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5권 21화 – 에필로그
에필로그
“어때요?”
비류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전히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독특한 마력을 지닌
절세의 미소저(美少姐) 나예린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비류연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설마 그가 이 정도까지 해 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진짜로 삼성무제에서 우승할 줄 그 누가 짐작했겠는가!
“대답이 없네요…….”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기죽는 다면 그는 이미 비류연이 아니었다.
“제 말대로 됐죠? 제가 이겼죠?”
“예!”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역시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천상의 음악, 천음(天音)도 여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솔직히 의외였어요. 정말 그대의 말 그대로 될 줄은 기대하지 않았었죠.”
“솔직한 대답이네요.”
비류연이 생긋 웃었다.
“그럼 이제 사과해 주시겠죠?”
어린아이가 보채는 것처럼 비류연이 말했다.
“무엇을 말인가요?”
“제가 검후처에 든 범인이라고 의심했던 점에 대해서 말이죠.”
당연하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이런 가증스러운 놈을 보았나!
그래도 제딴에는 정직하게 백향관 침입자라는 말은 쏙 빼고 검후처 침입자라는 말만 내뱉었다. 사실 백향관은 몰라도 검후처에 침입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제가 성급했으니 사과드리죠.”
역시 미심쩍긴 했지만, 그녀는 일단 사과했다. 자신이 내놓은 터무니없는 약속을 비류연은 완벽하게(?) 수행한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럼 사과 선물은요?”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비류연이었다.
“예?”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녀가 비류연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느새 비류연은 그녀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또 읽지 못했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그의 손이 그녀의 가녀린 진주보다 더 희고 고운 손목을 잡고 있는데도, 신체적 접 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류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이번에도 허락받지 않은 도둑질이었다. 역시 첫 번째보다는 못하지만 뇌전 직격타 같은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감 미로웠다. 저번에 너무 정신이 새하얘져 잘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엔 그런 데로 정신이 온전히 붙어 있었던 관계로 그 황홀한 느낌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웬일인지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 비류연의 입술이 나예린의 입술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만일 알려진다면 다시 한번 수많은 남자들의 심 장을 찢어놓을 일대 사건이었다.
“채앵!”
예고도 없이 다시 한번 나예린의 검이 은빛 섬광을 뿜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군요.”
방비를 하고 있었던가? 그녀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이번엔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전 성공했어요!”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채 태연하게 말하는 비류연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증스럽다고 말할 그런 미소가 그의 얼굴에 활짝 피었다.
“사과의 대가는 치른 것 같군요. 그럼 실례했어요!”
여전히 감정의 편린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말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비류연도 좀 실망이었다. 좀더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전혀 감정이 느껴지 지 않는 얼굴이었다. 좀더 풍부한 감정이 깃든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울 텐데……. 비류연은 그 점이 애석하기 그지없었다.그녀가 등을 돌려 그에게 로부터 멀어져갔다.
“다음에 또 봐요!”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는 비류연의 목소리를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내가 이겼구만!”
금영호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승자의 미소가 그의 얼굴에 어렸다. 반대로 기환검 도광서의 얼굴엔 패배자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크으으으, 내가 졌다.”
상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역시 자신의 눈과 판단은 정확했다. 도광서는 현재 죽을 상을 하고 풀이 죽은 채 서 있었다.
“어떻게 알았나?”
상대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투로 도광서가 물었다.
“뭘 말인가?”
“어떻게 그 애송이의 우승을 예측할 수 있었나? 아무런 근거도 없었을 텐데.”
그 점이 도광서로서는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찍었다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허허허, 자네가 없다고 남들도 없겠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넨 큰 착각을 한 것일세. 항상 도박은 한 끝 차이지. 그 한 끝이 나한테는 있었고 자네한테는 없었던 거야. 해서 내가 이긴거지. 더 이상 알려하지 말게. 도박사에겐 누구나 남에게 알려 주지 않는 비장의 한 수가 있게 마련이지. 그걸 묻는 건 크나큰 결례가 아니겠나. 금기(禁忌)란 말일세. 자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바보나 그런 걸 묻는 거라네.’라고 속으로 한 마디 더 덧붙여 주었다.
“거기엔 아주 끔찍한 이야기가 숨어 있거든.”
그 이야긴 절대 타인에겐 숨겨야 하는 극비 사항이었다. 승자인 금영호의 두툼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아직 내 실력이 녹슬지 않은 모양이군. 약속은 지키겠지?”
도광서의 얼굴이 쓰다 버린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남아일언중천금,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청룡단 단원들한테 고개를 든단 말인가? 생 각할수록 참담하기만 할 뿐이다.
“왜 그렇게 미적대나? 너무 뻣뻣한 것 같군. 그래, 설마 몇 달 지났다고 벌써 내기를 잊은 건 아니겠지?”
불만스런 목소리로 금영호가 말했다. 약속은 약속! 내기는 내기! 얼른 지켜라, 그런 뜻이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도광서는 이를 악 물었다.
“본인 청룡단 소속 도광서는 나의 미천한 안목이 주작단의 금영호 공자보다 못함을 인정하며 절을 드리는 바이오!”
이렇게 외치며 그는 이마를 바닥에 세 번 조아리고 아홉 번 절했다.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대로 절을 받는 금영호는 이겼다는 승리의 희열감에 천상에라 도 오를 듯한 기분이었다.
금영호의 손에 배당금이 두둑이 쌓였다. 비류연의 우승을 예측한 사람은 그 이외에 세 명밖에 없었다. 더구나 배당금이 좀 갈라져 아쉽기는 했지만, 내기에 건 액 수가 다른 3인에 비할 수 없이 많은 관계로 그에게 돌아가는 배당금 또한 가장 많았다. 모험을 하며 건 돈이 십수 배로 튕겨 돌아온 것이다.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 린 것이다.
게다가 도광서와의 내기로 삼고구배와는 별도로 얻은 남창제일루의 화려한 저녁 식사마저 함께 주어졌다. 남창제일루(南昌第一樓)라는 이름 그대로 그곳은 일반 인들 기준으론 눈 돌아갈 만큼 비싼 곳이었다. 그 돈이 모두 고스란히 금영호의 손으로 들어온 것이다. 횡재가 따로 없었다.
“캬아! 이때를 위해서 내기를 한단 말이야!”
손이 묵직할 정도의 최고액 배당금을 받는 순간은 언제나 짜릿짜릿한 쾌감이 온몸 구석구석을 누빈다. 최고의 손맛이었다.
이겼다. 주머니도 두둑했다. 청룡단 도광서 녀석의 풀 죽은 모습도 봤다. 단원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돌아가는 금영호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 뿌듯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던 금영호는 너무나 행복에 취해 모종의 불행이 자신을 노리며 달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부 주의를 탓하기엔 이번 불행은 너무나 불가항력이었다.
“여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요? 그런데 손에 들린 게 참 무거워 보이네요? 좀 들어 줄까요?”
“아니, 괜차… 컥! 켁! 크헉!”
등 뒤에서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의식중에 활짝 웃으며 응대해 주던 금영호의 얼굴이 금세 사신(死神)과 조우한 사람처럼 사색이 되었다.
“아니, 왜 그러나요? 누가 보면 경기 든 사람인 줄 알겠네요?”
싱글벙글 웃는 비류연의 얼굴이 금영호의 눈에 마치 악마(惡魔)처럼 보였다. 비류연의 손가락이 금영호가 등 뒤에 감추려고 노력하는 중인 묵직한 상금 주머니를 가리켰다.
“누구 때문이죠?”
비류연의 얼굴에 맺힌 생글생글한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이런 때는 절대 딴 마음을 품거나 허튼짓을 궁리하고 있으면 안 된다. 평소의 하대(下對)가 공대(恭對)로 바뀔 때가 일종의 위험 신호인 것을 금영호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하지만 금영호는 용기(勇氣)를 내어 모험을 감행했다. 여기서 아무런 시도도 없이 포기하기엔 손에 쥔 게 너무 아까웠다. 비류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진 해졌다.
“어라? 정말 몰라요? 그럼 섭섭하죠. 할 수 없이 수고스럽지만 제가 상기시켜 드려야겠군요. 이번 내기에 이긴 건 누구 때문이죠? 설마 잊은 건 아니겠죠?” 금영호의 눈 앞이 암담해졌다. 가슴이 철렁해졌다. 대사형은 다 알고 이곳에 온 것이다. 아아! 대사형의 다음 행동을 뻔하게 예측할 수 있는 자신이 미웠다. “잊다니요! 그거야 물론 영민하시고 자랑스러우신 대사형 덕분 아닙니까. 제가 어찌 감히 대사형의 은덕을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꿈 속에서조차도 잊어 본 적이 없는 것을.. 그거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요. 하하하…….”
금영호의 아부는 이제 신의 경지에 다다른 모양이다. 양심마저 팔아넘긴 대가인지, 아니면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뿜어져 나온다는 미지(知)의 힘 덕분인지, 그의 혀가 매끄럽게 잘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웃음엔 힘이 없었다.
“내가 열심히 온몸으로 뛰어다니며 얻은 승리가 확실하지요?”
“물론입니다.”
속으로야 입이 댓자나 튀어나왔지만 약자의 서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당연히 수고비가 있겠죠?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후안무치한 행동이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어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그는 억지로라도 웃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 생명에 여벌이 없는 것일까? 생각만 해도 아쉽기 그지없었다.
“전, 사제의 마음 씀씀이를 기대하겠어요!”
기대에 못 미칠 시엔 어찌어찌해 버리겠다는 구차한 말은 하지 않았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때론 하지 않은 말도 척척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크흐흐흐흑!’
금영호는 심장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배당금의 2분의 1 이상을 비류연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만 했다. 3분의 1만 내놓았을 때, 자신을 향해 짙게 미소짓던 비류연의 눈빛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류연, 그가 수고비 명목으로 수거해 간 돈은 금영호가 땅을 치며 통곡할 정도로 비통한 마음 을 감출 수 없었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안목품평회(眼目品評會)!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비류연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날 사실 금영호가 염도를 만난 이유도, 염도가 비류연의 심부름으로 내기 돈을 걸러 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이름 앞으로였다. 때문에 금영호랑 만난 이야기가 모두 비류연의 귀에 흘러 들어가고 만 것이다.
염도가 돌아와 무심결에 금영호와 만난 사실을 비류연 앞에서 몽땅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비류연이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그 정도 이야기면 충분했다. 그리 고는 여태껏 잠자코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가서 마수(魔手)를 뻗친 것이다. 이리하여 주작단원들은 배보다 배꼽이 큰 개평(속된 말로 삥이라고도 한다)을 뜯길 수밖 에 없었다.
돌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천근만근 같은 금영호에 비해 돌아오는 비류연의 발걸음은 새의 깃털보다 더 가볍고 날아갈 듯 경쾌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제 가을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낙엽과 함께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허나 아직도 생기가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천무학관 남쪽에 위 치한 주작단 전용 연무장이었다.
“쾅!”
“커억!”
노학의 몸이 4, 5장 밖으로 날아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게다가 아직도 힘의 여파가 남았는지 노학은 서너 바퀴 더 굴러가며 연무장 바닥을 청소해야 했다. “다음!”
염도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넘실거렸다. 마주 대하기 두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예!”
다음 차례로 검을 뽑아든 이는 유운검 운룡(雲龍) 현운이었다. 그의 검은 혹독한 수련 속에서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이제 단일합(合)에 날아가 거나 하는 꼴사나운 일은 없었다.
염도(焰刀)의 도와 현운의 검이 한데 어우러지며 푸른 검광과 붉은 도광의 멋진 춤사위를 그려냈다. 이젠 제법 잘 버티는 현운이었다. 예전처럼 허둥지둥 막는 데 급급한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많이 늘었구나! 제법이다.”
격전 중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현운을 칭찬하는 여유를 부리는 염도였다.
“예! 감…, 사합니다.”
청운은 힘겹게 대답했다. 지금은 염도의 도기를 막는 데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허나 여기가 비었어!”
염도의 애도 홍염(紅焰)이 청운의 옆구리를 쇄도해 들어갔다. ‘아차’하는 심정으로 현운이 검을 틀어 옆구리를 막았다. 젊은 나이에 허리가 양분되는 것은 사양이 었다.
“콰쾅!”
막긴 막았으되 힘이 모자랐다. 시기 또한 적절하지 못하여 반 초 정도 늦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현운 역시 실 끊어진 연처럼 4장 밖으로 날아가 바닥을 쓸며 처박 혔다. 그래도 노학보다는 몇 수 재간이 나은지 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까지 보여 주었다. 거의 소용이 없었지만.
“다음!”
염도가 다시 외쳤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나선 이는 뇌전검룡이라 불리며 남궁상이라는 이름을 떨치는 이였다.
“방심하지 마라. 죽을힘을 다해라. 이제 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삼성제도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빙검(劍) 자식의 청룡단과 한 판 붙는 것뿐이다. 지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무조건 이긴다. 알겠느냐?”
대갈성을 터뜨리며 포효하듯 염도가 기염을 토했다. 손 끝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전율시키는 거센 기파(氣波)가 느껴졌다.
“예! 노사님!”
“와라!”
염도가 외쳤다. 남궁상은 새하얀 백광의 검기를 뿌리며 염도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다시 한번 검무(劍舞)와 도무(刀舞)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들은 지금 진심이었 고, 아무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삼성무제가 끝난 뒤, 벌써 한 달!
염도는 더욱더 주작단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수련은 혹독해져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끼인 윤준호만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수련이 반도 지 나기 전에 기절한 채 저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그로서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웬만한 날고 긴다는 1학년생들도 이들의 수련에 동참한 다면 시작하자마자 반 시진(약 1시간)이 되기 전에 기절해 버릴 것이다. 그 것을 윤준호는 벌써 한 시진(약 2시간) 가까이나 버틴 다음 기절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코가 석자인 입장에서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청룡단과의 결전.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효룡도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우선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하니 적을 알아보는 것 또한 훈련만큼이나 중요했다. 효룡은 자신의 눈 앞에 부복해 있는 한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꼭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존재를 드러내며 이렇듯 깍듯이 인사할 필요는 없는데 복면인 무흔(無痕) 일호(號)는 막무가내였다. 이것만 은 굽힐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흔 일호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입장인지라 어쩔 수 없이 효룡은 매번 무흔 일호의 하례(下禮)를 받 아야 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고요?”
효룡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흔각(無痕閣)의 정보 조직을 가지고도 아직 못 알아내는 정보가 있단 말인가?
“예!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오리무중입니다.”
일호는 죄송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일호는 돌아가면 아랫것들을 좀 족쳐야 되겠다고 내심 결심했다. 아무래도 요즘 각(閣)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나 은밀한 문파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효룡이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효룡이 일호에게 부탁했던 것은 비류연의 출신 사문에 관한 전반적인 조사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불 명(不明)’이라는 한 단어였다.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현재까지 지켜본 초식만으로는 도저히 사문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비 류연은 자신의 사문 관계에 관해서는 좀체 말을 하지 않았다. 계획과 다르게 좀 더 시간을 들여야 될 것 같았다.
“그럼 우선 삼절검 청흔과 칠절신검 모용휘에 대한 조사에 신경을 써 주세요. 특히 두 사람은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니 주의해서 되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효룡이 일호를 불러 세웠다.
“하명하십시오.”
일호가 깍듯이 대답했다.
“일단 위의 세 사람에게 전력을 집중하되 덤으로 장홍이란 사람에 대한 정보도 모아 줘요.”
일단 장홍에 대해서도 알아두어야 했다.
“존명!”
“그리고 청흔과 모용휘! 그 둘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우선한다는 것 명심하세요.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효룡이 떠나라는 신호를 보내자 무흔 일호의 몸은 밤의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스르륵 사라졌다. 언제나 감탄이 나올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효룡은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은 여전히 밝기만 했다. 밤이 깊어 갔다.
<『비뢰도』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