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32화 – 나예린과 폭풍 속에 갇혀

비뢰도 6권 32화 – 나예린과 폭풍 속에 갇혀

나예린과 폭풍 속에 갇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동굴 입구의 곡면을 타고

한 방울 한 방울 맺힌 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져

이미 고인 웅덩이에 또 한 번의 파문을 일으킨다.

비로 인한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지만 비류연은 기분이 좋았다. 비안개가 자욱하게 덮인 산의 한 동굴에서 미인과 함께 있다는 상황은 무척이나 매력적이기에, 마 른 하늘에 갑작스런 비를 내려준 하늘의 변덕에 감사해야 함이 마땅하리라.

“몸을 좀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동굴 속에서 마른 잎과 나뭇가지를 찾아낸 비류연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는 옆에 있던 나예린에게 말했다.

려태(麗態).

그녀의 옷은 비에 흠뻑 젖어 착 달라붙은 관계로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나 보였다.

나예린이 차갑게 대답했다.

“이대로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요.”

냉담(冷淡)!

물론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하에 직면했지만, 비류연을 대하는 나예린의 태도는 해빙(解氷)될 기미가 없었다.

“무척이나 오래 꽁하고 계시는군요. 사람을 사귀는 데는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니에요. 게다가 그런 모습으로 남자 앞에 오래 있는 것은 별로 현명한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마치 충고하는 듯한 비류연의 말이었다. 사실 지금 나예린의 모습은 마성(魔性)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모습이었다. 거의 범죄에 가까웠다.

그런데 인간 관계 형성에 대한 기술로 비류연이 나예린에게 충고할 자격이 있는지가 우선 의문이다. 지금까지 짧은 시간 동안 비류연이 만들어 놓은 거미줄 같이 얼기설기 얽힌 원한 관계는 그 복잡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무 도전장이 쌓이는 주제에, 인간 관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 다.

이런 사실들을 나예린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격은 금세 날아왔다.

“인간 관계 형성에 대한 충고를 날마다 수도 없이 비무장 받아드는 사람한테 받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하하! 이거 한 방 먹었네요.”

나예린의 응수에 비류연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 나예린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두텁기 그지없었다. 약간 새침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입맞춰주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빗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나예린은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과 떨어져 홀로 산책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역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에 끼여 있는 것이 불편 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상념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마음을 다스리고 있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역시 혼자가 편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갑작스레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살기를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암습 인은 일곱이었고 조직적인 연환 공격을 해 왔다. 조직적이고 상호 연계되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미루어 보아 허접스런 잡배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장강에서의 암습자들과 한 패인가?”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어찌하여 무당파의 영역 안에서 이런 정체 모를 암습자들이 들끓는가 하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었다.

개개인의 실력으로 보면 별것 아니지만, 무공의 강함이 상대를 죽이기 위한 절대 명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항상 정당한 대결밖에 해 본 적이 없는 나예린에게 있어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불사하는 암습인들과의 싸움은 생경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암습인들이 진을 짠 채 시도 때도 없이 독암기를 뿌려 오니, 천하의 그녀로서도 쉽게 방비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고전할 정도는 아니였다. 문제는 자신을 노리는 암습자가 이들 일곱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전면에 몸을 드러내지 않은 채 기척을 숨기

고 있는 자들의 존재가 확실히 느껴졌다.

이들 암습자들은 겁도 없이 무당파 영역 내에 포위망을 구성한 모양이었다.

‘그때 이 사람이 와 주지 않았으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이들의 공격 전술은 상대가 고수일 경우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막는 것으로 상대의 실력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즉 운신의 폭을 줄이고 호흡을 끊음으로써 상대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방법의 비열함이나 추악함 따위는 이들의 고려 사항에 들어있지 않았다.

동료가 그녀의 검에 베여 나가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殺意)에 나예린은 눈이 따가웠다. 그녀로서는 처음 느껴 보는 지독한 살의였다.

때마침 비류연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무공 실력이야 암습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그녀였지만 이런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 앞에 닥친 위험은 처리했지만, 그 다음은 날씨가 말썽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먹장 구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듯 사나운 빗줄기를 뿌려댔다. 머리카락 한 올의 틈도 없이 쏟아지는 폭우(暴雨)에 사위는 어둠 속에 잠겼다. 울창한 숲 속에서 만난 폭우였기에 상황은 더욱 나빴다.

이런 폭우는 암습자의 기척을 지우는 데 최고의 공로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우선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지금 비류연과 나예린이 이 동굴 안에 자리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나예린은 마음 속으로 물었다.

분명히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왜 확실히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사의 마음이 일지 않는 것일까?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희한한 일이었다.

“왜지?”

물어도 마음은 답이 없다.

“쏴아아아아……!”

어둠 속에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무사하겠죠?”

냉정한 척하고는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이 걱정되는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엷게 드리워졌다.

“밑에는 염도 노사가 있습니다.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정도 녀석들에게 당할 사람들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도 못막아낼 만큼 허약 하다면 그동안 쌓아 놓은 이름이 아깝죠! 그들을 믿어도 됩니다.”

“내 제자들이니깐 말입니다.’

뒷말은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내뱉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불신만 높아질 위험까지 있었다.

“그렇겠죠.”

“물론이죠.”

비류연이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일 지기라도 한다면 가만 놔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제서야 나예린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