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6화 –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연주하다

비뢰도 7권 6화 –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연주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연주하다

“거기 있죠?”

귓가를 울리는 영롱한 목소리에 비류연은

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하고 있던 셈을 포기해야 했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군요.”

비류연이 살짝 미소지으며 뒤돌아보았다. 비류연이 바라본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빈 공간을 건너 한 그루 나무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십 장떨어진 아름드리 나무 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하늘이 녹아든 머리칼을 지닌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피부, 별의 융단을 퇴색케 하는 미모, 바로 나예린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자염려(神姿艶麗 : 신의 자태와 고움과 아름다움)라 칭할 만했다.

외로이 떠 있는 달빛 아래 둘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월광에 어슴푸레 빛나는 하늘, 사방이 적막으로 깔린 숲 속!

달빛 탓인지 그녀의 차가운 미모가 더욱더 돋보였다. 때때로 그녀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환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잡고 싶어도 손에 잡을 수 없는 환 상.

비류연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애석하게도 비류연이 기대했던 대로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것 아닌가요?”

사방이 적으로 도배되어 있는 이 판국에 한밤중 홀로 떨어져 금(琴)을 연주하고 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다스 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금음(琴音)에 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곳에는 의외의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 었다.

“왜요?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위가 적들로 포위당한 사면초가(四面楚歌),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신세에 빠져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 여유만만이라는 게 문제 일까 요? 조금 더 심각해져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는 이야기죠. “

“그런 건가요?”

“외딴 고도(孤島)에 갇힌 사람다운 반응을 보여 주어도 주위에 폐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야밤에 이 사람과 쓰잘데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인가? 그녀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고도라? 여긴 산이지 섬이 아닌데요?”

비류연이 나예린의 말꼬리를 잡았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섬이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륙으로부터 고립된 육지가 아니던가요? ”

실제로도 비류연은 그저 말로만 전해 들었을 뿐, 섬이란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바다를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꼭 섬이 바다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긴 하죠. 단지 비유였을 뿐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걸 곧이곧대로 해석하다니 성격이 나쁘시군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류연이 되물었다. 진짜로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예의는 아니죠. 단지 전 댁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꿔 주길 바랐을 뿐입니다. 좀더 긴장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도 좋지 않을까요?”

“위기감… 이란 녀석 말인가요?”

“뭐,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요.”

지금 비류연의 정신 상태나 태도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긴장한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나 친 긴장만큼이나 지나친 여유도 좋지 않았다.

조금은 긴장감을 가지는 것이 정상인의 반응이 아닌가. 위험할 정도로 그는 긴장감이 없었다.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듯한 모습에 그녀는 가만히 놔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가?

‘읽을 수가 없어…….’

여전히 비류연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상대였다.

“당신은 언제나 혼자군요.”

비류연을 지켜본 그녀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친구가 없다기보다는 왠지 주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다 만 남들의 불평을 살 뿐……. 그런데 주작단 사이에 팽배한 그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경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녀로서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 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뭐가 말인가요?”

“혼자인 건 나 소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순간 그녀의 가슴에서 아릿함이 느껴졌다. 이유는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겨우 그의 한마디에 동요하는가…….

하늘을 바라보아도 달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사방이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있는 와중에도 인세(人世)에 관심 없는 달은 휘영청 밝기만 하고, 약올리듯 덩달아 별까지 밝은 밤이었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와 바람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나예린이 비류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비류연은 아직 나뭇가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선남선녀가 만나는데 음율이 없다니 아쉽군요. 헤아릴 수 없이 가득한 별무리의 밤하늘! 외로운 달빛 아래 만난 두 명의 가인(佳人)! 여기에 노래만 들려 오면 금 상첨화가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정중히 사양하겠어요.”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쩝! 그런가요? 애석하군요. 이렇게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다니…….”

비류연은 입맛을 다셨다. 정말 속 편해 보이는 인간이었다.

“조용하죠?”

산중의 밤은 풀벌레 소리만 조용히 들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그 점만은 나예린도 동의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비류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엇이 말인가요?”

“사면초가를 당하면 노래가 울려 퍼진다던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나예린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연하죠. 아무리 사방이 포위됐다지만 초가(楚歌: 초나라 국가가 울려 퍼질 리야 없지 않겠어요?”

“낭만을 모르는 놈들이군요.”

비류연은 사정없이 상대를 깎아내리며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죠.”

그녀의 반응은 냉랭했다.

“저금 저들에겐 뛰어난 악사가 없는 모양이네요. 풍류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어요.”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비류연이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뭘 말인가요?”

“저쪽에서 초가를 연주해 주지 않으니 대신 이쪽에서라도 연주를 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비류연이 진지한 눈빛으로 묻자 나예린은 문득 두려워졌다. 진심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비상식적인 짓을 저지르고 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악몽은 잠잘 때 가끔 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의 악몽은 정중히 사양할 사양지심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는 그녀였다. 허나 비류연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비류연이 성큼 자신의 무릎 위에 묵금을 올려 놓았다. 칠흑 같은 색상 덕분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묵금을 들고 이곳에 나온 모양이었다.

더 이상 말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비류연의 손가락이 현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띠리링!”

“이 음율은?”

나예린은 두 번 놀랐다.

첫번째는 악몽을 직접 실행하는 비류연의 놀라운 행동력과 실천력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의외로 그의 금음이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역시 조금 전에 울렸던 금음의 주인공은 믿어지지는 않지만 바로 눈 앞에 있는 남자였다.

“당신! 금을 때리는 것말고도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었군요?”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천살이 귀를 쫑긋하며 물었다. 밤의 적막은 금음을 쌍살의 진영까지 운반해 놓았던 것이다. 청흔의 예상대로 이들은 지금 천라지망을 친 채 천관도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묵금(墨琴)의 소리가 아닐까요?”

옆에서 심부름하던 부하 녀석 십오호(十五號)가 대답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 내 말은 왜 이런 상황에서 금음이 들려 오느냐 이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쌍살의 심기가 불편하다 싶으면 무조건 죄송하다고 용서를 비는 게 오래 사는 비결임을 그는 오래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 재빠른 사죄를 못한 동료들이 참으 로 허무하게 죽어 가는 꼴을 여러 번 목격해 온 그였다.

금음을 들은 천살은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대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율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간 큰 놈이 이런 행사를 벌였는지 반드시 잡아서 족치고 싶은 욕망이 가슴 내밀한 곳에서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차가운 야밤의 공기를 타고 흐르는 선율은 마 치 그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잡히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천살은 속으로 다짐했다.

“어차피 다 죽을 놈들이 감히 우리를 무시해!”

“뿌드득!”

흥분한 천살이 이빨을 아드득 갈았다. 살기가 뭉클뭉클 저절로 피어 올랐다. 시중 들던 부하녀석은 살기 충천한 그의 모습을 보며 덜덜 떨고만 있었다.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지던 금음이 갑작스레 끊기지 않았다면 천살은 발작을 했을지도 몰랐다. 부하 십오호는 오늘 목숨을 건진 것이다.

갑자기 연주되던 금음이 뚝 끊겼다. 나예린은 조용히 감았던 눈을 뜨고 심연처럼 깊은 눈으로 비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류연은 그녀의 등 뒤에 위치한 다 른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삭!”

난데없는 나뭇가지 밟는 소리! 비류연과 나예린의 청각이 이 소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누구냐?”

나예린의 외침에 나무 뒤에서 나타난 이는 무척이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름드리 나무 뒤에서 사뿐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이진설이었다.

비류연은 자신의 멋들어진 천금 같은 연주를 중도 방해한 사람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내녀석이라면 하늘과 달의 이름으로 응징해 주겠지만, 여성이 라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냐?”

나예린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발그레졌다. 그녀의 대답은 나예린에게 무척이나 의외였다.

“효, 효 공자를 찾아 왔어요.”

“자리에 없더냐?”

이진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모여 앉아 다음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데 비류연과 나예린, 효룡, 청흔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찾으러 나왔던 것 이다.

“여기에는 없구나! 다른 곳을 찾아 보거라!”

“네, 언니!”

이진설이 황급히 사라지자 비류연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흐흐!”

능글맞은 웃음이 비류연의 입가에 걸렸다.

“재미있는 구경 가지 않겠어요?”

“예?”

“조금 있으면 무척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거든요. 이런 재미난 구경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걸요?”

“아니… 전…….”

그녀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투명할 정도로 하얀 손을 끄는 사내의 손은 거부를 용납하지 않았다.

“악!”

반항할 생각도,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는 우악스런 손길이 잡아 끄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손을 떨쳐 버려야 할지 계속 이 상태로 놔 두어야 할 지그녀는 순간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