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6권 33화 – 나예린의 고혹적인 자태

비뢰도 6권 33화 – 나예린의 고혹적인 자태

나예린의 고혹적인 자태

-그리고 동굴 속……

불가로 다가앉은 나예린의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비류연의 시선을 느낀 나예린이 한 마디했다.

“이번엔 방심하지 않겠어요! 이번에도 통할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제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요?

순진한 척 비류연이 물었다.

“남의 입술을 두 번이나 허락받지 않고 훔친 이의 말을 믿으라니 저를 너무 얕보시는 게 아닌가요?”

그녀의 말은 북풍한설을 연상케 할 만큼 차가웠다.

“그럴 리가요. 제가 그런 망상을 품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억울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러나 믿고 안 믿고는 나예린의 소관이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죠.”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분명히 태산보다는 높은 모양이었다. 태산을 눈 아래 깔고 있는 고산준봉인 모양이었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훌륭한 방어입니다. 허점을 찾을 수 없군요.”

비류연의 평가였다.

“방심은 두 번으로 충분해요. 더 이상은 사양이니까요.”

“쩝! 애석한 일이군요!”

비류연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예린의 관심을 끄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믿지 못한다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죠. 그렇다면 제가 처음이 되는 건가요?”

무엇이 처음이란 말인가? 제일 신용이 안 가는 비류연의 만사태평한 한 마디였다.

문득 의아함을 느낀 그녀가 반문했다.

“그런데 왜 제가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거죠?”

나예린은 무척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왜 이런 생소한 기분이 드는지는 그녀 자신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 사람 앞에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를 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요? 나 소저의 마음을 제가 알 수는 없겠죠. 질문 상대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소저의 마음에 물어 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인 것 같은데요!”

나예린은 일순 말문이 막혀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게 왠지 지는 것 같아 분했다.

평소와 다르게 의외로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는 나예린을 바라보는 비류연의 입에서 참았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왜 웃는 거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예린이 물었다. 비류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하하! 아뇨! 다양한 표정이 살아 있는 소저의 얼굴이 귀엽게 보여서요.”

비류연의 말은 나예린에 있어서 충격이었다.

귀엽다? 아름답다거나 고귀하다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귀엽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설마 무의식중에 감정이 얼굴에 나타났단 말인가?”

언제나 비류연 앞에 서면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 나예린이었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남자한테 휘말려 들고 있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려고 했다.

“나 소저는 인형이 아니에요. 웃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어요. 억지로 웃음을 참는 것보다 나쁜 건 없죠.”

그녀의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비류연의 한 마디였다. 웃음이 그녀의 가려(佳麗)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비류연이 한눈에 보기에도 나예린은 여전히 빈틈없는 방어를 펼치고 있었다. 마치 생사 대적이라도 눈 앞에 두고 있는 자세였다.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하! 이것 참!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웃어 보자고 한 얘기였지만,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남자는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 아버님과 어머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받은 첫 번째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저와 사부님 또한 항상 사내는 늑대와 같은 과에 속하는 동물이니 백 번 조심한다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이르셨죠. 그리고…….”

어려서부터 수십 번의 유괴 미수 사건에 휘말린 전적의 소유자인 그녀에게 남자의 빈약하고 갈대보다 약한 이성을 믿으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믿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감히 남자의 자제심 따위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알 필요는 없지요.”

나예린은 끝내 ‘당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에 더욱 경계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만일 그것이 좋든 나쁘든 비류연의 마음이 보인다면 이렇 게 긴장한 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두운 장막에 쌓여 있다는 그 자체가 나예린의 경계심을 북돋우고 있었다.

“이런, 이런, 전혀 신용받지 못하고 있군요.”

투덜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비류연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남자를 신용할 만한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내를 불신할 만한 일이라면 셀 수 없이 일어났지만요!”

나예린의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단호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미모에 혹해 그녀를 납치하려 한 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가까운 인척 관계의 사람들까지 끼여 있었다. 본인이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미모에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마력이 있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사내는 그녀 앞에서 이성이 마 비되고 마는 것이다.

만일 그녀의 아버지가 무림맹주만 아니었어도, 이미 사단이 벌어졌으리라. 여지껏 나예린은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아슬아슬하게 순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그러니 남성에 대한 불신의 장벽이 쉽사리 걷히리라고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좀처럼 방심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사내라는 족속들이다. 늑대랑 동류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았다. 사내들은 불신받아도 싸다.

“그 정도였나요?”

비류연이 되묻자 나예린의 얼굴이 차가워지더니 일렁이는 불꽃에 초점을 맞추고 말했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서인가? 그녀의 눈빛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죠. 어차피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 테니까요! 저의 어린 시절은 항상 남자들의 악의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왜 자신이 이 남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어릴 때 길가다 납치당할 뻔한 경험이 986번, 패물점 앞에서 납치당할 뻔한 경험이 758번, 야밤에 담을 넘어온 흉한에게 납치당할 뻔한 경험이 108번! 그리고 조 금 큰 다음 식당에 들어갔다 수작 걸어오는 건달들과 싸운 게 899번! 그 외에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하나 둘씩 나타나 수작 거는 하오문 패거리까지 합치면 합이 5,672회로군요. 이런 일을 전열 살 때부터 겪었어요. 이런 데도 남자란 존재를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나예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는 사람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다채롭고 화려했다.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예린의 부친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월담한 이가 백을 넘었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셀 수 없는 납치의 위험 속에서 그녀는 가장 순수해야 할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마음에 남은 상처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군요. 불신할 만하네요. 사내란 원래 그런 존재였군요. 좀 의외네요. ”

비류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욕망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의지력 바닥의 인간들이 그녀의 주위에 밀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혐오감을 가지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비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믿지 말아요. 안 믿으면 그만이죠. 우리 사부가 그랬는데요, 세상에서 여자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바로 남자라는 동물이래요. 여자, 특히 아름다운 미 인은 남자를 상대할 때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이고, 꺼진 불도 다시 보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안전하대요.”

마치 남 얘기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자신이 남자라는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예린은 묘한 시선으로 비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이한 사부셨군요.”

“확실히 독특했죠!”

물론 어떤 의미로는 굉장하다는 데 이견이 없는 비류연이었다.

“굉장히 지독한 술꾼에다가 아동 학대에 금전 갈취를 전문적으로 하시던 분이시죠. 당신께선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시고 모두 이 연약한 제자를 뼈가 삭을 때까 지 부려먹다니……. 흑흑흑! 저의 비참한 과거가 다시금 떠올라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군요. 확실히 그런 사부는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겁니다.”

비류연의 느닷없는 악담에 나예린의 눈이 새알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풋! 자기 자신의 사부님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처음이군요.”

“하하! 전 항상 진실만을 말하거든요!”

비류연도 마주보며 웃었다

자신이 비류연 앞에서 두 번째로 웃었다는 사실을 나예린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는 방심해서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뭔가?

모닥불이 타오르며 불꽃을 토해 냈다. 일렁이는 불꽃에 벽면의 그림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비류연이 말했다.

“남자를 신용 못하는 건 좋아요. 어차피 이제 와서 전적으로 신용한다는 것도 무리죠. 하지만 피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사부께서 왈왈(曰 日)하시길 뭐 무서워 피해 갔다가 등 뒤에 두고 껄끄러워할 바에야, 가루를 내든 초전박살을 내든 깔끔하게 박살을 내버리는 게 뒤통수가 시원하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했죠. 저도 사부의 왈왈(曰)엔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피하기만 해서는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나예린은 고개를 돌려 비류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앞머리가 그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가에 상냥한, 그리고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 다.

나예린은 자신의 마음을 묶고 있던 엉켜진 씨실 하나가 스르륵 소리없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의 붉은 입가에 환상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월옥의 조각상이 미소짓는 것만 같았다.

“굉장한 사부님이셨군요.”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 괴인괴걸(怪人怪傑)에 대해 들어 온 그녀로서도 선뜻 믿기 힘들 정도였다.

“굉장했죠. 두 번 다시 만나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지금은 또 얼마나 제자의 뼈와 살을 축내 가며 저축해 둔 돈을 술로 탕진하고 있을지…… 걱정이네요. 그 돈 떨어지면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그랬다간 정말 큰 일이죠.

“네?”

어처구니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비류연에게 그녀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예린은 비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남자에 대한 정의를 차례대로 부수는 비류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동굴 밖에 결계로 쳐놓았던 뇌령사가 가늘게 떨리며 경고성을 전했다.결계 안으로 적이 침입해 왔다는 의미였다.

비류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둘만의 오붓한 한 때를 방해하는 불청객은 진심으로 사양이었다.

운사(運絲) 조율(調律).

비류연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다시 주먹을 말아쥐듯 오므렸다. 현을 조율하듯 뇌령사를 조종하는 것이다. 나예린은 그의 이런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 다.

비뢰도(飛雷刀) 오의(義) 비의(秘意)

결계(結界)의 장(章)

절박(切縛).

조여든 뇌령사의 거미줄 안에 걸려든 먹이의 몸부림이 실을 타고 확실히 전해졌다.

“지잉! 지잉!”

뇌령사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확실히 걸려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종(終)!

심하게 요동치던 뇌령사가 떨림을 멈추고 이내 조용한 호수의 수면처럼 잠잠해졌다.

비류연은 오므렸던 손을 다시 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잠시 동안 뇌령사의 움직임에 신경을 쏟고 있던 비류연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나예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비류연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굵었던 빗줄기가 점점 줄어 가며, 빗방울이 지면에 튕기는 소리도 잦아 들었다. 점점 약해져 가는 빗발과 밝아 오는 하늘 사이로 미약한 햇살이 어둠을 비집고 들 어왔다.

날이 개였다.

비류연은 기분이 좋았다. 나예린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구름도 조금은 걷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절벽 사이의 간격(間隔)이 조금은 가 까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과연 언제쯤이면 저편으로 건너뛸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질 수 있을까?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