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5권 19화 – 비류연과 위지천의 최종 결승

비뢰도 5권 19화 – 비류연과 위지천의 최종 결승

비류연과 위지천의 최종 결승

드디어, 삼성대전 결승전의 날이 밝았다.

비류연은 이 특별하고 중요한 날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 오기도 전에 일어나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고, 차가운 정수(淨水)로 몸을 정결히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각오를 다지는 그런 따위의 행동과는 애초에 인연이 없었다.

반대로 위지천은 이 과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답습했다. 그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일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종종 믿어지지 않는 일이 한 번쯤, 가끔씩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다음 순간에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변덕스러움과 어이없음에 감탄하거나 욕을 바 가지로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천관도들에게 있어 비류연의 삼성대전 결승 진출은 그야말로 신의 농간(弄奸)이라 불러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천지신명의 농간이라고 명명된 결승전을 구경하러 왔다. 비류연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풍검룡 위지천을 보기 위해서 그들은 발걸 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검성전의 결승에 비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도 검성전 결승의 열기가 가시지도 않은 채 학관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오늘은 관객의 신분인 나예린도 구경차 나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류연의 시합을 보기 위해서였다. 왜 또다시 자신이 그런 남자의 시합을 보러 온 것일까? 막 상 이곳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제 날아온 우뢰매의 발목에 달린 편지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윈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는 그녀였다. 지금껏 그녀의 손에 처리된 편지만 해도 이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않았던가.

‘그냥 호기심 정도겠지…….’라고 가볍게 치부하던 나예린 자신도 자신의 태도에 놀라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자신에게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 단 말인가? 결단코 없었다. 주위에서 걱정할 정도로 주위와 인간 관계에 마음을 끊고 살아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흥미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녀가 다가서자 군중들 모두가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한 번씩 그들의 앞을 지나가는 나예린을 쳐다본다. 황홀한 눈빛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그녀로서는 그들의 눈빛이 탐탁치 않을 때도 있었고, 껄끄러울 때도 있었다. 부담스러울 때는 더욱 많았다. 특히 지금처럼 빙봉영화 수호대 일원들이 앞에서 남세 스럽게 사람을 쫓으며 길을 낼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왜 자신이 겨우 미모 하나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미모만이 여자를 평가하는 잣대란 말인가? 남자라는 생물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자라는 동물의 미묘한 감각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너무 깨끗하고 순수했다.

그녀를 따라온 이진설은 쉽게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표정이었고, 그녀의 사저인 독고령은 언제나 그러했듯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 곁에 호 위하듯 붙어 있었다. 나예린의 심연한 눈에 지금 막 비무대 위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지면 안 돼! 지면 안 돼! 난 결코 지지 않아! 저런 근본도 모르는 애송이 녀석 따위한테 난 결코 지지 않는다. 이겨서 반드시 그날의 치욕을 씻어내고야 말 테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위지천은 외치고 있었다. 절대 저런 근본도 모르는 애송이에 패해서는 안 된다고, 더욱이 자신의 우상이자 모든 것인 빙백봉 나예린이 목전 (目前)에서 보고 있는 이 마당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고 위지천은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분이 지금 눈 앞에서 보고 있다. 그런데도 진다면 무슨 낯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그따위 용기는 나에게 있지 않다. 반드시,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 백 일연무(百日練武)의 성과를 오늘 여기에서 보여 주마! 네놈은 꿈 속에서도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명문의 힘, 구대 문파 청성파의 정수를 여기서 보여 주마!’

이번 일전은 그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명예와 체면이 걸린 한 판 승부였다. 반드시 이유를 불문하고 이겨야만 하는 승부인 것이다. 한껏 굳어진 얼굴로, 매서운 눈 빛을 내뿜으며 비장한 마음으로 위지천은 검을 들었다. 백광으로 빛나는 새하얀 검을…….

삼성무제의 마지막 장식자인 비류연과 선풍검룡 위지천…

선풍검룡 위지천의 결승전 진출이 확정되자 관도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결승전에 오른 나머지 하나가 소문이 무성하던 1학년 애송이 운수대통(運數大通) 비류연임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매우 기괴한 표정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의문 부호를 그려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이냐고,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니냐고…….

위지천으로서는 비류연의 결승 진출이 다행한 일이었고, 바라마지 않던 일이기도 했다. 영혼을 불사르며 사모하던 여인의 코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는데 이제 그것 을 만회하지 못한다면 천 년 만 년 자신을 괴롭힐 수치심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때문에 비류연이 삼성무제에 출전하는 걸 알고 자신의 주특기인 검을 버리고 이쪽으로 출전한 것이다. 위지천은 그날 그 때 그 당시에 당한 건 명백히 순간의 방심 으로 인한 실수였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었고, 그렇게 느끼는 게 위지천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방심한 놈이 검강까지 뿜어낼 기력이 있었던가는 아직 의문 이다).

비류연은 묘하게 눈을 빛내며 위지천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안 보인다는 소문이 돌더니, 어디 처박혀서 신공이라도 연마하고 온 건가 하고 살펴보았다. 하긴 뺀지 르르하던 그때와는 몸에서 흘러 나오는 기세가 달랐다. 잘 연마된 한 자루의 검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류연의 입가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번졌다. 오래간만

에 해 볼 만한 상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금(琴)은 치워야 하나?

이리저리 궁리하는 비류연을 쳐다보며 위지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독기(氣)와 원한(怨恨)이 가득 서린 미소였다. 처음 대진표를 받아 봤을 때 그는 내심 실 망했고 걱정이 앞섰다. 저 비류연이란 녀석과 출전 분야가 다르거나, 혹은 만나 보기도 전에 그가 중간에 지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결승전에 오른다 해도 만날 수가 없지 않겠는가. 만나지 못하면 설욕전이 성립될 수 없다. 그 자신은 물론 계속 승승장구해 결승전에 다다를 자신이 있었다. 아직도 비류연의 실력에 미심쩍어하고 있던 위지천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런 마당에 비류연이 그의 걱정을 불식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말짱한 모습으로 결승 무대 위에 올라왔다. 이제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했던 폐관수련의 성 과를 보여 줄 때이다.

“드디어 그날의 치욕을 갚아 줄 시간이 도래했다. 각오해라!”

비장미 넘치는 목소리로 위지천이 외쳤다. 이 한 마디를 외치기 위해 얼마나 별러 왔던가!

“뭘요?”

헌데 그의 독기를 품은 목소리를 들은 비류연은 마이동풍(馬耳東風)격으로 무심하게 되묻는 것이었다.

“뿌드득!”

5장 이상 떨어진 비류연의 귀에도 우렁차게 들릴 만큼 강렬하게 이빨 가는 소리였다. 위지천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보통 사람은 한 순간도 마주 보기 힘든 그런 사나운 눈빛이었다.

“그날 받은 치욕을 오늘 수십 배로 되돌려주마!”

“자신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살기(殺氣)와 투기(鬪氣)가 뒤섞인 채 뭉클뭉클 솟아 나오는 위지천을 정면에 두고도 비류연은 여유롭기만 했다. 이 여유만만한 태도가 오히려 위지천의 쌍심지를 돋우고 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느껴졌다.

“광오하구나!”

“현실일 뿐이죠.”

빙글빙글거리는 비류연의 낯짝을 한 대 후려갈겨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이 위지천의 가슴 속에 뭉클뭉클 솟아났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못 담게 만들어 주마. 그분을 위해서라도 넌 사라져 줘야겠다.”

노골적인 살기가 위지천의 전신에서 기세등등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런 비무 대회에서는 볼 수 없는, 비무 대회라고 여기기 힘든 엄청난 살기였다. 그의 살기에 동 조하기라도 하듯 그의 검은 푸른 검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저 살기는 마치 생사대적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듯하군요!”

위지천의 짙은 살기를 지켜보는 심사위원 노사들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 두 사람의 실력차가 너무나 커 보였던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스럽게 말을 내뱉은 사람은 검혼관 사감이기도 한 철혈무정검 강하윤이었다. 지금 강하윤은 비류연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천무삼성을 기념하는 천 무삼성무제에서 사상자(死者)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중지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형!”

천자조의 조장이자 원로원 소속인 무당파 현학진인 검존 공손일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역시 고수답게 위지천의 몸에서 사정없이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투기를 감지한 터였다. 미우나 고우나 제자인 비류연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은 천자조 담당 스승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선풍검룡 위지천은 벌써 예전부터 무명을 떨치던 기재 중의 기재였다. 그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과연 그 정도의 기재를 저 말썽 많던 비류연이 버텨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내심 확정해놓고 있던 터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지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문일기 노사가 말했다.

“저 아이가 겨우 1학년을 상대로 저런 살기를 뿜어내다니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모두들 선뜻 대답해 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들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

“저길 보시오!”

문일기가 비무대 위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오오! 훌륭하오! 저 나이에 저 정도 성취라니!”

막 위지천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검강(劍剛)이 한 자 이상 솟아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지켜보던 모든 무사부들이 잠시 걱정을 잊고 흡족한 마음을 드러냈다.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저 아인 전력을 다할 모양이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중지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위지천이 검강까지 선보인 이상 시합은 더욱 흉험해질 게 뻔했다. 검강(劍剛)이면 아차 하는 사이에 젊은 목숨 하나 하늘로 보내는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위험이 생기기 전에 중지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비무는 계속되어야 하오! 계속 진행합시다! 그냥 강행시키시오!”

큰 소리로 중지 의견을 막은 사람은 바로 염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염도에게로 쏠렸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의견을 제시한 염도였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노사들을 한 번씩 훑어봐 준 다음 다시 염도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지레 겁먹고 중지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게다가 이대로 시합을 중지시킨다면 우승은 누구 것이란 말이오?”

“그야 당연히……..”

‘위지천!’이라고 말하려던 강하윤은 입을 꽉 다물었다. 아직 정식으로 격돌하기 전이었다. 그들의 눈에 아무리 위지천의 승리가 환히 보여도 함부로 단정지을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반대편이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저런 젊은 나이에는.

“비류연이란 아이가 저 위지천의 검기를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까요?”

지금 강하윤은 자신의 기숙사생이기도 한 비류연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염도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누구 말이오? 저 비류연이란 녀석 말이오? 저 녀석이라면 걱정할 거 없소.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말짱히 살아날 그런 녀석이니깐! 걱정 말고 시합을 계속 하도록 합시다.”

염도가 뒤에 한 줄 빼먹은 말이 있었다.

‘저 정도로 뒈지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랬다면 예전에 그의 손으로도 절단낼 수 있었을 것을. 그놈의 쓸데없는 약속은 왜 해 가지고 스스로의 목에 족쇄를 채웠는지. 그날 일만 생각하면 자 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염도였다.

‘제발 져라! 져!’

그가 보기에 비류연은 그렇게 간단히, 비참하게 무너질 놈은 아니었다. 또 자신의 도를 야비한 수를 동원하여 꺾은 녀석이었다. 진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일 비류연이 여기서 진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위지천보다 약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차마 관주 이하 원로들 앞이라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염도가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저 비류연 쪽이 아니라 저기 앞뒤 가리지 않고 살기를 풀풀 내뿜는 위지천 쪽이었다.

‘뭐 죽이기야 하겠는가……?”

잠시 명복을 빌어 줄 한가로움 따윈 염도에겐 없었다.

“그럼 시합을 속행하기로 합시다!”

문일기가 말했다.

“그럽시다. 천이도 분별이 없지는 않겠지요!”

강하윤은 눈에 콩깍지 비슷한 게 씌인 모양이던데……, 아마 같은 청성파 출신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염도는 강하윤의 의견에 좀 회의적이었지만 귀찮아서 반박 하지는 않았다.

“그럼 결정된 것으로 알고 시합을 관전합시다.”

마침내 현학진인이 시합 개시를 허가했다.

“시합 개시!”

심사위원석의 결정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비무대는 다시 위지천과 비류연 둘만의 것이 되었다.

““나 소저어……!”

비무대 위에서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관전석 한쪽으로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위지천이 검강을 뿜어내든 말든 난 상관할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비류연이 갑자기 나예린을 부르는 바람에 위지천은 시작과 동시에 베고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비류연이 손을 흔든 방향에는 그녀로서는 매우 드물게 어색한 표정을 한 나예린이 독고령, 이진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우와! 언니! 저 사람 용케도 언니가 있는 곳을 알아맞혔네요! 언니도 손 한 번 흔들어 줘요!”

그러면서 진설은 먼저 비류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비류연이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더욱 신나게 손을 마주 흔들어 주고 있었다.

“진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이진설에게 주의를 준 것은 독고령이었다. 이진설의 의외의 행동에 나예린의 얼굴은 약간의 동요를 보였다.

“이 애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첫 시합 이후 비류연의 시합을 거의 보러 오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비류연이 여기까지 해 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날은 그저 이상한 기분 탓에 무심결 내뱉었을 뿐이었다.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사문의

검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 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사과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저쪽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기대하라고…..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의 안에는 무엇이 잠재되어 있는 것일까?

‘과연 이번에도 이길 수 있을까?”

나예린의 눈에도 위지천은 마치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동안 그녀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무위(武威)를 선보이 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비류연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전히,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저 남자 앞에서는 당황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굳이 용안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순순하다는 것!”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뿐이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례하다! 어디서 감히 아는 체를 하는 것이냐?”

위지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화무쌍해졌다. 이진설과 죽이 맞았는지 손을 마주 흔드는 비류연을 보며 위지천은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나예린 앞에만 서면 숨이 막혀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데, 이 눈 앞에 서 있는 자식이 서슴없이 그의 우상이자 여신(女神)을 부르는 게 아닌가.

게다가 그녀와 가장 절친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손까지 흔들어 주니, 마치 그녀가 손을 흔들어 주는 듯한 착각이 들어 더욱더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살기가 조금 전 보다 족히 두 배는 짙어진 듯했다. 열심히 손을 흔들던 비류연이 손을 멈추고 위지천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선배께서는 하류 잡배도 아니니 제 한 곡의 연주를 들어 줄 여유 정도는 있겠지요.”

만일 내 연주를 방해하면 넌 하류 잡배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를 생글생글거리며 잘도 하는 비류연이었다. 위지천의 속을 뒤집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오장육부 가 몽땅 자리를 바꾸려 하고 있었다.

“흥! 그따위 싸구려 연주를 들을 만큼 난 한가하지 않아!”

“호오! 제 금음이 무섭다는 이야기군요. 이런, 이런 불상사가……!”

애석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누가 무섭다는 거냐?”

위지천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렇지 않다면 한 곡 정도 들어 줄 여유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해 좀 아쉬웠거든요. 저기 지켜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 아량은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번 삼성제 기간 동안 그의 묵금은 아직 한번도 악기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류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무릎 위에 묵금을 올려놓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 볼까.’

비류연의 두 손이 금현 위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현 위를 나는 듯이 움직이며 묵금(墨琴)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저놈이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살펴보기로 한 위지천은 비류연의 금음에 흠칫 놀랐다. 아직 음공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위지천의 충격은 음공에 당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이 곡은……?”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 곡은! 설마…….”

놀란 사람은 비단 위지천만이 아니었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나예린, 그녀조차도 비류연의 이 곡을 듣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이진설이 기다리지 않고 한 마디 했다.

“우와! 언니도 놀랄 때가 다 있네요! 언니, 저 사람 보기보다 연주 실력이 훌륭한데요. 멋진 음률 아니에요?”

물론 뛰어난 실력이었다. 이 정도까지 금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범상한 실력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기 저 위 심사 위원석의 홍란도 비류연이 지금 이 정 도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연주를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볼을 세차게 꼬집으며..

하지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곡은 바로 그녀가 첫 입맞춤을 빼앗기던 그날, 그곳 운향정에서 자신이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었기 때문이다.

“으으으으으!”

위지천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다. 순간 정신을 놓쳐버릴 뻔했다. 어느새 비류연의 연주에 내공이 깃들었는지 그의 정신을 분탕질시켜 놓고 있었다. 비 류연의 음률은 순식간에 그의 마음에 생긴 허점을 파고들어왔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비류연의 음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고 있었다. 당장 터져 버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기가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쳐올랐다.

하지만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발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고 어깨는 돌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대기를 타고 흘러드는 비류연의 금음

을 듣고 있자니 그날의 악몽이 눈 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날의 치욕, 그날의 수치!

다가가는 남자, 마주치는 입술, 저항하지 않는 그녀. 무한한 질투심이 미칠 듯이 그의 마음 속에서 폭발해 온몸을 질주했다.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허나 여전히 몸은 그물에 걸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훌륭해요! 음문(音門)에 먹칠은 혼자서 다하고 다녔으면서, 저런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비류연의 연주를 본 홍란의 평가였다. 그녀 역시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맞소. 매우 훌륭한 연주구려!”

문일기도 홍란의 감탄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지금의 그는 그 동안 홍란의 속을 태운 사람이 바로 비류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연주가, 상대의 빈틈을 완전히 파고들어가 심령(心靈)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에요. 보세요!”

홍란의 가녀린 섬섬옥수의 끝이 위지천을 가리켰다.

“보라는 건 제 손가락이 아니라 저 위지천이란 아이예요!”

문일기가 정신없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고 있자 얼굴이 붉어진 홍란이 소리를 빽 지른 것이었다.

“험험! 예쁜 손가락이오! 험험.

연방 헛기침을 터뜨리며 문일기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자신의 시선을 위지천에게로 보냈다.

“지금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데, 정작 몸은 움직이질 못하고 있죠! 저게 바로 음률이 완전히 심령(心靈)의 지배권 안에 들어갔단 증거예요! 그래서 지금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죠.”

“호오? 과연! 듣고 보니 그렇소이다.”

신기하다는 듯 문일기가 위지천을 쳐다보았다. 과연 살기는 솟구치고 투지도 엄청난데 두 기운이 제멋대로 뒤섞이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헌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가 말이오?”

검(劍)으로는 이미 일가를 이룬 그였지만 음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너무 쉽게 당했어요. 저 위지천이라는 아인 그래도 구룡의 일인에 검강(劍剛)까지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너무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음률에 당했어 요. 저 아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저항하거나 했을 텐데..”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비류연은 저 위지천에게 상당히 큰 정신적 충격을 가한 다음, 그로 인해 그의 내부에 발생한 마음의 빈틈을 완벽하게 찌르고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위지천이 단번에 넘어간 거죠.”

“으음……. 저놈이 그냥 두발 불량자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한 가닥 하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오!”

설명을 들은 문일기도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음률에 조예가 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솔직히 저 정도 수준일 거라고는……, 게다가 저 애는 음공을 익힌 지 아직 반 년밖에 안 되었어요.”

“뭐요? 홍매! 그게 사실이오?”

이번엔 문일기도 정말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가 음공에 대해서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음공이 제대로 된 경지에 들어서기엔 반 년 가지고는 턱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흥! 누가 당신의 홍매란 말이에요?”

혼란의 와중에 은근슬쩍 흘린 말을 용케 놓치지 않은 홍란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어? 눈치챘소? 빈틈이 없구료, 홍매!”

이젠 아예 대놓고 시위하는 문일기였다. 안 그래도 비류연 때문에 골치 아픈데 두통거리를 하나 더 보태 주는 문일기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홍매가 아니라니깐요! 나잇살 먹은 양반이 참 부끄러움도 모르고…….”

더 이상의 입씨름으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홍란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결론은 두 가지밖에 없어요! 실력을 숨긴 고수이거나……, 별로 확률은 없지만 천재이거나. 둘 다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죠, 휴우.”

그 동안 비류연이 수업 시간에 저지른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수라는 사실은 거의 말이 안 되니, 그렇다면……. 인정하긴 싫지만 천재란 말이오?”

문일기의 인상이 금세 찌푸려졌다.

“인정하기 싫은데…….”

“동감이에요!”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하는 두 사람이었다. 현실에 등 떠밀려 눈 앞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 외의 가정에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투였다. 두 사람이 의견 개진을 핑계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도 비류연의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