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5권 15화 – 빙백봉과 청설옥검녀의 결승 비무

비뢰도 5권 15화 – 빙백봉과 청설옥검녀의 결승 비무

빙백봉과 청설옥검녀의 결승 비무

하늘에 뿌리는 검화(花)인가?

아니면 땅에 바치는 검우(劍雨)인가?

두 자루의 검과 검이 어울리며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검기를 뿌려댔다.

“우와아아아아!”

열광적인 환호성이 관전석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나예린의 검 끝이 천변만화의 조화를 부리며 관설지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과연 사대검신(四大劍神)의 이대절학을 한 몸에 지닌 여인답게 그녀의 검은 날카로 운 예기(氣)와 깊은 현기(氣)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상대방의 검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나예린의 결승전 상대는 청설옥검녀(淸雪玉劍女)라 불리는 관설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천하오검수의 일인인 빙검 관철수의 외동딸이기도 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특이한 용모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특이하게 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꼭 탈색된 듯 옅은 남색에 가까운 색이었는데, 매우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검후전 우승의 영광을 노려 왔던 화산일선녀 정하경은 애석하게도 준결승전에서 관설지의 검 아래 꺾이고 말았다.

벌써 결승전이었다. 나예린의 검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 대결인 것이다. 그녀의 사저인 독고령은 내년에 있을 ‘그것’을 대 비하여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내년에 있을 그것을 위해 힘을 아끼고 아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가장 강한 자들만의 제전인 그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대회가 아니었다. 백도를 대표하는 인물을 뽑는 대회가 녹록할 리가 없지 않은가. 1년을 미리 준비한다 해도 결코 여유가 없을 것이다.

“백뢰낙화(百落花)!”

다시 한번 나예린의 검극(劍戟)에서 순백의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미 결승 비무는 시작된 지 오래 되었다. 과연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은 그 위력이 막강했다. 마치 100가닥의 번개가 한꺼번에 떨어지듯 화려하면서도 강한 검초였다. 하지만 이에 맞서는 관설지의 검 또한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녀는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섬광시(閃光矢)처럼 쏟아지는 나예린의 검초에도 한 번도 낭패를 당하는 일 없이 묵묵히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예린의 검이 창 (創)이라면 관설지의 검은 방패(防牌)였다.

“빙령수혼(氷靈守魂)!”

싸늘한 한빙지기(寒氷之氣)가 실려 있는 관설지의 검은 직접 살에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몸을 얼리기에 충분할 만큼 극냉한 한기를 머금고 있어 두렵기까지 했다. 가까이 다가만 가도 마치 빙굴에 빠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예린으로서도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빙굴 속이 아무리 한랭하다 해도 그 속을 뚫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나예린은 상대의 검기(劍)에 경의를 표하며 자신의 검을 힘껏 휘둘렀다.

“섬뢰관일(閃貫日)!”

빙백봉 나예린이 오늘 펼치고 있는 검법은 그녀의 별호와 다르게 빠르고, 강하고, 매서웠다. 그녀가 검을 펼칠 때마다 은은한 뇌성(雷聲)이 울려 퍼지고 번개가 번 쩍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번개가 지상을 때리듯 강한 검초가 그녀의 검 끝으로부터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하나하나 절기(絶) 아닌 것이 없었다. 그에 맞 서는 관설지의 검법 또한 수준을 맞추는 듯 평범한 초식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로 수준 높고 위력적인 검기가 한 곳에 부딪치는데도 여태껏 쉽사리 승패가 가려지지 않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 조화되듯 두 사람의 검기가 한데 어우러 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쪽은 공격(攻擊)의 검, 다른 한쪽은 방어(防禦)의 검! 창(創)과 방패(防牌)! 그렇다 보니 금방 승부가 갈리지 않고, 100여 초가 넘어가도록 승 부가 갈리지 않는 것이다.

“과연 검후(后)와 맹주의 진전을 이은 사람답군요. 여인의 몸으로 저토록 절정의 검공을 구사해 낼 수 있다니 말입니다. 펼치는 초식 하나하나에 현기가 가득합 니다.”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노사들이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예린의 무위는 사내를 압도할 만큼 강했고, 그것을 펼치는 그녀는 더할 나위 없 이 고아한 기품을 내뿜고 있었다. 청설옥검녀 관설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두 사람의 대결은 마치 천상의 여신이 검을 들고, 검무(劍舞)를 추는 듯 아름답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두 여인의 검무 속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자태는 검에 실 린 살기마저 녹여버리고 잊혀질 지경이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심하세요!”

검기(劍氣)를 일으키며 교성을 터뜨린 이는 나예린이었다. 검초를 시전하기 전에 미리 주의까지 주는 그녀였다.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義) 참천무뢰(斬天舞雷).

드디어 나예린의 검 끝에서 절정검초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펼쳐 왔던 것과는 격을 달리하는 위력적인 검격(劍擊)이었다. 하늘도 찢을 듯한 벽력(霹靂) 같은 기

세였다. 한없이 우아하면서도 가냘픈 여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라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위력적인 검기였다. 관설지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지지 않겠 다는 의지가 두 눈 가득했다.

빙령수류검 검한기(劍寒氣) 오의(奧義) 제이십사식(第二十四式) 한빙벽(寒氷壁)!

나예린의 검이 하늘을 찢는 번개처럼 변해 가차 없이 뻗어져 나갔고, 이에 대응하는 관설지의 검 끝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한빙지기를 내뿜었다. 나예린은 마치 거대한 빙벽을 마주 대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차가운 얼음칼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관설지의 몸 앞에 빙벽(氷壁)을 쌓은 그런 느낌이었다.

양대 검법의 최절초가 한 곳에서 부딪치자, 그 기세는 사뭇 흉험했다. 관설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검한기(劍氣)였다.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해도 그 위력 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직 나예린의 검초도 그녀가 시전한 차가운 검망(劍網)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히 철벽이라 불러 마땅할 방어였다. 사실 방어에 있어서 그 어느 검법보다 탁월한 조화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녀가 지금 펼치고 있는 빙검 관철수의 독문검법 빙령수류검(氷靈水流劍)이었다.

애초에 공격과 파괴력을 염두에 두고 만든 염도의 진홍십칠염(眞紅十七炎)과 함께 창안한 방어(防禦)를 위주로 만든 검법이었던 것이다. 만년빙벽(萬年氷壁)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몸을 수비하는 묘용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수세에 가장 강한 검법 중 하나였다.

관설지가 부친인 빙검 관철수로부터 전수받은 빙령수류검(氷靈水流劍)은 방어를 통해 상대를 무너뜨리는 독특한 검법이었다. 한계를 넘는 파괴력으로 모든 것을 짓뭉개는 염도의 도법과는 정반대의 무리(武理)를 지니고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검(劍) 끝에서 피어올라 검과 검을 타고 넘어오는 한빙지기(寒氷之氣)는 상대방도 모르게 몸의 신경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자신의 움직임이 둔해진 줄 모르고, 계 속해서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가는 겨울철 두꺼운 얼음 밑에 은밀히 흐르는 물 같은 공격을 받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서서히 상대의 몸과 신경을 갉아먹는 무서 운 무공인 것이다.

“이야! 볼거리가 풍성하구만!”

사람들은 구경하다 눈이 빙그르르 돌아갈 지경이었다. 나비처럼 우아하게 운신하며, 때로는 제비처럼 재빠르게 공수를 교환하는 두 미녀의 격전은 옆에서 지켜보 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침이 흐를 정도로 화려하고 풍성한 볼거리였다.

그녀들의 검기 또한 미모에 걸맞게 출중한 것이어서 더욱더 비무대 위를 빛내고 있으니, 남자들이 그녀들에게 목숨을 거는 것도 당연했다.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은 나예린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엔 취향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청설옥검녀 관설지 쪽을 추종하는 무리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나예린은 나예린대로, 관설지는 관설지대로 각자 나름대로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의 무공은 서로 우위를 쉽게 가르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것 이지 않은가.

나예린은 그녀답지 않게 오늘 두 번 놀랐다.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으슬으슬할 정도로 극냉(極冷)한 한기를 품은 관설지의 검기에 한 번 놀랐고, 용안의 능력을 반쯤 무위로 만드는 검법의 오묘함에 두 번 놀랐다. 마치 그녀가 쳐놓은 그물 속으로 자신의 검기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적수가 없던 나예린으로서는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였다. 관설지의 뛰어남은 마음 속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철벽 같으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숨겨놓 고 있는 듯한 검법은 나예린을 당황시켰다.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쓰여지는 용안(龍眼)의 능력이 없었다면,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을 쓰지 않았더라면 패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상 대도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상대도, 자신도 일부러 검 끝에 약간의 사정을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녀가 용안(龍眼)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그 능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용안(龍眼)은 상대의 공격(攻擊)을 파악하는 데는 강하지만 방어(防禦)의 수를 읽는 데는 약하다. 즉, 자신이 공격하는 입장이 되면 본래 위력의 반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방어란 공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수동적인 성향이 강하 기 때문이다. 그나마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능력 발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관설지의 검은 방어의 검이지, 공격의 검이 아니었다. 그것도 수비검학(守備劍學) 측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이를 지닌 검법이었다. 특 히 그녀가 펼치는 검막(劍幕)은 마치 만년 빙벽처럼 차갑고 단단하고 두터웠다. 도저히 뚫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부류의 검법을 대하는 것은 그녀로서 도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관설지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으로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겪어 본 나예린의 검기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경지였다. 이건 거의 무사부들을 뛰어넘는 수준 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예린이 아직 봉인해 놓고 쓰지 않는 검법이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 나예린이 쓰지 않고 있는 검법이 있었다. 시작 때부터 그녀는 몸에도 잘 맞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강검(剛劍)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나예린의 진짜 검법은 그것이 아니었다.

여중제일검 검후(劍后) 이옥상으로부터 전수받은 검기(劍技)!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검후(劍后)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가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검법이 그녀의 손에서 아직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왜 쓰지 않는 거죠? 그 검법?”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관설지가 궁금한 듯 물었다.

‘왜 사용하지 않느냐!’, ‘날 무시하는 거냐!’, ‘오늘 죽어 보자!’라는 식으로 성질내며 길길이 날뛰지 않는 게 대부분의 남자들 하고는 다른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허락 없이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나예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의 뜻을 표했다. 잠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잘못하면 얕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전 혀 얕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사문의 절기는 허락 없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 쓰고 있는 검법도 비록 여인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 사대검신 중 한 명인 무림맹주 나관천의 독문검법이었다. 그 근본이 어디로 도망갈 리는 없었다.

“아쉽네! 하지만 사문의 명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요.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그럼 다시 해 볼까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관설지가 외쳤다. 그녀의 성격이 얼음 송곳처럼 차가운 부친 쪽을 닮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다시 천상선녀들의 검과 검이 한 데 어우러져 합주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승부가 나질 않겠는데…….”

비류연이 보기에 아무래도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둘 다 열성적으로 승부를 낼 마음도 없는 것 같았다. 투기(鬪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지금 모습은 마치 친목 도모나 무공 교류하는 사람들 같았다.

“이야! 저분들의 검법을 보니 요즘 사내들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군!”

비류연과 함께 지켜보던 효룡도 탄성을 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견하기에도 그녀들의 검술 실력은 남자들을 무더기로 눈 아래로 볼 만큼 빼어났기에 다수의 남 성들이 자신의 성취에 부끄러운 마음을 품어야 했다.

“뭣 빠지도록 수련해야지 별다른 수가 있겠어!”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내뱉는 비류연이었다. 비무는 점점 더 비류연이 예측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300여 초가 지나도록 승패가 나지 않자, 심사 위원석에서 쑥덕이는 기색이 느껴지더니 무당파 전대 장로이자 천무학관의 원로인 현학진인의 오른손이 위로 들려 졌다. 그러자 심판관이 양손에 들고 있던 깃발 두 개를 위로 들어올리며 선언했다. 비류연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중지!”

도저히 이대로는 승부를 가릴 수 없음을 느낀 심사 위원들이 무승부를 선언한 것이다. 더 이상 위험해지기 전에 중지시키는 게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300 여 초가 지나도록 더 이상의 최절초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들 또한 무리하게 승부를 가르지 않을 의도임을 나타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만일 사내들이 었다면 피가 튀고 살이 튀어도 끝장을 보려고 했을지 모른다.

중지 신호가 울리자마자 둘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검을 멈추고 원래 마주보던 그 자리로 돌아갔다.

“허허허! 이런 봉황들이 둘이나 나왔다는 것은 천무학관의 큰 기쁨이자 무림의 홍복이 아닐 수 없소! 노도를 비롯한 여기 계신 다섯 분의 노사들이 합의한 결과 두 소저의 실력에 도저히 우위를 가릴 수 없다고 판단된 바, 아쉽지만 무승부를 선언하도록 결정하였네.”

심사위원석에 대표로 앉아 있던 현학진인이 대표로 일어나 너그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한 말이었다. 두 사람 다 불만은 없었다. 이대로 가면 목숨을 던질 작정을 하지 않는 이상 승패를 가리기가 힘들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장내를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두 미인 중 한 명이 낭패한 꼴을 당하지 않아 더욱 잘 됐다는 반응이었다.

무승부! 승부가 갈리지 않은 한 판이었다.

잠시 후, 청설옥검녀 관설지는 주위의 환호를 받으며 비무대 위를 내려오던 중 느닷없는 사태에 깜짝 놀랐다.

웬 거구의 사내가 나타나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와락 움켜쥐는 게 아닌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처할 틈이 없었다.

“소운(巢雲)!”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은 거구의 사내가 외치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녀 역시 처음엔 무척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렸다. 눈 앞의 상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발(赤髮), 적염(赤), 적미(赤眉)! 이런 특이 한 용모를 한 사람은 아마 무림에 단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염도(焰刀)였다.

놀란이는 비단 관설지 그녀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추종자들도 깜짝 놀랐다. 특히 멀찍이서 지켜보던 청흔의 놀라움은 그 누구보다도 큰 것 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라고 버럭 외치려던 청흔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함부로 큰 소리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옆에서 보기 에도 아파 보이게 움켜잡은 손은 일단 떼어 놓아야 했다.

그때 청흔의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 준 사람이 있었다.

“빠샤!”

옆에서 두고 보던 비류연이 아연 기절초풍할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비류연이 있는 힘껏 수도(刀)로 염도의 손목을 내리쳤다.

염도의 고개가 비류연 쪽으로 홱 돌아갔다.

본래 의미는 ‘죽고 싶냐?”라는 의미였지만, 그 의미가 비류연에게만은 예외적으로 통하지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런 험악한 상판대기를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아가씨 코 앞에 들이밀면 아가씨께서 놀라잖아요. 기절 안 한 게 천만 다행이네요!”

가차 없이 염도의 실수를 질책하는 비류연의 말이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이탈할 만큼 크게 놀랐다. 누가 감히 천하의 염도를 상대로 저런 괘씸한(물론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언행을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염도가 단번에 비류연을 발설착두(撥舌捉頭:혀를 뽑고 목을 비틀어버리는

형벌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염도는 비류연에게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관설지의 어깨에서 손을 떼는 게 아닌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염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선은 그녀에게서 한 치도 떼지 않고 있었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여인이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자신 앞에 나타났는데 어찌 자신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설지의 미모는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굉장히 뛰어났다. 피부는 눈부신 백옥(玉) 같았고, 두 눈동자는 심해의 흑진주를 연상케 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 리색은 옅게 탈색되어 남색빛을 띠고 있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무공을 연성한 흔적일 것이다. 염도의 가슴이 저며지듯 아파 왔다.

“모친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느냐?”

염도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혁(赫), 소(巢)자, 운(雲)자 되십니다!”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직접 확인이 떨어 지자 그 충격이 말도 못할 만큼 컸던 모양이었다.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 혼란스러웠다. 하늘과 땅이 건방지게 허락도 안 받고 자리를 바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소운의 딸이더냐?”

왠지 풀이 죽은 듯한 음성이었다. 어깨가 축 처지는 것처럼 보인 것은 눈만의 착시 효과였을까. 전혀 염도답지 않은 그런 슬쓸한 모습이었다.

하늘을 올려 보던 염도의 시선이 다시 관설지에게로 향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더냐?”

붉은 귀신을 연상케 하는 용모와 어울리지 않게 추억이 일렁이는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염도가 안 돼 보였다.

“예!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런가…….”

겨우 한 마디를 듣고는 다시 입을 닫은 채 침묵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염도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염도답지 않아 보고 있기가 답답할 지경이었다.

‘흐흠……..’

흥미로운 눈길로 비류연의 눈빛이 염도와 관설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일단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자! 이러지 말고 빨리 휘 녀석이 출전하는 준결승전 시합을 보러 갑시다. 그 녀석이 보기엔 그렇게 냉정하게 보여도 의외로 쓸쓸함을 많이 탈지도 모른다니 깐!”

물론 근거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분위기 쇄신을 위한 이야기에 근거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걸음을 옮기는 염도의 어깨가 왠지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자신 은 외로움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용휘는 가뿐하게 준결승전 상대를 물리치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삼절검 청흔 과의 대결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