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출관(出關)!
-무당산에서의 과거를 캐묻다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새들도 벌도 나비도 날아다니길 멈추고 날개를 쉬었다. 곧 한바탕 비라도 내릴 모양이었다.
“나에게조차도 알려줄 수 없단 말인가?”
백무영은 지금 심각해 보일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평상시 그의 얼굴에 진지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백무영의 얼굴은 질릴 정도로 충분히 진지했다.
“미안하네!”
청흔은 미안한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럴 때가 그는 가장 미안했다.
“자네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며, 자네와 더불어 구정회의 두 기둥이라 불리는 나에게마저도 말해줄 수 없단 말인가? 왜?”
백무영의 어조엔 실망감이 물씬 베어져 나와 점점 말이 격해지고 있었다. 항상 냉정 침착하던 이 친구가 오늘따라 냉정을 잃고 있는 듯 보였다.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 부탁인가?”
“미안하군!”
“벌써 열두 번째일세. 아직도 내가 자네에게 계속 빌어야만 하나? 이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에게?”
“미안하네!”
청흔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는 정말 미안해 하고 있었다.
“저번 철각비마대 일은 이유를 묻지 않았네. 왜냐하면 자네와는 둘도 없는 친구니깐! 친구이니깐 이유를 묻지 않고 사선(死線)으로 걸어갈 수 있었네! 결과가 잘 되었기 망정이지 아니라면 최악의 결과가 찾아왔을 수 있겠지!”
“…..”
반박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철각비마대 건은 청흔 자신으로서도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냉정하기만 할 것 같은 친구의 우정을 엿본 기분이었다. 물론 어처구니없는 장면만 보고 별반 활약도 하지 못했지만 친구에 대한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더욱 그의 협박 아닌 부탁을 거절 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다시 백무영이 청흔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는 점점 더 포위를 좁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도 끝났으니 이제는 꼭 들어야 하겠네!”
청흔은 조용한 눈동자로 묵묵히 백무영을 바라보았다. 백무영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의지가 느껴졌다.
청흔은 각오를 다졌다.
“그때 무당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번쩍!
백무영의 등 뒤로 번개가 번쩍였다.
“꽈르르르릉!”
빛을 따라 소리가 따라왔다. 뒤늦게 천둥이 울려퍼졌다. 우레 소리와 함께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가을비였다.
후두둑 후두둑! 쏴아아아아아!
비가 떨어진다. 비구름은 해를 가려 땅은 어둑해져 있었다.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웠다. 빗줄기는 하늘 위에 사는 불평분자가 난폭하게 물을 끼얹은 듯 거칠고, 마 른 땅을 모두 진흙탕으로 만들 만큼 난폭했다.
가을비 소리만이 요란하게 귓가를 울리는 한참의 침묵 후에야 비로소 청흔은 힘겹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 미안! 신의(信義)를 저버릴 수는 없네.”
청흔의 마음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마치 친구를 배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천무학관과 우리 구정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실, 아니 진실이라 해도 말인가?”
번쩍!
다시 창호지와 문틈 사이를 뚫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순간적인 빛인 광량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다시 한 번 사과할 수밖에 없군!”
“자네는 사과밖에 할 수 없는가? 자네는 그 외에 할말이 없는가?”
“미안하네!”
드디어 백무영은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어 폭발하고 말았다.
“미안! 미안! 미안! 미안! 이제 미안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단 말인가? 자네가 그 이외의 말을 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자네에게서 들을 말이 없겠군!”
현재 백무영에게서는 구정회의 문절로 불리며 냉정냉철한 모습을 유지하던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쾅!”
등 뒤에서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백무영은 자신이 청흔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져온 구정회와 군웅회에 대한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걸 깜빡 잊고 말았다.
“미안!”
청흔은 조용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자기혐오가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기혐오감이 가슴 속에 똬리를 틀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바보처 럼 느껴졌다.
그때 주위의 강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처럼 중대한 사실을 함부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무학관을 단번에 발칵 뒤집을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사실 을 알게 된 이상 함부로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때 그런 약속을 했을까?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약속을 한 가지 해줘야겠다.”
그때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염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염도가, 당시 합숙훈련의 사부나 다름없는 사람이 약속을 요구한 것이다. 염도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수 상쩍은 기운은 감히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집합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무… 무슨 약속을 말입니까?”
말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떨려나왔다. 강도에게 갈취당하는 선량한 시민의 마음이 이러할까?
“다른 사람은 나와 모두 약속했다. 아니, 하늘을 두고 한 무사의 자존심을 건 맹세다! 너는 할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모두 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염도의 말은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단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꼭 해야 합니까?”
“당연(當然)!”
거래(去來)의 여지가 없다는 태도였다.
“어떤 맹세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주체가 염도라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지금 네가 보고들은 일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
“그… 그것은?”
“왜? 할 수 없단 말이냐?”
염도의 시선 탓인지 볼이 따끔따금 했다.
“아니… 저…….”
염도가 엄청난 박력을 동원하여 막무가내로 몰아세우자 청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혀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뜻이구나 하고 비로소 청흔은 이 넉자 고사성어의 깊은 뜻을 숙지할 수 있었다.
“너는 저 슬픈 장면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단 말이냐?”
‘자 봐라! 보란 말이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손가락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효룡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형의 시신을 부여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청흔의 마음도 씁쓸해 졌다.
한 달 이상 숙식을 같이한 합숙동료인 것이다. 특히 일주일간의 특별특훈(特別特訓)으로 미묘한 감정적 교류가 있었던 터였다.
그 때문인가… 왠지 효룡이 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충분히 수상쩍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터면 무의식 중에 ‘네, 그 러죠’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낚시꾼 염도와 월척 청흔과의 ‘낚느냐 끊고 도망가느냐?’의 팽팽한 입질 승부는 계속되고 있었다.
의외로 고기는 강단이 있었다. 염도는 무조건의 맹세를 강요하는 1단계 방법을 포기하기로 했다. 때문에 비류연에게 언질 받은 작전 제 2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은 좀 전의 반복으로 다시 돌아갔다.
“맹세하게!”
염도가 강경한 어조로 청흔을 밀어붙였다. 청흔은 이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내가…….?
‘윽박지른다고…….?
“맹세하게!”
‘윽박지른다고…….?
“맹세해!”
“… 그것에 굴하여 맹세할 성 싶은가!’
청흔의 각오는 철벽처럼 단단했다. 그러자 염도가 말했다.
“맹세 안 해? 그럼 넌 이번 합숙훈련 평점 최하위다. 넌 낙제야!”
순간 청흔은 하마터면 맹세합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칠 뻔 했다. 사안의 중요성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결심이 조금 전까 지만 해도 어떠했는지도 잊은 채, 청흔은 당장에 손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을 것이다. 우등생인 그에게 있어 평점 하락이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점 수유지가 그에겐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점하락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사안의 중요성은 컸다.
“그래도… 눈물날 만큼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래도 안 됩니다.”
이번 물고기는 제법 뚝심이 있었다.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염도는 잠시 당기기를 그만두고 줄을 풀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다. “그래?”
“예!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후우? 그렇단 말이지? 과연 문무쌍절의 무절이로구나! 그 굽힘 없는 태도 훌륭했다! 과연 자네는 믿을 만한 사람이로군.”
갑자기 염도의 태도와 목소리가 백팔십도 급변했다. 청흔이 어리둥절함을 느낄 정도였다. 청흔을 바라보는 염도의 눈빛은 엄청 진지해져 있었다. 대신 아까 전의 강압감은 느낄 수 없었다.
“마침내 자네도 이 일에 대해 알고 말았군.”
매우 은근하고 은밀한 어투였다.
“예?”
청흔은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절대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되네! 이것은 특명일세.”
“그… 그렇다면.”
염도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이건 상부에서 내려온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작전이야. 절대로 효룡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눈치 챘다는 것을 우리 이외에 효룡이나 다른 사람에 게 알려서는 안 되네, 알겠나?”
그렇다면 이중 정보 교란 작전이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청흔도 속으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보인 뚝심이 아까울 정도로 쉬운 함락이었다. 염도로서도 청흔이 2단계 작전으로 넘어가자마자 의외로 쉽게 함락되자 맥이 빠져버렸다.
“예! 물론입니다.”
“자네를 믿지!”
염도가 친밀하게 청흔의 어깨를 두드렸다.
“맡겨주십시오!”
속아넘어간 줄도 모르고 청흔은 힘차게 대답했다.
“휴우… 미안하네, 친구!”
그날 일과 백무영 일만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요즘 들어 왠지 자신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 못 볼 걸 봤기 때문인가… 아니면 역시나 그자 때문인가… ‘비류연!’
생각하면 할수록 불가해한 존재였다. 자신의 운명이 그의 운명의 수레바퀴에 휩쓸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비류연이 애소저회 부실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했다. 임성진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요즘은 흑검조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처지이기도 했다. “아! 류연, 자네 왔나. 잘 왔네.”
오늘 비류연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는 임성진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때 요즘 재미 좋나?”
짓궂은 표정으로 임성진이 물었다.
“무슨 재미 볼 일이라도 있었나요?”
비류연은 미처 임성진의 말속에 숨은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자네 요즘 두 명의 천상선녀와 항상 함께 지내고 있지 않나? 난 자네가 부러워 곧 죽을 것 같으이.”
임성진의 두 눈은 진정으로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요즘 비류연이 은설란의 수신호위가 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언 들어줘요? 뭘 그런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비류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임성진은 그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무슨 소리! 자네가 지금 얼마나 우리 애소저회 회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일간에선 자네를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죽이고 싶어하 는 사람도 수두룩하다네. 그만큼 자네를 부러워하는 거지.”
“왠지 그런 말 들어도 전혀 기쁘진 않군요.”
“자넨 항상 자네가 애소저회의 일원임을 잊지 말고 사중화 은설란 소저에 대한 정보를 좀 보내주게! 항상 우리는 신선한 정보에 굶주려 있다네. 특히 특급 기밀로 감추어져 있는 그녀의 삼부 수치 같은 것 있잖아! 제발 부탁하네.”
임성진의 두 눈은 어긋한 열정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짜로요?”
비류연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임성진은 흠칫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제 그도 눈치를 챈 것이다. 이 녀석이 어디서 불만인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나! 이 세상에 공짜란 없지. 그런 걱정하지 말고 좋은 정보나 낚아오게나!”
“생각해보고요.”
단호하게 한다고는 하지 않고 비류연은 약간의 여지를 남겼다. 나중에 덤터기 쓰는 건 사양이었기 때문이다. 비류연은 본능적으로 외교가 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일 때문에 부른 거였어요?”
비류연이 물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 들린 처지였던 것이다.
“아! 그건 아닐세. 자네에게 긴히 해줄 말이 있어서 불렀다네. 급한 정보가 들어왔거든.”
“뭔데요?”
비류연도 고개를 앞으로 뺏다. 임성진도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요즘 신변에 위험한 일은 없었나?”
“글쎄요… 가끔 길을 걸을 때 등 뒤에서 암기가 날아오거나, 들어가는 방문에 기관이 장치되어 있거나, 저주가 적힌 서찰이 서찰함을 가득 메우거나, 동물의 시체 가 창 밖에 걸려있거나 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네요.”
비류연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을 듣는 쪽은 억지로라도 미소짓지를 못했다. 임성진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 그건 좀 심한 거 아닌가?”
“뭐 별거 아니죠. 그 정도 가지고 남의 정신에 타격을 주려 하다니 아직 어린애들이 아닐 수 없네요. 그런 소심하고 심약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어떻게 상대의 정 신에 타격을 줄 수 있겠어요.”
심약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수준이 높길래 이 정도를 수준 낮고 심약한 사람들의 소행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가.
“뭐! 환상 속의 여자밖에 좋아할 수 없는 놈들의 소행이겠지, 그 유치한 소행으로 미루어 볼 때.”
빙봉영화수호대의 녀석들이 대부분의 범죄에 대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하지만 용의자라 해도 그 대상자가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도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자네가 오히려 더 놀랍군! 일을 저지르다 적발된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닌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했나? 설마…….” 비류연이 얼마나 과격하게 손을 썼는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비류연이 말했다.
“멀쩡하죠.”
“정말?”
“그럼요! 제가 동문들에게 어떻게 심하게 손을 쓰겠어요. 음… 엉덩이 한쪽에 구멍이 뚫리거나 다리 한쪽이 부러지거나, 어깨가 탈골되는 정도로 용서받다니 정 말 운이 너무너무 좋은 녀석들이죠. 완전범죄에 실패하고도 그 정도 대가로 끝나다니 말이에요.”
이어지는 비류연의 말은 임성진의 말들을 틀어막고, 폐를 찌그러뜨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임성진은 완전범죄에 실패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의 최후가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오른손 손바닥에서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비류연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아참! 이틀 전에 꽤 재밌는 걸 보기는 봤죠. 참 신기한 거였는데…….?
그날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우주의 신비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러나?”
임성진이 돌연 호기심을 나타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신기한 마술이었죠. 혹시 살들이 춤을 추는 것 본 적이 있어요?”
비류연이 말똥거리는 호기심으로 질문했다.
임성진은 황당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적이 없네.”
“안됐네요! 그런 멋지고 신기하기 짝이 없는 살들의 묘기를 볼 수 없었다니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견식해 보도록 하세요. 마치 살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유 롭게 움직이는 게, 그건 인체의 불가사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하마터면 증거인멸 당할 뻔했지만 비류연은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왔다.
“그런데 겨우 그런 시시한 일 때문이었어요?”
비류연이 물었다.
“물론 그 일도 있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그리고 사실은 하나가 더 있었다. 원래는 그것 때문에 비류연을 이곳에 부른 것이었다.
“자네 구정회주와 군웅회주가 이번 폐관수련에서 출관한 사실을 알고 있나?”
“그 사람들이 누군데요?”
“뭐!”
임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마음 쓴다고 불러줬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과 근심도 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구정회와 군웅회에서 자기를 바라 보는 시선이 어떤지 모른단 말인가?
“류연! 자네 정녕 자네가 구정회와 군웅회 양측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야기였다.
“몰라요!”
비류연의 단호한 한마디는 임성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지금 구정회, 군웅회 양측 모두 비류연의 뒤를 캐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다니…….
“그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인가요?”
“설마 자네 정말로, 진짜로, 가짜 아니고 아직도 그들에 대해서 모르나?”
끄덕!
일말 양심의 가책도 없이 서슴없이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성진은 기겁을 했다.
“굳이 남의 신분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진짜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네요.”
“물론이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천무학관 소속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둘이라구! 모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세.”
““난 몰라요.”
비류연의 말엔 흔들림이 없었다. 설혹 이상한 놈 취급받는다 해도(물론 이미 이상한 놈 취급받고는 있지만),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떻게 하면 입관한 지 벌써 일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들을 모를 수 있지? 아무리 자네가 입학할 때 반천(半)일 폐관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말일세?” 비류연이 그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전 저보다 약한 사람에겐 별로 흥미가 없거든요.”
듣고 있던 임성진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이미 그의 심장은 충격으로 벌렁벌렁 거리고 있었다. 두통도 없는데 골이 지끈지끈거렸다.
“빈 말이라도 함부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게. 천무학관 거의 대부분의 관도들이 이 두 조직 안에 속해있으니까 말이야. 그들의 수장(首將)이 남에게 모 욕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꽤나 시끄러워질 걸! 자존심에 상처 나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녀석들이니깐 말일세.”
“그땐 죽을 수밖에요.”
비류연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자신은 차마 죽을 수 없으니 별수 없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존재를 모두 말살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비류연이 당연하다 여기는 사고방식이었다. 그것은 사부의 사 부의 사부의 사부의 사부 때부터 면면부절 이어져 내려온 비뢰문의 정신이기도 했다.
“설마, 혹시나, 행여나 어쩌다가 어찌되었건 그들과 문제 일으킬 생각일랑 하지 말게! 무한한 귀찮음을 자진해서 껴안은 꼴이 될 테니깐 말일세. 이걸 경고해 주기 위해 자넬 부른 걸세.”
아무래도 애소저회의 정보망에 걸린 구정회와 군웅회의 비류연에 대한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때문에 임성진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하는 행동이 귀엽지도 않 고 오히려 우주거만하기까지 한데 차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었다.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여전히 비류연은 태평했다. 거의 무관심의 극치였다. 이런 태연작약하기까지 한 비류연을 보면 여태껏 자신이 고민해 왔던 게 모두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그 끝없 는 여유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래도 왠지 불안해져서 말이야. 사람에게는 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이란 게 있잖아…….”
“그런 걸 보고 사서 고생, 통칭 고생매매(苦生賣買)라고 하죠. 걱정 붙들어 매요.”
비류연은 여전히 천하태평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문제가 발생해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을 그런 녀석이었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한거야.’
임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위하려 했다.
그러나 신용이 가지 않는 비류연의 호언장담 따위를 아무리 들어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여전 히 불안감이 마음의 일부라도 된 것인 양 앙금이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하늘이 억지변덕을 부리기 전에는 절대로!’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조심하게! 만일 일이 잘못되면 자네의 위패 앞에서 향 한 대는 사려줄 테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글쎄… 그런 목뼈에 부목 댄 높으신 사람들이랑 만날 기회나 있겠어요? 길가다가 우연히 부딪칠 일도 없을 테고 말이죠.”
“길가다가 부딪치지 않게 특히나 조심하게나.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자네 목숨은 장담하지 못할 걸세.”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말이었다.
“그런 우연이 설마 일어나겠어요?”
비류연은 그냥 웃어넘겼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라고 임성진도 스스로 자조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건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특히 인간의 뜻에는 절대 제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랬다.
‘이게 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차를 마시던 임성진이 갑자기 손바닥을 탁 쳤다.
“아참! 내가 그 녀석한테 군웅회주가 여자란 말을 해주었던가?”
임성진은 자신이 비류연에게 미처 깜빡하고 말해주지 않은 게 있음을 떠올렸지만 이미 비류연이 나간 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뭐, 별일은 없겠지…….”
다음에 만나면 알려주기로 하고 임성진은 마음 편히 먹기로 했다. 만일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자업자득이야. 임성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런데…….
이 일을 어쩌겠는가. 세상에는 가끔, 아니 매우 자주 일이 사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럴 경우 보통 현실은 사람들이 예기치 못하는 결과 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막상 당하는 사람도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대답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그렇게 되 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단지 어쩌다 발생한 우연에 설명은 필요 없는 것이다. 억지라고 주장해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늘은 때론 무척이나 억지스런 어거지꾼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하늘은 전면적인 묵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대화가 전혀 안 통하는 먹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국이 눈앞에 닥쳤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은 단 하 나! 하늘의 억지와 농간을 이겨낼 무식한 강행돌파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발생한 비류연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그저 우연찮은 기회에 그의 곁에서 발생한 것뿐이다.
그리고 저 위쪽에 존재하는 높으신 분들이 산다는 하늘이 지닌 주요 특성 중 하나인 상습적인 약간의 변덕에 의해 내려준 억지와 장난 때문에 그것에 휘말려 피해 입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감히 누구에게 피해와 손실을 입히려 한단 말인가!
비류연은 그 존재가 설령 하늘 일지라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존재는 하늘이 아니라 한 여자였다. 물론 하늘이, 운명의 신이 제멋대로 이 일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는 없을 것이다.
꽤 여러 가지 일을 그동안 겪어 온 비류연이었지만 이번 일은 참으로 황당함과 우연의 극치를 달리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살다보면 별일을 다 당할 수 있구 나… 라는 좋은 경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 희박한 우연이 일어나는 데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비류연이 애소저회의 문을 나서서 기숙사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그 사건은 우연히 발생하고 말았다.