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27화 – 기연 찾아 삼만리
기연 찾아 삼만리
“과연 이 아래에 무엇이 있을까?”
안개가 잔뜩 낀 깎아지른 듯한
절애(絶崖)의 바위 밑을
바라보며 비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과연 기연(奇緣)이란 게 존재할까?”
구대 문파의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는 무당파(武當派)쯤 되는 초 거대 유서 과다한 문파쯤 되면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숨겨진 비보 이야기나 숨겨놓은 무공 비 급 같은 이야기가 열 손가락은 넘게 전해 내려오게 마련이다. 집계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마흔 가지는 족히 될 듯 싶다.
소림사(少林寺)만 놓고 보더라도 인연이 닿으면 한 몫 잡고 덩달아 고수까지 된다는 내용의 전승(傳承)만도 서른 가지가 넘었다. 게다가 그 외의 소소한 전승까지 합치면 기백을 헤아렸다.
사실 이런 유서깊은 문파들에게는 악취미를 가진 사조님들이 어딘가에 몰래몰래 꼭꼭 숨겨두었다는 기예(技藝)나 보검, 혹은 무공 비급 이야기가 별달리 대수로 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완전히 없다고, 순 날거짓말로 만들기엔 그동안의 전적이 있는 관계로 그러지 못할 따름이다. 신기하게도 꼭 50년을 주기로 한 명 정도는 인연이 닿아 선대의 기연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없다고는 못하고, 널려져 있다고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인연자에게만 인연이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준호만 하더라도 엉겁결에 얼렁뚱땅 기연을 하나 꿰차지 않았던가. 물론 그 기연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준호도 찾았는데, 나라고 못찾을 이유는 없지!”
역시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보물은 찾아야 맛이라 했다. 무당산으로 오는 길에 현운으로부터 무당산 보물 관련 전승에 관해 충분히 전해 듣고 온 터였다. 보물을 벼르고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참 엉뚱하고, 어찌 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시도였다.
‘무공 비급이라도 팔면 큰 돈이 되겠지!’
비류연이 기연을 찾으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절정 고수가 되기 위한 전대 고수의 심득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팔아서 돈이 될 만한 보 물이었다. 물론 무공 비급도 팔면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될 수 있기 때문에 찾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남이 남긴 무공비급의 내용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비류연다운 생각이었다. 사행심(射倖心)을 조장하는 비보와 무공 비급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처분해야만 한 다는 사명감으로 비류연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역시 현재 무당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뽑으라면 자소봉의 태극동(太極洞)과 운대봉의 태극절애(太極絶崖)에 관한 소문에 가까운 전설을 들 수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뭔가 숨겨져 있을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지금 비류연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태극절애라 불리우는 절벽의 가장자리였다.
자소봉을 둘러싼 다섯 봉우리 중 하나인 운대봉(雲臺峯)에 위치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이 웅장하고 험난한 모습과 뭔가 하나쯤은 감추어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숨기기 가장 좋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인의 발길이 쉽사리 허용되는 곳은 아니었다.
“그럼 가 볼까?”
단단히 결심을 굳힌 비류연은 깎아지른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내 비류연의 신형이 운무(雲霧) 속으로 사라졌다.
겁대가리는 항상 상실되어 있는 비류연이었다.
한 번 결심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켜 버리는 이가 바로 비류연이었다. 그리고 한 번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뒤를 돌아보거나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헉! 저 녀석 삶에 회의를 느꼈나? 느닷없이 투신 자살이라니?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멀리서 비류연을 지켜보던 암혼비영대(暗魂飛影隊) 소속 암살대(暗) 암영(暗) 3 조(組) 조장(長) 흑살도(黑殺刀) 흑상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자살할 놈처럼 보이진 않는데요?”
부하 녀석 한 명이 대답했다.
“그렇지?”
자살할 놈 치고는 행동이 너무 당당했다.
“쫓아가자!”
“어떻게요?”
부하가 반문했다.
“에라이!”
“딱!”
흑상은 자신에게 불쾌한 질문을 한 부하 녀석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갈겼다. 선임자가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은 지대한 불충(不忠)이었다. 그런 놈은 맞아도…….
“잔말 말고 따라와!”
흑상은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가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게 뭐야?”
의외로 태극절애 아래는 협곡이 아니라 그저 평범해 보이는 평지였다. 곳곳에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나 있지만, 이곳이 평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헛탕인가?’
절벽을 타고 내려오며 살펴봤지만 중간 중간에 있는 동혈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사실 겨우 한 번의 탐색을 가지고 기연 얻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염 치없는 짓이었다.
절벽 한 번 뛰어내린 것으로 단번에 기연을 얻을 만큼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이때 가당치도 않은 이유에도 막심하고 비류연의 코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흘러 들었다. 자신의 시장기를 돋구는 것을 보니 분명 인공적인 사람의 요 리 냄새가 분명했다.
“어라? 무슨 냄새지?”
비류연의 후각이 구수한 냄새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이곳에도 사람은 있었다.
훨훨 타오르는 장작불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지글지글 통째로 굽고 있는 박력있게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였다.
불꽃 속에서 지글거리며 돌아가는 사슴 고기가 아까부터 비류연의 후각을 맹렬히 자극하던 구수한 냄새의 출처였다.
어랏? 도사(道士)?”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노인의 복장은 상하 좌우 어디를 뜯어봐도 도복(道服)이 분명했다.
고기를 통째로 굽는 도사라니……. 참으로 독특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원래 도사가 고기를 굽든, 중이 계집질을 하든 자신에게 이익이 생기지 않는 일에는 관 여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노도인(老道人)의 앞에는 한때 사슴 종으로 분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훈제 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런데 열심히 타오르는 불꽃 위에서 지글지글 익 어가고 있는 산멧돼지는 사지가 멀쩡하고, 소실된 살점도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비류연은 곧, 저 노도인이(과연 도사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매우 의문스럽지만)한 탕을 끝내고 두 탕째를 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컥.”
노도인 옆으로 다가가던 비류연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성을 터뜨렸다.
“어디 아픈가?”
이때까지 열심히 화식(火食) 요리 중이라 세속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던 노도인이 고개를 들어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예……! 갑자기 위장(胃腸)이 밥 달라고 소리를 치는군요.”
“심장(心腸)이 아니고 위장(胃腸)인가? 별난 청년이구먼.”
“지극히 정상적인 청년이죠.”
비류연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근 슬쩍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코로 향긋한 냄새가 흘러들어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행복감이 솟아나게 만들 었다.
“이야! 솜씨가 상당하시네요! 이 정도로 알맞게 화력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죠. 특히 사슴 고기는 구울 때 노린내가 많이 나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데 말이죠. 풍겨 나오는 향기로 유추해 보건대적당히 들어간 양념도 양이 정확하구요! 훌륭하십니다.”
노도인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새삼스럽다는 듯이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자네 보는 눈이 있군!”
노도사의 진심어린 칭찬이었다. 비류연이 노도사의 옆에 쌓인 뼈무덤을 보며 한 마디했다.
“이야! 노인네가 위장도 크시네요. 하나가 모자라 두 개씩이나! 급체할까 봐 심려(心慮)되는군요.”
걱정이 풀풀 날리는 은근한 어조였다. 이제 그만 드시고 건장한 청년에게 먹을 걸 넘기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한 마디였다.
“허허허!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한다는 걸 자네 혹시 아나? 자네가 이 노도(老道)를 생각하는 마음씨는 갸륵하나 심려무용(心慮無用)일세!”
비류연의 마음을 눈치챈 노도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한 번 먹어 볼 테냐? 고기는 통째로 구워 식기 전에 먹어야 제맛이지!”
마침 배가 고프던 차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공짜라는데, 무엇을 사양하리요! 비류연은 냉큼 앉은 채로 불가로 더욱 다가갔다.
“이야! 할아버지가 뭘 좀 아시는 군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님을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할아버진 소위 말하는 상습범이 분명하죠?” 노도사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자만이 낼 수 있는 그런 류의 웃음이었다.
“허허허허! 그래 맞다, 맞아. 노도(老道)야 사문에서도 알아주는 말코 도사지! 이상하냐?”
비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훌륭한 취미세요. 그런데 술이 없는 게 좀 아쉽군요. 미처 준비를 못하셨나 보죠?”
비류연의 날카로운 지적에 노도사는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고기를 뜯을 때 곁에 술이 없다면 그건 죄악일세! 자네 지금 이 늙은이가 그런 대죄를 지었다고 모함하고 싶은 건가?”
술도 물론 완비되어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상당히 투철한 도인이었다.
“아참 그리고, 가죽과 녹용과 간은요? 어떻게 했죠? 설마 버리거나 내팽겨(?)쳐 두는 것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데 말이죠.”
비류연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천자는 감탄성을 토했다.
“자네 빈틈이 없구만. 훌륭해, 아주 훌륭해!”
뭐가 훌륭한진 잘 모르겠지만 훌륭하다는 말을 반복한 노도사는 손가락으로 한 켠에 놓여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자네는 저 술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나?”
“흐흠……, 가죽과 기타 용품을 판 대가로 저걸 가져오셨다 그 말씀이죠?”
비류연은 영악하게도 금방 알아들었다.
“맞네 맞아! 이 나이쯤 되면 밑에 애들한테 술 사먹게 돈 달라고 조를 수가 없더군. 체면이 있지 명색이 존장 신분이라서 말이야……. 밑에 애들이 알았다가는 학 을 뗄 걸세!”
참으로 애석하다는 투로 노도사가 말했다. 대무당파의 존장이 공금(公金)을 술값 명목으로 쓴다는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노도인은 이미 이런 자급 자족의 방법을 수십 년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도사 신분이구요! 하지만 꽤나 훌륭한 솜씨인 걸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게 눈에 보이는군요.”
“허허허! 눈치챘는가? 도둑질도 하다 보면 늘게 마련이라네. 가죽은 저쪽에다 벗겨놓고 고이 모셔 두었다네.”
노도인는 부끄러운 기색은 전혀 없고, 가슴을 활짝 펴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듯한 기세였다. 마주 대하고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비류연이니깐 이런 일에 무감각할 수 있었다.
비류연은 어떤 일이든 함부로 선악(善惡)을 판단하는 법이 없었다. 다만 자신 앞에 장애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상관하지 않고 소멸시켜 버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