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6화 – 절대 경비 구역 백향관 습격 사건

비뢰도 4권 6화 – 절대 경비 구역 백향관 습격 사건

절대 경비 구역 백향관 습격 사건

애소저회 선배 회원들의 부추김에 못 이긴 척 고액의 내기를 건 비류연과 그 일행은 방과 후 애소저회 부실에 모여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그들이 그동안 근 삼십 년 동안 그림의 떡으로

여겼던 금남(禁男)의 장소, 여인들의 낙원 백향관이었다.

성공만 보장된다면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천금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을 일이었다. 그 동안 백향관 공략을 위해 애소저회가 쏟아 부은 노력과 도전만 해도 엄청 난 것이었다.

이곳 천무학관 내에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을 손으로 꼽으라면 항상 모든 이의 접혀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백향관이다. 절대 금남(禁男)의 성지(聖地), 철저하고 엄중한 경계 경비.

하지만 수십 겹에 걸쳐 둘러진 깊은 방어진과 죽음의 절진도 몇몇 특이한 사내들의 흥미 유발과 치솟는 호기심을 완전히 말소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경계 경비가 삼엄하면 삼엄할수록, 난이도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백향관은 기묘한 매혹의 향기로 사내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고 그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켰다.

그런 와중에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라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먼지보다 작은 돌파의 구멍을 찾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천무쌍귀영과 비연태도 그 중 한 사람 이었다.

백향관 공략을 일생 일대의 목표로 삼고, 가슴 가득히 정렬을 품고서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백향관 대남성 절대 금남진 돌파야말로 그들 애소저회에게 주어진 필생의 과업이었다.

물론 그들의 들끓는 정열에 남자의 어두운 욕망 부분이 상당 부분 개입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들끓는 정열 속에서 한 달이란 시간이 유수처럼 흘 러갔다.

휘어진 칼날처럼 암천(天) 위에 걸려 있는 신월은 지상의 모든 사물을 그 그림자의 영향권 아래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백향관의 주위를 밝히는 횃불의 불빛마저 없었다면 천지는 거의 완벽한 어둠에 묻혀 버리고 말았으리라.

신월야를 거사 일로 택한 이유가 있었다. 그믐날 밤은 오히려 사람의 경계심을 북돋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침투 시기로 달이 기울어져 가는 최후의 시기인 신월 야를 택한 것은 나름대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은신술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백향관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가슴에 묘한 흥분이 일어났다. 이런 약간의 흥분은 몸을 긴장시켜 근육을 경직시키기보다는 약간의 활력을 주어 오히려 기분 좋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강호 출두 이후 아직까지 뭔가를 두려워해 보거나 긴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지닌 바 성품과 다르게 주절주절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런 은밀 무쌍함을 요하는 일에 내심 자신이 있는 비류연이었다. 비록 애소저회의 회원들이 누구나 배워야 하는 은신잠행술을 익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최강의 신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봉황무(鳳凰舞)가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천금을 주고도 바 꿀 수 없는 실전 경험이 있었다. 과거로 이미 흘러간 일을 어찌 돈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옛날 소실 적 사부의 눈길을 피해 식사 당번을 빠지려고 은밀하게 몸을 빼내다가 걸린 횟수만 하더라도 수백 번을 헤아린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종국에 가서는 드디어 사부의 귀신같은 이목을 귀신 빰치는 솜씨로 피해 내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에게는 수천 번의 실전 경험을 통한, 그것도 귀신같은 이목의 소유자인 괴물 단지 사부를 피해 낸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거 아니고는 절대 자기 자 신을 남의 이목으로부터 숨길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목숨 걸고 해본 가락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자정을 반 시진 앞둔 시각, 이제 곧 백향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난화백무진(亂花白霧陣)의 생문(生門)이 열릴 시간이었다. 이때를 놓친다면 다시 생문이 열리기까 지 다시 두 시진(네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자칫하면 일도 벌이기 전에 날이 밝을 위험이 있었다. 사실상 기회는 지금 이때뿐이었다. 두 시진 후는 탈출의 시기였 다.

일은무영 추일태도 어디선가 침투 시기를 노리며 양 떼를 노리는 늑대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저 안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 쨌든 지금은 남에게 신경 쓰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할 때이다.

사전 예비 침투 교육은 완벽히 받았다. 그 동안 백여 차례의 침투 전과 기록을 보유한 애소저회에는 그간의 경험과 영예로운(?) 전적의 산물인 침투 경로와 시각, 방향, 기관의 배치, 진법의 종류 등이 자세히 적힌 자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게다가 자체 정보 수집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사전 정보는 완벽했다.

목표는 삼층에 위치한 301호실. 이제 남은 것은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입관 당시, 현재 지내고 있는 기숙사인 검혼관(劍魂館)에서 비류연이 이미 몸소 경험해 본 바 있듯이 천무학관의 각 건물들 안에는 무수히 많은 수의 노방과 기관 들이 거미줄처럼 엄밀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검혼관의 그것도 백향관의 첩첩 삼중 사중으로 둘러쳐진 기관 함정에 비한다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검혼 관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밀한 기관이 죽음을 방석 삼아 깔려 있는 곳이 바로 백향관이었다.

왜 백향관에 설치된 기관 진식이 다른 곳보다 오히려 그 수와 그 강도 면에서 더욱 강할까?

왜냐하면 그녀들은 적의 침입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울타리를 끼고 사는 남자라는 늑대들의 침입에도 주위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천

장과 처마 위, 지붕 위, 욕실, 변소 주위에는 사내들의 침입에 대비한 함정들이 적의 침입에 대비한 함정보다 더욱 높은 살상력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것들로 빼 곡이 설치되어 있었다. 음탕 변태남들이 함부로 그녀들의 욕탕이나 변소에서의 은밀함과 치부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 취미 생활의 일환으로 이 기숙사에 잠입을 결 심하는 남정네들은 생명을 담보로 걸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백향관의 설립자이자 건축가 담당자는 앞으로 들어올 천무학관 남정네들의 인격과 도의에 큰 기대와 신용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 면 어찌 몰래 들어올 늑대 무리들을 대비한 삼중 사중 죽음의 절진을 거리낌 없이 깔아 놓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설립자의 우려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수백 차례의 침투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침입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별로 좋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어도 좋을 것이다.

수 차례의 침입 사례가 발생하고, 여느 때처럼 실패로 돌아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때마다 백향관의 기관 진식은 한 겹 두 겹 그 살벌함과 엄밀함은 가중되어 갔 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그곳은 이제 누구도 뚫고 들어가지 못할 희대의 절험지가 되어 있었다.

취침 시각 이후 야간 방어 기관이 작동되면 백향관 소속 여성들조차도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릴 정도였다. 수많은 기관이 어디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 지 모두 일일이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귀찮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순결 방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용의 가 있었다. 불평 불만을 지닌 소수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러다 보니 백향관에 설치된 기관 진식과 노방은 도리상(그리고 상식상)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 침입자로 간주되고 있는 인물들의 평균 실력을 추정해 보았을 때, 신법(身法)의 고절함은 한 걸음에 사오 장(丈)을 뛰어넘고, 검기의 출중함은 검기를 뿌려 칠팔 장 밖의 목표물을 베어 버리는 실력의 사내들이었다. 그 실력 이하의 인물들은 천무학관에 발을 붙이지도 못한다. 게다가 위의 기준은 어차피 평균적인 예상치에 불과할 뿐이었고 개중에는 더욱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에 대비하는 기관 진식에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날이면 날마다 기관 작동 위치와 함정이 변하는 곳이 바로 백향관이었다. 만약 파해법과 암호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양날의 검이 되어 이용자에게까 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백향관의 기관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단 비상종이 울리고 남정네의 침입이 확인되면 백향관 주위로 아줌마들의 천라지망이 단숨에 둘러쳐져 물샐 틈 없는, 방수 완비한 경비 하에 침입자를 색출하게 된다. 그 아줌마들은 바로 금남의 문파에서 날고기는 여고수 출신들로, 그 실력은 남자를 눈 아래로 깔아뭉갤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들의 남자에 대한 혐오는 병적 인 것에 가까워 용서와 인정이란 그녀들의 칼 끝 아래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그녀들을 공포와 경외를 담아 절독난향십이선녀라 조심스럽게 부른다. 기니깐 줄 여서 독한녀(毒恨) 혹은 쌍말로 독한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녀들이 이곳을 지키는 이유는 닭장을 늑대 소굴을 향해 활짝 열어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백향관을 지키는 수호위로 전설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그녀들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멀쩡했던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응징 당하는 것이다.

오늘 침투 계획에 그녀들과의 접촉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녀들과의 접촉, 그리고 만남 그 자체는 이번 일의 실패를 뜻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그녀들의 볼일 보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여 그녀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입증하겠노라 큰소리치며 백향관에 잠입을 시도했던 한 중생이 그 날 이후 세인들의 눈에서 자취를 감추고 소식 두절이 된 적이 있었다. 그 후 감히 함부로 백향관을 넘보는 자들은 없었다. 물론 내심으로 승복하지 않고 불타는 도전 의식을 지닌 남자들도 많았다. 아직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녀들에 대한 사전 정보도 완벽했다. 지금 이 시각이 절독십이선녀들의 경계가 가장 허술할 때였다. 침투 경로도 완벽했다. 몇 번이나 사전 연습을 거쳤다. 실행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 녹아들 듯 비류연의 몸이 움직였다. 한낮이라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의 움직임은 은밀하기 그지없었다.

‘일차 관문은 통과한 것 같군.’

보통 십이선녀들은 세 명씩 교대로 경계를 서는데, 세 명의 독선녀 중 그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원에 핀 꽃들을 이용해 펼친 난화백무진도 진법에 휘 말리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비류연은 신형이 스며들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통해 가자면 너무나 많은 기관 진식들이 그를 막을 것이다. 아직 완전한 취침 시각 전이라 완전히 작동되지는 않겠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이목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비류연은 선배들이 답습했던 발자취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우선은 예전에 다섯 번째로 백향관에 도전했던 애소저회 선배가 발견한 천장 통로였다. 침투로는 이미 숙지한 대로였다. 천장 위는 역시 예상대로 좁았다. 그는 천장 위로 올라왔다 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일곱 번짼가 여덟 번째 선배가 이곳 을 이용하다 걸리는 바람에 이곳에도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고 주의를 이미 받았던 터였다.

비류연은 전신의 감각을 최대한 개방한 채 고양이보다 더 조심스럽게 신형을 움직였다. 여전히 무음 무형의 움직임이었다.

백향관 내의 모든 침소에 불빛이 꺼지고, 취침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백향관 내의 모든 절진이 가동된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몇몇은 잠들고 몇몇은 깨어 있 는 현실과 꿈의 세계가 교차하는 시각에 침투하는 쪽이 오히려 안전하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무시무시하고 흉험하기 짝이 없는 기관 진식을 피하느니 차라리 사람을 피하는 쪽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주위의 경계도 훨씬 느슨할 것임이 분명했다. 누가 자신이 눈 멀뚱멀뚱 뜨고 있을 때 몰래 침투하리라 생각하겠는가. 의식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이었다.

해서 비류연은 이때를 통해 백향관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몇 명의 선자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위치가 비류연의 이목에 걸린 이상 절대 그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가 볼까나.”

비류연의 신형이 달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였다. 어떠한 소리도 형체도, 심지어 미동조차도 없었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머리 속에 그려진 도면대로 움직인 줄 알았는데 이곳이 도대체 어딘가? 분명히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엄중함은 다른 곳의 수 배는 됨직해 보였다. 방어의 엄중함과 공기 속에 가득 찬 수분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그곳은…… 욕실이 분명했다.

“어흠, 이걸 공교롭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때마침이라고 해야 하나?”

비류연이 백향관을 침투한 시각은 공교롭게도 천무학관의 여협들이 하루의 먼지와 피로를 털어 내고 취침 준비를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피로를 몸에서 털어 내 는 데 열탕에서의 목욕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백향관의 목욕탕 시설은 어느 대부호집 못지 않게 화려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 는 욕실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신비롭게 비류연의 귀를 울렸다.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선율이었다.

“근데 어떻게 목표 진행 방향과 정반대에 위치한 욕실에 도착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말 우연이긴 한 건가?”

비류연이 사전에 예비 지식으로 알아 놓은 목욕탕을 향해, 그곳이 목표 지점과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것은 거의 본능 따라 움직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항, 여기가 바로 그곳이구나.’

피부를 민감하게 자극시키는, 공기중에 떠도는 고온 다습한 습기로 보아 바로 자신의 발 밑이 목욕탕임을 확신한 비류연은 한 가지 사명감에 불타기 시작했다. 비류연은 우선 이 건물이 얼마나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또 재료를 불량품으로 쓰지나 않았는지, 부실 시공으로 지어져 안락한 생활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 었다. 문득 자신의 귀를 가로막지도 못하는 주제에 눈 앞을 가로막는 검은 벽(천장)을 보니 돌연 그런 생각이 충동적으로 든 것이다. 사나이 대장부로서 그런 불의 가 저질러지는 걸 막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 비류연은 욕실 천장의 재질과 그 강도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쯧쯧, 이런 이런.’

생각 대로였다. 도대체 이 건물은 지은 작자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부실 시공과 불량 목재를 사용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맥 없이 구멍 뚫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변이 있나.’

비류연이 검지손가락으로 판을 푹 찌르자 소리 없이 쑥 들어가 단숨에 관통되는 게 아닌가. 정말 약하디약한 불량 목재에 부실 시공이라고 비류연은 탄식했다. 슬 쩍 검지손가락 끝에 뇌신지(雷神指)의 신(神)을 운용한 것은 애써 무시해 버리고 마는 비류연이었다. 육 할의 뇌신지라면 정강으로 이루어진 철괴도 구멍을 뚫 을 수 있다.

‘임마, 이런 목재 따위가 문제가 아니잖아.’

동그랗게 뚫린 동전만한 크기의 구멍으로부터 빛이 새어들어 왔다. 순간 비류연은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론은 금방 났다. 자신이 비록 관음증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이런 하늘이 자비롭게 선심 쓴 기회를 버르장머리 없이 차 버리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그래서 비류연은 쾌히 하늘이 간만에 던져 준 선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류연의 얼굴이 비밀의 낙원을 향해 뚫린 좁은 구멍에 바짝 가까이 붙여졌다. 고민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성인군자 행세하며 위선 떠는 것과는 거리가 먼 비류연은 자신의 현재 행동에 별다른 거리낌을 느끼지 못했다.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놈이다.

건물이 부실한(?) 만큼 방음 처리도 미숙한 벽 너머로 은방울 같은 목소리가 들려 온다. 처음 듣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꺄하하하! 언니, 정말 아름다우세요. 정말 예뻐요. 질투나.”

순수한 감탄을 터트린 사람은 바로 이진설이었다. 비류연은 이진설의 의견에 동의해 주기 위해 숨을 들이키며 시선을 옮겼다.

있었다. 그곳엔 바로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몸체 선을 이루는 우아한 굴곡은 곡선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가 무엇인지 실물로서 증명하고 있었다.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영롱하고 매끄 럽기 그지없는 뽀얀 피부, 월옥(月玉)을 매끄럽게 깎아 놓은 것만 같은 봉긋한 젖가슴, 늘씬하게 뻗은 우아한 두 다리. 백옥 진주가 무색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 게 만든다.

감히 질투마저도 풀이 죽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세상에 반수 이상이 남자라고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거짓말 안 하고 그녀의 눈부신 나 신을 본 남자는 비류연 하나뿐일 것이다. 천만금을 쥐어 줘도 왕후장상이 와서 무릎꿇고 빌어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이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비류연의 몸뚱어리 는 천하 사내들의 공분으로 갈갈이 찢겨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는가.

신기하게도 그녀의 신의 예술 조각품 같은 눈부신 나신을 보았는데도 이상하게 욕정은 일지 않았다. 오히려 경외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성결함이라고나 할 까……. 백옥을 무색케 하는 초설 같은 피부와 더 이상 부드럽게 깎아 낼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곡선미.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정도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대한 비류 연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이한 행복감이 몸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가에 자신도 모를 미소를 띨 정도의 기묘한 행복감. 무엇이 이리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걸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보통 여타의 다른 사내들이었다면 일분 일초라도 더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두 눈을 부릅떴겠지만, 비류연은 오히려 마음과 자신의 영혼 속에 그녀의 고운 자태 를 새겨 넣기라도 하는 듯이 두 눈을 살짝 감았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조용히 걸려 있었다. 비류연은 잠시 그 행복감에 도취되어 헤어날 수가 없었 다(이 녀석도 변태야.).

머리 위로 피가 거꾸로 쏠리거나, 아니면 하체에 과도한 혈류가 유입되거나 하는 불미스런 사태는 없었다. 관자놀이가 거세게 뛰고 심장이 파열될 듯 벌렁거리지 도 않았다. 코피가 주르륵 터지거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어두운 욕망에 번들거리지도 않았다.

이 기기묘묘한 만족감과 충족감과 행복한 도취감은 한 소녀의 부럽기 짝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와, 독고 언니 가슴 진짜 크다.”

“어머나 이 애가. 부끄럽게 그게 무슨 소리냐.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이진설의 목소리에 돌연 흥취가 깨어져 버린 비류연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지만 이미 마차는 지나가고 배는 떠난 후였다.

이진설의 감탄사 섞어 가며 피력된 감상에 비류연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언뜻 봤을 때는 꽉 조여진 무복과 살벌한 분위기 탓에 잘 알아보지 못했는데 지 금 보니 그녀는 정말로 큼직한 거유(巨乳)의 소유자였다. 그것도 크기만 큰 게 아니라 탱탱한 데다가 모양도 완벽했다. 과연 천무쌍귀영이 왜 맨날 죽을 줄 알면서

도 그녀의 가슴을 트집잡는지 알 만했다. 그리고 왜 그녀를 보고 거유 마귀할멈이라 놀려댔는지 알 만했다. 실물을 보니 그제야 그도 납득이 갔던 것이다.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나…….?”

못내 아쉬운 듯 이진설이 자신의 가슴을 만져 보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두 언니에 비해 너무 빈약한 감을 감출 수 없다. 모아모아 받쳐 보지만 아직은 의도대 로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직 가슴이 절벽을 갓 벗어난 그녀는 못내 독고령의 큰 가슴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크기만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야. 본받으려면 나 사매의 것을 본받으려무나. 괜히 크기만 하면 싸우는데 방해가 될 뿐이야.”

여성의 가장 큰 매력 점도 독고령 그녀에겐 한낱 방해물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사저도 참.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부담돼요.”

독고령의 이진설을 향한 핀잔에 나예린이 한 마디한다. 이런 대화에 익숙치 못한 그녀였다.

“하지만 언니처럼 되는 건 불가능한 걸 언닌 너무 완벽해. 달성 목표 수준이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높다구요. 난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볼 만큼 머리가 나쁘지 는 않다구요.”

물방울이 진주처럼 튀어 오르는 모양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호오, 그럼 난 가능한 모양이지?”

“흥, 좀 크긴 하지만 열심히 만져 주면 클지도 모르죠. 아직 다 큰 건 아니라구요.”

뾰로통해진 얼굴이 좀 토라진 모양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토라지면 웬만해선 풀기 어렵기에 독고령은 이쯤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 선언문을 낭독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졌다.”

독고령은 자신이 졌다는 듯 백기를 들어올렸다. 언제나 처치 곤란한 막내둥이 같은 아이라 항상 상대하기에 애먹는 독고령이었다.

“정말요?”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녀가 살짝 다시금 물었다.

“그래.”

“그럼, 항복 선물이 있겠네요?”

“요, 암큼한 것이.”

“헤헤.”

이진설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무엇을 원하니?”

“그건 말이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독고령이 흠칫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산화무궁연환(散花無窮連環)의 검기 수법을 가르쳐 줘요.”

“뭐?”

독고령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의 귀가 잘못 되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너 진심이니?”

“물론이죠, 언니.”

독고령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진설은 기대에 잔뜩 부푼 채 두 눈을 빛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당돌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그럼 가르쳐 주는 거예요?”

“안 돼!”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왜애요오. 아이잉, 언니이이이.”

갑자기 이진설이 작은 새 같은 나신의 젖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온갖 아양을 떨어 보였다. 물방울이 수정처럼 허공에 빛을 받으며 비산되었다. 비류연으로서는 참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너한텐 무리야. 그건 너무 어려워. 너한테 부담될까 봐 두렵구나.”

산화무궁연환의 수법은 엄청난 검기 성형(劍氣成形)의 변화를 요하는 것으로 엄청난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어지간한 검기 성형 솜씨 가지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 는 절정 기술이었다. 아직 이진설에겐 무리라는 게 독고령의 솔직하고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전에 쌍검이연십이참격을 성공시키면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요. 벌써 잊었어요?”

아차,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것도 저번에 이진설의 등쌀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맺은 약속이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쌍검이연십이참격을 습득할 줄은 몰랐기에 한 약속이었다.

“독고 언니, 자꾸만 그러시면 다시는 언니랑 말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온 학관 내에 언니가 왕 거짓말쟁이라고 떠들고 다닐 거야.”

이런, 토라져도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었다. 말 안 한다고 해 놓고 삼 일을 못 참을 이진설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지만, 약속도 있고 하니 이쯤에서 항복 하기로 했다. 다시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으리라.

“요, 앙큼한 것.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졌다, 졌어. 이제 됐니?”

“네, 언니!”

언제 삐졌냐는 듯 그녀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보석처럼 물방울을 사방으로 비산시키는 가운데 웃음 짓는 그녀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한 소녀에게 휘둘리는 그녀의 모습이, 간간이 웃음마저 머금은 그 모습이 냉혈독심 혹은 마귀할멈이라고 불리는 별명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앞서 언급된 별명들 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비류연으로서도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 자리를 깔고 싶었지만 현실이 용납해 주지 않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한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었다. 마침 목 욕도 모두 끝난 모양이니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왜 아쉽지 않겠느냐마는 마음 굳게 먹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삐걱!”

안 떨어지는 발을 억지로 떼려고 한 부작용인가? 아니면 천려일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나예린과 독고령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가슴을 가린 나예린의 오른손이 하늘 향해 뻗어졌다. 그와 함께 욕탕 안의 물이 그녀 의 동작에 딸려 올라가며 마치 거대한 낫처럼 천장을 관통하듯 후려갈겼다. 그 여파 때문인지 천장 내에 숨겨져 있던 기관들이 요란스럽게 작동했고, 기관들이 연속 적으로 작동하는 소리가 그녀들의 귀를 어지럽혔다.

욕탕 안의 수면 아래로 몸을 감춘 채 세 명의 선녀는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천장 위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피 한 방울조차 갈라진 흠을 따라 흘러 내리지 않았다.

“쥐새낀가 봐요.”

이진설이 먼저 말문을 열어 침묵을 깼다. 사실 오십 년 이상 된 건물에, 아무리 관리를 잘 했다 해도 쥐생원 수십 마리쯤은 대가족을 이룬 채 자리를 틀고 사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해서 가끔 쥐생원에 의한 기관 오작동이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었다. 너무 과민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제야 나예린과 독고령도 안심했다. 우선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다면 그녀의 용안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틀렸다는 것을 그 녀는 알지 못했다.

“그런 모양이구나.”

“천장을 또 고쳐야 되겠어요. 이게 벌써 올해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요.”

올해 들어서 만도 쥐 때문에 천장이 부서진 일이 몇 번씩이나 있었다. 그녀들은 이번에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비류연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 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수력도(水力刀)는 그의 어깨를 한 치 간격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잘못 했으면 그의 내장을 훑고 지나갔을 수도 있었다. 위기일발이었다.

비류연은 요란한 충격음 속에 기척을 숨긴 채 잽싸게 몸을 피했다. 한 번 움직이려고 마음먹으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비류연이었다.

간신히 위험구역으로부터 몸을 빼낸 비류연은 경각심을 가지고 좀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로 했다. 다시 그의 신형이 목표 지점을 향해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은밀 하게 움직였다. 다음 이동 장소는 목표대로 삼층에 위치한 제일호실 바로 나예린의 방이었다. 곳곳에 산재된 기관들을 조심하며 비류연은 조용히 신형을 움직였 다.

역시 정보의 힘이란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인 것 같다. 게다가 예습의 중요성 또한 실감할 수 있었다. 사전 정보에 입각하여 그 동안의 침투 시도가 허탈해질 정 도로 간단하게 비류연은 목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백향관 301호. 바로 빙백봉 나예린의 방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어떤 물건 하나를 가져가면 되는 것이다. 천장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소리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십 점 만점(滿點)이다.

여기까진 좋았다. 아주 완벽했다. 그러나 세상은 왕왕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 사람을 즐겁게 해준다. 세상이 의외성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번 경우는 세상이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 준 경우였다.

“누구죠?”

느닷없이 방문이 열리며 들려 오는 여자 목소리. 근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령이었다.

‘젠장, 낭패다.’

왜 여기서 갑자기 진령이 등장하는 건가? 아무래도 근 반 년 만에 있는 사제지간의 재회를 자축할 경황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귀신같은 은잠술로 몸을 숨기고, 유령 같은 신법으로 감쪽같이 몸을 피하려던 그 순간에 나예린의 방으로 진령이 들어온단 말인가! 여긴 분명 나예린의 방이지 진령의 방이 아니었다. 번지 수가 틀린 건가?

“예린. ? 헉!”

번지수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원래 이런 일에 복면은 기본 사양 아니겠는가. 비류연의 생각은 길

지 않았다. 우선은 진령의 제압이 우선이었다. 일단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확실했다.

진령은 진령대로 아미파의 직전 제자이자 천무학관 칠봉(七鳳)의 일인답게 평범한 여인처럼 비명을 자지러지게 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순간적인 기민한 대응 판단으로 발검 출수했다. 침입자의 격퇴는 기숙사 생도로서의 의무였다. 이때 비류연은 이미 신형을 움직인 이후였다.

“웁!”

그녀의 행동은 기민했지만 시간을 맞추지는 못했다. 진령의 검은 애석하게도 아교가 붙은 것처럼 검집에서 채 뽑히지도 못하고 비류연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비류연의 민첩한 행동이 진령의 대처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유령 같은 신법으로 단숨에 이 장 공간을 압축해 들어간 비류연은 왼손으로 발출하려던 검을 붙잡고 (뽑혔으면 분명히 검기를 뿌리며 그를 공격해 들어왔을), 순식간에 신형을 틀어 그녀의 뒤를 잡아 오른손으로 그녀의 고운 입술을 틀어막았다. 진령이 발버둥쳐 봤 지만 전신은 거미줄에 붙들린 나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진기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던 비류연의 시선이 절반 이상 뽑혀 나오다 만 그녀의 검으로 향했다. 비류연이 진령의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검을 반 이상 뽑아 내다니 실력이 제법이구나.”

듣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광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조롱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류연으로서는 믿거나 말거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이었다. 비류 연으로서는 진령에게 그런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령은 비류연의 불시 습격에 검을 반도 뽑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가 들킬 것을 염려해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해나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이대로 그냥 놔준다면 치한이라고 진령이 떠들어댈지 모른다. 그러면 매우 귀찮아 질지도 모른다. 자신의 묵룡환을 노출시킬까도 생각해 봤지 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포청에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다름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일이라면 진령이 자신의 얼 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류연은 진령을 기절시키기로 결정했다. 수혈(睡穴)를 집자 이내 진령이 바닥에 쓰러졌다. 조심스럽게 진령을 편한 자세로 바로 눕힌 비류연은 조심스럽게 방 안 을 살펴보며 자신이 원하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방 안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땡땡땡땡땡!”

갑자기 요란한 비상종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이때만은 비류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이 건드린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령이 누른 것도 아니었다. 발검 출수하기에도 바빴 던 그녀에게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설마 그 사람이 실수한 건가?”

그렇다면 내기는 승리로 끝날 것이다. 내기 돈을 무사히 받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 게다가 지금은 바닥에 진령까지 쓰러져 있지 않은가. 남 에 눈에 띄었다가는 좋은 꼴 보기는 글렀다. 근데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지 복도 밖에서 빠른 속도로 방을 향해 달려오는 기척이 있었다.

“이런, 삼 장…… 이 장…… 일장!’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벌써 기척은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그 뒤에는 나예린 그녀가 서 있었다. 비류연을 본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비류연도 그녀와의 기쁜 재회가 이런 식이라면 사양이었 다.

“이런, 이건 안 좋은데…….”

방문이 열리는 순간 비류연은 자신이 원하던 물건이 빨랫줄 위에 걸려 있음을 발견했다. 여인들의 부드럽고 탄력있는 가슴을 가리기 위한 모종의 물건이 틀림없 었다. 게다가 비단 천 끝에 금실로 수놓아진 린(璘)이라는 글자를 보아 진품이 확실했다. 그것이 바로 내기에서 증거품으로 가져오기로 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직 목표물은 저 멀리 있었다. 그는 반 장도 안 되는 거리가 이때만큼 멀어 보인 적이 없었다. 비류연은 황급히 자신의 왼손을 쓰러진 진령을 향해 뻗었다. 백향관 지하 연공실에서 정신 집중과 명상, 그리고 수련에 열중하던 나예린은 초저녁부터 불안으로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그래서 수련에 집중하 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 불안은 자정이 다가오도록 끈질기게 따라왔고, 기분 전환 삼아 목욕을 했는데도 떨쳐지지 않았다.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명확한 영상이 뇌리 속에 그림처럼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용 안에서 비롯되는 예지력과 육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확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전지 전능이 아닌 이상 모든 일을 손바닥 들여 보듯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요란스럽게 백향관 전체를 뒤덮는 비상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번 간격으로 울리는 경보음은 검후처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왠지 불길하고 어두운 느낌이었다. 검후처라면 백봉관 꼭대기에 위치한 가장 신성한 장소.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의 침입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 장소였다.

‘늦은 건가?”

웬만한 일에 동요하지 않던 그녀도 이때 만큼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검후처에 침입자가 들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곳에는 천무삼성 중 일인이 자 유일한 여성인 검후의 신물(信物)과 심득(心得) 일부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백향관 역사상 아직 그곳까지 도달한 침입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선례가 깨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평소 그녀답지 않게 조급해졌지만, 아차, 지금 그녀의 수중은 비어 있었다. 목욕을 하러 갈 때 검을 방 안에 두고 온 것이다. 무기도 없이 침입자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조금 늦어지겠지만 어차피 검후처로 가는 길목에 자신의 방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바람처럼 움직여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하는데는 열 번의 도약이면 충분했다. 그녀가 급하게 방문을 열었 다. 그런데 방 안의 풍경은 그녀를 아연실색케 만들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방 안에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남자는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왜 검후처 쪽에 있어야

할 침입자가 그녀의 방에 존재하는 것인가? 순간 그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생각보다는 제압이 우선되어야 할 때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벽에 걸려 있던 그녀의 애검 봉루(鳳淚)가 그녀의 손 안으로 마술처럼 빨려 들어왔다. 훌륭한 허공섭물(虛空攝物)의 공부였다. 봉루가 그녀의 손 에 잡히자 그녀는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눈부신 백광검뢰(白光劍)가 그녀의 검으로부터 폭사되어 나왔다. 과연 백도 사대 검신 중 두 명의 진전을 한몸에 전수받 은 사람답게 그녀의 검기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인정 사정 보지 않고 검기를 발출할 줄이야. 이대로는 도저히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매섭기 그지없는 일검(一劍)을 발출하고, 그것이 모자라는지 재차 이검(劍)을 연속해서 발출하려는 그녀를 향해 비류연은 자신의 왼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렸다. 바로 조금 전 황급히 쓰러진 진령을 향 해 뻗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비뢰도(飛刀) 비술(秘術) 인형술사(人形術士)의 장(章) 괴뢰(傀儡!

신기하게도 비류연의 왼손의 움직임에 따라 쓰러져 있던 진령의 몸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인형술사의 손에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형 ‘괴뢰’ 같은 움직임으로 진령이 나예린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아까 전에 손을 뽑았을 때 이미 그녀의 몸에 뇌령사(雷靈絲)를 감아 두었 던 것이다. 지금 진령은 그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느닷없는 방해꾼에 나예린은 더 이상 검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진령이 다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금 진령의 몸이 무방비 상태로 그녀를 향해 쓰러 지고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두 손을 벌려 진령의 몸을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

“콰광!”

맨 처음 날아간 검기는 비류연의 우수에서 뿜어져 나온 분뢰수와 정면으로 충동했다. 요란한 경기가 돌풍처럼 방 안을 휘감았다. 날아다니는 물체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야도 방해받았다.

비류연은 그녀의 검기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로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었다. 두 가지 기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틈을 타 몸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평상시였다 면 이것만으로는 그녀의 예리한 검 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진령의 몸이 친절하게 그녀의 손을 봉쇄하고 있었다. 비류연에게 그 정도의 틈만 있으면 탈출하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돌풍이 잠잠해지고 시계가 제대로 확보되었을 때 이미 그의 존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놓친 건가…….?

꽤 익숙한 기척이 방 안에 잔향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겐 이 정도 기척과 정보면 충분했다. 그녀에겐 용안(龍眼)이 있었 다.

‘설마 그 남자?’

아무리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해도 그 분위기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용안의 소유자. 잘못 볼 리 없었다. 더욱 확실한 증거는 눈 앞의 정체 모를 사내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그 정도 거리라면 보통 때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대방의 마음이 그녀 속으로 흘러 들어 오게 된다. 그런데 이번만은 허전할 정도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이런 일은 전에 딱 한 번 있었을 뿐이었다. 그곳은 바로 운향정에서였다. 아쉬운 건 무엇 하나 확 실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재빨리 창문으로 몸을 빼낸 비류연은 바람처럼 몸을 날려 짙은 어둠 속으로 그 자신을 숨겼다. 아직 내기의 목표물인 가슴 가리개는 현재 그의 손에 없었다. 하지 만 비류연은 낙심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쯤 그녀도 자신과 나머지 한 명을 추적하기 위해 방 안을 빠 져나왔으리라.

비류연의 손가락이 미약한 달빛을 맞으며 마치 연주하듯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손놀림에 따라 어두운 밤하늘을 살랑살랑 움직이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별빛 아래에서 춤추는 그 물체는 매우 얇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모란꽃 자수가 수놓아져 있는 비단 천이었다.

방 안을 급히 빠져나가기 전 비류연은 목표물에 뇌령사를 박아 넣어 두었던 것이다. 뇌령사와 연결만 되어 있다면 백 장 밖에서도 목표물을 꺼내 올 수 있었다. 지 금 비류연이 올라와 있는 곳이 백향관으로부터 정확히 백 장거리 되는 곳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듯 날아온 비단 천 조각이 안전하게 비류연의 손바닥에 착륙했다. 비류연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

검혼관 옆에 위치한 작은 숲 속. 맨 처음 검혼관에 왔을 때 무수한 함정으로 비류연을 막았던 소로 옆에 위치한 숲에 지금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남들이 모두 자고 있을 야심한 시각에 홀로 수림 속에 몸을 묻고 있는 사내는 놀랍게도 효룡이었다.

그런데 효룡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어디선가 남 모르게 연인이라도 만든 걸까? 그렇다면 효룡의 수완은 참으로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 하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어둠 속 한켠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느닷없이 들려 온 목소리에도 효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왜 지금 효룡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역시 성공하지 못했군요, 일호(一號).”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스러운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어둠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자였다. 단지 무흔(無痕) 일호라고만 불리우는 존재.

“다쳤나 보군요?”

“죄…… 죄송합니다. 완전히 기관을 피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삼 공자님께서 그렇게 많은 정보를 주셨는데도 실패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뭐 그렇게 크게 신경 쓸 거 없어요. 몸을 무사히 뺀 것만해도 다행입니다.”

효룡의 말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사내의 긴장은 늦추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일호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감히 함부로 경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일호라 불리는 사내는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백향관이 만만치 않은 곳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중에서 검후처는 최상층에 위치한 데다가 가장 경계가 삼엄하고, 기관 진식이 복잡한 심처(處)중의 심처지요. 아직까지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곳이니 이번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다름없지요.”

“송구스럽습니다. 이번 실패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일호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그의 부끄러움은 더욱 컸 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검후(劍后)의 심득이 고절하다 하나 겨우 아녀자의 무공입니다. 거기에 목맬 필요도, 정도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약간의 소 란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치사하게 남에게서 훔친 무공으로 이겨 봤자 모두의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랬 다가는 대(大)마천각(魔天閣)의 학도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치욕적인 일이 되겠지요. 전 애초부터 대사형의 계획에 반대였습니다.”

효룡의 말은 부하의 실패를 경험한 사람답지 않게 담담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삼 공자님!”

일호가 판단하기에도 삼 공자는 흑도인답지 않게 냉정함과 비정함이 모자랐다. 그의 대사형인 일 공자와는 성정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났다.

“괘념치 말아요. 그럼 몸을 숨기고 푹 쉬도록 하세요. 언제 천관의 그림자가 우릴 포착할 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당분간 연락을 끊도록 하세요. 치료에 전념하고 피 의 흔적을 확실히 지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일호의 몸이 어둠에 동화되듯 깊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옅은 월광 사이로 밤바람만이 조용히 불어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