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4권 9화 – 제자들과의 재회
제자들과의 재회
염도는 약속을 지켰고, 지금 비류연은
어젯밤의 예고대로 주작단 앞에 인피 면구가 아닌 본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제자를
감회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미산에서 헤어진 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주작단 열여섯 명이 다 모이자 그제야 비류연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와 그들 앞에 섰다.
“자네는 누군가?”
처음 보는 인물이 그들의 전용 연무장에 알짱거리자 보다 못한 당철영이 물었다. 짐짓 불쾌하다는 듯 묻는 당철영을 힐끔 쳐다본 비류연이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처음이지? 만나서 반갑다. 내가 너희들의 대사형이다.”
주작단원들은 비류연의 황당한 선언에 눈을 껌벅거렸다. 어처구니없는 경악이 그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의 홍두깨요, 귀신 씨 나락 까 먹는 개잡종 같은 소린가?
비류연의 자기 소개에 주작단 전원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과거를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과거 언제 저런 사형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숨겨 둔 은밀한 과거도 그들에겐 없었다.
왠지 평범해 보이는 푸짐한 소매의 흑의 무복에 앞머리는 치렁치렁하여 얼굴 윤곽을 제대로 알아 볼 수도 없었다. 머릿결 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매끄러운 턱 선으 로 미루어 보아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얼굴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소매의 표시를 보아하니 애송이 일 학년생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지금 벌써 삼 학년이다.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였다.
“미친놈!”
그들이 일제히 외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이, 그것도 갓 천무학관에 입관한 일 학년 애송이가 삼 학년인 하늘 같은 선배들 앞에서 무엄하게도 ‘사형’, 그것도 ‘대사형’을 운운하다니. 그들이 분노하지 않을 리 없었다. 비류연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주작단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엇을 원하나?”
존경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언제나 비꼬는 듯한 가식적인 존대어를 사용해 오던 비류연도 그들 앞에서는 처음부터 철저히 하대로 일관했다.
“미친 놈, 네놈이 정신이 나갔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망발이냐? 그런 망발을 부릴 때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서라고 보아도 무방한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비류연을 비난한 이는 바로 성질 급한 노학이었다. 다른 이들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물론.”
생글생글 웃으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얼마간 보지 않은 사이에 참 많이들 커 있었다. 아니 간이 부어 있다고나 해야 하나? 그러기에 건강 관리에 신경 좀 쓰라고 했 더니…….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 상관은 없었다.
“호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건방진 놈, 그럼 증거를 보여 봐라.”
노학은 자신의 이 한 마디가 자신의 무덤을 자진하여 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증거?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그럼 보여주지. 너!”
비류연의 검지손가락이 노학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
다시 손가락이 방향을 튼 곳은 당철영이 있는 곳이었다.
“일루와!”
비류연의 검지손가락이 안으로 까딱거렸다. 노학과 당철영을 깔보는 듯한 태도. 마치 자신들이 비웃음을 당하는 듯한 불쾌감이 두 사람의 신경을 자극했다. 노학 과 당철영이 동시에 발끈했다.
“이놈!”
성난 멧돼지처럼 둘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지만 먼저 비류연에게 달려든 건 노학이었다. 그 성질 급한 거지는 당철영과의 합동 작전도 잊은 채 그냥 달려들었다. 단 일 초에 저 시건방진 놈의 버릇을 고쳐 놓자고 했다. 그리고 이런 애송이를 손 봐 주는데 굳이 당철영의 손까지 차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학의 이런 착각은 모든 재앙을 자기 한몸에 뒤집어쓰고 얼떨결에 당철영을 구제해 주는 격이 되었다.
노학은 그 동안 갈고 닦은 강룡십팔장을 준비하고 무영신보로 달려들었다. 지난 반 년 동안 자신의 이 쌍장 아래 무사했던 이는 아무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비류연도 예외일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노학의 예상은 단숨에 틀어지고 말았다. 손바닥 뒤집는 듯한 비류연의 간단한 손동작에 휘말려 그의 신형의 중심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둔탁한 충격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비류연의 일 장이 그의 가슴을 가격시킨 것이다. 비록 비류연이 죽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힘썼지만 그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커억!”
노학의 입에서 단말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쯧쯧, 반 년 가까이나 지났는데 이것 하나 못 막다니……. 그 동안 대체 뭐 하며 농땡이를 친 거야?”
비류연은 단번에 주작단원들의 반 년 동안 거쳐온 피땀 어린 수련 과정을 전면 백지화시켜 버렸다. 성과가 보여야 납득해 줄 것이 아닌가.
“제법이지만 아직 멀었구나. 그렇게 쉽게 남의 도발에 넘어가서야 어디다 써먹겠느냐! 이건 그 벌이다.”
순식간에 수십 발의 주먹 그림자 권영(券)’이 노학의 전신을 쇄도해 들어갔다. 규칙도 법도도 없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퍼버버벅!”
수백 번의 가죽공 터지는 듯한 격타음과 함께 노학의 몸이 점점 수직으로 떠올랐다.
“저…… 저…… 저것은!”
지켜보던 주작단원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노학과 주작단원들은 이것이 어떤 무자비한 무공에 당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라 는 이름의 연장으로 그들 뼛속 깊이 각인되어져 있는 것이었다.
삼복구타권법(三伏狗打券法)!
그 저주받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 다시 그들 앞에 현신(現身)한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야 말로 바로 꿈이길 빌었다. 하지만 일부러 세게 꼬집어 본 볼의 감각 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한 채 아픔을 호소해 왔다. 신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나만…….?’
노학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것으로 벌써 두 번째였다.
이 강도, 이 울림, 무엇보다 이 익숙한 지독히 끔찍한 느낌!
“반 년 전 아미산에서의 교훈을 잊고 왜 또 멍청이처럼 나섰단 말인가. 나의 학습 능력과 교훈 이해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얼어붙은 감성과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노학은 한탄했고,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맷집도 많이 늘어 고통이 감소될 법도 한데 아픔은 여전했다. 그가 반 년 전 공포와 절망 속에서 느껴 보았던 감각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맛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쉴새없이 움직이는 비류연의 손목에 차여 있는 묵룡환(墨龍環)이 보였다. 그걸 마지막으로 노학은 마침내 의식의 끈을 놓았다. 주작단원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노학을 바라보았다. 반 년 전 아미산에서도 그들은 이와 똑같은 장면을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 맛본 적이 있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전율의 그 이름, 삼복구타권법. 그 저주받을 무공이 다시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작년 여름 아미산에서 노학을 시범용 본보기 로 반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자비한 무공.
피를 붉은 안개처럼 뿜으며 뒤로 저만치 날아가는 노학의 애처로운 모습과 마지막으로 내뻗은 비류연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묵룡환을 보자 그들의 뇌리 속을 스치 는 사부의 한 마디가 있었다.
‘너희들의 대사형을 만나거든 이 사부의 화신을 대하듯 깍듯이 대하도록 해라. 그를 만나면 그가 너희들의 대사형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부의 예언대로 그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차고 있는 묵룡환은 그들이 차고 있는 밋밋한 묵환과는 분명 차이가 많았다. 게다가 아미산 합숙 훈련 시 절에 항상 사부가 차고 있던 묵룡환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또다시 앞에 나섰다가 피 안개를 뿌리며 저만치 나가떨어진 노학에게 슬쩍 눈길을 한 번 준 비류연이 주작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충분한 증거를 제시했다고 본다. 또 불만 있는 사람?”
더 이상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무슨 횡액을 당하려고 감히 그런 생각을 품겠는가! 비류연의 질문에 모두들 사색이 되어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도리쳤다. 비류연 은 아직도 증거 불충분이라고 우길 제자들(이제는 사제가 된)을 위해 성심 성의껏 증거를 다시 한 번 제시해 줄 의향이 있었지만, 만장일치로 그들이 거부하는 바람 에 그 생각을 아쉬움과 함께 접고 말았다.
“너도 맞을래? 왜 아직도 거기 서 있어?”
비류연이 아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당철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당철영은 심장은 내려앉는 줄 알았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난데없이 약한 모습 보이는 당철영. 전혀 그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새삼 먼저 달려든 노학이 고마워지는 그였다. 주작단 일동 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사형!”
우렁차게 인사하는 그들의 이마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실 직접적인 사승 관계가 아닌 이상 비류연이 대사형을 고집하는 것은 언어 도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의 존재를 무시하기엔 사부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후환이 호환(虎患) 마마만큼 두려웠다.
‘너희들의 대사형을 만나거든 사부라 생각하고 따르거라.’
떠나기 전에 사부가 당부하던 말이 갑자기 그들의 머리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그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부의 마지막 경고 한 마디. 결국 사부의 말대로 되고야 말았다. 그들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의 대사형이 된 비류연이 자 신의 사제들에게 훈시했다.
“대사형은 곧 사부님과 같다. 알겠느냐?”
“예, 대사형!”
주작단 열여섯 명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행동 역학으로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증명한 비류연이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사부와 제자의 감동적인(?) 재회였다.
그때서야 저 멀리서 구경하고 있던 염도가 다가오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한 마디했다. 주작단원들은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황당해졌다.
“보아하니 이미 인사는 나눈 모양이군.”
인사? 요즘은 사람을 복날의 개 패듯 팬 다음 모래 더미 속에 처박아 넣는 일련의 과정을 인사라고 하는 모양이지?
“정식으로 소개하지. 인사해라. 너희들의 대사형인 비류연이다.”
복날의 개처럼 널브러져 있는 노학을 무시한 채 염도가 비류연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주작단원들은 의아했다. 자신들이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염도까지 비류연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비 사형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남궁상이 대표로 나서 그들의 궁금증을 물었다. 비 사형이라……. 벌써부터 위엄을 보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비류연은 매우 흡족했다.
“어라?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염도의 연기는 꽤나 능청스러워 사정을 알고 있는 비류연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내가 그 동안 일부러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지만, 사실 내가 너희들의 아미산 시절 사부와 안면이 있느니라.”
“예에? 그럴 수가!”
주작단에게 있어 염도의 발언은 폭탄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염도가 그들의 아미산 합숙 훈련 시절의 사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강호가 비록 넓다지만 그 속에 얽히고 설킨 인연의 굴레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의 사부가 나에게 신신당부했었다.”
‘신신당부’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염도의 비수 같은 시선이 주작단원들을 향해 날아가 박혔다. 모두들 등골이 오싹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너희들을 허약하게 만들어 놓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이다.”
“예에?”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설마 이제는 끊어졌으리라 생각하고 안심하던 사부의 마수가 아직까지도 그들을 붙잡고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약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들이 청룡단 애송이들을 이기게 만들어 놓겠다고 말이다.”
‘무슨 수’를 특히 강조하는 염도였다. 그것이 핵심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
모두들 이제는 얼이 다 빠져 말할 기운도 없었다. 정신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탈색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염도의 증언으로 비류연에 대한 긴가민가하던 진위 여부 에 대한 진품 확인서에 현실의 확인 도장이 찍힌 것이다. 게다가 보증인은 천하 오대 도객의 한 사람인 염도였다. 그 누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인 그는 보증 인의 자격이 충분했다. 지금 염도가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강호란 데가 워낙 은원(恩怨)과 인연이 얽히고설킨 곳이라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작단에게 있어서 이처럼 강호의 인연이 원망 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주작단은 팔자에도 없는 대사형을 한 사람 모시게 되었다. 그들이 과연 비류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날은 언제인가?
노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호의나 악의(?)에 관계없이 학생인 이상 비류연은 수업을 찾아 들어야 했다. 게다가 오늘은 강호 생활에 있어 필요 불가결이라 할 수 있는 독(毒)에 관한 수업이 있었다.
독술(毒術)은 전년도 천관도 여론 조사에서 가장 듣기 싫은 수업 중 당당히 일위를 차지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공 해독학은 천관도라면 반드시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이라 피해 갈 수 없었는데, 이는 모든 이들의 불행이었다. 모두들 독공 수업을 꺼려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냄새 때문이었다.
음침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험실 안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십 개의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묘한 악취를 동반한 형형색색의 연기를 뿜어 대고 있었 고, 한 쪽에는 수십 개로 분류된 도굴 채집장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듣도 보도 못한 수백 가지 징그럽기 짝이 없는 끔찍한 독물(毒物)들이 가득 들어 있어 보는 이의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그 중에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붉은 쌍두사까지 있었다. 그 위에는 팻말로 홍린 쌍두사라고 친절하게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독약 실험실에 들어서자마자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향기가 그들의 후각을 자극하여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과연 전 학생이 가장 꺼린다는 독공 수업 시간답군. 이 고약한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겠어. 충분히 살인적이야.”
“콜록콜록. 동감이야. 나 지금 숨막혀 죽을 것 같애.”
수백 개의 칼날이 코 안의 점막을 쑤셔 후비는 듯한 자극으로 인하여 일그러진 얼굴로 코를 단단히 움켜쥔 효룡이 말했다. 코를 틀어막고 있는 건 비류연 이하 다 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홍만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원래 그의 감각 기관이 인체 오감 중 후각이 빠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들 정도로 태연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저 아저씨는 코가 마비됐나? 왜 혼자만 멀쩡하지?”
의혹감에 찬 비류연이 물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장홍 이외에는 손으로 코를 쥐어 막지 않고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이 향을 맡는 순간 코가 떨어져 나갔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게 사람이야?”
효룡도 맞장구쳤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 냄새만은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고 끔찍했다. 그 동안 받아 왔던 그 고된 인내력 수업이 다 공(空)으로 돌아가 는 듯한 참담한 기분이었다. 어떠한 고문이나 협박과 고통에도 굴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겨우 악취 하나에 그 동안 공들여 쌓아 온 인내심의 벽을 허문 자신이 생각만 해도 비참하고 한심했다.
“정말 비인도적인 지독한 고문이로군. 이건 누군가의 살인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스스로 한심스런 생각에 효룡이 불만을 토해 냈다.
“자자,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여전히 태연한 장홍이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애초에 후각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충고는 별로 미덥지 못하군.”
여전히 태연한 장홍의 충고에 비류연이 쏘아붙였다.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강의 담당 노사인 사천당문의 천독수
말했다. 당학령이
그는 비류연 일행에게 암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천수탈혼(千手奪魂) 당평의 형이기도 했다. 하지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같은 피를 나눈 형 제라 할지라도 바라보는 목표와 걸어가는 길이 다른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여러분들에게 이 교실 안에 가득 차 있는 독초(毒草)의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고, 철창 우리 속을 기어다니는 수십 가지 독사, 독충, 그외 희귀한 독물들이 귀엽 게 느껴질 때, 그리고 냄비 속에 끓고 있는 약초와 독액 혼합체의 우아한 색채가 아름답게 보일 때 비로소 여러분의 수업은 모두 끝날 것입니다.”
독공 독약의 신비 시간 담당 노사인 천독수 당학령의 설명을 들은 비류연의 소감은 딱 한 가지였다.
“절대로 수업이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군.”
이런 걸 필수 과목으로 채택해 둔 학관이 원망스러웠다. 좀더 우아하고 심도 있는 무공 학문을 기대할 수는 없단 말인가.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지. 공부를 끝장낼 수 있는 방법이.”
여전히 미간에 세 겹 주름을 만든 채 효룡이 말했다.
“그게 뭔데?”
한시라도 빨리 공부를 끝장내고 정상적인 자연 환경과 벗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비류연이 물었다.
“확, 미쳐 버리는 거야.”
“뭐?”
비류연은 언뜻 효룡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 말 안에 담겨 있는 진실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무간지옥의 밑구녕에서 올라온 것 같은 악취가 향기롭게 느껴질 수 있겠어. 미쳐 버린 후 신경이 뒤엉키지 않고서 말이지.” “내 말이 그 말이야.”
아직도 장황한 설명에 극도의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는 비류연과 효룡이 내심 불만을 품으며 중얼거렸다.
당학령은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몇 가지 희귀 독물들을 앞에 두고 기쁨에 들떠 강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걸 들어야 하는지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다. 그런 당학령이 저쪽 한쪽 구석에서 조잘거리는 비류연 일행을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곧바로 협박 섞인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시끄럽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한 번만 더 주둥이를 이 신성한 독약 냄비 앞에서 나불댔다가는 입 속에다가 염위산과 오장분탕산을 처넣어 주마.”
섬뜩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협박이었다. 염위산이라 하면 반 숟갈만 먹어도 위가 녹아 버린다는 무시무시한 극약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장분탕산에 비하면 조족 지혈에 불과했다. 오장분탕산은 이름에 걸맞게 한 방울만 마셔도 오장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칠일 주야를 뒹굴다가 마침내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독 중의 독이 었다. 그런 것들을 서슴없이 제자들의 입 속에 처넣어 주겠다고 장담하는 당학령이 무섭게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호감을 보내 줄 인물은 아 무도 없었다.
독공 기초 수업인 ‘독에 대한 천 가지 이해와 다양한 이용 강의의 담당 노사인 천독수 당학령은 가르치는 과목만큼이나 음침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기형적으로 길 쭉하게 돋은 하관과 가늘게 찢어진 두 눈, 거기에 덤하여 좁쌀만큼 작은 홍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괴팍 하기 짝이 없었다. 때문에 비류연을 비롯한 강의 수강자 모두는 사람을 외모만으로 평가하는 편협한 사고 방식으로 멀쩡한 사람을 매도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만큼 당학령의 성격은 상식밖으로 이상하고 괴팍했다.
당학령의 협박 한 마디에 장내는 매우 효과적으로 고요 속에 잠겨 버렸다. 누가 감히 간도 크게 입을 벌려 혀를 놀릴 수 있겠는가!
그제야 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오장분탕산을 한 사발 들이키고 전신 요혈에 오독침(五)이 박혀 고통 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 상태를 항상 유지하도록.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매우 효과적인 협박이었지만 사파의 인물인지 정파의 인물인지 모호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사파 인물 중에서 당학령만큼 괴팍하고 무시무시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당학령은 이미 예전에도 협박을 실천에 옮긴 예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물론 금세 해독약을 복용시 켜 주기는 했지만 그 잠시의 순간에 당한 고통만으로도 지옥을 체험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체험자들은 한결같이 증언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너희들이 이 달구어진 냄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음양 오행의 조화의 이치와 상생상극의 묘리를 배우고, 더 나아가 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약재의 향기가 향기로워질 때, 또 자신이 제조한 독약을 서슴없이 냉큼 먹을 수 있을 때, 그리고 강호도상에서 내어 주는 어떤 음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너희들의 수업은 끝날 것이다. 이따위 태도로 배웠다가 행여 강호로 나가서 남의 용독술(用毒術)에 당하거든 나한테 배웠다는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마 라. 노부가 어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느냐. 그런 놈은 남의 독에 중독되어 죽기 전에 내 손에 녹아 죽을 줄 알아라. 알겠느냐?”
“예!”
비류연이 속한 천자조의 수업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했다. 극도의 인내력으로 지독한 독향을 참아 내고 수업에 다들 몰두했다. 딴 짓 하는 이는 눈 씻고 찾아 봐도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당학령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독사 같은 눈빛에 모두들 주눅이 들었는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두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그 수업 시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