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21화 – 무인에게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다
무인에게는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다
“그런데 너의 검법은 무엇이냐? 저승길 선물로 기억해 두마!”
검객으로서의 단순한 호기심으로 천살이 물었다. 자신이 처음 접해 보는 검법에 대해 알고 싶은 욕망은
검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 욕구였다.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천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흐! 과연 그 이름 높은 검후의 한상옥령신검이란 말이렷다.”
그의 입에서 차마 소녀의 깨끗한 귀로는 듣기 괴로운 괴소(怪笑)가 터져 나왔다. 소름끼치는 그 소리는 흉소(凶笑)에 가까웠다.
“좋아 좋아!”
그는 연신 ‘좋다’를 연발했다. 방금까지 반드시 죽여 주겠다고 살의를 불태우던 때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극강의 이름을 가진, 세간으로부터 인정받는 검법을 만나면 우위를 논해 보고 싶은 것은 바로 무인의 한결같은 마음가짐일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사파에서 뒹굴 던 천살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것이 천무삼성의 일좌인 검후 이옥상의 비전검기 한상옥령신검이라면 두말 할 것도 없었다. 한겨울 북풍한설에 얼어붙 은 들판같이 차가웠던 그의 마음에, 오랜만에 한 줄기 투지와 흥미가 솟구쳐 올랐다.
“흐흐흐! 죽이는 거야 천천히 해도 되는 일! 그 전에 너의 검법을 충분히 음미해 주마!”
지금은 투지가 살기를 한켠으로 밀어 내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천살의 애검 귀령이 신바람이 난 듯 귀곡성을 토해 냈다. 넘칠 듯한 검기가 한꺼번에 주입되었을 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근 5년 간 들리지 않던 소리이기도 했다. 초혼귀곡성(招魂鬼哭聲)이라고도 불리는 이 소리가 난 후에는 상대의 시체가 멀쩡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집애라 해서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전 남녀의 차에 따라 대우받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성별이 다르다 해서 봐 줄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몸을 지키고 사(邪)를 멸할 힘은 충분히 단련받았습니다.” 사파 최악의 ‘짝짝쿵’인 천지쌍살 중 천살을 눈 앞에 두고도 나예린은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대단한 수업이었다.
“예쁜 얼굴만큼 말도 잘 하는구나! 하지만 너의 그 예쁜 얼굴도 노부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성욕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살인말고는 특별히 그에게 쾌감을 주는 일이 없었다. 눈 앞에 낭자한 선홍의 피만이 그의 말라비틀어진 감성을 꿈틀거리 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하나를 더 뽑자면 그것은 싸움이었다. 물론 피가 튀지 않는 것은 싸움이라 부르지 않는다.
싸움에 싸움을 거듭해 검왕의 이름을 얻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후의 검을 꺾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예린의 검 끝이 바람 없는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한 점에 머물렀다. 어떤 태풍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그녀의 검은 강해 보였다. 그리고 무 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호오! 과연!”
천살이 감탄했다. 과연 일 대 일로 검을 뽑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천살의 살기가 폭사(爆射)되자 그와 그녀 사이에 있던 풀들이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이미 그 둘 사이의 공간은 새나 곤충조차도 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살의(殺意)만이 가득한 죽음의 공간.
죽음의 손길은 점점 더 손을 뻗어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우우우웅!”
그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검기가 무형의 손길을 내뻗는 죽음의 행사를 막았다. 오로지 감에 의존한 방어였다.
그녀의 검이 세차게 떨렸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검을 타고 그녀에게로 전해졌다. 처음 느껴 보는 거대한 압력! 실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혈을 뒤흔들 정도의 압 력이었다. 사부인 검후와의 비무는 연습이기 때문에 항상 검후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던 것이다. 지금 강호에서 그녀의 전력이 담긴 일검을 막아 낼 수 있는 이는 손 에 꼽을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윽!”
그녀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내장이 진동하는 충격이었다. 그가 뿜어 낸 무형의 검기와 맞부딪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실력은 예 측보다 더욱 뛰어났다. 그녀의 눈이 그녀에게 한 본능적인 경고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은 견딜 수 있어!’
그녀의 보석 같은 두 눈이 굳은 의지로 빛나기 시작했다. 사부님의 명예와 사문의 명예, 그리고 부친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이이이잉!”
그녀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색의 안개가 더욱더 농도를 더해 갔다.
그녀는 지금 최고의 초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10년을 하루처럼 갈고 닦은 비전오의! 검(劍) 중의 검기! 우선은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우웅!”
초혼귀령검법(招魂鬼靈劍法)
제이초(第二招)
소혼붕렬(消魂崩裂)
새파란 검기가 압박하듯 밀려왔다. 천살 독문의 붕검(崩劍)이었다. 휘어질 듯 가느다란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압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 힘이었다. 나예린 또한 가장 신중한 자세로 그의 검초를 마중했다.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신기(神氣)가 번뜩였다.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밀려들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세상의 시간이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붕검이란 거대한 압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기 위한 무공이기 때문에, 초식의 경로를 안다 해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무공이 아니었다. 초식의 경로를 안다 해도 힘이 부족하면 막을 수 없다. 원래 붕검이란 검법 자체가 상대의 방어를 부수고 들어가 상대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절정 고수들의 무공은 막아도 막을 수 없고, 피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수를 읽는다 해도 수집, 해독, 판단된 정보를 이용할 만한 실력 겸비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녀의 준비된 검기가 최고의 빛을 발했다.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오의(義)비전전승(秘傳傳承)
한상옥령기(霜玉靈氣) 비애무한(悲哀霧寒)
안개 같기도 하고 은빛 가루 같기도 한 검기가 은은하게 뻗어 가며 천살에게로 손길을 뻗쳤다. 천살도 고수답게 그 안에, 조용하고 은은한 가운데 담겨 있는 예측 불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면으로 맞서면 십이 할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맞받아 치는 것은 위험하다. 천살도 소문으로 검후의 검법이 얼마나 기오막측하고 무서운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중 어느 하나도 정면으로 마주쳐서 좋은 꼴 봤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리 내공이 약한 어린애라 해도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림없다!”
이성은 차가웠지만 뜨거운 감정이 이성을 따라 주지 못했다. 천살이 정면으로 그녀의 검을 마주쳐 갔다. 호승지심이란 귀찮은 녀석이 친구인 자존심과 함께 고개 를 쳐든 것이다. 게다가 검후의 제자이자 아직 어린 계집애라는 선입관이 그의 승부욕에 더욱더 불을 질렀다.
천살은 정면 승부로 부딪쳐 보란 듯이 검후의 검법을 깨뜨리고 그 찬란한 명성에 먹칠을 한 다음 그 드높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수욱!”
느낌이 없었다. 소리도 없었다.
분명 정면으로 베어들어 갔건만, 검과 검 혹은 검기와 검기가 부딪친 듯한 느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은색의 기류가 안개처럼 그의 검을 감쌀 뿐이었다.
“소… 속았다!”
허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의 검은 완전히 그녀의 검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손이 얼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 앞에서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은색의 안개 속에 신형을 감추려는 의도였다.
“어림없는 짓!”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천살이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잉! 쿠구구구구구!”
검풍이 사위에 몰아쳤다. 검풍이 품고 있는 엄청난 압력에 그녀의 비술이 한순간 흔들렸다. 순간 은빛 안개에 가려진 그녀의 신형이 잠시 드러났다. 찰나의 순간이 지만 천살 정도의 고수에게는 그 정도 기회면 충분했다. 아직 이 정도의 미혹(迷惑)에 감각을 뺏길 정도로 그는 미숙하지 않았다.
위기!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확실히 그녀에게는 부담되는 일격이었다.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검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위기를 대신 막아 준 사람이 있었다.
나예린과 천살의 사이에는 어느 새 웅덩이가 움푹 파여 있었다.
“어린놈이 대단하구나!”
천살 초혼검이 감탄을 터트렸다. 감히 자신의 검을 막을 자가 저만한 어린애들 중에 두 명이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남녀 한 쌍이었다. 그의 검기를 정면으로 막아 낸 이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조금 전 입만 살아서 큰소리 땅땅 치며 여인의 치마폭 뒤에 숨은 애송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신위였다.
“이놈이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과연 군사께서 관심을 둘 만하군. 이대로 두면 화근이 될 자라더니…….?
위기감이 그의 눈빛을 더욱 깊숙이 가라앉혔다.
“하하하! 뭘요. 노인께서 나이가 들어 근력이 쇠하신 것뿐이지요!”
비류연은 탄복하던 천살의 마음에 서슴지 않고 찬물을 끼얹었다.
“무례한 아이구나!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말이렷다?”
“물론이지요. 전 이래봬도 정직하고, 참신하고, 조신하고, 바른 생활을 지키는 도덕과 규범의 화신이기 때문에 없는 걸 있다 하고, 있는 걸 없다 하는 어리석은 짓 은 하지 않습니다.”
염도와 주작단이 들었으면 기가 막혀 땅을 쳤을 이야기였다.
“대단한 자신감 잘 보았다. 네가 한 말에 얼마만큼 책임을 질 수 있는지 확인해 봐도 상관없겠지?”
천살의 검에 서늘한 검기가 맺히자, 그의 전신에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천지쌍의 명성은 농담 따먹기 내지는 마작, 골패 쳐서 얻은 게 아 니었다. 피와 도산검림(刀山劍林)의 길을 걸으며 얻은 명성이었다. 한낱 애송이의 혀 위에서 농락당할 이름이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천살은 자신이 비류연을 어리다고 너무 무시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증명해 드리지요. 전 거짓말쟁이라고 오해받는 건 죽어도 싫거든요!”
“네 실력으로 가능하리라 보느냐?”
“물론이죠. 지나칠 만큼!”
비류연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