에서 우렁차고 거침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비류연이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진성곤 임성진을 비롯한 애소저회 인물들이 서 있었다. 심지어 두 다리로 그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지 의심스 러운 부장 비연태마저 있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의 두 다리가 그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성곤 임성진이 한 발짝 나서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철곤이 바닥을 움푹 패이게 만들었다.
“내 후배에게 용무가 있으면 먼저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은연중에 주위에 잠복하고 있던 인간들을 끌어내어 살펴보니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질끈 동여매져 있는 백건을 보니 빙봉수호대의 인물이 틀림 없었다. 그의 귀도 주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편이라 왜 그들이 비류연의 뒤를 따라왔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도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놀랐었던가. 선뜻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정보원 녀석이 괜히 장난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서너 군데의 다른 경로를 통해 똑같은 소식을 접하고서야 그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녀를 아는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은 이미 터진 거지만 그렇다고 해도 임성진은 간만에 손에 넣은 신입 회원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자기 같은 동호회에 신입 부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헛된 몽상을 품지 않았고, 사태를 확대 해석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발맞춰 대처 방법을 찾 은 것이다. 착각은 자유지만 임성진은 이미 그 자유를 반납한 지 오래였다.
백건을 두른 청의인 중 우측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강만현, 좌측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전문연으로 둘 모두 종남파 출신의 동문지간이었다. 이래봬도 사문에서는 알아주는 인재들이었다.
덤벼들라고 하자 두 사람은 정말로 검을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에 따라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철곤도 서서히 움직였다.
그의 곤은 마치 태산처럼 둔중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느려 터진 일격에도 강만현과 전문연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아니, 전신의 근육이 부르르 떠는 것 을 보니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성진십이곤의 일격을 막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힘겨워 보여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먼저 무기를 부딪친 사람은 우측에서 공격해 들어오던 강만현이었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인 임성진의 곤이 그의 검에 닿자마자 청강검은 이층에서 떨어진 접시 조 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펑!”
굉음이 터졌다. 동료의 낭패를 본 전문연이 급하게 검기를 뿌리며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임성진의 곤은 태산처럼 둔중하게 움직였다. 그의 검은 마치 빨려 들어가듯 임성진의 철곤에 부딪쳤다. 이번에는 조금 전 한 수와는 다른 한 수인 모양이었다. 이번 철곤에 부딪친 전문연의 청강검은 한 여름철의 엿가락처럼 우그러졌다. 더 이상 병기로서 사명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이럴수가!”
흐물흐물한 엿가락처럼 꼴사납게 휘어진 검을 든 전문연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검의 생명이 한여름 태양 빛 아래 녹아 내린엿가락처럼 휘어졌는데, 그가 어찌 감히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할 맘이 있나?”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검을 잃은 검객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졌다는 표시였다.
싸움은 임성진의 승리로 싱겁게 돌아갔다.
“그럼 가 봐. 다시는 내 사랑스런 후배들 건들지 말고.”
그제야 둘은 부랴부랴 몸을 움직여 자리를 떴다.
“쯧쯧, 저렇게 약해 빠져서야 천무학관이라는 이름 넉자가 부끄럽구만.”
한심스럽다는 듯 임성진이 내뱉었다.
“그런데 아직도 몸을 숨긴 채 안 나타나고 있는 분이 계시네요!”
손 털고 있는 임성진에게 비류연이 말했다. 앞의 두 사람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상관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같은 소속은 아닌 모양이었다.
“호오, 자네도 눈치챘군. 이목이 대단한데!”
임성진은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그의 기척은 너무나 은밀해 하마터면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할 뻔했던 것이데, 이 새까만 후배가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신기루처럼 등장했다. 앞의 두 사람처럼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주섬주섬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마술처럼 눈 앞에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임성진과 비류연, 모두 동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헉!”
놀란 사람은 그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윤준호뿐이었다.
“훌륭한 잠영술이로군.”
은신술의 대가라 불리는 비연태의 짤막한 평이었다.
“오호라, 이게 누군가? 햇빛이 싫어 숨어 다니는 추형 아니신가?”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임성진이 말했다. 의외로 등장 인물은 그가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이로군, 성진.”
오후의 그림자 속에서 마술처럼 등장한 사람은 바로 일은무영 추일태였다. 그 둘은 이미 예전에 아는 사이었던 모양이었다.
“자네도 우리 귀염둥이 후배에게 볼 일이 있나?”
“물론 볼 일이 있어 왔네.”
그는 임성진의 물음에 순순히 시인했다.
“그렇다면 자네도 나와 한 번 붙어 보겠다는 건가? 사양하지는 않겠네.”
임성진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었다. 추일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이쪽에서 사양하지. 그러기엔 자네의 철곤이 너무나 무섭군. 자네의 붕곤(崩榥) 아래에 찌그러지는 건 사양일세.”
추일태가 과장되게 몸을 떨며 말했다.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만은 진심이었다. 소위 명문이라고 칭하는 문파 출신의 제자들이 출신을 따져 은근히 무 시하는 임성진이었지만 그의 실력은 결코 남에게 무시당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는 임성진의 붕곤 공부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 다. 조금 전 두 명의 수호 대원을 상대로 펼쳐 보인 맛보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용무는 끝난 건가?”
용무를 마쳤으면 이만 가 보라는 이야기였다.
“아직 남았다네. 난 그저 간단한 내기를 한 번 했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다네.”
“엉덩이 무거운 자네가 대낮에 그런 일로 움직였다니 도무지 믿지 못하겠군.”
언제 봤다고 그가 비류연과 내기를 한단 말인가. 추일태의 괴팍한 성격에 대해서 꽤 상세히 알고 있는 임성진은 절대로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모 르는 내막이 있었다.
“그렇다면 믿지 말게.”
저쪽도 굳이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더욱더 수상쩍었다.
“그러지. 그래, 내기의 내용이란?”
“마침 저 아이가 자네 애소저회 소속이라니 마침 잘 됐군. 이건 그쪽에서도 구미에 당기는 일일 걸세.”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욱더 궁금해지는군.”
임성진은 정말로 궁금했다. 원래 그는 누구보다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둔하게 생겼다고 그를 무시하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었다.
“사실 이렇게 연약한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치고 박고 싸운단 말인가. 내가 가진 재주라고 해야 몸을 숨기고 어딘가에 숨어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재주를 겨루었으면 해서 말이야……..”
“자네와 은신잠행술을 겨루라니 시작하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라는 말이 아닌가. 난 응낙할 수 없네.”
임성진이 잘라 말했다.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하지만 내가 내기를 청하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자네가 아니라네. 내가 청한 사람은 바로 저쪽이지.”
추일태의 손가락이 곧장 비류연을 가리켰다.
“어떤가?”
다시 추일태의 입이 비류연을 향해 열렸다. 비류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전 내기를 하지 않습니다.”
순간 추일태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하게 떠올랐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돈이 적게 걸린 내기는 말이죠.”
이어지는 비류연의 대답에 추일태가 광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지. 걱정 말게나. 내기 돈은 충분하게 걸릴 테니깐 말일세. 그 정도는 예산 청구를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럼 승낙한 걸로 알겠네.”
“잠깐. 아직 내기의 내용도 말하지 않았어. 말은 끝까지 해야지.”
중도에 임성진이 막아서며 말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그건 말일세 어느 한 장소에 들어가 어떤 물건을 들고 나오는 것이지.”
“장소는?”
““바로 자네 애소저회 회원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침투에 성공하지 못한 곳이지.”
“자네……. 서…… 설마!”
“맞네! 바로 그 곳이지. 바로 백향관(白香館)일세.”
“진심인가?”
눈이 휘둥그래진 임성진이 말했다.
“물론.”
“그건 자네의 위쪽에서 시킨 일인가?”
여전히 임성진은 신중했다.
“그런 고리타분한 녀석들이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있겠나. 이것도 그들의 귀에 들어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들걸. 재미있지 않나?”
상상만 해도 우습다는 듯 추일태가 배꼽을 잡았다. 그제야 임성진도 신중한 표정을 풀고 마주 웃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과연 구파의 이단아다운 내기로군. 그 내기 이쪽에서 받도록 하지.”
갑자기 그들 사이에 끼여든 것은 비연태의 거구였다. 추일태의 공언대로 그의 제안은 애소저회로서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여성 전용 기숙사 백향관의 절대 방어를 돌파하는 것은 그들 애소저회의 오래된 숙원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도전과 좌절과 실패가 있었던가. 이제 다시 도전의 깃발을 올릴 때였다.
“그럼 세부 사항에 대해 의논해 볼까?”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추일태가 말했다.
“그전에 한 가지 물어 봐도 될까요?”
비류연이 말했다.
“뭔가? 무엇이든 물어 보게.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대답해 줄 용의가 있다네.”
“이거 참 친절하기도 하시군요. 굳이 백향관을 택한 이유가 뭐죠?”
강호에 대해 먹통인 비류연도 그 동안 천관에서 지내다 보니 백향관이 뭐 하는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건 간단하지. 이곳 천무학관에는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곳이 세 곳 있다네.”
추일태가 비류연의 눈 앞에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힘주어 말했다.
“그럼 백향관이 그 세 곳 중 하나라 그 말이군요.”
“그렇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곳을 제외하고 굳이 백향관을 택한 이유는?”
“그건 안 들어도 뻔한 일이지.”
“그건 또 왜 그렇죠?”
추일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왜냐하면 나머지 두 곳은 절대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금지 지역이기 때문일세. 사실 백향관은 들어갔다 걸려도 작은 징계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곳은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지. 백향관은 일이 잘못 돼도 장난으로 얼버무릴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곳은 그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강호의 성역이야. 이곳 천관의 도의(道義) 상의 문제이기도 하네. 답이 되었나?”
“물론이죠.”
“그럼 내기가 이루어졌다고 믿겠네.”
“내기는 이루어졌습니다.”
비류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인은 저쪽 비연태에게 맡기면 되겠군.”
추일태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으로 천무학관 희대의 사고뭉치 이인 조 천무쌍귀영을 양 옆에 끼고 서 있는 비연태의 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지.”
비연태는 추일태의 제의에 순순히 응낙했다. 그도 내심 이 내기를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내기의 목표는 바로 애소저회 최후의 목표와 일치하는 백향관이 다. 거부 의사를 낼 이유가 없었다. 이로써 천관 역사상 가장 황당한 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내기의 흥분에 들떠 있는 부장 비연태를 비롯한 애소저회 회원들과 함께 애소저회의 건물로 돌아왔을 때 건물 안에는 한 명의 사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는 거지였다. 그런데 거지답지 않게 그는 너무 뚱뚱했다. 빌어먹는 거지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이 찔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저런 때깔은 도저히 거지한 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동시에 세워 놓고 보니 꼭 쌍둥이 형제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에 비연태와 같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비연태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오, 태남. 자네 왔는가. 마침 잘 되었네.”
만면에 화색을 띄며 비연태가 그를 맞이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자네가 흥분하다니 별일 다 있군.”
그는 꼬질꼬질한 얼굴을 돌려 비연태를 쳐다보았다.
“그럼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고 말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네.”
“무슨 기회?”
그가 의아해 하는 게 당연했다.
“드디어 우리의 성지를 공략할 기회 말일세.”
“정말인가?”
“물론일세. 내가 자네 같은 거지에게 거짓말해서 얻는 게 무엇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나. 명백한 사실일세.”
꾀죄죄한 걸인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백향관 공략은 그의 일생의 과제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누굽니까?”
처음 보는 사람과 둘이서만 짝짜꿍하는 비연태를 보다 못한 비류연이 물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내가 아직 소개를 안 했군. 우리 애소저회의 부부장이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걸개 변태남 대협이지.”
“호오.”
호기심 어린 시선이 걸개 변태남의 거구로 향했다.
현재 애소저회에는 동호회 전체를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현임 부장인 비연태였고, 나머지 한 명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거지 걸개 변 태남이었다.
알다시피 이곳 애소저회에서 주로 하는 일은 소저들의 하루 일과에 대한 은밀하고 끈질긴 추적과 분석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회가 된다면 서슴없이 사용 물 품을 얻어내는 매우 고난이도의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런 주제에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공식적으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단짝이 아닐 수 없었다.
걸개 변태남, 또는 취화개 변태남. 개방 출신 거지 치고 그를 모르는 거지가 없었다. 스스로 꽃에 취했다고 떠벌이고 다니는 그의 남다른 취미 활동은 거지 세계에 서도 알아주는 전혀 거지답지 않은 취미였다. 거지랑 미소저(小姐)랑 무슨 친분 관계가 있다고 그쪽 계통에 발을 들여놓는단 말인가. 하지만 걸개 변태남은 비단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력과 추진력을 보여주어 보는 이를 감탄케(?) 했다.
그가 개방의 팔결 제자 신분을 이용해 이끌고 있는 곳이 바로 추미단(追美團 : 아름다움을 추적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였다. 그가 거느린 개방의 십팔 금 여성 전문 정보 집단 추미단은 여성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정보 수집 능력과 그에 걸맞은 업적(?)과 실적을 지닌 단체였다. 그들 구성원 대부분 은 별나게도 미녀 정보 수집 능력 방면으로 특화되어 있는 거지들이었다. 게다가 그 이외의 일엔 관심도가 매우 낮았기에 능력 발휘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그 특성만큼 여성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들 말로는 그들은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단체라고 한다. 별로 신용은 없어 보인 다.
추미단은 모두 천관도 출신 거지로만 이루어진 단체가 아니었다. 개방 내부에 그물처럼 뻗어 있는 추미단의 특성상 천관도가 아닌 인물이 오히려 더 많은 집단이 었다. 개방 안의 소모임 같은(소모임이라 하기엔 규모가 너무 컸지만) 조직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추미단 단장인 걸개 변태남과의 관계 때문에 추 미단과 애소저회는 긴밀하고 탄력 있는 상호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일석이조의 일이었다.
그러니 거대 거지 정보 집단인 추미단의 거의 모든 정보가 애소저회로 흘러 들어간다고 보면 크게 틀린 게 아니었다. 날마다 엄청난 십팔금 정보가 각계 각처로부 터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다. 걸개 변태남은 그런 비각 내지는 비영원의 대원이 되기에는 결격 사유가 넘치도록 많은 거지 떼들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 시기에 걸개 변태남은 누구보다 힘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비연태, 그가 누구인가? 뒤룩뒤룩 살찐 둥글넓적한 얼굴 면상에 가느다란 두 눈, 툭 튀어나온 두꺼운 입술, 팔뚝과 종아리와 보이지 않는 가슴에 난 무성한 털, 보 기만 해도 파묻혀 버릴 것 같은 살들. 정말 상상하기도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사람들은 비연태 혹은 줄여서 변태라고 부른다. 그의 모습은 정말 변태 라 부르기에 정말 적합하고 합당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무공 수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들리는 풍문으로는 그는 은신잠행술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체술의 달인이라고들 한다. 그의 비밀 무 공 절기인 비연태 육구오십사(九五十四) 체위술. 도대체 어떤 기술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숨겨진 비장의 기술이다.
무한한 변화와 응용으로 이루어진 무공이며 여성을 상대할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데, 무성한 소문만으로는 그 어렴풋한 형태조차 짐작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도무지 예측을 불허하고 하나 하나가 모두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엽기적인 행동 투성이였다.
그의 취미는 미녀들의 그림과 신상 정보를 캐내는 일이었고,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와 관계가 깊은 무리는, 그의 방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천무쌍 귀영이나 임성진 같은 특색 있는 녀석들 빼고는 개방의 거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거지들은 모두 개방의 추미단 회원들이었다. 한 마디로 미녀들의 신상 정보를 전문적으로 캐고 다니는 거지 단체였다. 개방 추미단장은 바로 그의 단짝친구이자 애소저회의 부부장이기도 한 걸개 변태남이었다.
둘은 짝짜꿍이 잘 맞았다. 서로의 동일한 취미 생활을 위해 상부상조하며 생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천관 내의 모든 미녀들이 그를 꺼려했지만, 그의 존재는 어둠 속 은밀함에 가려져 있었고 그의 행동은 신비하고 음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이 천무학관은 물론 강호 내에 모르는 미녀는 없다고 자부하고 있는 데, 그것이 그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런 비연태에게 있어 갑자기 맺어진 추일태와의 내기는 애소저회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내용의 것이었다. 그것은 애소저회의 삼십 년 염원이자 목표이 기도 했다. 그만큼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본격적인 내기 일을 앞두고 애소저회는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물론 여기에는 비류연과 효룡, 장홍 등이 참석하고 있었다.
“필요한 건 정보야.”
비연태의 단호한 한 마디였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닌 자라도 백지 상태에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백향관이지.”
변태남도 거들었다. 비류연이 비록 일 학년 기본 소양 과목으로 기관 진식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초보자에 불과했다.
“백향관이라면 천무삼성 중 한 분인 검후(劍后) 이옥상 여협이 직접 세웠다는 여자 전용 기숙사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곳 맨 꼭대기에는 그분의 심득까지 보관되어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분에 대한 백향관 여학생들의 존경도 남다르지.”
부장 비연태의 친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흐흠…… 백향관이라…….”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사람은 효룡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두 눈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예?”
퍼뜩 정신이 든 효룡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질문한 사람은 옆에 있던 장홍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 아니요……. 잠깐 뭐 좀 딴 일을 생각하느라구요. 남자로서 무척 흥미 있는 일 아닙니까?”
효룡은 음흉한 웃음 사촌쯤 되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홍의 물음을 그냥 얼버무렸다. 장홍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돌아서는 효룡의 눈에서 기광이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하하하하! 그럼, 그럼. 흥미진진한 일이고 말고. 사내 대장부로서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광소를 터트리며 끼여든 사람은 부장 비연태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연신 웃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자자, 빨리 머리를 맞대어 보자고. 우리에겐 별로 시간이 없어.”
이 일의 최대 관건 중 하나가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비류연에게 기관 진식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내기 일시가 한 달 후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애소저회에는 그 동안의 피땀어린 노력과 정렬의 결정체라고 할 만한 자료가 산더미처럼 수북히 쌓여 있었다. 미인을 찬미하는 애소저회에 있어서 백향관은 가장 먹음직스런 먹이감이자 지상 최대 최고의 목표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꿈을 품은 이가 비단 비류연, 추일태만은 아니었다. 백향관의 정복은 애소저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삼십 년의 애소저회 역사 동안 수많은 도전과 시도가 있었다. 비록 번번이 그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실패를 통해 얻은 것 또한 적 잖게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늘어나는 것이 백향관 내의 지도와 기관의 파해법들이었다. 비록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 바뀐다고는 하지만 기본이 바뀔 리 없었다.
백향관에 관한 자료만도 한 수레는 족히 나올 정도의 양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애소저회는 벌써 올해의 백향관 침소 배정 현황까지도 입수해 놓고 있었다. 건 물 내부 도면도는 벌써 이십 년 전에 입수했으며, 개축과 개량을 거듭할 때마다 자료를 보충해 나갔다. 하지만 백향관의 개수는 다섯 번밖에 되지 않았기에 큰 자료 변동은 없었다.
이제 선배들의 피땀어린 결정체이자 노력의 산물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쏟아 부어지기 시작했다. 언제가 한 번은 시도하려고 했던 일. 애소저회 부장으로서 백향 관 침투를 획책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격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탁자 위에 백향관 내부 도면도가 깔리고 그 위에 각층의 기관배치도가 깔렸다. 그리고 그 외의 수십 종의 기타 참고 자료들이 수북히 책상 위에 쌓여 올라갔다. 그들은 이마를 맞대고 침투로를 찾기 위해 엑기스가 나올 때까지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