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2화 – 시작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도와 주지 않아도 되나요?”
남궁상이 생각하기에 이곳에서 지금 저 치열한
두 사람의 격투에 끼여들어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얄밉거나 두렵거나 해도 비류연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염도 사부가 무당산에 볼일 보러 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남궁상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아직도 남궁상의 눈에는 대사형 비류연이 미덥지 않아 보였다.
“내가 왜?”
비류연이 반문했다. 남궁상이 금세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지금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구요!”
남궁상은 비류연의 면전에다 대고 현재 상황에 대해 좀더 제대로 자각해 달라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극도의 인내력을 발휘해 언성을 높이는 정도에서 참 았다.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비류연의 얼굴에선 위기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살짝 찌푸려진 저 얼굴은 시끄럽다! 귀찮게시리!’라는 표정이 분명했다.
남궁상의 낙담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 대사형이란 작자를 믿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궁상아!”
시선은 여전히 모용휘와 갈효봉의 격전장에 둔 채 비류연이 조용히 남궁상을 불렀다.
“예?”
남궁상도 보조를 맞추는 의미에서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질주하는 전차처럼 다급했다.
“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싫어!”
“네!”
남궁상이 뭣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수 없는 투자도 싫어!”
“네!”
그건 비류연의 성격상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보고 지금 모용휘를 도우라고?”
비류연이 남궁상을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물론 남궁상은 비류연의 앞머리가 방해되어 그의 눈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볼 수 없다 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네?”
“넌 이윤 없는 사업에 투자하는 장사꾼을 본 적이 혹시 있느냐?”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씀이신지?”
남궁상은 비류연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비류연의 친절한 설명이 계속되었다.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언변이었다.
“저녀석이 나의 도움을 전혀 반기지 않는데 내가 미쳤다고 수고해 가며, 힘써 가며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하겠니? 감사의 소리는 고사하고 어차피 원망밖에는 듣 지 못할 게 뻔한데 말이야.”
‘당연히 그래야죠!’
라고 남궁상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진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 비류연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런 적자투성이 행동을 내가 미쳤다고 하냐? 그렇게는 못하지!”
남의 싸움에 쓸데없이 끼여드는 것은 비류연의 생활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감사조차 받지 못할 도움일 시에는 말이다. 그의 마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저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것! 시작부터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다.
그때였다.
“헉!”
“히엑!”
남궁상은 순간 헛바람을 들이켰다. 비류연이 예고도 없이 그의 멱살을 사정없이 움켜잡았던 것이다. 숨이 털컥 막혔다. 비류연의 행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우웅!
한 사람의 몸이 타의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비류연이 남궁상의 몸을 인정사정 없이 앞으로 내던져 버렸던 것이다.
지켜보던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다시 하극상에 준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부탁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어어어!”
남궁상의 팔이 허공에서 당황 섞인 허우적거림을 보여 주었다. 그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쌍방 합의 하에 벌어진 상황이 아님을 여실히 알 수 있었 다.
이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한 남궁상은 이 장(丈)이나 날아가고서야 간신히 신형을 한 바퀴 틀어 무사히 지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집어던져진 충격 이 남아 있어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일 착지에 실패했다면 땅바닥에 혈흔을 길게 그리는 멋들어진 면상 박치기를 보여 주며 지면과의 우애를 돈독히 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짓… 헉!”
벌떡 일어난 남궁상이 냉큼 뒤를 돌아보며 항의하려던 말은, 게 눈 감추듯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두두둑!”
급하게 돌려진 그의 시야에 들어온 두 명의 인영을 본 순간, 그의 전신에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척!”
무의식중에 남궁상의 손이 허리춤의 검을 찾았다.
살기(殺氣)!
그가 감지한 것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하기까지 한 지독한 살기였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말겠다는 어둠침침하고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농 도 짙은 살기!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며 대사형 비류연이 서 있었다.
파락!
그때 남궁상의 등 뒤에서 옷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남궁상의 얼굴이 핏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어… 어느 새!’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옷이 정체 불명의 날카로운 검기에 의해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미… 믿을 수 없어! 이… 이럴 수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제 검기가 자신의 무복을 상하게 했단 말인가! 비류연이 자신을 내던졌을 그 순간이 분명했다. 자신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허공 에 뜨자마자 그 빈 공간으로 예리한 검기가 훑고 지나갔을 것이다. 사신(死神)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순간 심장이 쿵쾅쿵쾅 굉음을 내며 압축됐다. 싸늘한 식은땀이 전신의 모공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대사형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난……!”
아마 이승에서 이렇듯 유유자적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사신의 손길이 닿았다 떨어진 것처럼 목덜미가 서늘했다.
오늘 그는 죽을 뻔한 생사의 고비를 또 한 번 넘긴 것이다.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목덜미에는 서리가 낀 듯했다.
갑자기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성질만 유난히 더럽던 대사형이 엄청나게 위대해 보였다. 생명의 은인이란 감투의 위력은 자신의 나쁜 시력도 잊어버리게 할 수 있 을 정도로 효과가 탁월했다.
“허허! 거참!”
두 명의 노인 중 비쩍 마른 노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비류연과 남궁상의 등 뒤에서 느닷없이 칼질을 해 온 이는 천지쌍살 중 천살(天)이었다. 천살은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비류연을 힐끔 쳐다보았 다. 그리고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뭔가 계산이 잘못된 듯한 표정이었다.
죽어야 할 게 죽지 않았다. 천살은 과거에 예측된 미래와 현실로 나타난 현재의 괴리에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찮은 애송이들에게 암습 따위의 시시한 행위를 한다는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들에겐 그저 갈 길을 방해하는 귀찮은 장애물이 있어서 치워 버린다는 정도의
감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데 감히 장애물이 발 달린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검을 피해 간 것이다. 무척 시건방지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허!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 분명히 죽었어야 할 인생이 둘 다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 괴이쩍은 일이로고.”
천살에게 있어서는 괴사(怪事)나 다름없었다.
분명히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저 수만 번을 계속해 온 칼질을 다시 한 번 반복했을 뿐이다. 그의 칼질엔 항상 이승을 떠나는 생명의 피가 묻어 나왔는데, 공교 롭게도 이번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천살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고도 어처구니없는 간만의 실수에 대해 참오하고 있는 천살을 바라보며 비류연이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천지쌍살의 입장에서 보면 겁대가리를 상실 한 언행이었다.
“늙어 죽지도 않았으면서 귀신처럼 다가오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런 짓은 귀신이 돼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말이죠. 노인네가 젊은이들을 놀래키려 하다니 장난이 지나쳐요.”
“팍!”
“헉!”
천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칼날 같은 살기에 남궁상은 하마터면 부끄럽게도 제풀에 놀라 뒤로 물러날 뻔했다. 보통 고수라면 땅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요, 일반인이라면 다리가 풀려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물러나고픈 본능의 욕구를 억제한 것만으로도 남궁상은 칭찬받을 만했다.
천살의 허연 수염이 상하로 꿈틀거렸다. 그의 볼이 분노로 실룩거렸다.
“꽤씸하게 어린놈이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구나!”
스산한 살기가 음험한 귀기와 함께 사방으로 자욱하게 뻗어 나왔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슴을 열고 심장을 갈라서 속을 확인할 필요까지도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진한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류연의 신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할 테면 해 보라지’라며 시위라도 하는 태세였다.
“크크크! 이놈, 죽는 게 소원이구나! 그럼 죽여 주마!”
“쉐엑!”
천살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새파란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그만 아가리 닥치고 죽으라는 의미였다.
“쾅!”
그러나 천살의 교육적 지도는 다른 누군가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천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신경질적으로 부릅떠졌다.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자신의 검이 무위 로 돌아간 것이다.
“웬 놈이냐?”
천살의 시선이 검초를 저지한 느닷없는 방해꾼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방해꾼의 머리카락은 특이하게도 타오르는 불꽃 같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콜록콜록! 젠장! 사람 잘못 봤군!”
뿌연 먼지 속에서 염도의 후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비조의 거친 목소리! 천살의 일검을 막아 내고 천살을 떨어뜨리는 신위를 보인 이는 바로 염도였다. ‘젠장! 설마 이 웬수덩어리일 줄이야!’라고 염도는 덧붙여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속으로 씹어삼켰다. 그러나 애통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공격의 대상이 비류연 인 줄 알았더라면 막아 주지 않았을 것을……. 주의력 부족으로 쓸데없는 짓을 해 버리고 만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무지막지한 검기를 아이들이 감당하지 못할 줄 알고 중간에 막아 줬건만 그 상대가 비류연일 줄이야!
“젠장! 젠장! 젠장!”
후회가 막급했다. 그냥 놔 둘 걸! 괜히 손해 본 느낌이었다.
마치 사부의 위기를 감지하고 용감히 길을 막아선 제자 같은 꼴이 아닌가. 염도는 갑자기 그런 신세가 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짜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런 때 치가 떨릴 정도로 아주 반가운 얼굴과 약속도 없이 재회하고 만 것이다. 그의 짜증이 옛적에 남겨 뒀던 증오와 결합하여 요란한 결합 반응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저자는!’
그 인영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항상 웃고 있던 지살(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변에 항상 보여 주던 유들유들한 미소가 지금 한순간이나마 그 넓적한 얼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지금 얼음장을 한 겹 씌워 놓은 듯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후 지살의 얼굴엔 다시 그 특유의 능글능글한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상대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 이는 바로 염도였다. 그는 지금 한창 살기가 충천해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이군, 뚱땡이!”
뚱땡이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의 안면 살이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허허허! 이게 누군가? 혈기만 왕성한 단순 무식의 대명사, 염도가 아닌가. 반갑네, 반가워! 15년 만인가?”
지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냥 당하고만 있기엔 그동안 쌓아 놓은 수미산 같은 악명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 15년 만이군! 옛날보다 비계는 지칠 줄도 모르고 더 붙은 모양이군, 뚱돼지!
“여전히 예의를 모르는군. 시간 나면 예의 범절이란 것도 한 번 배워 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걸세. 그래서야 짐승이랑 다를 게 무에 있겠는가! 불, 타, 는, 개, 차, 반!”
염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 살인 사건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둘 사이의 공기는 험악했다.
“돼지를 잡는 데 예의 범절이 무슨 소용인가. 도살법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거 아닌가? 잔말 말고 덤벼, 뚱돼지!”
아무래도 이 둘은 아주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내며 차근차근 알찬 우정을 쌓아 온 친밀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 친근함이 도가 지나쳐 지금은 살짝만 움직여도 피 가 튀고 살이 튈 듯한 화기애매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감정을 얼굴에 분노로써 드러내 놓고 있는 염도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가슴 속에 감추어 둔 지살의 태도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속에 품고 있는 살의만은 둘 다 똑같았다.
“계속할 텐가? 15년 전의 결말! 지금 내자면 지금 내 주지. 그때 아마 끝을 내지 못했지?”
염도가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그나마 당장에 칼 빼들고 흥분해서 달려들지 않는 것은 비류연과 다니면서 마음 수행이 깊어진 탓이었 다. 옛날 같았으면 모든 절차 생략하고 칼부터 휘둘렀을 염도였다. 그의 별명 중 하나가 괜히 ‘불타는 개차반인 게 아니었다.
“글쎄…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군. 그때의 건방진 애송이에게 예의를 가르쳐 주는 게 내 꿈이었다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단 뜻인가 보군?”
염도가 특유의 붉은 검기를 일으키며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오늘 한번 끝장을 내보자는 진취적인 태도였다.
“곧 무당파에서 지원이 올 테지만 그 전에 결판을 낼 수 있을 것 같군. 십 초(招 : 열 초식) 안에 승부를 가려 주지.”
염도가 호언장담했다.
십 초 안에 승부를 가린다는 것은 지살(地) 명왕도(冥王刀)의 이름(그것이 비록 오명이라 할지라도)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15년 전에도 삼백 초 이상을 싸우고도 결말을 내지 못했던 사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면상 보기 싫은 녀석 앞에서 굳이 마음에 안 드는 진실 따위를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상대의 콧대를 올려 주는 진실이라면 더욱더 사양이다.
무당파의 지원이란 말에 지살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게다가 천살의 태도도 좀 이상했다. 아까 산이 울릴 정도로 큰 기폭음이 터진 이후 갈효봉의 상태도 정상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현재 목표물 사냥 성과도 변변찮았다. 아니 전무하다는 게 옳았다. 여기에 무당파까지 가세한다면 좋은 꼴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살은 할 수 없이 마음 을 바꿔 먹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콰쾅!”
하지만 지살의 생각은 거대한 굉음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갈효봉과 모용휘가 정면으로 부딪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