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2화 – 비류연의 폭탄 선언
비류연의 폭탄 선언
속담이란?
교훈이나 풍자를 담은 짧은 어구로서 이 속에는 사소한 것도 재치있게 만들어 경고하는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시간의 관대함(?)에 관련된 속담이 하나 있다. (그런가?)
시간은 금(金)이다. 물론 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것은 일단 한 켠으로 제쳐두고, 시간의 귀중함과 드높은 가치를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시간의 귀중함을 무시하는 이가 많이 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은 연인처럼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금쪽 같은 가치와 불회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가 너무도 많음에 우리들은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런데…….
이와 전혀 관계없이(놀랍게도 정말로 눈곱 반 토막만큼도 관련이 없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시간의 무한연속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작단(朱雀團)에게 언약 된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결전의 날이 다가온다는 심한 압박감도, 매일 이어지는 뼈가 마모(摩耗)되고 살이 구워지는, 특훈(特訓)의 고통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주작단은 모두들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열혈(熱血)에 불타는 염도의, 뼈와 살이 멍들고 날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특훈으로 인해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이어진 이들이었다. 이제는 말을 안 해도 몸짓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지막지한데다가 인정 사정까지 없는 염도의 애도(愛刀) 홍염(紅焰)이 내뿜는 사나운 열기 아래에서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유일무 이한 방법이 바로 협동과 상부상조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낙엽 지는 가을이 어느덧 가고, 차가운 북풍이 내려옴과 함께 세상을 하얗게 덮는 초설이 내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낙목한천(落木寒天), 나뭇잎이 떨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초겨울에 들어섬과 동시에 결전의 날이 코 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에 반비례해서 염도의 특훈을 빙자 한 왕 다구리는 그 강도를 점점 더해 가고 있었다. 하나 이미 모루 위에서 수천 번의 망치질로 제련된 검처럼 단련될 대로 단련된 처지인 주작단원들이라 이젠 나름 대로 버틸 만 했다. 그나마 죽는다는 소리 안 나오는 게 내심 자랑스러웠다.
염도 특유의 화령신공(火靈神功) 때문인지, 검염기(劍炎氣) 탓인지, 아니면 고된 훈련 속에서 흘린 세 양동이는 족히 될 땀 때문인지, 훈련이 끝난 연무장엔 언제 나 후끈거리는 열기가 가득했다. 지금이 아무리 싸늘한 북풍이 부는 겨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수북히 쌓인 초설이 채 녹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지만, 이들의 연무장 주위만은 그 어디에도 눈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수련에 정진했다는 반증이리라. 염도가 얼마나 이들을 닦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고되고 엄한 특별 수련 후, 땀에 절은 몸과 욱신거리는 삭신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에게 비류연의 느닷없는 일방적 통고는 그들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 다.
“허걱!”
“예?”
“그…그게 정말입니까?”
주작단은 너나 할 것없이 모두들 사이좋게 도란도란 자신들의 청각 기능에 장애가 있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가는귀가 먹었니?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두 번 말하기 싫은지 비류연의 말투에는 다분히 짜증기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게 진위 여부가 무척 의심스러우니까 게 문제잖습니까!”
남궁상이 주작단의 대표로서 그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허허! 너의 믿음이 부족하구나. 내가 너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거늘…….”
비류연은 낡고닳은 산전수전(山戰水戰), 산악전(山嶽戰), 수중전(水中戰) 다 겪은 강호 노고수처럼 말했다.
주작단의 지금 심정도 이해해 줘야 한다.
단체전!
말이 좋아 단체전이지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패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비류연의 일방적 통고는 다음과 같았다.
주작단과 청룡단은 양측 담당 노사의 합의에 따라 32명이 남녀를 불문하고 단체로 싸운다는 것이 그 통고의 주요 골자였다. 어렵게 말하면 단체전, 쉽게 말하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패싸움인 것이다.
“저…정말 염도 노사님께서 그런 사항에 합의하셨단 말입니까?”
믿고 싶지 않았다. 남궁상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되물어 보았다. 하나, 그의 바람은 너무나 간단하게 비류연에게 버림받고 말았 다.
“왜 간단하고 편리해서 좋잖아? 귀찮게시리 열여섯 번씩이나 싸우지 않고 한 번에 뚝딱 끝낸다는 데 얼마나 좋아.”
16(十六) 대(對) 16(十六)!
단지 귀찮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단체전으로 몰고 갔다는 듯한 투의 말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서.(뚜껑을 열어 뒷배경을 보면 그게 사실이긴 하지 만. …)
“하지만 그러면 모양이 나지 않지 않습니까! 단체전이라니요…….”
우물쭈물 말을 뒤로 빼는 남궁상에게로 비류연의 가차없는 호통이 떨어졌다.
“어리석은 것! 너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겉멋만 따질래? 중요한 건 겉멋이 아니라 실속이야 실속! 우리는 열여섯 번씩이나 싸우지 않는다. 간단하게 한 판으로 끝 장낸다. 왜냐? 우린 구차함과 번거로움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기호 취향상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이는 비류연 단 한 사람뿐이었다.
사실 단체와 단체가 비무를 벌인다 해도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 일일이 붙어가며, 승패에 따라 숫자놀음을 하는 것이 관례이자 정석이자 ‘상식’이었다. 한데, 느닷 없이 선례조차 없는 단체전이라니…….
한 마디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그런 날벼락 같은 소리를 저렇듯 아무 죄책감 없이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내뱉다니…….
언제나 그렇지만 비류연의 무신경에는 절로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러니 모두들 염도를 뒷배경으로 세운 비류연의 말에 경기 든 표정을 지을 수밖에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지 않겠는가.
물론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믿고 싶지 않다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얼마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주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