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살 초혼검과 나예린
・여자 꼬시기와 회춘의 상관관계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천살은 자신의 검이 고작 애송이도 피해 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라고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천살은 반드시 비류연을 죽여야만 했다.
그의 눈에서 푸른 살기가 일렁거렸다. 그는 조금 더 진지해지기로 했다.
사십사(四十四) 초혼귀령검법(招魂鬼靈劍法)
제일초(第一招)
귀령압혼(鬼靈壓魂)
그의 검이 느릿하게 앞으로 움직이며 비류연을 향해 천천히 뻗어갔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하지만 둔중한 속도에 담긴 거력 (巨力)은 무시무시했다.
천살의 검은 빠르게 뻗어질 때보다 느리게 뻗어질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깡마른 체구와 가는 검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무거운 붕검(崩劍)을 익히고 있었다. 붕검 이란 검기의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고, 힘으로 부수는 검법을 말한다.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검법 중 하나다.
지면이 부르르 떨리며 사납게 들썩였다. 무형의 압력이 비류연에게로 사정없이 날아갔다.
“콰쾅!”
또다시 귀청을 찢는 굉음이 귓가를 때렸다. 비류연도 이번에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천살의 검이 향한 곳에는 쥐새끼 비류연 대신 나예린이 검을 빼 든 채 서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었다. 후환은 미리미리 제거하는 것 이 좋았다.
‘위험’을 소리치며 경고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검세가 그녀를 파고 들어갔다.
“챠라랑!”
검과 검이 한 곳에서 부딪치며 비명을 토해 냈다. 나예린의 검이 천살의 초혼귀령검법 중의 일 초인 귀령압혼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냈던 것이다.
“휴우우우!”
지켜보던 천관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상황은 아직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너무도 일렀다. 천살의 검이 기세만으로 나예린을 압박해 들어갔다. 과연 검귀라 부를 만한 검기였다.
“우웅! 우웅!”
나예린의 섬섬옥수에 들린 애검 옥령(玉靈)이 기세를 세우며 울었다. 하얀 안개 같은 검기가 그녀의 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힘의 대부분을 흘려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팔이 찌릿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서리가 내린 듯 검이 하얗게 변했다. 은빛 안개가 그녀를 보호하듯 피어 올랐다.
“계집애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신기한 얼굴로 천살이 물었다. 겨우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애가 자신의 진심 어린 일격을 막아 낸 것이다. 게다가 늙은 자신이 보기에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의 수련 정도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그녀의 미모에 홀렸을지도 몰랐다.
“스윽!”
그러자 비류연이 더 이상의 사담(私談)은 금지라는 듯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건방지구나!”
천살의 이마에서 핏대가 꿈틀거렸다. 비류연이 비웃음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입은 연신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노인네가 너무 주책인 것 아닌가요?”
“무슨 소리냐?”
“그 나이에 여자를 유혹하기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뭣이라? 참으로 건방진 애송이로구나!”
오늘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별꼴 다 당한다는 피해의식이 천살을 사로잡았다. 피해의식은 살기가 되어 내부에서 외부로 뻗어 나왔다. 천살의 몸에서 살기가 무럭 무럭 솟아올랐다.
“회춘을 향한 노인장의 뜨거운 열정과 용맹정진하는 노력은 타의 모범이 될지 모르나, 지나치면 그 또한 꼴불견이 아니겠습니까! 그 뜻은 드높고 가상하지만, 인 내심을 기르는 것이 더 좋은 공부가 될 것 같군요!”
천살의 노안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태어나서 너같이 건방진 놈은 오늘 처음 본다. 물론 그 말은 죽을 각오가 된 후에 한 말일 테지?”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보시는 것도 좋은 도전이죠. 절 죽이시겠다구요?”
“물론이다. 잘 알면서 왜 되묻는 것이냐?”
이미 천살의 검극은 비류연의 생명을 위협하며 앞으로 뻗어 있었다. 천살 정도 되는 고수라면 검극이 향하는 순간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기술쯤은 간단했다. “때로는 회춘을 위해 불가능에 도전해 보는 것도 진취적 기상을 기르는 데 좋은 일이죠. 여자를 유혹하기보다는 훨씬 보기에 좋군요.”
천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비류연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가 눈에 거슬렸다. 미소는 상대를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미소에 담긴 조롱과 멸시가 그의 심기를 폭발 직전까지 몰아 가고 있었다.
“말이 너무 길었다. 죽어라!”
“슈웅! 위잉!”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은빛 선 하나가 허공에 그려졌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여지껏 붕검을 구사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검놀림! 그의 진면목이 어느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섬쾌(閃快)란 이런 것이다,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채앵!”
그러나 단숨에 휘둘러진 천살의 일검은 아쉽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 여인의 검이 그의 검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검은 서늘한 한기마저 머금고 있 었다.
“방해하는 것이냐?”
천살이 요사로운 귀광을 빛내며 나예린을 노려보았다. 나예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전했다. 그녀의 표정엔 아직도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만이 점점 더 심유하게 깊어질 뿐이었다.
비류연은 다시 한 여인의 치마폭 뒤로 신형을 숨겼다.
‘흐흠…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는 것은, 천살의 검을 대신 막았다는 것은 내가 저보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인가?”
일단은 그런 이야기인 것 같은데 과연 그녀의 마음에 동정심이라는 것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작전 실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비류연의 뇌리를 언뜻 스쳤다.
‘역시 염도를 믿는 게 아니었어!’
실패의 원인은 역시 신뢰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신뢰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비류연은 차분한 마음으로 실패의 원인을 하나 둘씩 되짚어보고 싶었다. 한데 천살은 그런 여유를 비류연에게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 뒤에 숨다니 꼴사납구나!”
천살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런 남녀 평등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시다니요!”
비류연이 여인의 등 뒤에서 격렬하게 반박했다.
“왜 막아 주신 거죠?”
비류연이 물었다.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게 강한 자의 의무입니다.”
나예린의 대답에 천살이 코웃음쳤다.
“약한 자를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강자의 의무이자 권리이지! 아주 탐욕스럽고 유혹적이며 매력적인 열매지! 거절할 수 없는! 크크크!”
“당신의 가치관은 저하고는 상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변함 없이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곧 상관 있게 될 거다. 왜냐하면 넌 곧 약자가 될 테니깐!”
천살의 눈이 사이한 요광(光)을 띠며 빛나기 시작했다.
“찌릉! 찌릉!”
요사한 방울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나예린은 마치 독사가 빨간 혀를 낼름거려 뺨을 핥는 듯한 오한과 전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가 그녀의 머리 속에서 요란스럽게 경종을 울렸 다. 하지만 검후(劍后)의 제자로서 그녀는 한 번 뽑은 검을 헛되이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마음 속에는 일말의 방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심이란 미세한 허점은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검기가 점점 더 싸늘해지고 있었다.
“어째서냐?”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살의 안색은 결코 밝지 않았다. 마치 소태를 한 움큼은 씹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석상처럼 굳어갔다. “어째… 어째서 통하지 않는 거지?”
그의 독사같이 찢어진 두 눈과 강퍅한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는 지금껏 맞닥뜨려 보지 못한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칼날처 럼 날카롭던 검세가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의 귀요안(鬼妖眼)이 왜 네년에겐 통하지 않는 거냐?”
나예린은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질문에 굳이 대답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가 초조해하면 초조해할수록 오히려 그녀에게는 유리했다. 그녀는 여전히 한 점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천살의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졌다. 대화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귀요안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크흐흐! 미안하지만 너를 살려 둘 수 없게 되었다! 절대로 살려 둘 수 없다. 나의 비기가 통하지 않는 너를 살려 두자면 위험 부담이 너무 크구나!”
그의 전신에서 짙은 살기가 무럭무럭 솟아 나왔다.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살기였다. 모든 살의가 날카로운 검이 되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치마폭 뒤에 숨어 있는 비류연은 자신이 앞으로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