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22화 – 적웅채, 거덜날 뻔하다
적웅채, 거덜날 뻔하다
녹림칠이십채 소속의
거대 산채는 꽤나 큰 집단을 상대로 한
비폭력 협상 주의식 영업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이 정도 큰 산채에 덤비는 바보는 없었다.
통행세를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게다가 이런 거대 강력 산채랑 정면으로 충돌하다가는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표물 또한 하나 둘 정도 이상은 손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신용 하락, 배상금 지급, 일감 하락, 등등 자칫 잘못하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고 쪽박찰 수도 있는 일!
그런 위험한 모험을 할 만큼 수장해는 혈기왕성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수장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적웅채주 막적의 목줄 위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놀리며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저 치는 도대체 어떤 괴물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번엔 친구라는 작자가 부채주까 지 장난치듯 붙잡아 왔다.
그러나 수장해는 절대 기쁘지 않았다.
“나, 나까지 잡은 이유가 뭐, 뭐요?”
순식간에 인질 신세가 된 방천이 당황해서 물었다.
“응? 당연히 인질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가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지. 인질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비류연의 대꾸에 방천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채주와 부채주가 잡힌 이상 적웅채는 머리가 날아간 곰 꼴이었다.
“어… 얼마를 원하시오?”
“흐응……, 요구한 만큼 다 들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히죽 웃는 미소가 왠지 불길했다.
‘서…설마 자기네도 사람인데 양심이 있겠지!’
그동안 꽤나 양심적인 영업을 해 왔다고 자처하는 방천의 생각이었다.
“불가능하지 않은 액수라면 들어 주겠소.”
천무학관 출신임을 안 이상 애들이라 해도 반말짓꺼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나도 양심적으로 말하지. 가진 것의반만 내놔! 나머진 산채 운영하는 데 써야 할 테니깐 말이야.”
“아… 알았소! 모두들 주머니를 풀어라!”
방천이 명령하자 모두들 자신들이 차고 있는 주머니를 끌르려는 순간 비류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라? 지금 뭐하는 거지?”
“보시다시피 가진 것의 반을 내놓으려 주머니를 풀고 있지 않습니까!”
알면서 뭐하러 물어 보냐는 투였다. 그러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말했다.
“아니, 제정신이야? 누가 지금 가진 것의 반을 내놓으래? 가서 산채 창고에 들어 있는 재산의 반을 가져오란 말이야. 이렇게 대화가 안 통해서야……!”
“헉!”
비류연의 이 한 마디에 적아를 불문하고 모두들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이건 완전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그…그런 과한 요구가 어디 있소! 그건 불가(不可)하오.”
방천이 단호히 거절했다.
“호오? 그으래?”
순간 막적의 목줄을 겨누고 있던 칼이 시퍼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목을 무저항 상태로 내맡기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방천까지 전율을 느낄 만한 예기 였다.
“도…도강(刀剛)!”
과연 천무학관의 명성은 명불허전이었다. 섬뜩해질 만큼 시퍼런 도기는 위협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못준다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죠? 네? 아저씨?”
비류연이 시퍼런 도기를 내뿜는 칼을 장난처럼 만지작거리며 막적에게 물었다. 막적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이젠 의식하든 의식하 지 않든 장난으로 한 번 치면 당장에 저승행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도기를 머금은 칼과 그렇지 않은 칼의 위력은 천지차이기 때문이다.
“한 번만 봐 주시오. 저희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방천이 효룡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산적한테 왜 체면이 필요해? 쓸 데가 어디 있다고?”
“고…공자! 한 번만 참아 주시오!”
질린 얼굴을 한 수장해까지 나서서 비류연을 말렸다. 말린다고 들을 녀석은 아니지만 일단 시도라도 해 봐야 했다.
“왜 그래요? 아저씨?”
아…아저씨라니……!
기분은 와락 나빠졌지만 지금은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 중양표국과 적웅채는 원수지간이 되는 것이다.
다음 번엔 어느 한쪽의 기반이 완전 박살날 때까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아닙니까. 강호의 관행을 함부로 어기면 별로 좋을 게 없지요.”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설득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런 게 인과응보 아니겠습니까.”
전혀 상관없다는 비류연의 말투에 수장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러다간 훗날 자신들의 중양표국이 대신 산적들로부터 인과응보를 받아야 될 판이었다. ‘제기랄!’
“비 공자, 저들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이 수모의 얼굴과 중양표국을 봐서라도 한 번만, 딱 한 번만 선처를 베풀어 주시오. 내 돌아가서 사례하리다.” “사례라구요?”
사례라는 수장해의 말에 비류연의 귀가 쫑긋했다. 비류연이 흥미를 나타내자 수장해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그를 얼르기 시작했다.
“그렇소. 내 섭섭지 않게 사례하리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저들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그럴까요? 으음…….?
일이 이렇게 되자 비류연도 조금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고민을 지켜보는 수장해와 막적은 초조함으로 인해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흐흠! 수 지국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할 수 없죠. 그렇다면 앞으로 이곳에서 중양표국을 건드리는 일은 없겠죠? 오늘 이곳 적웅채가 무사한 건 다 수 지국주 의 노력 때문이니깐요.”
“무, 물론입니다!”
“맹세할 수 있나요?”
“매, 맹세합니다.”
“그럼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 받도록 하지요. 교훈비라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교훈 학습비요.”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막적이 얼른 외쳤다. 비류연의 마음이 언제 또다시 바뀔지 모를 노릇이기 때문이다.
“모두 주머니를 풀어 이분 공자께 가져다 드려라!”
막적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적웅채 산적들은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비류연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 남을 털어 본 적은 셀 수 없이 많아도 이렇게 탈탈 털려 보긴 처 음이었다. 수거한 돈주머니를 모두 챙긴 비류연 일행은 그들의 곁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이날 이후 적웅채는 거덜난 돈을 만회하기 위해 한 달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아아! 내 운세에 마(魔)가 끼었단 말인가? 아직 내 목이 붙어 있긴 붙어 있는 건가?”
강창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목을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한 번 크게 십겁을 한 것은 수로에서의 암습으로 충분했다. 그와 비슷한 일을 두 번이나 겪게 한다는 것은 하늘의 공평성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한 번쯤 문제를 제기해 봄직한 일이다. 지금 중양표국 소속 대표두 강창은 하늘의 공평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불신에 빠져 있었다.
배에서 내려 무한(武漢)에 들렀을 때, 소문난 점쟁이한테서 산 부적도 별로 효력이 없는 듯했다. 모든 것은 현 상황이 말해 주고 있다.
도둑들에게서 건네 받은 돈보따리가 비류연이라 불리는 청년에게 넘겨질 때 강창은 암담함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앞으로의 호북표행길이 왠지 막막해져 왔기 때문이다.
“내 이 사기꾼 점쟁이 자식을 뭐?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운수대통하고 모든 위험이 나를 지나쳐 간다고? 살아서 다시 만나기만 해 봐라!다리몽둥이를 사이좋게 분질러 주고, 두 번 다시 거짓부렁 못하도록 주둥아리를 뭉개주마!”
대표두 강창은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이를 갈며 하늘에 대고 외쳤다.
“정말 이 생활도 이제는 때려치워야 할지도…….”
이렇게 수중전을 치러 봤었으니, 이제는 산악전도 한 번쯤 치루어 보라는 하늘의 배려라면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이것은 너무 쓸데없는 참견이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눈 앞에 어른거려 차마 실행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이제 이틀 남았다.”
하루 빨리 무당산에 도착해 이들과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제발 앞으로의 이틀만은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게 강창의 소박한 소원이었다. 강창은 무한에서 지국주와 함께 구한 사선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