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그 두 번째
– 홀황의 경지
그때 비류연은 사부에게 물었다.
이제는 기억마저 흐릿해져 가는 8년 전의 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때 사부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다.
“정말 그대로 따라 하면 사부 말대로 될 수 있는 건가요?”
8년 전에 했던 질문.
여기서 말하는 사부의 말이란, 한계를 두지 않는다면 사부 자신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호언장담을 가리키는 말로서, 직접적으로 속 좁은 노인네 코 앞에서 입 에 올렸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인지라 채에 한 번 걸러 말한 것이다.
비류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 강렬함은 창공에서 지상을 뛰어다니는 먹이를 발견한 독수리의 눈빛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놈 봐라?”
비류연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나자 사부는 약간 찝찝해졌다. 불순한 의도를 지닌 불길한 기운이 예리하면서도 민감하기까지 한 그의 육감에 잡힌 것이다.
“제자 녀석 주제에 감히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넓으신 위대한 사부님의 자리를 넘봐? 네가 날 따라오려면 백 년도 빠르다!”
“어디 골탕 좀 먹어 봐라!’
제자가 불순한 의도를 품었을 때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 또한 사부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이자 책임이 아니던가. 불량 제자 골탕 좀 먹이는 일에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사부가 가슴을 활짝 펴고 큰소리 탕탕 치며 말했다.
“물론이다. 이 사부의 말에 언제 거짓이 들어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더냐? 믿어라! 무조건 믿고 따르라! 그러면 광명이 보일진저! 일말의 의혹이라도 마음에 품은 자는 결코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연극을 할 때는 전개의 극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때로는 다소 과장도 필요한 법임을 그는 벌써 백 년도 전에 터득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도록 체득해 놓고 있었 다.
“어떻게요?”
“성질도 급하구나. 넌 좀더 인내심이란 걸 길러 봐라.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다. 어라? 뭐냐, 그 반항적인 눈초리는?”
“아뇨. 인내심이곤 애당초 개털만큼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 사부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민망해서요!”
사부가 비류연을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날로 저항 의식이 드높아 가는 제자를 바라보는 사부의 눈은 갱생의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제자가 나쁜 길로 빠지기 전에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또한 사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어라? 얼레??
그러나 비류연은 자신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으음… 욘석 봐라?”
아무래도 일 시키러 대장간에 보낸 이후, 얼마 전부터 갑자기 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하더니, 뭘 잘못 먹었는지 이놈이 자꾸 고산준봉보다 높은 사부 머 리 꼭대기에 기어오르려고 했다.
‘고작 비뢰도 두어 개를 부릴 줄 알게 됐다고 감히 사부님 머리 위를 등반하려 들어?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취라지만, 노부의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그런 꼴은 볼 수가 없지!’
역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는 골탕을 한 번 먹어 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이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비류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진 중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라!”
“네!”
“그리고 좀 적어라!”
“들어 보구요!”
제자의 반항심은 아직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었다.
곧 의무감에 불타오른 사부가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이(夷)라 한다!”
“네!”
비류연이 힘차게 대답했다. 사부를 능가할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데 한눈팔 여가가 없었다. 그는 모든 정신력을 사부가 내뱉는 말 한자 한 자에 집중시켰다. “청지불문(聽之不聞) 명왈희(名曰希),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을 희(希)라 한다.”
“네!”
또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부득(搏之不得) 명왈미(名曰微), 얻지 않고도 만져 봐 아는 것, 즉 만져지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을 미(微)라 한다.”
“네!”
마지막도 역시 이해했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부의 얼굴이 기묘막측하게 변했다.
‘설마 이 고난이도의 경지를, 일반인은 평생을 노력해도 오를 수 없는 이 까마득한 경지를 이해했단 말인가?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넌 확실히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냐?”
비류연이 인형처럼 자꾸 고개를 끄덕이니 사부로서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도리도리!
비류연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휴우! 그러면 그렇지!’
사부는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이 세 가지 개념을 한 번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보통의 자질을 지닌 무인이라면 평생을 가도 그 그림자의 끝자락조차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경지다. 보통 이상의 자질을 지닌 무인이라면 만년(晩年)에 가 서 겨우 이 경지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자질을 지닌 이라야만 비로소 이 경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고 있는 것과 익히는 것, 그 사이에 천지 차이의 거리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를 가리켜 홀황(侊)의 경지(境地)라고 칭한다. 무상지상(無狀之狀) 무물지상(無物之象)의 경지이지. 형체가 없는 형체, 물질이 아닌 물질의 경지이다.” “그게 가능하긴 가능한 모양이죠?”
의심스런 눈초리로 비류연이 물었다. 질문하는 비류연의 눈초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넌 이 사부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
갑자기 비류연의 혀가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항상 매끄럽게 움직이던 녀석의 혀가 갑자기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자 위화감이 심하게 들었다. 사부에게는 그 것이 말없는 반항, 침묵시위처럼 느껴졌다.
“어흠! 제자야! 침묵이 지나치게 길구나.”
갑작스런 대화의 단절에 머쓱함을 감추지 못한 사부가 한마디 던졌다.
“음! 애석하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차단하거나 진실을 축소한 적은 있어도 거짓을 말한 적은 없지요. 제가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군요.”
제자의 어조가 미묘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더 이상 비류연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란 녀석이 말싸움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하다니……. 노동량을 좀더 늘려야겠다고 사부는 잠시 생각했다.
“어흠! 그것 봐라! 이 사부는 결코 허언을 남발한 적이 없다. 영사심결을 터득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만나는 장벽,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 이(夷)·희(希)·미(微), 이 세 가지 감각을 깨치는 경지야말로 고수가 되기 위한 우리 비뢰문의 첫 걸음, 바로 기초지공(基礎之功)이다!”
“기초지공이요?”
“그래! 기, 초, 지, 공!”
사부가 자신의 일방적 주장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발음했다. 비류연이 느끼기에, 감히 네 주제에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식의 도전적인 어투였다.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기초지공도 현재의 너에겐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
갑자기 사부가 걱정이 구구절절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안색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자에 대한 진정한 근심걱정으로 노심 초사하는 훌륭한 사부의 모습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아뇨!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 보이지요.”
왠지 사부에게 얕보이는 듯한 느낌을 비류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바로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순간 발끈 해서 함부로 호언장담하는 것이 아 니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아차 하는 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훌륭하다, 제자야! 영사심결(靈心結)을 통해 수련하거라. 만일 네가 홀황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너는 자유로운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세계의 본 질을 꿰뚫어 보는 눈과 귀, 그리고 감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린 이 날부터 비류연은 바로 집중적인 영사심결의 수련에 들어갔다. 이(夷)·희(希)·미(微), 이 세 가지 감각을 얻기 위한 일종의 수 련법이었다.
허나 아무리 해도 사부가 말한 경지에는 다다를 수 없었다. 보고 듣기엔 쉬워 보였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마치 안개의 바다를 헤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부 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기초지공이라 그랬는데… 그랬는데…….”
역시 사부는 쉽게 믿는 게 아니었다는 잔혹한 진실을 비류연이 뼈아프게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의 일이었다.
홀황의 경지.
홀황경.
사부를 이길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 여기에 죽도록 매달렸지만, 비류연 자신도 이 말의 비밀을 푸는 데 8년이란 시간이 소비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었 다. 기초지공 하나 깨치는 데 8년이나 소모하다니, 왠지 손해 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다.
육체의 단련만으로는 결코 이 경지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 그날로부터 무려 5년 후의 일이었다. 홀황의 경지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 정신은 무아지 경 속에서 허무의 공간 속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다. 하마터면 시간도 공간도 느껴지지 않는 허무의 바다에서 미아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한 위험에 처한 적 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미친놈’ 발광 상태가 될 뻔했던 것이다.
머리가 찬 이후로는 사부에게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하지만 치사하기는 해도, 속이 좁기는 해도, 덤으로 비열하기까지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거짓말만은 하지 않는 사부인지라 죽어라 이것에 매달렸다. 이쯤 되면 오기로라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 날로부터 5년 후, 이것은 사부와 비류연 자신의 오기와 자존심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비뢰도를 익히면 익힐수록, 영사심결의 성취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홀황경에 대한 확신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만 더 정신을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세계가 바로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도 알아차려 나갔던 것이다. 물론 그 도착 지점이 까마득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8년 후, 마침내 비류연은 사부의 얼굴을 경악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때 사부의 그 어처구니없어하며 당황하던 모습이라니! 생각하면 생 각할수록 통쾌한 일이었다.
‘나의 인생에 있어 그 날은 하나의 전환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다. 아직 눈 앞에 한 단계 더 높은 경지가 있음을 비류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터득하는 데만 8년이면 대성하는 데는 도대체 몇 년이 소요된다는 소리일까? 그곳은 언젠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장소였다. 아마 그곳은 사람들이 도(道), 혹은 신 (神)이라 칭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 장소는 너무나 높고 까마득하기에 대개는 애초에 시작도 않고 포기하기 일쑤이다. 하나 아직도 신의 경지라 불리는 곳을 향 해, 세인들이 무모하다 부르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가능일 뿐.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약은 없지만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중도하차란 그의 정신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뇌신의 힘을 얻는다면 이 경지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아니면 뇌신의 힘을 얻기 위해 이 경지에 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