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24화 – 형제 상봉

비뢰도 7권 24화 – 형제 상봉

형제 상봉

·마지막 부탁

“형!”

효룡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진 형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의 마음은 지금 폭풍 치는 바다처럼 격동하고 있었다.

눈 앞이 뿌옇게 변해 형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형! 형!”

십수 번을 부르고서야 겨우 효봉이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양 힘겨워 보였다.

“아룡이냐?”

“예, 형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절 알아보겠어요?”

희색 어린 표정으로 얼굴을 환하게 펴고 효룡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효봉이 눈을 뜰 때만 해도 비류연의 말에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완전히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고 있었는데, 비류연이 멋지게 상황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빚을 졌군.’

갚기 힘든 무거운 빚이었다.

“아룡아!”

“예?”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는 효룡을 보며 효봉이 한마디 했다.

“시끄럽다, 녀석아!”

몸만성했으면 당장에 꿀밤을 먹였을 터이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생각만 앞설 뿐 실행은 불가능했다.

“예에?”

형의 갑작스런 호통에 효룡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 안 먹었다. 조용조용히 말해라. 주위에 민폐 끼치지 말고!”

생사의 기로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답지 않은 말이었다.

“예에…….”

효룡의 목소리가 단번에 기어 들어갔다. 역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형을 당할 수 없었다. 효봉에겐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순진한 동생이 귀엽게만 보였다. 갈효봉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모두를 쳐다보았다.

“제 미욱한 동생이 여러분께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그 점에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군요.”

효룡의 무릎에 머리를 벤 채 효봉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형님! 저도 이제는 어엿한 성인입니다. 이제 스무 살이라구요.”

갈효봉의 놀리는 듯한 말에 효룡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제 자신도 어엿한 성인이건만, 형은 아직도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 소리가 금세 잦아들었다. 그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수많은 상념들이 한꺼번에 그의 뇌리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만 해도 열세 살 꼬맹이였는데… 내가 미혹과 미망에 빠져 잃어버린 시간이 무려 7년이나 된단 말인가……. 쿨럭쿨럭!” 

“형!”

느닷없는 각혈에 효룡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효봉의 입으로부터 검붉은 피가 기침과 함께 터져 나오고 있었다. 효룡의 손과 옷이 금세 혈육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제 죽는 건가?”

자신의 몸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온몸의 심맥이 가닥가닥 끊어진 상태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어거지에다 개인의 이기심일 뿐이었 다.

소위 말하는 화타와 편작을 명부(冥府)에서 소환해 와, 응급 수술을 한다 해도 살릴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꿈틀!

효봉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신을 위해 눈물을 보이려는 마음 여린 동생의 볼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 팔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이제는 팔 하나조차도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은 무리한 비술의 중첩과 선천지기(先天之氣)의 격발, 그리고 기(氣)의 폭주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당신은 신분은 도대체 뭡니까?”

조금 전 그와 격전을 벌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청흔이 다가와 물었다. 그에게는 이 일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 중 이처럼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가 흑도측에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의 느닷없는 암습의 배후를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 다.

“죽으면 사라질 육신의 이름 따위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굳이 알려 하지 마라는 이야기였다. 청흔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효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집안의 치부를 알리고 싶지 않군요. 이미 가문에서조차 잊혀진 이름, 세상에 남겨 무엇하겠습니까!”

곧 죽을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청흔으로서도 난감했다. 비록 적이지만, 상대는 심령을 제압당한 상태이고, 그의 무공이 지금껏 상대한 그 누구보다 뛰어남이 있었 기에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다. 누가 뭐라 지껄여도 그는 같은 연배에서 모용휘와 청흔 자신을 한꺼번에 감당해 낸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으음……..”

고민과 번뇌로 청흔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런데도 굳이 알아야 하겠습니까?”

약간 고민하는 듯했으나 청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효봉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방금까지 살의로 온몸을 불태우며 혈우(血雨)를 뿌리기 위해 날뛰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알게 될 겁니다. 이제 그만 쉬고 싶군요.”

효봉의 정중한 부탁을 청흔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십시오!”

“감사합니다.”

이것이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청흔은 평생 갈효봉의 그림자를 마음 속에 안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검을 최초로 무력화시킨 상대로서! 효봉은 자신의 소원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엄청난 고통이 그의 몸을 엄습해 왔던 것이다.

“하악하악! 크윽!”

갈효봉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헐떡이며 호흡조차 힘겨운 효봉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의 입가를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이미 오장육부도 갈가리 찢어진 걸레 같은 상태였다. 너무나 많은 잠재진력을 마구잡이로 사용한 탓에 이미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회복은 불가능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잠력(潛力)을 끌어다 쓴 덕분에 효봉은 조금 있으면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져 참혹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이었다. “크으윽!”

누군가 그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 이대로는 갈수록 처참해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가 될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쌍검을 차고 있는 한 명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말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효룡은 시꺼멓게 죽은 안색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난 할 수 없어! 어… 어떻게 내가… 내 손으로…….”

앞으로 내민 허허로운 그의 두 손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그럼 누가 한단 말인가?”

이 일은 누군가가 대신 해 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을 선뜻 맡고 나서기엔 효룡의 마음이 너무 여렸다.

“크윽!”

갑자기 효봉이 온몸의 기력을 짜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팔 하나 움직이지 못하던 몸이다. 게다가 온몸이 천참만륙(千斬萬戮)되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혼자의 힘으로 몸을 세우려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형!”

효룡이 단번에 효봉을 부축하려 했다. “거… 건들지 마라!”

효봉의 벼락 같은 호통에 효룡은 얼른 손을 뗐다. 형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지막 기력을 모두 짜내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크으으으!”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며 그의 몸이 서서히 일으켜 세워지고 있었다. 엄청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무인이라면 벌써 기절했어도 백 번은 더 했을 상황이었 다.

“으아아아아!”

효봉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죽어 버린 근육들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 고통이 작을 리 만무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듯한 극렬 한 통증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찢어진 내장이 따가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통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의지로 차올랐다.

“헉헉헉! 크윽!”

거의 일각(약 15분) 가까이를 고통과 씨름하고 나서야 효룡은 몸을 세울 수 있었다. 그의 몸은 일 각 동안의 사투에 의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누가 보 아도 무모한 짓을 그는 하고야 만 것이다.

갈효봉의 입에서 피식 실소가 흘러 나왔다.

“훗! 이미 죽어 버린 몸인데도 아직 식은땀이 나는군!”

땀을 한바탕 흘렸더니 몸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조금 전 수천 개의 바늘로 전신을 찌르던 고통은 거짓말처럼 온데간데없었다. 육체도 마음도 평온하기만 했다. 그 의 입가에 한 줄기 만족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효룡!”

조용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효봉이 불렀다. 처음으로 효룡이라 불러 준 것이다. 이제는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 다. 효룡에게는 무척이나 의미가 큰 말이었다.

“예! 형님!”

효봉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시절 형이 항상 보여 주던 따스한 미소였다.

“이만 나를 편안하게 해 주지 않겠니? 너의 공부를 보여 다오. 이젠 편안해지고 싶구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혀… 형님!”

효룡의 몸이 벼락 맞은 듯 부르르 진동했다. 주위 사람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이 사람은 이제 죽으려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을 자신의 동생에게 맡긴 채.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비굴하게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단 하나뿐인 동생에게!

“안 됩니다, 형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효룡이 말렸다. 그는 지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태였다.

“정신 차려라! 네가 어느 분의 손자인지 벌써 잊었단 말이냐!”

움찔!

효봉의 입에서 벽력 같은 호된 꾸지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박력이었다. 공기가 찌르르 떨리는 듯한 기세였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도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죽음 앞에서 저토록 의연할 수 있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마침내 효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말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곧 다시 찾아올 끝없는 고통에서 형을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그 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효룡 자신도 마침내 인정한 것이다.

‘형!’

효룡은 속으로 조용히 형의 이름을 불렀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휘익!”

검광이 번뜩였다. 검광은 밤하늘의 유성처럼 효봉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피는 튀지 않았다. 검에도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

“장하구나! 훌륭하다.”

갈효봉이 싱긋 미소지었다.

“푸화악!”

뒤늦게 그의 몸으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효룡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상처가 보이지 않는데도 피가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갈효봉은 피의 비 속에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혀… 형!”

효룡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피가 눈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겁(劫)! 하늘의 겁을 조… 조심…….?”

털썩! 마침내 갈효봉의 눈이 조용히 감겼다. 한때 흑도의 별로 불리며 촉망 받던 천재가 오늘 그 생을 마쳤다.

그리고, 그가 남긴 한마디는 모두의 가슴에 차가운 얼음 송곳을 박아 넣는 일이었다. 하늘의 겁…… 천겁(劫)! 설마 그 어둠의 마수가 아직도 남아서 꿈틀대고 있단 말인가?

순간 지켜보던 모든 이가 침묵의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훌륭한 검기상인(劍氣傷人)의 수법이었어. 형도 기뻐했을 거야!”

비류연이 효룡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아마 효룡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법이었을 것이다. 피부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혈관과 신경만을 베어 상대의 목숨을 끊는 검기상인의 최고 단계였다. 형은 죽으면서도 자신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가슴 속에 단단히 뭉쳐 있던 무엇인가가 스르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털썩!

효룡의 무릎이 땅바닥에 부딪쳤다. 그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크윽!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효룡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도저히 격동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마른 땅을 움켜쥐며,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 끼며 효룡은 하염없이 울었다. 피를 나눈 혈육이 죽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비류연은 침통한 눈으로 오열하는 친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음껏 울고, 원망하고, 통곡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것뿐.

“형을 이렇게 만든 무리를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으드득!”

꽉 깨물어진 입술로부터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마시며 효룡은 굳게 결심했다. 피의 맹세였다. 이렇게 이들의 여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