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의 화음
아름다운 옥소(玉簫) 소리가 저녁 바람을 타고
달빛과 어우러져 노닐 듯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듣는 이의 심금(心琴)을 울릴 듯한 아름다운 소리였다.
허나, 현재 옥소 소리에 끌려가듯 다가서는 중년의 사내, 세인들이 화산비천응이라 이름 붙여 준 사내 문일기는 이 소리가 평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하던 소리가 오늘따라 유달리 급박하고, 불안정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짐작하는 문일기였 다.
소리의 근원에 다다르자 문일기는 곧 자신이 목적했던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리한 판단력에 다시금 연거푸 칭찬을 내 렸다.
달빛을 은은히 머금은 얼굴은 탄성을 절로 자아낼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누가 저 아리따운 모습을 보고 마흔 살 나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겠으며, 아줌마라 부르겠는가. 만일 그런 놈이 있다면 당장에 달려가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줄 참이었다.
문일기는 그녀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속에 묻은 울화와 분노를 그녀는 지금 옥소를 통해, 음률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중이었 다. 여기서 방해한다는 것은 매우 큰 실례였거니와, 화를 속에 간직한 사람을 자극하는 행동은 그에게도 좋지 못한 일이었다. 이럴 때는 그저 하염없이 지켜봐 주는 쪽이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음률이 점점 격렬해지고, 사나워졌다. 그도 처음 듣는 느낌의 음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도 함께 격동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음률은 곧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것을, 비록 음률에는 문외한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거센 폭풍을 만난 조각배를 연상시키는 사나움이 느껴지던 음률에 곧 폭풍이 가시고 잔잔한 물결 같은 안정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가 잦아들며 조용히 옥소를 입에서 떼었다. 홀린 듯이 그녀의 음률에 심취되어 있던 문일기는 그녀의 음률이 끝나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과연 음선(仙)의 맥(脈)을 잇는 사람답군!’
언제 들어도 감탄스러운 음률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고운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그런 얼굴을 보고 누가 40 대아줌마라고 함부로 얘기할 수 있겠는가. 주둥이가 뭉개지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입을 연 쪽은 문일기였다.
“음률이 흐트러지셨습니다. 무슨 마음 상하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렇게 거칠고 난폭하게 옥소를 부는 선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근 5년 만 의 볼거리 같습니다.”
“속이 시원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즐거웠나요? 물론 재미있었겠지요. 제 꼴이 보기 좋아 보이던가요? 눈요기를 마음껏 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녀가 독 오른 암코양이처럼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오늘 낮부터 그녀는 낯이 뜨거워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졌었다. 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을 찾아 옥소 를 불며 마음을 달래던 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 남자가 용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남들과 대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허허허, 이거 화가 나도 단단히 나신 모양입니다그려. 뭐 옥소도 때리거나 찌르는 용도로 쓰이지 않습니까!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속상해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요. 마음을 편히 가지고 화를 푸세요.”
문일기가 너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제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요! 어떻게 그런 참담한 꼴을 보고 저에게 참으라고 말하실 수가 있습니까?”
위로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자기딴에는 위로랍시고 하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던 천음선자 홍란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간 떨어지겠소이다.”
문일기가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형색을 보건대 그리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떨어질 테면 떨어져 버리라고 하죠. 그런 술에 쩔어 비실비실한 간 따윌 누가 신경 써 주기라도 한답니까?”
홍란이 독 오른 살모사처럼 표독하게 반박했다. 어지간히 기분이 상해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기분 수습하러 온 문사부에게는 참으로 첩첩산중 소림 사십 팔동관의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이거 너무 하시는군요! 그래도 제게는 소중한 장기(臟器)입니다. 그 비류연이라는 아이의 일에 대해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오?”
그녀에게서 무슨 소리를 듣든 간에 문일기는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야 하는 입장이었다.
“과하다니요? 오늘 하루 아침에 음문(門)의 명성(名聲)과 제 이름이 땅에 곤두박질쳤는데 제가 가만히 있게 생겼나요? 아아~, 음문 칠백 년의 역사가……. 부끄 러워 감히 조사님들의 얼굴을 어떻게 뵈올지…….”
그녀의 매끄러운 입으로부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왜 이렇게 기분이 최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었
다.
오늘 비류연 때문에 고매하기 그지없던 음문의 이름이 땅에 곤두박질쳤다고 굳게 믿고 있는 홍란의 귀에 문일기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 더욱 화가 치밀어올라 얼굴이 붉어지는 천음선자였다.
문일기의 위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녀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변화무쌍한 색조(色調)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일기 때문이 아니었다. 문일기의 능 글맞은 얼굴을 대하다 보니 다시 그날,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다시 한번 울화가 치밀어오르고 심화가 들끓어오르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음문 전체가 웃음거리가 된 듯 느껴지던 그날, 그때의 일을…! 백주 대낮에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버젓이 일어난 천인공노할 일 을!
“그래도 이기지 않았습니까! 잘했다고도 할 수 있죠. 진 것보다야 낫지요!”
사실 문일기는 비류연이 지든 이기든 별 상관없었다. 아니, 자신의 수업 시간에 보여 주었던 괘씸한 태도를 보면 져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관심은 비류연 쪽이 아니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40대의 반을 지난 지금도 아직 아내가 없었다.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노총각이었다. 그리고 홍란도 마흔이 넘었음에도 아직 남편이 없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노처녀인 것이다. 아마 사문의 영향이 큰 탓일 것이다.
노총각이 노처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자연의 당연한 섭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문일기가 이곳에 온 것 또한 자연의 섭리에 따른 행동이었다.
“전…, 전 절대로 저런 싸움법을 인정할 수 없어요!”
부르르 몸을 떨며 홍란이 말했다.
“차라리 깨끗하고 깔끔하게 졌으면 졌지 그런 싸움, 그런 승리, 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음문의 사조에게 들 낯이 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그런 볼썽사나운 싸움을 인정하느니 칼을 물고 자결하는 게, 아니면 자결시키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비류연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음문(門) 전체를 비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것은 그의 소속이, 그의 일맥(脈)이 음문이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 았다.
무림 일맥 중에 문도가 가장 적은 문파를 꼽으라면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데가 바로 음문(音門)이었다. 그렇지만 세력은 약한 반면, 그 어느 곳보다 고고하고, 자 부심이 강하며 유대감 또한 높은 곳이 음문이었다. 그런데 음문을 표방하는 악기를 들고 저런 싸움이라니. 차라리 옥소(玉簫)를 가지고 검(劍)처럼 휘둘렀으면 말이 라도 하질 않겠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자신의 얼굴만 걸려 있다고 해도 분하고 원통할 터에, 확대 해석해 보면 음문(門) 전체가 웃음거리와 조롱거리로 화(化)해 버린 그날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눈에 흙이 한 포대 들어가도 잊을 수 없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오늘 낮 이후, 그날은 사실 바로 오늘 낮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이 화끈거려 제대로 고개도 못 들 지경이었다.
문로(門路)와 비전(秘傳)을 잇는 직전 제자는 아니라고는 하나 자신의 손을 거쳐 간 제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원통했다.
그때 애초에 등장부터 조짐이 이상할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 이리도 자신을 괴롭힐 줄이야! 이제 와서 후 회해봤자 사후(死後) 약방문(藥房文)이고, 현실적으로도 말릴 방도가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으로 오묘해서 쉽사리 현실에 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후회막 심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매우 평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