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29화 – 과거, 현재에 나타나다

비뢰도 6권 29화 – 과거, 현재에 나타나다

과거, 현재에 나타나다

“자, 밥을 먹었으니 이제 식후 운동이나 할까! 이보게, 젊은이?”

“네? 무슨 일이시죠?”

“노도가 얼마 전 명상을 하다

한 가지 검리를 깨달았다네.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볼 텐가?” “공짜인가요?”

가장 먼저 금전적인 대가 지불 여부에 대해 확인부터 하는 것이 비류연다웠다.

“좋아! 선심 쓰마!”

현검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돈도 받을 수 있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공짜로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좋아요!”

비류연이 승낙했다.왠지 손해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현검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이, 자넨 검객(劍客)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넓은 공터로 걸어가며 현검자가 물었다.

“글쎄요?”

현검자의 느닷없는 질문은 부지불식간에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비류연의 대답은 기대도 안 했으니, 머리 쥐어짜지 말라는 태도로 그는 말을 이었다. “검객이란 말일세, 검에 목숨을 건 사람이지. 한 마디로 검에 미치지 않은 자는 검객이라 할 수 없네. 난 단 하나의 초식을 파해하기 위해 평생을 걸었다네. 천겁령 의 발호를 막는 것조차도 이 일에 비하면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라네!”

현검자의 눈이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의 전신에서 그물처럼 삼엄한 기백이 일어나는 것을 비류연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스르릉!”

그의 검이 서서히 검집에서 나와 그의 손에 머물렀다. 검을 들기 전과 검을 든 후의 그 모습은 천양지차였다.

검을 들기 전의 그는 마치 옆집 할아버지 같은 수수한 인상이었는데 반해, 지금 검을 들고 있는 그의 기도(氣道)는 태산 준봉을 연상시킬 만큼 위엄이 넘쳤다. 현검자는 이미 검 안에 자연을 담아내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스르륵!”

태산처럼 장중하던 그의 검이 서서히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더니, 이내 빛무리로 변해 하늘을 수 놓았다.

삼정태극검혜(三情太極劍慧) 극(極) 천망(天網).

“지이이잉!”

촘촘한 황금빛의 그물이 화려하게 창공을 수놓았다. 눈이 부실 만큼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었다. 매우 세밀하고 촘촘한 검기의 그물이었다.

변화는 한 순간에 나타났다 환상처럼 사라졌다.

빛무리 같은 검망(劍網)을 펼쳐 하늘을 뒤덮었던 현검자가 이내 검을 거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짝짝짝 와아아아아!!”

비류연은 박수로써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높은 무공의 경지를 견식한 사람으로서의 경탄은 어려있지 않았다. 그는 별달리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이렇게 몸을 풀어 보는 게 얼마만인가! 가끔 이렇게 몸풀이를 한 바탕해 주는 것도 나름대로 기분이 상쾌하구나.”

“전혀 도사답지 않은 발언이네요, 할아버지.”

“허허허허! 도사가 하는 말이 어디 정해져 있다는 말이더냐.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진실 그대로를 말로 전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도사(道士)지. 도(道)는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들의 곁에 있지.”

“말을 비비꼬시는 걸 보니 도사는 도사인 모양이네요.”

그제서야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괴상한 할아버지가 도사임을 납득하는 비류연이었다.

“그래, 어땠나?”

현검자가 감상을 물었다.

“글쎄요……. 너무 촘촘하다 보니 검기(劍氣)의 가닥가닥마다 실린 힘과 속도가 죽어 버린 것 같던데요. 너무 변화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였어요. 변화도 물론 중 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힘과 변화가 중요하죠. 아무리 성긴 그물이라 해도 그 재료가 약하면 금방 뚫려 버리지 않을까요?”

머엉!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비류연의 지적에 현검자는 입을 쩍 벌렸다. 마치 둔기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는 넋나간 얼굴을 지었다.

“이, 이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설마 자신의 검기(劍技)에서 미진한 점을 이토록 정확하게 집어낼 줄은 미처 몰랐던 탓이리라.

“설마 이 아이가 나랑 비슷한 경지에라도 도달했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길! 저 노괴물은 도대체 누구야?”

첩첩산중(疊疊山中)! 산 넘어 산이란 말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인 모양이다. 암혼비영대(暗魂飛影隊) 암영(暗影) 3조(組) 조장 흑살도 흑상은 사양하지 않고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암룡대(暗龍隊)의 실패! 그것도 물에서의 실패는 암혼비영대에 있어 오점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목표를 제거해 암혼비영대의 위신을 세워야 했다. 보다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무리들과 떨어지길 기다리기까지 하지 않았던 가. 실수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저 노인네는 도대체 누구인가? 입고 있는 옷은 닳았지만 확실히 도사 복장인 것으로 보아 무당파 사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 보여 준 그 거짓말 같은 무시무시하게 위력적인 검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 헛거라도 보고 있는 건가?”

백이면 백, 무당파 전대 고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번엔 기필코 성공시켜야 하는데……!”

흑상은 이를 악물었다.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실패할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냥 돌아갈까? 아니야!’

진지하게 한 번 고민해 보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해 봐?”

이대로 돌아가면 처벌만이 자신을 반겨 줄 뿐이다.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일을 진행시킨 것은 흑상이 저지른 일생 일대의 실수이자 마지막 실수였다. 이번 판단 착오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자네 평소에 누구에게 원한을 산 일이라도 있나?”

갑자기 안색을 굳히며 현검자가 물었다.

“하하하! 저같이 착한 아이가 어떻게 남들이랑 원한이란 무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겠어요. 할아버지도 참, 농담도 잘 하시네요.”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일은 전혀 안중에 없다는 뜻인 모양이다.

암습에 대한 비뢰문의 생각은 이러하다!

“자넨 암습(暗襲)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암습이요?”

이제는 뼈다귀에 남아 있는 고기 살점들을 아쉬운 눈길로 한 번 일별한 후 비류연은 고개를 들어 현검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암습 말일세!”

“할아버지께서 물은 암습이란 게,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 있다가 남의 허점을 노리고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암습이 맞다면, 그딴 건 약골 얼간이들이

나 하는 거죠.”

비류연의 말은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허허! 젊은 친구가 무척이나 과격하구만!”

“뭐 원래 암습 따위나 떼거지로 가하는 얼간이들 따위는 신경쓴 적이 없어서요. 그런 건 능력이 안 되는 얼간이들이나 즐겨쓰라고 해요.

혀에 칼날을 달아놓은 듯 신랄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비류연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도 당연했다. 소싯적부터 그렇게 세뇌되어 왔던 것이다. 지랄맞은 사부로 부터.

“그런데 여기 주위에도 남의 귀중한 식사를 방해하는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참새 떼들이 많이 있어서 탈이네요. 밥값으로 참새나 쫓아낼까요?”

드디어 눈 앞에 있는 모든 먹을 걸 작살낸 비류연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노도인의 의향을 물었다. 식후 운동거리를 찾는 사자 같은 한가로운 태도였다.

“허허허! 그 정도면 밥값은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을 걸세. 그래만 준다면 어딜 가도 공짜로 얻어먹기만 하고 신세만 졌다는 말은 듣지 않을 걸세.”

순간 현검자의 눈에 호기심이 일렁거렸다. 자신도 이제야 찾아낸 참새의 존재에 대해 벌써부터 알아차리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청년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보였 다.

“젠장! 들켰다! 살(殺)!”

은신(隱身)이 노출된 이상 이제는 돌아갈 길마저 없었다. 울며겨자먹기로 흑상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무량수불(無量壽佛)! 감히 누가 신성한 무당파의 영역 안에서 살기를 뿜는단 말인가!”

현검자의 도호성은 낮지만 장중하고 대기를 울리는 힘이 있었다.

“파바박!”

검은 참새가 날아올랐다. 하지만 위치가 파악됐는데도 날지 않는 참새는 맹금(猛禽)의 먹이가 될 뿐이다.

아무리 힘차게 날아오른다 해도 참새의 한계라는 불가항력적인 면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래 비류연의 사문인 비뢰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암습 따위의 하찮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기에, 참새들의 공세에 대한 비류연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 다.

그의 이런 의외의 반응은, 자신들의 느닷없는 암습에 화들짝 놀라 동요하기를 원하는 암습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암습자에 대한 모독이었다. 사부가 말했었다.

“비뢰도(飛雷刀)의 전승자(傳承子)로서 상대가 언제 어디서 무슨 엄한 짓을 해서 튀어나오든지간에 상관없이, 불의의 암습 따위의 시시한 공격조차도 못막을 실 력이라면 죽어도 싸지! 그런 바보 천치 얼간이 짓에 당하는 병신은 비뢰도를 전승(傳承)할 자격이 없다. 물론 그런 놈은 애초부터 비뢰도의 전승자로 삼지도 않지만 말이다.”

암습자에 대한 사부의 견해였다. 비류연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비뢰문의 진정한 가르침이었다.

보통 사람은 의외의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당황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고수쯤 되면 이런 보통 사람들하고는 뭔가 차별된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 겠는가!

적이 오든 말든,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던 암습자가 암습을 하든 말든 비류연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암습자들이 들으면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소화에 열중하고 있는 비류연의 모습은 암혼비영대들의 눈에 허점투성이였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괴팍하게 생긴 노도인은 말코처럼 보 일 뿐이었으니, 노도인이 방금 전 보여준 검초만 아니었으면 서슴치 않고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불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대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만만치 않은, 그들이 떼거지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는 괴물들이었던 것이다.

비류연에게 날아오는 까만 참새 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현검자를 보며 말했다.

“하늘을 찢어발길 수 있는 힘만 있다면, 그 그물코가 듬성듬성하다 해도 아무 문제가 안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이죠.”

날아드는 독검(毒劍)의 소나기를 지척에 두고도, 비류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두 팔을 휘둘렀다. 날아드는 날파리나 때려잡겠다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지막지했다.

비뢰도(飛刀) 검기(劍氣) 비의(秘意)

천라지망(天羅地網)의 장(章)

천뢰무망(天雷舞網)

쇄천(碎天).

순간 펼쳐진 하늘이 금빛 그물 안에 갇히는 듯한 착각과 함께 달려들던 암습자 복면 흑의인들이 그물에 갇힌 참새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비류연이 친 그물은 방금

전 현검자가 친 그물보다 결이 촘촘하거나 세밀하지는 않았다. 허나 그 한 올 한 올에 담긴 힘과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날아오던 까만 참새들은 그물에 걸린 것마냥 파닥거리다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제대로 된 공격을 펼쳐낸 놈은 한 놈도 없었다. 황금빛 그물은 검은 참새들의 침입 도, 도주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류연의 실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현검자 쪽에만 신경을 쓴 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는 것을 암영 3조 조원들은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저…저…저것은! 어…어떻게 이럴 수가……. 이,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현검자의 눈이 경악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심적 충격은 주화입마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둔중한 철퇴로 뒷통수를 가격당한 충격도 이만하지는 못하 리라.

백 년 전 보았던 당시 하늘을 뒤덮던 그 황금빛 그물과 똑같은 모양의 그물이었다.

현검자의 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졌다. 이미 그의 정신은 100년 전 그날로 날아가고 없었다.

비류연의 일초는 과거의 현신을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