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28화 –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노도인의 정체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사슴 통구이가 장작불 위에서
지글지글 돌아가고 있었다.
연기와 함께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가 숲 주위로 가득 퍼졌다.
옆에서 이제나 저제나 고기 익기만을 기다리는 비류연의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순간 비류연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비류연이 노도사에게 신중하게 운을 뗐다.
“이제 다 익은 것 같지 않나요?”
“역시 자네, 보는 눈이 있구만. 자네 말대로 이제 다 익은 것 같네!슬슬 먹도록 할까?”
노도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류연의 손이 통구이를 향해 뻗어갔다. 아직 꺼지지도 않은 장작불 위인데도 비류연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일렁이는 불꽃이 손을 침범하는데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자네 안 뜨겁나?”
멀쩡한 사람이 아무런 방비 없이 불 속에다 손을 집어넣으니 노도인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뜨거워야 정상이었다. 아니, 살갗이 타는 화상을 입어야 정상이었다.
“물론이죠! 겨우 이 정도로 뜨거움을 느껴서야 말이 안 되죠.”
비류연의 반응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뒷다리를 부욱 뜯어냈다. 비류연의 말대로 사슴 통구이의 속은 골고루 노릇노릇 제대로 익어있었다.
“이야, 참 맛있어 보이는데요. 실한 놈으로 잡으셨네요!”
“잠깐!”
비류연이 다 익은 사슴 뒷다리 한 짝을 뜯어 막 입에 넣으려는 찰나, 노도사의 손이 이를 제지했다.
“왜요?”
비류연의 어리둥절한 반문에 노도사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원래 이 고기를 먹기 위해선 한 가지 규칙이 있다네!”
“호오, 그래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규칙이란 걸 꼭 알아야 되나요?”
“자네, 확실히 배가 고프긴 고픈 모양이군?”
“예리한 통찰력에 삼가 경의를 표해 드리죠. 이제 먹어도 되나요? ”
성급하게 뜯은 사슴 뒷다리를 손에 든 채 비류연이 물었다. 이미 비류연의 위장은 요동치며 먹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는, 노 릇노릇 잘 구워진 사슴 통구이 뒷다리를 다시 한 번 저지하며 노도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안 되네. 젊은 친구가 기억력이 나쁘군!”
그제야 다시 기억됐다는 듯 비류연은 잠시 자신의 입과, 미각이 과도하게 발달된 혀와 생긴 것답지 않게 소장량이 많은 위를 진정시키며 노도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재촉하는 의미가 강했다.
“규칙이 뭐죠?”
비류연이 물었다.
“먼저 비밀 엄수가 최우선 규칙일세! 이건 모든 규칙에 우선하지. 본산의 아이들은 내가 이러는 걸 무척 싫어하지. 거기엔 나의 이런 풍류를 이해할 수 있는 이해 력을 가진 이가 무척이나 드물거든!”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니깐 고자질하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군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 않나?”
“진실은 언제나 냉정한 법이죠.”
맞는 말이었다.
“제가 만일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나요?”
문득 궁금증이 인 비류연이 노도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것 같나?”
노도사의 말이 은근해졌다. 노인은 도사답지 않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시 자네 이런 생각해 본 적 없나? 지금 자신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엿보고 말았다는 사실 말일세!”
넌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엿보고야 말았다, 그런 이야기였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도 하실 건가요?“
태연한 어조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어허, 자네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살인멸구라니…
“아직 세상에 남아 할 일이 많은 관계로 사양하지요.”
비류연은 노도사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겸손해할 것 없네!”
뭐, 원한다면 고려해 줄 수도 있네! 돌이켜보니 무척이나 깔끔하고 산뜻한 방법인 듯도 하군.”
노도인은 부탁만 하면 언제든지 흔쾌히 들어 주겠다는 표정이었다.
“겉으로는 도사인 척하면서, 사실은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던 거군요, 과연! 걱정마세요. 비밀은 절대로 지킬 테니깐요!”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다 멈춘 뒷다리를 다시 입으로 밀어넣고 싶은 비류연이었다. 고기 한 짝 뜯는 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흐흐! 그럼 우린 이제 공범인 걸세.”
노도사의 음흉한 말에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더 기다릴 것 없다는 듯이 고기를 뜯기 시작하는 비류연을 바라보며 노도인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재미있는 인연을 만난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군! 어디 그럼!’
즐거움이 늘어나니 식욕이 더욱 왕성해졌다.
“와구와구! 쩝쩝! 우걱우걱!”
참으로 노인네답지 않은 맹렬한 식욕에 비류연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식욕만으로 따지면 자신의 사부와 경쟁 상대가 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즉, 식욕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이야기였다. 도저히 도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상 식욕이었다.
하지만 비류연이 보기에 노도사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당당하고 한 점의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맹렬히 통구이를 뜯고 있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비류연의 시선을 인식했는지, 잠시 절삭 작용에 여념없던 입을 쉬며 한 마디했다.
“허허! 도사가 육식(肉食)을 즐기는 모습이 이상한가?”
“원래 이상하게 느껴야 정상 아닌가요?”
그 정도 상식은 비류연도 알고 있었다.
“하나도 이상해할 필요없네. 이런 사소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죄의식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지! 노도는 만년에 이르러서야 이 진리를 깨달았다네. 무척이나 오래 걸린 셈이지.
노도인은 자신의 의견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목소리로 진리를 선언하듯 말했다.
“이야! 뭘 좀 아시는 분이군요. 어디 사는 누구랑은 격이 틀리시네요, 할아버지!”
공감이 간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비난이나 혐오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무진자보다는 눈 앞의 노도사에게 훨씬 더 호감이 가는 비류연이었다.
노도사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이런 괴행은 자신의 제자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아니었던가. 노도인의 마음은 더욱 더 유쾌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다리 한 짝 더 뜯을까?”
“좋죠. “
비류연은 사양하지 않았다.
점점 더 노릇노릇 익어가는 사슴 통구이에 붙은 살점들이 두 노소(老)의 무지막지하고, 인정사정없는 손길과 식욕(食慾)에 참담하게 겁탈당했다. 곧이어 뜯겨 져 나간 살점들 사이로 앙상한 뼈들이 숭숭 드러났고, 야들야들한 살들이 떨어져나가 이제는 쓸모가 없는 뼈다귀만이 모닥불 옆에 수북히 쌓여 갔다.
“에이…… 그럼 기인(奇人)은 아니에요?”
사슴 통구이를 거의 다 해치운 비류연이 노도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예상했던 은거 고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번도 자신을 기인 내지는 은거 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노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선에서 은퇴하기는 했지만 아직 기인이라 불리기엔 무리가 있지!”
“쩝! 그런가요? 제가 잘못 짚었군요.”
실망했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심 기대했던 행방불명 처리된 은거 고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뭔가 한 건 할 줄 알았던 비류연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런 비류연의 태도에 노도사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놈이 열심히 먹을 것 다 처먹고 한다는 말이 겨우 ‘은거 기인도 아닌데 뭣 하러 이런 곳에 있어요?”라는 식의 말이었으니 그가 내심 얼마나 얼떨떨했겠는가!
“그런데 젊은이는 이곳에 어인 일인가?”
이곳은 외인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비류연이 걸어온 방향을 보니 아무런 길도 없는 절애 한가운데였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한 가지.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는 이야기!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비류연이란 이 아이는 자신이 은연중에 풍기는 무형지기(無形之氣) 앞에서도 태연자약하기만 해 그를 더욱 놀라게 했다. 이런 놀라움은 10년 전 청흔이란 아이를 제자로 거두어 가르친 이후 그의 성취에 크게 놀란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저요? 저야 순수한 마음으로 수수하게 보물찾기 하러 왔죠. 이곳 태극절애에 대한 전설만도 무당파에 여섯 건이나 되더라구요. 그 정도면 뭔가 하나쯤 있지 않을 까해서 찾아보려고 왔는데 막상 와 보니 실망이네요.”
“허허! 참 어이가 없구나, 그 말을 실제로 믿었더란 말인가? 우리 무당에서조차 이제는 믿지 않는 것을..
혀를 차며 황당함을 감추지 않는 노도사의 반응을 본 비류연이 되물었다.
“그건 어째서죠? 할아버지?”
하…할아버지!
점입가경이라더니……. 80년만에 다시 들어 보는 호칭이었다. 100년 전에 있은 천겁혈세 이후 살아남아 무당팔검(武當八劍)이 된 후 자신에게 그 누구도 할아버 지라 부른 이는 없었다.
언제나 모두들 그 앞에 서면 최대한 공손하게, 최상의 예의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의 사제 현학진인은 백 살이 넘은 몸으로 팔팔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는 은거한 채 자신의 검경을 넓히고 새로운 검법을 만들기 위해 수련 중이었던 것이다.
“이미 이곳에서 발견된 전승만 해도 세 가지라네. 그 크고 작음을 떠나 세 가지나 한 곳에서 나왔으니 이제 더 이상은 나올 게 없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기 때문이 지.”
“우쒸! 누가 이미 다 거덜내 갔단 말이죠! 좀 더 일찍 오지 못한 게 아쉽군요.”
뭣 하나라도 건져 가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지 비류연의 입이 댓자(1자 : 30.3cm)나 튀어 나왔다.
“어? 근데 할아버진 누구세요?”
“나?”
먹을 걸 다 먹고 나니 이제야 사람에게 관심이 쏠리는 비류연이었다.
“제자가 누구라구요?”
비류연이 반문했다.
“아! 청흔이라고, 그런 녀석이 있다네. 늘그막에 얻은 신통할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지. 문제는 이 사부의 음주가무를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게 한 가지 큰 흠이랄 까……, 나머지 면에선 완벽하지. 누구나 탐낼 정도로.”
누구보다 뛰어났던 제자를 머리 속에 떠올리자 노도사의 마음이 절로 흐뭇해졌다.
“어? 제자가 청흔이라구요?”
“호오? 아느냐?”
“물론이죠. 이번에 무당산에 같이 왔는 걸요.”
“아니? 그 아이가 무당산에는 무슨 일로 왔단 말이냐?”
그가 반문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그동안 세상과 담 쌓고 수련에만 전념한 터라 소식에 어두웠던 것이다. 비류연으로부터 자 신의 제자 청흔이 합숙 훈련에 동행하여 무당산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노도인은 감탄을 터뜨렸다.
“허허,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로구나.”
완전무결한 초(招) 벽창호 모용휘에게 지지 않을 만큼 완벽함을 자랑하는(그나마 모용휘, 백무영보다는 양호하지만) 삼절검(三絶劍) 청흔의 사부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도사는 자유분방했다.
도가 지날칠 정도로!
“도저히 그 청흔의 사부님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군요.?”
“허허허! 그래서 제자한테 잔소리 많이 들었지. 그래도 그놈은 융통성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재능만큼은 융통성이 없었어.”
다른 건 몰라도 규율(規律)에 있어서만은 누구보다 철저했던 제자를 떠올리며 노도사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나머지 한 놈보다는 그나마 양호하다고 하던데요!”
“그러냐?”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노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도인은 바로 삼절검 청흔의 사부이자 천무학관 천자조 담당사부 옥현자(玉) 현학진인의 사형이며 무당팔검의 제일검(第一劍)이며,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 이라는 놀라운 신분을 지니고 있는 옥허자(玉子) 현검진인(劍眞人)이었다.
현(玄)자배는 무당팔검에 든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명예 항렬이었다. 때문에 그의 도호는 옥허자이기도 하지만 현검자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누가 지금 현검자의 모습을 보고 그 이름 드높은 무당 제일검 현검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요구다.
50년 전 한 가지 진리를 깨달은 이후 현검자는 엄격한 규율을 만들고, 스스로 규율의 노예가 되어 정체된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를 속박하는 문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규율에 너무 자신을 혹사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규율에 따라 살아갔다. 젊었을 당시 그에게 있어 사문의 규율은 하늘이요, 절대 진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검에 매진한 순간 현검진인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온갖 것에 얽매이는 이런 식으로는 절대 검(劍)이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일찌감치 답답한 장문인직을 때려치우고, 은거한 채 검로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명예보다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아직 그 목표를 이루지 못 한 이상 가야 할 길은 멀었다.
그러기를 40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키니 그것이 바로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