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8화 – 모용휘, 검룡위를 가지기로 하다
모용휘, 검룡위를 가지기로 하다
“검룡(劍龍)의 위(位)를 가지기로 했다네.”
모용휘가 말했다.
“그래?”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렇다네! 별로 그런 외적인 실력 평가 제도에 대해 호감은 생기지 않지만 그게 없으니 여러 가지 제약이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군.”
“아직도 더 공부할 게 남았어? 이제 충분하지 않나? 배울 거 다 배워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나? 난 지금까지만 배운 것도 아직까지 다 못써 보고 있는데?” “아직 멀었네. 아직은 미숙해.”
“에휴, 자네가 어련하시겠나. 마음대로 하게나.”
학기 초 승급 시험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공부와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던 모용휘가 승급 시험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제였다. 여느 날처럼 남보다 족히 여섯 배는 많은 양의 책을 보는 모용휘는 그 질리는 독서열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또다시 도서관인 천서각(天 書閣)을 찾았다. 웬만한 비장 비급을 다 읽은 그는 자신이 아직 읽지 않은, 다른 한켠에 따로 모셔져 있는 서가로 다가가 막 책을 뽑으려 했을 때였다.
“잠깐만요. 거기 있는 책은 안 됩니다.”
“왜죠?”
천서각을 맡고 있는 사서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사서도 날이면 날마다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자신의 일감을 늘여 놓는 모용휘를 모를 리 없었 다. 하지만 그는 모용휘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용휘가 손을 뻗은 서가의 비급과 심득서는 오검룡 이상의 자격을 지닌 자만이 열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사서는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모용휘에 게 자초지정을 설명해 주었고, 자신의 결벽증만큼이나 법규 또한 칼같이 지키는 모용휘는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시시한 서적 몇 가지만을 가지고 천서각을 빠 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서로부터 첨언해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천무학관에는 이런 비급 대출 이외에도 특별 강의나 수련 과정 선택에도 검룡위의 등급에 따라 자격 제한이 있다는 것 도 알 수 있었다. 자격 요건 때문에 비급 대출을 저지 당한 모용휘의 상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듣고 싶은 수강을 못 들을 위험도 있을 수 있다 하니 얼마나 놀 랄 일인가. 그래서 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모용휘는 당장에 승급 시험을 결심한 것이다. 다시는 비급 열람이나 수련 선택, 그리고 강의 선택에 제한을 당하고 싶지 않은 모용휘가 마침내 결심을 굳힌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삼성제 참가 의사만 있었을 뿐 우승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 과욕과 과신은 몸을 망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 는 며칠 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챙강!”
눈 앞에서 불꽃이 사납게 튀었다.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뻔할 만큼 손목이 시큰하고 손아귀가 얼얼해 왔지만, 윤준호는 그 아픔에 울상 지을 만큼 넉넉한 여유 가 없었다. 다시금 그의 전신에 쇄도해 들어오는 무지막지한 도기(氣)에 제 한 목숨 추스르기도 급급했던 탓이다.
윤준호는 울고 싶었다. 애초에 비류연이 선심 쓰듯 써 준 소개서를 가지고 거기에 쓰인 장소로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고질병인 매화 과민증을 치료해 줄 당사자라며 비류연이 소개시켜 준 인물은 그가 고개를 못 들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인물이었다. 사문인 화산에 있을 때 선후배 동문들의 혓바닥을 움직이게 하고 자 신의 귀를 따갑게 했던 염도, 바로 그 사람이 비류연이 소개시켜 준 인물임을 알았을 때 소심하기 짝이 없는 윤준호는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그것은 경악 그 자체였다. 비류연이 어떻게 염도 같은 강호의 절정 고수를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에게 부탁씩이나 할 정도의 친분이 있었는지 의문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듣기로는 염도라는 성질 급하고 더러운, 그래서 항간에는 불타는 개차반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 누군가의 부탁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줬다는 이야 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시나무 떨듯 후들거리는 손으로 내민 그의 서찰을 받고서 염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을 때, 윤준호는 솥뚜껑 같은 주먹에 묵사발이 되지 않을까 잔뜩 겁에 질렸다. 염도 앞으로 나서기 전 널브러져 있다가 일어선 열여섯 명의 남성 혼합조를 보았을 때 그의 무자비한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열 여섯 명이 쓰러졌다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것을 윤준호는 숨어서 지켜봤던 것이다. 당장 불호령과 함께(주먹질이 없으면 운이 좋은 거고) 축객령을 내릴 것 같던 염도가 의외로 순순히 그를 받아 준 것은 눈알을 부릅뜨며 경악할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함께 특별 강화 훈련(줄여서 특훈)이라는 명목 아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요즘 학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유명한 주작단임을 알 았을 때(그리고 그들의 정체가 그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 지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일어선 그 열여섯 명임을 알았을 때) 그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지 경에 놓이고 말았다. 솔직히 너무 과분해서 기뻐할 수 없었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후로는 나날이 고달픔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을 감히 물릴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염도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했다. 그때부터 윤준호는 반죽음 내지는 초죽음이 되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무시한 염도 밑에서 그래 도 어느 정도 잘 버티고 있는 주작단원들을 보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윤준호는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악!”
겨우겨우 염도의 무식하기 따를 자 없는 일도(一刀)를 간신히 막아냈지만 안도하기엔 너무 일렀다. 도대체 비류연이 서찰에 뭐라고 휘갈겨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염도의 가르침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일도를 과감히(?) 날리는 염도에게 윤준호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염 노사와의 비무 대련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염도는 그를 상대로 다짜고짜 도를 휘둘렀다. 물론 염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의 일도를 허약한 윤준호가 쉽게 막아낼 리 없었다. 손속에 약 간의 사정을 두면서 한다고 해도 윤준호에겐 오십보 백보였다. 그나마 펼치는데 별 지장이 없는 회풍무류검(廻風舞柳劍)을 펼치지 못했다면 이미 예전에 관(棺) 짰 어야 했을 것이다.
“허걱!”
이젠 그만 둘 때도 됐는데 염도는 또다시 일도를 무식하게 휘둘러 댔다. 게다가 이번엔 뭔가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안면 전체가 화끈해지는 기운, 전신을 때리는 심상치 않은 열기!
빌어먹을. 염 노사가 정신이 나갔는지 절초라고 할 만한, 지금의 매화 과민증 환자인 윤준호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막아 낼 수 없는 수준의 도기를 뿌려 댄 것이 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초적인 매화검법이나 미숙한 회풍무류검, 그리고 그밖에 이전에 배웠던 장법이나 어떤 수법으로도 막아 낼 수 없는 절초. 있다면 단 한 가 지. 그의 매화 과민증 환자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게 했고, 다시는 매화검법을 펼칠 수 없게 만들었던 환상의 칠매검뿐이었다. 눈 앞에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에 윤준호의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악!”
윤준호의 검이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이윽고 뿜어져 나온 투명한 홍광의 검기와 함께 미묘하고 향긋한 매화 향기가 연무장을 감싸고 돌았다. 염도의 도에서 뿜어 져 나온 도기는 이제 흔적도 없었다.
만개하는 매화의 환상과 함께 피어오른 홍광의 검기가 잠잠해지고 은은하게 풍기던 매화향이 찾아든 연무장 한가운데 멍한 얼굴을 한 채 윤준호가 서 있었다. 다 행히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넋을 임시 할부로 대여해 주고, 육체를 임대해 준 사람처럼 멍청하니 서 있는 그를 염도가 의외라는 듯한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염도는 솔직히 놀랐다. 설마 이 소심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약하기까지 한 화산파 제자 나부랭이 녀석이, 설마 자신이 무의식중이라 엉겹결에(솔직히 시인해서 딴 생각하다 실수로) 펼쳐 낸 자신의 절초 중 하나인 염천풍을 막아 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런 약해 빠진 녀석을 비류연의 강권만 아니었으면 받아들 이지도 않을 것이다. 뭐 볼 게 있다고 이런 귀찮은 짐짝을 자신이 떠맡아야 하겠는가.
이미 주작단 열여섯 명만으로도 그에게 맡겨진 짐짝은 너무 과다하다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주작단은 꽤나 반응이 있어 가르치는 재미라도 있었다. 어디서 어떻 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예전에 상당히 혹독하게 수련을 쌓은 모양인지 꽤나 잘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빙검(劍)과의 경쟁의식까지 맞물려 있어 그의 투지를 강렬 하게 자극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윤준호란 녀석은 형편없었다. 그래도 구파 중에서 행세 깨나 하는 화산파 제자 녀석 주제에 매화검법을 못 펼친다는 게 코가 막혀 축농증에 걸릴 지 경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높은 단계인 검향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가 때려눕힌 몇 명의 화산파 녀석들 중에도 검향의 경지에 오 른 녀석은 둘인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 녀석들의 요즘 근황을 들어보면 화산파의 장로로서 잘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런 소심한 애송이 녀석이 검향의 경지라니,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라고 손가락질 할 일이었다. 게다가 매화 과민증이라는 해괴한 병은 무엇인가? 오음절 맥, 칠양절맥 등으로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매화 과민증으로 인하여 두드러기로 무공을 펼치지 못한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 이었다.
비류연의 서찰에 적힌 치료 방법(?)은 더 웃겼다. 뭐가 죽음의 공포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게 한다는 말인가? 쉽게 얘기해서 죽음의 문턱에 몰리면 인간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기대해 보자는 말이 아닌가. 참 대책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사부라고 시키는 대로 해줬다. 죽도록 윤준호를 몰아붙여 준 것이다. 그래서 윤준호와의 비무는 일격 일격이 생명을 노리는 매서운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그게 하루아침에 될 거라고는 애당초 기대를 안 했기에 서서히 강도를 높여 나갔다. 배웠어도 펼치지 못하는 윤준호의 매화검법으로는 염도의 공세를 벗어나기가 매우 지난했다.
그러기를 두 달여 가량 지났지만 그래도 별 진전이 없었다. 오늘도 여는 날과 다름없이 뭔가 특별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염도는 윤준호를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런데도 여유가 남아 잠시 딴 생각을 좀 하게 되었다. 고수들과의 싸움에서라면 비무 대련 중 한눈을 파는 게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만 워낙 실력 차가 나다 보니 염도에게 위험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위험은 윤준호에게 닥쳤다. 잠시 딴 생각을 품은 염도가 무의식중에 사정 안 봐 주고 절초를 펼 친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윤준호는 머리가 새하얗게 텅 비는 듯한 느낌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 하여 육체의 구명 운동(救命運動)을 펼쳐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터져 나온 매화만개(梅花滿開)의 환상, 그의 코를 찌르는 은은한 매화 향기, 그리고 처음 보는 형식의 매화검. 이렇게 해서 윤준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염도는 의문의 눈빛으로 넋 놓고 있는 윤준호에게 한 마디만 했다.
“너 정말 검향지경(劍香之境)이었냐?”
윤준호는 말이 없었다. 그 날 화산 수련동 이후 처음으로 칠매검을 펼쳐 낸 윤준호는 얼이 빠진 채 그저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윤준호. 그의 정 신에 신지가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그의 정신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그의 오감 중 하나인 후각이 연무장을 감도는 미미한 매화향을 감지했다. 볼 것도 없이 피부 전체에 붉게 볼록볼록 일어나는 두드러기.
“으아악!”
그 가려움에 윤준호는 그만 검을 놓쳐 버렸다. 무인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검이 아무런 저항 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윤준호의 그런 한심한 모습에 절로 한숨이 새
어나오는 염도였다. 다시금 단련이 필요할 듯했다. 더욱 혹독한 단련이……. 아무래도 충격 요법에 들어간 충격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충격이 약했나 보군. 아무래도 다음 번엔 더욱더 충격의 강도를 높여야겠어.’
다음 번에 할 때는 더욱더 정신적 충격의 강도를 높이고자 내심 작정하는 염도였다.
천하 오대 도객으로 손꼽히고 추앙받는 염도에게 가르침을 사사받는다는 것은 행운이자 무인으로서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준호가 솔직히 만세하며 기 뻐할 수 없는 것은 염도의 손속이 너무나 무자비한 탓이었다.
배움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고, 그 배움이 깊고 높을수록 더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 가르침이란 게 너무나 무지막지하 다 보니 솔직히 깊이도 넓이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가르침 당하는 당사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도 주작단처럼 되었으면……”
“뭐?”
난데없는 윤준호의 푸념에 놀란 비류연이 경악으로 물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변함 없이 염도에게 휘둘리다 물먹은 솜처럼 녹초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쓰러진 후 혼잣말처럼 윤준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특훈이 힘들기로서니 벌써 인생의 막을 내리기엔 윤준호는 너무 젊다는 게 비류연의 생각이었다.
“응?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왜? 부담스러워?”
“예.”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는 무언의 시위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심약한 윤준호에겐 무리도 아니었다.
“왜요? 매화검법 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저에겐 너무 무리한 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비류연은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면요?”
“네 꿈이 너무나 시시해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비류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예에?”
하지만 윤준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몸이 축 늘어져 눈 한번 확대시키는 것도 이제는 힘들 지경이었다. 그는 비류연이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시시한 녀석들처럼 되어서 뭐하게? 그래 봐야 약해 빠진 삼류밖에 못 된다구. 되려면 나처럼 멋진 미소년이 되어야지.”
비류연의 주장은 간단했다. 도(道)와 진리(眞理)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하게 들리는 비류연의 진심에 윤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때, 생각 있어?”
은근한 어조로 비류연이 물어 왔다. 윤준호는 그가 과연 지금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뇨, 그건 포기할래요.”
측은한 눈빛으로 비류연이 윤준호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애석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왜? 불가능하긴 하지만 노력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 아니겠어? 주작단보다야 이몸이 훨씬 더 보람 있는 목표가 아닐까?”
열렬히 동의를 구하는 비류연의 눈빛을 윤준호는 애써 외면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보통 사람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불 가능한 사람이었다.
‘증증이군.’
윤준호는 절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될 때도 있지만, 마음에 있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도 많기 때문이었다. 요 즘 비류연과 지내면서 그 점을 뼈저리게 느끼며 학습해 나가는 중인 윤준호였다. 그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닫아 버렸다. 사실 더 이상 말씨름할 기력조차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저항에 비류연도 별 수 없었 다.
“그 녀석들, 정말 한심한 녀석들인데….
윤준호가 괜스레 별것도 없는 주작단을 따라 할까 봐 심히 걱정되는 비류연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비류연은 자신의 제자들이 참 한심한 놈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골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내일 있을 음 공 수업이나 생각하는 게 더 남는 장사일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대로 듣는 몇 안 되는 수업 중 하나이니 오늘은 더 이상 골치 아픈 생각말고 그냥 실컷 잠이 나 자기로 했다.
“오늘은 좀더 본격적인 음공 수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방음 완비된 음률관 삼층 음공 전용 강의실에서 천음선자 홍란이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는 오늘 이론보다는 좀더 실전적인 음공 공부에 대 해강론할 예정이었다.
“먼저 시범을 보여주도록 하지요. 잘 보도록 하세요.”
탄금 준비를 하는 그녀의 앞에는 한 송이 백합꽃이 피어 있는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천음선자 홍란이 자신의 무릎 위에 금을 올려놓고 탄금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음선자라는 강호의 별호에 부끄럽지 않은 화려하고 신비로운 음색의 소유자였다. 인간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천상의 선음(音)이 그녀의 우아한 손가락 끝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가락가락 아름다운 선율로 짜여진 아름다운 음색의 직물이 거대한 소리의 그물이 되어 그들을 덮쳐 왔다.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기는 듯한 달콤한 음조였다. 단정 하게 그녀의 금음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얼굴도 그녀의 음률에 보조를 맞추듯 덩달아 환히 밝아졌다. 과연 그녀의 음공 조예는 놀라운 면이 있었다.
그녀의 금음이 화려하고 맑고 경쾌하면 경쾌할수록 그녀가 눈여겨보라고 했던 화분에 핀 한 떨기 백합꽃의 빛깔도 더더욱 고와지고 잎사귀의 푸름도 더욱 선명해 지는 것 같았다. 모두들 감탄 어린 눈길과 귀로 그녀의 음공 절학을 감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맑고 경쾌하던 곡조가 갑자기 돌변했다. 조금 전 같은 소리를 낸 악기와 악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슬픈 음색이 금현(琴絃)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애처롭고 구슬픈 음색은 순식간에 학생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미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음선자의 음공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음색이 점점 더 높아지고 빨라질 때마다 화분에 피어 있는 백합은 눈에 띌 정도로 변화가 생겨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명의 싱그러움과 화사함을 자랑 하던 백합꽃이 빛깔을 잃고 점점더 시들어져 갔다.
처절하기까지 한 애절함으로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던 그녀의 금음이 점점더 빨리지기 시작하더니 소리는 격정을 더해 갔다. 다시 그녀의 옥 같은 손가락이 금 현 위를 격정적으로 춤추었다.
“디딩!”
듣고 있던 모두의 몸이 움츠려 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금음이 무섭게 들렸던 것이다. 순간 그들은 자신의 몸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괴이한 기운에 휩싸였다. 심 장이 아무런 이유 없이 격렬하게 뛰고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호흡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가 계속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제야 모두들 자신들이 놓인 상황을 깨닫고 암암리에 내공을 돋구어 외부로 침입하는 금음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냥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비로소 모두의 마음에 경각심과 경원감이 솟아났을 때 거짓말처럼 허공중에서 금음이 사라지고 그들을 옥죄이던 압박감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떤가요?”
방긋 웃으며 천음선자 홍란이 학생들의 감상을 물었다. 한 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감탄했습니다. 과연 강호에 이름높은 음공의 명인 천음선자 홍란 선생님다운 솜씨였습니다.”
그는 종남파의 제자인 이 학년 진석헌이었다. 그가 이 수업을 듣는 이유는 강의에 여자가 남자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귀가 씻기는 듯한 선생님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과 존경 이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이번엔 여제자 한 명이 일어나며 극찬했다. 물론 입바른 소리하지 않아도 천음선자의 금음과 음공 조예는 칭찬받을 만한 실력이었다.
“자자, 이제 모두 진정하고 여기 화분을 보도록 하세요.”
홍란의 손이 그녀 앞에 놓여 있던 백합 화분을 가리켰다. 자연 학생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쏠렸다.
“헉!”
“어머! 저럴 수가!”
“과연!”
여기저기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그곳엔 향기를 내뿜는 화초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저 말라비틀어진 줄기만이 을씨년스럽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화분에 분명히 향기를 뿜으며 피어있던 백합꽃은 이미 생명의 싱그러움을 잃어버린 채 꽃은 떨어지고 줄기까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멀쩡하던 백합꽃 한 송이가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조화였다.
“보는 바와 같이 음공을 연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물을 상대로 연습하는 겁니다. 식물은 보기보다 매우 소리에 실린 감정에 민감해서 음공 시전자 선율에 담 긴 악의와 죽음을 확실히 느끼고 반응해 주죠.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생명을 연주하지 못하는 자는 죽음을 연주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전자의 선율에 생명이 담겨 있을 때 식물은 생명과 사랑을 양분 삼아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선율에 죽음이 담겨 있을 때 죽음이 찾아오겠지요. 자신의 음공 시전 대상을 식 물로 삼아 보세요. 어떤 식물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자신들의 성과를 명확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장내의 모든 학생들은 말라비틀어진 백합을 통해 음공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 전설적인 음의 명인 음선(音仙) 천향선자 이향령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음률에 죽음의 향기가 울려 퍼질 때 사방 십 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가 죽음 을 맞이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옵니다. 또한 거대한 거목조차도 그분의 선율 앞에선 순식간에 고목으로 화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구 할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형성시키듯 음공의 선율도 던져진 돌멩이처럼 우리의 몸 안에 파문을 형성시킵니다. 그 파문이 어떤 형태를 띠는가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 수도 있고, 괴롭게 만들 수도 있으며, 넋을 빼놓을 수도 있고, 파문이 파도가 되어 호수를 진탕시키듯 신체 내부를 요동 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공 공부의 오의(悟意)이자 심오한 이치입니다.”
말을 잠시 멈춘 홍란이 장내를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직접 보시다시피 자신의 음공을 시험하는 데 화초만큼 좋은 것은 없어요. 화초는 보기와 다르게 매우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 음공을 연습하는 대상으 로 그만이죠. 여러분도 자신의 음공을 연습하는 대상으로 화초를 삼아 보도록 해 보세요. 백합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화초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이룬 음공 공 부의 결과와 성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다음 시간엔 악기의 종류에 따른 음공 성질의 차이점과 본격적인 공격 수단인 격공음(擊空音)에 대해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음선자 홍란은 다음 시간 강의 내용을 예고하는 것으로 수업을 끝냈다.
비가 잔뜩 내리거나 우중충하게 안개 끼는 일 없이 기상은 매우 양호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티 없이 맑고,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현재의 비류연의 심 리 상태를 몰래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날은 공부고 수련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밖으로 놀러 가는 게 최고인데 말야.’
다음 시간부터 본격적인 격공음을 연습해 보겠다는 천음선자의 음공 수업 시간이 끝나고 비류연은 효룡, 장홍 등과 담소를 나누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옆에 모용휘도 있었지만 사교성이 부실한 데다가 말까지 극도로 아끼는 그와는 대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다음 강의실로 가는 중이었다.
등에 긴 뇌금 묵뢰를 메고 걸어가던 비류연은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느라 미처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알았다 해도 먼저 길을 피해 갈 비류연도 아니었다. 때문에 자신의 뇌금에 사람이 부딪쳤을 때도 상대방에 대해 전혀 미안한 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소중한 뇌금에 충격을 가한 상대에 대한 분노만이 머리를 치켜들었을 뿐이다.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무례한!”
비류연의 뇌금 끝에 부딪힌 사내가 비류연을 노려보며 대갈성을 터트렸다. 비류연의 뇌금이 그를 치는 바람에 사내는 균형을 잃고 하마터면 낭패를 당할 뻔했던 것이다. 비록 뇌금에 걸려 바닥에 코를 처박는 낭패는 면했지만, 흐트러진 균형을 잡느라 몸을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매우 불 쾌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른 모든 분노가 피의자를 향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쏘아 박혔다. 근데 이놈의 원인 제공자란 놈은 적반하장 격으로 고개를 빳빳이 세우 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자칭 피해 당사자인 철검비룡 하세인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비류연은 비류연대로 감히 자신의 귀중하기 짝이 없는 사문의 비보(秘寶)인 뇌금 묵뢰에 충격을 가 한 무뢰한의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불문에 붙일까 했더니만, 상대방이 되려 악을 쓰며 노려보니 기분이 심히 나빴다. 전방 부주의 는 책임이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다고 믿는 비류연으로서는 꺼릴 게 없었다.
“무슨 일이죠?”
비류연의 그 한 마디가 하세인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놓았다.
“네놈,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보는 것이냐?”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비류연의 입가에 불길한 빛을 감돌기 시작했다. 예측 불허하기로 명성높은 미소였다.
“물론 몰라서 묻는 겁니다. 그럼 아는 걸 힘들게 물어 보는 멍청이도 있는 모양이죠?”
담담한 기색의 어조였지만 듣는 쪽으로서는 오히려 그쪽이 더 불편하고 귀에 거슬렸다.
“뭐야? 그건 지금 본인이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하세인의 이마에 쌍심지가 돋구어졌다. 새파란 후배에게 희롱당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틀린 느낌은 아니었다. 청룡단의 단원이자 구룡칠봉(九龍七鳳)의 일인인 자신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자는 근래에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우러러보고 감탄과 존경과 흠모와 연정의 정을 보낼지언정 이런 무례는 결단코 없었다.
“그리고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군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로 비류연이 자신은 피해자라고 극구 주장하고 있는 눈 앞의 사내가 낯이 익어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그리고 보니 주작단 하나도 이기지 못해 절절 매고 있는 그 청룡단인가 뭣인가 하는 곳의 일원이네요. 이런 경우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해야 하나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저번에 주작단보다 조금 앞서 들어온 청룡단의 무리에 끼어 있던 자였다. 모르는 건 비류연 단 하나뿐, 이미 천무학관 내에서 그와 그가 속한 청룡단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능글능글한 비류연의 말은 다시 한 번 하세인의 부아를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죽고 싶으냐?”
엄청난 살기가 송곳처럼 하세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비류연은 짐짓 그 살기를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장수만만세(長壽萬萬歲)는 소문만복래와 더불어 저의 이대 신념 중 하나죠.”
하세인의 안색이 점점 더 굳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효룡과 장홍, 모용휘 등이 오히려 더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다.
“이봐 자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옆에서 비류연을 뜯어말리려고 노력중인 장홍도 이미 하세인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비류연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류연은 장홍의 그런 노력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왜요, 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직접적으로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게 더 얄미울 때가 있다. 지금 비류연의 경우가 딱 그 경우였다. 안 그래도 요즘 주작단과의 승패를 명확히 못
가린 덕분에 둘 사이를 저울질하는 주위의 시선이 따갑고 부담스러웠던 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오늘 그 팽팽하게 당겨진 예민한 신경을 마구 잡아 뒤흔드는 인물을 만난 것이다.
철검비룡 하세인의 이마에 핏대가 마구 솟아나 달구어진 쇳덩어리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도저히 그가 가진 인내의 재고량으로는 분을 참고 화를 삭힐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 무례한 놈! 정말 방자하기 그지없구나. 얼마나 오만 무도하면 감히 선배 앞에서 그따위 짓거리가 가능하단 말이냐! 내 오늘 너의 방자함에 따끔한 훈 계를 내리고야 말겠다. 그것이 선배로서의 진정한 도리! 용서치 않겠다.”
가뜩이나 요즘 주작단의 추격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판에 생전 처음 보는 애송이 놈이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으니 하세인이 얼마나 열 받겠는가. 그 동안 주작단으 로 인하여 쌓여 있던 욕구 불만들이 단번에 인내의 둑을 무너뜨리고 정신의 대지에 범람했다.
하세인의 우수가 자신의 애검 철비룡(鐵飛龍)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의 인내도 이제 바닥 상태였다. 그는 정말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기세였다. 아니 아직까지 안 뽑고 있는 게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막 철검비룡 하세인이 자신의 애검 철비룡을 뽑아 훈계의 일검을 내리쳐 선배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던 찰나, 그의 주위에 있던 동행자 두 명이 그의 행동을 막아서 며 광마(馬)처럼 날뛰는 그의 분을 진정시켰다.
“이보게 세인, 진정하게. 비록 저 녀석의 무례함이 도를 지나치고 방자하기 그지없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네. 지금 우리가 어디에 가고 있는지 자넨 벌써 잊었단 말인가? 이제 곧 약속 시간이네. 서둘러야 한단 말일세.”
옆에서 길길이 날뛰려던 찰나의 하세인을 진정시킨 이는 같은 청룡단 소속의 점창 문하 분광신검(分光神劍) 제기일이었다.
“그래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빙검 관 노사님과의 약속에 시간을 어기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칼같은 성격은 하 소협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저런 녀석 한테 신경 쓰지 말고 이번 한 번만 참도록 해요. 훈계의 기회는 나중에도 또 있을 거예요.”
옆에서 분광검 제기일을 도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구대 문파의 일맥 종남파의 절기를 이어받은 여걸 일향일검녀 강유란이었다. 종남파에서 는 그녀의 미모를 따라올 이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미색은 뛰어났다. 물론 그녀는 미색 못지 않게 검기도 오묘하고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이었다.
청룡단 소속인 그들 세 명이 서둘러 복도를 가로지르던 이유는 지금 빙검 관철수 노사의 가르침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청룡단도 빙검 관 노사 앞에서는 한 낱 얌전한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빙검 관 노사의 쟁쟁한 위명이 효과가 있었는지, 약발이 잘 들었는지 하세인은 가까스로 화를 죽이고 진정할 수 있었다. “오늘은 중요한 선약이 있어 네놈을 그냥 놓아둔다만 다음 번에도 또 이런 행운이 겹칠 것이라곤 기대하지 말아라. 운 좋은 줄 알아라.”
조금 후에 있을 약속이 천하오검수(天下五劍手)의 일인인 절정검객 빙검 관철수와의 약속이 아니고, 또 그 약속이 새로운 무공 수련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면 하세 인은 돼먹지 못한 후배 비류연을 징계 처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다(집행 능력의 유무에 대한 것은 논외로 치고). 물론 그렇다고 눈썹 하나 깜짝 한다면 천하 의 비류연이 아니다.
현재로서도 비류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발이 지나쳤던 것일까? 하세인은 가긴 가되 이대로 그냥 갈 수 없었 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훈계 정도는 맛보기로 보여 줘야겠지.”
하세인은 끝내 검을 뽑아 들고 말았다. 성질 급하기는. 지켜보는 이들은 이미 뽑혀진 그의 검이 피를 빨아들이지 않고 얌전히 기어 들어갈 지 걱정스러웠다. 그의 몸에서 폭출되던 살기가 피를 먹지 않고 잠잠해질 지는 주변에 있던 그들로서도 장담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철비룡에 시퍼런 검기가 일렁이며 맺혔다. 살기가 충만한 그의 애검이 인정사정없이 비류연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비류연은 움직이지도 않고 사정권 내에 그냥 서 있었다. 예전에 호랑이간을 삶아 먹은 전적이 있어 그런지 두려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하세인이 펼친 징계의 일검의 끝은 허무했다. 검기가 맺혔든 말 든, 그 예기가 날카롭든 말든 결과는 비류연의 우수에 잡혔다는 허무한 사실로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고…… 공수입백인!”
말 그대로 빈손으로 날아오는 칼날을 잡아내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서 절정 고수가 아니면 감히 흉내조차도 내지 못하는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 아 고수들도 함부로 펼치지 않는 그런 기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일 학년이라니! 청룡단원 세 명은 경악하고 말았다.
“너…… 넌 누구냐?”
이름도 없는 일 학년 후배 나부랭이한테 자신의 일격이 봉쇄 당한 치욕적인 사태를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부릅떠진 눈으로 하세인이 물었다. 하지만 비류연의 대 답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건 알아서 뭐 해요? 그 눈을 보니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네요. 봐 주기라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하세인의 떨리는 심장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이었다.
“정말 광오하기 짝이 없구나.”
다시 애검 철비룡을 쥐고 있던 하세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유란과 제기일과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 소협,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가야 합니다.”
강유란이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하세인은 거칠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고, 분광검 제기일도 그 뒤를 따랐다.
막 하세인의 뒤를 따르려던 강유란이 비류연을 쳐다보며 한 마디했다.
“당신, 정말 겁이 없군요.”
“겁이요? 그게 뭔지 몸에 지니고 있질 않아서 잘 모르겠군요. 혹시 알고 계시다면 가르쳐 주실래요?”
비류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강유란의 말을 받았다. 강유란에게는 그런 비류연의 모습이 얄밉게 보일 뿐이었다.
“젊은 나이에 패기를 가지는 것도 좋지만 그 패기와 혈기가 자칫 잘못하면 일신에 화를 불러올 수도 있지요. 이건 선배로서의 충고예요.”
하지만 강유란의 경고에도 비류연은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마이동풍과 우이독경의 사자성어를 몸소 실천해 보이는 비류연이었다. 다시 강유란이 날카로 운 어조로 말했다.
“어느 노사님 밑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게 앞으로의 학관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보여지는군요. 다음 번엔 이런 무례를 선배로서 절대 용서치 않겠어요.”
그녀로서는 멋모르는 후배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충고 상대가 바로 비류연이라니……. 최악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무례를 범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다음에 혹시라도 무례란 걸 범할 일이 있으면 참고하도록 하죠.”
강유란의 아미가 살짝 찡그려졌지만 그녀도 시간이 없었기에 이내 몸을 돌려 하세인의 뒤를 따라갔다. 시야에서 그들이 사라지자 미소짓던 비류연의 얼굴이 조용 히 굳어졌다.
“운이 좋군, 저 녀석들…….’
잠시 순간적으로 버릇없는 하세인의 면상을 찌그러뜨려 줄까도 고민했지만 사부된 입장에서 제자들의 밥상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게 최종 결론이었다. 역 시 자신은 제자들을 생각할 줄 아는, 훌륭하기 그지없는 사부라는 착각에 도취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자꾸 생각하고 있으니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겨우 저런 재수 없는 녀석들 따위한테 동수(同手)를 이루었단 말이야. 저런 약해 빠진 녀석들을 상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이대로는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얼간이 같은 녀석들. 그 동안 몇 달 안 봤다고 정신 상태가 썩어 빠졌구만! 아무래도 녀석들의 약해 빠진 정신 재무장을 위해서 귀찮지만 이몸이 직접 나서 야겠군.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어. 흐흐흐.”
마지막에 나직하게 뇌까리는 비류연의 독백은 너무 작아서 옆에 있던 효룡, 장홍, 모용휘 등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지 비류연의 입가에서 더욱 농도 짙어 져 가는 미소가 불길해 보일 뿐이었다.
애꿎은 분노의 화살이 난데없이 주작단을 향해 날아가 정통으로 꽂혀 버렸다. 주작단으로서는 억울하고 기가 막힐 따름이지만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다. 그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주작단의 운명 앞에 다시 한 번 먹구름이 짙게 깔리는 순간이었다.
‘그건 그렇군. 열을 받을 대로 받아 시뻘겋게 달구어진 걸 보니 좀 덥겠는걸. 그렇다면 선심 쓰는 셈치고 시원하게 해 줄까나…….?
물론 이미 비류연의 시야에서 멀어져 간 하세인은 옷 안에 땀이 들어찰 정도로 울화라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세인의 체온 상승 정도와 그에 다른 불쾌지수 수 치 증가에 비류연이 신경 쓰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은 그만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짓궂은 웃음과 함께 비류연의 오른 검지가 안으로 접혔다.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 있는 뇌령사의 끝이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바로 하세인의 허리띠였다. 그의 허리띠는 바지가 볼썽사납게 흘러내려 혹시라도 꼴사나운 모종의 것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해 주는 매우 중요하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물건이다. 그것이 난데없이 끊어진다면…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다.
시원하기는 무척이나 시원할 것이다. 사방에서 통풍이 그렇게 잘 되는데 안 시원할 리가 있겠는가. 쪽은 좀 팔리겠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하는 게 세상 사 냉엄한 법칙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먹이를 제자들을 위해 남겨 둔다고는 하지만 얌전히 돌려보내 줄 비류연이 절대 아니었다.
“큭큭큭!”
상상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지 비류연은 한동안 괴소를 흘려 보냈다.
‘하나, 둘, 셋!”
비류연은 속으로 천천히 셋까지 세었다. ‘셋’ 하는 소리가 끝나는 순간!
“꺄아아악!”
복도 저편으로부터 낯익은 여성의 비명 소리가 격렬한 소음과 더불어 반향되어 들려 왔다.
모용휘와 효룡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비명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효룡과 장홍은 의아함에 서로를 마주보았지만 금방 결론을 도출해 낼 수는 없었다. 복도 저편 보이지 않은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하기로 강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무학관에서 웬 여성의 비명 소리인 가? 게다가 자신들의 귀에 이상이 없다면 방금 전 대기를 진동시켰던 여성의 비명 소리는 청룡단의 일향일검녀 강유란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비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비류연만이 배를 움켜지고 자지러질 뿐이었다.
자지러지는 그의 옆에서는 여전히 냉엄한 표정의 모용휘가 서 있었다.
“웬 소란이냐?”
그때 갑자기 위엄 어린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인 선풍도골의 노인을 바라본 모두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던 모든 관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와 공경을 표하며
머리를 숙였다. 명치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과 백설이 내린 것같은 하얀 눈썹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신선풍의 노인. 전신에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뿜어내는 그 사람은 바로 검존(劍) 공손일취였다. 그는 세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관저로 가는 길에 소란을 목격한 것이었다. 참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손일취의 시선이 찬찬히 장내를 훑었다. 그의 시선 아래에서 누구도 감히 고개를 함부로 들 수가 없었다. 뻣뻣한 비류연의 허리를 옆에서 장홍이 강제로 눌렀다.
공손일취의 시선이 장내를 돌아 마침내 비류연 옆에 있는 모용휘에게로 가서 멎었다. 공손일취의 눈에서 기광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쓰 라린 기억이 떠올라 그의 가슴 한켠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정천…….’
그가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얼굴은 과거 그와 함께 강호를 위진했던 모용정천의 얼굴과 판에 박은 듯 흡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는 기도 또한 석년의 그 를 능가하는 듯했다.
묘한 감정이 공손일취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소생 모용세가의 모용휘가 삼가 검존 공손일취 원주님을 뵙습니다.”
모용세가라는 말에 공손일취의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분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모용휘가 자신을 소개했을 때 그의 얼굴이 미약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네가 바로 정천의 손자라고?”
“그렇습니다.”
현재 이 강호에서 검성 모용정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공손일취였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공손일취가 꾸중하듯 날카롭게 물었다.
“예?”
이번 소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고한 모용휘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검존 공손일취! 이미 검선지경(劍仙之境)에 들어간 고수라는 평을 듣고 있는 그에게도 한 가지 마음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했다. 한때 신검협(神劍俠) 이라 불리던 모용정천과 함께 검왕지재(劍王之才)라고 칭송받으며 모든 영광과 세인들의 흠모와 존경의 염을 한몸에 받았던 그였다. 세상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던 그의 위상은 어느 한순간 모용정천과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지고 말았다.
천겁령에 대항해 신검협 모용정천과 앞을 다투어 경쟁이라도 하듯 무수히 많은 공적을 세우며, 그 실력을 만방에 떨쳐 가던 그였지만 천겁령이 이 세상에서 사라 졌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주위의 비난 어린 모멸적인 시선뿐이었다.
한때 모용정천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라고 평가받던,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도 그는 천무삼성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논공행상의 뒷전으로 밀 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천겁멸살(天劫滅殺)이라 불린 마지막 대회전에 부상을 이유로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천겁 혈신 위천무와 생명 을 걸고 맞서 싸웠던 그때, 부상을 이유로 참가하지 못한 그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의 부상이 진실이었든 아니었든 그것은 상관치 않았다. 중 요한 것은 공손일취가 그 날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갑자기 그가 부상당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무림 일각에서는 대회전에 겁을 집어먹고 병을 핑계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그의 부상은 사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도도한 성격만큼 실력도 고고한 그가 전신에 거미줄처럼 가는 상처를 입고 너덜너덜해진 채 돌아왔을 때 누가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가 부상을 입은 장소가 구대 문파 중 하나인 아미산의 세력권 안이라 더욱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흰 붕대로 전신을 둘 둘 만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의 입을 열지는 못했다. 또한 그의 심각함에 함부로 입을 여는 이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당분간 도저히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완쾌를 기다려 주지 않고 드디어 무림의 생사를 건 대회전이 벌어졌 다. 침상에 누워 동료를 사지로 내보내는 그의 마음은 씁쓰레하기만 했다.
그는 병상에서 마음을 졸이며 동료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친구들은 비록 많이 다치기는 했어도 죽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혈신 위천무와 당당히 맞서 살아 남은 세 명의 친구들에겐 그 신위로 인해 천무삼성이란 영광이 돌아갔고, 침상이나 지켜야 했던 공손일취에게는 돌아갈 영 광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천무삼성에는 구대 문파의 인물이 하나도 끼지 못했기에, 무당파의 직전 제자이자 구파의 최고 기재로 촉망받던 그에게 돌아가는 비난은 더욱 컸다.
그 비난의 대부분은 구대 문파 측이었다. 그 동안 쌓아 놓았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은 일일이 막아내기 역 부족일 정도로 만만치가 않았다. 그 순간 모용정천과 나머지 두 벗에 대한 우정은 미움으로, 존경은 증오로 돌변했다. 그가 대회전을 눈 앞에 두고 침대 신세를 져야 했던 이유이자 원인 제공자가 바로 모용정천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공손일취에겐 그 정도로 충분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증오심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때 그가 받은 상처는 큰 것이었다.
천겁령과의 대회전 이후 공손일취는 다시 절치부심 무공 연마에 몰두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세 명의 벗과 벌어진 격차를 메우기 위해 그는 남들의 서 너 배에 가까운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천일연무(日鍊武)의 폐관수련을 깨고 나왔을 때, 그는 천겁멸살의 대회전 이후 어수선한 강호에 뛰어들어 추상같은 검기로 강호를 평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천겁령 잔당과 흑도 사파에 있어서 그 당시 공손일취의 검만큼 두려운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천 무삼성은 천겁멸살의 대회전 때 입은 상처가 완쾌되지 않아 강호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의 앞을 막을 자는 없었다.
다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검존이란 칭호도 그 당시 얻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그의 명성도 급격히 뛰어올랐지만 최강의 공 포라 불린 천겁 혈신 위천무에 맞서 싸운 세 벗의 명성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공포 중의 공포로 군림천하(君臨天下) 혈세강호(血洗江湖)하던 그가 사라지자 강호인 의 눈에 나머지는 모두 다 잔챙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무삼성은 끝내 사성(四聖)이 되지 못하고 삼성(三聖)으로 머물렀다. 그 당시 공손일취의 낙심은 짐
작할 만한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감히 누가 무슨 배짱이 있어 그를 비난하고 욕하겠는가마는 백 년 세월이 흘러도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증오심을 털어 내 버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공손일취의 안색이 밝지 않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과거의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모용휘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 옛날의 벗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모용휘는 사문의 존장을 대하듯 깍듯하고 공손하게 그를 대할 뿐이었다.
“너는 노부의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공손일취가 다시 한 번 날카롭게 모용휘를 추궁했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모용휘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 무슨 하교가 있으신 지 소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공손일취의 백설같이 단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왜 이리 소란이냐고 묻는 것을 너는 듣지 못했단 말이냐?”
그의 명성과 지위에 걸맞게 공손일취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추상같은 위엄이 서려 있어, 사람을 은근히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잠깐 청룡단 소속의 선배와 단순한 마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용휘는 자신이 본 바와 아는 것만을 대답했다.
“청룡단이나 되는 아이가 한참이나 후배인 너에게 시비를 걸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게 말이 된다고 여기느냐?”
공손일취의 말이 점점 노기를 더해 갔다.
“아닙니다.”
모용휘는 내심 억울했다. 어디까지나 구경꾼에 불과한 자신이 공손일취의 꾸중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당사자는 선배 고인을 보고도 여전 히 말짱하기만한 비류연이 아니던가. 시비를 벌인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비류연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변명 같은 비겁한 짓은 모용휘의 결벽성과는 한참이나 동떨 어진 것이었기에 굳이 변명 몇 마디를 지껄여 이 곤경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겠지.
새까만 후배로서 감히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무인이자 조부인 검성 모용정천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검존 공손일취의 면전에서 그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내 이번 한 번만은 너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 주마. 허나 다시는 내 앞에서 이런 불쾌한 사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예.”
억울함에 마음이 불편한 모용휘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정천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는 재주가 있었는데 후인을 양성하는 데는 재주가 모자랐던 모양이군.”
순간 빙하처럼 냉정하기 그지없던 모용휘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며 솟구쳐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모욕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모욕이 그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부까지 싸잡아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리 평소 침착하기로 이름난 그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요.”
겨울 삭풍처럼 차갑게 몸을 돌려 길을 가던 공손일취의 시선이 다시 모용휘를 향했다.
“너는 아직도 노부에게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느냐?”
당돌한 모용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공손일취는 기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제 자신의 실수에 저의 조부님을 끌어들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분은 저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현명하신 분. 그것은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의? 지금 노부에게 감히 네가 예의를 들먹이는 것이냐?”
공손일취의 입에서 추상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강호 도상에서 남들이 보기에 비약하면 반항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는 모용휘의 행동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짓이 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깊이 사과 드리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모용휘의 눈동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깨끗했다. 굳은 표정으로 그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던 공손일취의 입이 열렸다. 그의 표정 이 조금은 누그러져 있었다.
“좋다. 당돌하구나. 그렇다면 그 증거를 노부의 눈 앞에 보여주리라 기대해도 되겠지?”
모용휘는 무심결에 공손일취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았다.
“기대?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너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고 했으면 스스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올해 있을 삼성제 검성전에서 만일 네가 우승한다면 노부가 너의 말이 사실임 을 믿도록 하겠다.”
“삼성무제 검성전…… 말입니까?”
삼성제가 뭔지는 그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검성전이라면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너의 조부 정천을 기리는 시합이니 네가 그 시합에서 너의 기량을 증명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네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나도 너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내 가 한 말을 취소하마.”
“…..”
잠시 모용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공손일취의 제안은 누가 봐도 지나친 요구였다. 아직 겨우 일 학년에 불과한 그에게 천무학관에서 최소 삼 년
이상 기량을 갈고 닦은 검술 분야의 최고의 기재들만이 참가하는 검성전에서 우승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자신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겠다. 정천의 손자인 네가 할 수 없다는데 누가 더 무리한 요구를 하겠느냐?”
그의 마지막 말이 모용휘의 투지에 불을 지피고 말았다. 그 동안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던 묘한 감정이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느껴졌다.
“하겠습니다.”
모용휘가 맹세하듯 말했다. 그의 단호한 대답은 공손일취의 눈에 이채를 가져다 주었다. 변명이나 불평 한 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보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공손일취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군거리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모용휘만이 남았다. 칠절신검 모용휘가 일 학년의 신분으로 삼성제 검성전의 우승을 선언한 것은 한동안 천관 내를 요란법석하게 만들 충격 폭탄 선언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모용휘 한 개인에게 집중시키는 사 건이기도 했다. 드디어 입관 전부터 떠들썩하던 검성 후계자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요란법석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저 영감님 너에게 유감이 많은 모양이다. 왜 널 걸고 넘어지냐?”
강호의 명성 높은 검존도 비류연에게 걸리면 그냥 한낱 영감님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모용휘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고 그래? 부담스럽게시리…….”
비류연을 바라보는 모용휘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머쓱해진 비류연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난 가 보겠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모용휘는 자리를 떴다.
“여전히 얼음탱이 같은 친구로구만.”
멀어져 가는 모용휘의 등 뒤를 바라보며 비류연이 불평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칠절신검 모용휘가 검성전 우승을 선언하다니 한동안 관내가 시끄럽겠어.”
“재미있고 좋지 않나? 난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난 예전부터 그의 검기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궁금했었다구.”
“재미는 있겠지. 그래도 나하고 맞붙을 일은 없으니 다행이군.”
“그리고 보니 너도 누군가랑 삼성무제에서의 우승을 약속하지 않았냐?”
알면서 뻔히 물어 보는 효룡이었다.
“뻔히 알면서 왜 또 물어 보냐? 내가 잊었을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 잊지 않고 있으니깐. 그런데 오오오……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 녀석에 대한 기이한 감 정은 뭐지?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고 하는 건가? 저 녀석이 예전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데?”
비류연은 싱긋 한 번 웃더니 짐짓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걸 보고 착각은 자유, 미치는 것도 자유라고 하지. 저쪽은 네가 더 꼴 보기 싫어졌을걸.”
효룡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뭐 내가 손해볼 건 없지. 그럼 다음 진행을 기대해 보자고.”
역시 뻔뻔스러움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류연이었다.
“그래. 이미 수업이 시작했겠네. 이번 수업은 화산비천응 문일기 노사의 강의 시간일세. 안 그래도 자네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데, 빨리 안 들어가면 우리의 머리통 을 서른여섯 토막 내버릴 지도 모를 일이지.”
“빨랑 가자구.”
비류연은 모용휘를 뺀 그들 일행과 함께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을 향해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구룡 중 일인인 하세인이 대낮에 복도에서 만인이 둘러보는 가운데 개망신을 당한 그날 저녁, 또다시 비류연은 염도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염도도 다짜고짜 자신 의 애도 홍령을 휘두르지 않았다. 저번처럼 다시 왼쪽 눈이 시퍼렇게 물 드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격한 행동을 자제했다 해도 옛날부터 없던 존경심이 갑자기 솟아날 리도 없었다. 그러니 억지 사부 비류연을 대하는 염도의 접대는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왠일이슈?”
“왠일은요. 사부가 제자의 거처를 방문하는데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요?”
사부라는 말에 염도의 단단한 어깨가 꿈틀거렸다. 내심의 불만이 어깨를 타고 살짝 표출된 것이다. 염도는 여전히 마음 속으로 그 사실을 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런 염도의 심리 상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비류연이 말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제자였고, 그 제자가 말을 안 듣는다면 충분히 매로 다스릴 용의가 있었다.
“용건이나 말하슈.”
짧은 기간 안에 다시 만났더니 염도는 더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입이 튀어나온 게 마치 투정부리는 어린애 같았다. 비류연은 그런 그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요즘 주작단은 어때요? 가르칠 만한가요?”
오늘의 방문 목적도 역시 주작단에 있었던 것이다. 주작단 이야기가 나오자 염도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뭐 가르쳐 보니 나름대로 쓸 만은 하더군요. 기초도 잘 잡혀 있고 발전 가능성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또 전에 무슨 혹독한 수련을 받았는지 웬만한 힘든 수업에도 잘 따라오는 편입니다.”
이 정도면 염도로서는 최대의 찬사를 표한 것이었다. 여태껏 혼자 다니길 좋아하고 얽매이는 걸 극도로 꺼려하던 염도였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게 내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축적되어 있던 불만 해소도 되는 일석이조였다.
“누구 사젠데 안 그렇겠어요!”
비류연이 빙글거리며 말했다.
“누구 사제입니까?”
주작단과 비류연의 관계를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모르는 염도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묘한 침묵 속에서 비류연의 손가락이 염도를 향했다. 덩달아 염도 의 검지도 자신의 가슴을 향했다.
“예? 나요?”
슬며시 미소지으며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도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그 녀석들 사부가 나니깐 당연히 당신의 사제가 되지요.”
일순간 염도는 뇌가 텅 비는 듯한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그럴 수가…….”
너무나 큰 충격에 염도는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비류연의 폭탄 선언이 염도에게 던져 준 충격은 거대한 것이었다. 간신히 심란한 마음을 추스른 염 도가 멍한 눈으로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돼먹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어거지를 쓰는 겁니까?”
그는 아직도 계략에 휘말려 비류연의 제자로 전락한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염도의 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어허, 말을 가려 합시다. 돼먹지 못하다니……. 다 이유가 있으니 원인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 녀석들에겐 비밀이에요. 그 녀석들은 모르고 있는 사실 이니깐요.”
비류연에 대한 반항으로 확 불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염도였지만, 이어지는 비류연의 말에 생각을 곱게 접어 휴지통에 쑤셔 박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발설한다면 당신이 내 제자가 됐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다 말해 버릴 테니 그리 아세요. 아…… 그애들이 참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이렇게 훌륭한 사형이 생겼으니 말이에요. 그렇지 않은가요?”
‘제기랄……..
염도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비류연의 협박은 염도로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협박이었다. 꿈에라도 딴 마음을 품을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입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염도였다.
“그건 그렇고 준호는 어때요?”
비류연은 염도뿐만 아니라 매화 과민증 환자인 윤준호도 병세 치료를 빌미로 염도에게 떠넘긴 전적이 있었다. 그래도 아직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그 이상한 두드러기 녀석 말입니까?”
염도의 반문에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검향지경의 경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화향에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인간은 무림팔황을 통틀어 그 녀석 말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윤준호 얘기가 나오자 염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먼 모양이군요.”
“검향의 경지에 올랐다는 녀석이 매화검법 하나 제대로 못 펼치다니 참 살다 보니 별 황당한 경우도 다 당합니다. 그래도 이제 회풍무류검(廻風舞柳劍)은 곧잘 펼 치는 편입니다. 많이 능숙해졌습니다.”
염도도 내심 윤준호의 황당함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 경우는 강호에 잔뼈가 굵은 그도 처음 접해 보는 황당한 일일 것이었다.
“그래요? 요즘 상황을 보니 많은 나아진 모양이더군요. 좀더 거칠게 몰아쳐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요.”
“언제까지 말입니까?”
“물론 검향의 경지를 벗어나 더 높은 경지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비류연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염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게 가능이나 할까요? 그 녀석을 화산파 장문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군요.”
염도로서도 그것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염도의 의견은 그만큼 부정적이었다.
“일단 시도는 해 봐야죠. 일단 장난삼아 시작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어요. 혹시 또 알아요? 전에도 얘기했던 대로 죽음의 공포를 코 앞에 직 면하게 되면 그 증상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건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하지요. 저번에 죽을 위기에 처하더니 상승의 매화검법을 펼치더군요. 근데 무슨 용무입니까?”
“아, 오늘 용건은 내일 주작단 녀석들을 신시 초(오후 5시 경)까지 연무장에 모아 놓으라는 거예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갑자기 내려진 비류연의 지시에 염도가 되물었다. 여태껏 주작단의 일은 염도에게 일임했을 뿐 간섭하지 않았던 비류연이었다.
“아, 사부 된 도리로서 제자들의 정신력 약화를 마음 아파 두고 볼 수가 있어야죠.”
싱긋 웃으며 하는 비류연의 말에 염도는 내심 투덜거렸다. 마음 아프긴 뭐가 마음 아프단 말인가? 강철판을 여덟 겹 정도 덧대어 놓은 듯한 비류연의 심장이 아픔 을 느낀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염도였다. 절대적으로 신용이 가지 않는 비류연의 말이었다.
“겨우 청룡단 따위의 허약한 녀석들한테 이기지 못해서야 말이 되나요?”
“물론 안 되지요!”
이건 염도로서도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녀석들이 빙검 자식이 가르치는 녀석들에게 지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 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기적적으로 비류연과 염도의 마음이 의견일치를 본 것이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좀더 수련의 강도를 올려야 되겠습니다.”
“그거라면 즉시 그렇게 하죠.”
이것은 염도도 쌍수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날이면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련을 빙자한 염도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해 있는, 그래서 온몸이 남아나고 있지 않은 주작단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 그리고 그 녀석들은 나를 만난 적도 없는 대사형으로 알고 있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요. 내 정체는 비밀로 붙여 주시구요.”
마지막으로 염도의 거처를 떠나며 비류연은 신신당부했다. 비류연의 무시무시한 협박을 들은 염도는 물론 그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그의 가장 확실한 약점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비류연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재회인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흥분이 그의 온몸을 감싸안았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월광에 온몸을 녹이며 비류연이 나직히 읊조렸다. 지금 그의 머리 속에는 수백 가지 다종다양한 요리법(?)이 즐거운 상상과 함께 난무하고 있음은 오직 세상에서 그만이 아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